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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트레일 4구간 제1부
태안읍행정복지센터-동학농민혁명기념관-태을암-
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백화산정상-백화산구름다리
20260305
1.백화산 구름다리의 맛
-구름 위를 걷는 우화등선(羽化登仙)
동서트레일 4구간 탐방을 위해 충남 태안군 태안읍으로 떠났다. 도보여행팀 안내버스는 7시 10분을 조금 넘어 양재역에 도착하여 태안으로 출발한다. 날씨는 흐려 있지만 기온은 쌀쌀하지 않다. 행담도휴게소에서 20분 휴식한 뒤 출발하여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주차장에 7시 35분경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맑아졌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풍경은 투명하지 않다.
동서트레일 3·4구간 안내판에서는 동서트레일 4구간을 이렇게 개관한다. "동서트레일 4구간은 태안읍에서 백화산을 넘어 흥주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 오석산을 거쳐 태안과 서산의 경계인 어송리 및 팔봉산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입니다.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을 비롯해 상옥리의 삼층석탑, 만세루 및 천연기념물 제156호 은행나무 등이 있는 고려시대 고찰 흥주사와 초가집 형태의 고택인 가영현 가옥, 도내리의 파명당산 등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구간입니다." 주요 경로는 태안읍행정복지센터 - 흥주사 - 오석산 - 팔봉산 주차장(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으로 전체 거리 12.6km, 난도 3등급이라 한다. 동서트레일 4구간 탐방 체험을 3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1부(태안읍행정복지센터 - 백화산구름다리) : 태안초등학교 맞은편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옆 태안읍성 목애당 뒤쪽의 근대식 돌벽 건물을 살핀 뒤 태안초등학교 동쪽 큰별미술학원 옆, 태안향교 예절관 뒤쪽의 동서트레일 3·4구간 시종점에서 동서트레일 4구간 탐방을 출발한다. 태안의 진산 백화산은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지만 미세먼지 탓에 투명하지 않다.
성황단길을 따라 올라가면 동학농민혁명 기념관과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이 있어 이곳이 태안 동학농민군의 성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8년 11월 교장바위에서 처형 당한 동학농민군을 추모하는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이 교장바위 아래에 건립되었고, 2021년 10월 추모탑 서쪽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개관하여 명실공히 태안 동학의 성지가 되었다. 태화산 교장바위의 유래에 가슴이 아프다. 동학농민군이 교살(絞殺, 목을 졸라 죽이는 것)과 장살(杖殺, 곤장 같은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것)을 당하여 이 바위 아래로 버려졌다고 하여 이 바위를 교장(絞杖)바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교장의 미담 때문에 校長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이 당한 교장(絞杖)에 가슴이 아프고, 교장바위의 유래 싸움에 가슴이 막힌다.
"1894년 10월, 태안 백화산에서 봉기한 태안의 동학농민군은 백화산 아래에 있는 태안군청을 습격하여 탐관오리였던 태안군수를 처형하고, 사형 직전에 있던 동학 두령 30여 명을 구출하였다. 50여 명으로 시작된 태안 동학농민군이 서산을 거쳐 홍성까지 갔을 때는 2만여 명으로 불어나 홍주성으로 진입하였으나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에 연패하였다. 살아남은 100여 명 동학농민군은, 처음 봉기하였던 태안 백화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들은 교살(絞殺)과 장살(杖殺)을 당하여 이곳 바위 아래로 버려졌다. 그래서 이 바위를 교장(絞杖)바위라 부르게 되었다."([출처] 동학농민운동과 태안 백화산 - 네이버블로그 대세남 장문)
"경이정(憬夷亭) 밑에서 장사하던 일본인(高橋)이 오만하고 성깔이 되먹지 못해 분노한 학생들 수십 명이 모여 그 자의 가게를 때려 부숴버렸다. 주재소(지서)의 순경들이 학생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이에 당황한 학부형과 학교의 교장이 풀어줄 것을 애걸하게 되었다. 그때의 교장은 나카오 이따로(中尾猪太郞)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교육 책임을 들어 사과하고 학생들과 함께 주재소 마룻바닥에서 자면서 취사도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식사를 지어 먹이며 풀어줄 것을 호소하여 학생들이 풀려났다. 그래서 태안사람들은 그 교장이 고마워서 바위 한쪽 구석에 그 일인 교장의 명자를 새겨 고마움을 표시하였던 것인데, 해방 후에 전부 깨어버렸다."(오마이뉴스 김동이 기자. 2021.8.13.)
어느 것이 맞을까? 두 역사적 사실이 모두 맞다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여야 할까? 태안 출신의 소설가 지요하님은 "원래의 이름인 교장(絞杖)바위가 교장(校長)바위로 쉽게 바뀐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사회 분위기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 백화산 기슭에 태안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의 유래로 지어진 지명은 영원불변한 것일까? 그 지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이 시대의 현실에 더 적합할 때 과연 개명할 수 있는가? 태안의 한 향토사학자는 "일본인 교장의 이름을 새긴 데서 '교장(校長)바위'가 생겼다고 했지만, 이후 자괴감이 든다며 입장을 바꿨다. 기록은 없지만, 동학농민혁명군 참살과 관련해 '교장(絞杖)바위'로 논증이나 유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일본 군대의 공격으로 공주 우금치에서 격추당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을 잡아다가 남자는 관솔을 머리에 박아 폭파시켜 죽였고, 여자는 자궁에 독사를 넣어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의 동학군에 대한 만행은 너무나도 끔찍하다. 이런 이야기를 안다면 전해오는 교장바위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과연 주장할 수 있을까?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위 백화산 등산로로 오른다. 출입구에 동학의 가르침과 사대 강령을 각각 영문으로 적은 빗돌이 2개 놓여 있다. 영문을 풀이하여 옮기면, 동학의 가르침은 "사람이 하늘이다. 하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라." 동학의 4대 강령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폭정을 없애서 백성을 구하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널리 백성을 구제하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서양과 왜를 물리치는척양척왜(斥洋斥倭)"이다. 동학은 인내천, 발흥하는 탐관오리의 척결과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보국안민이 중심 사상일 것이다.
백화산은 높이 284m이다. 길손의 동네 대모산 293m보다 낮다. 그럼에도 백화산은 골이 깊고 품이 넓다. 매봉 갈림길에서 100m 거리의 매봉을 그냥 지나간다. 매봉은 전망이 활짝 열린 암봉이라고 하는데,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시 덕분에 낙조봉이라 불린다고 한다. 신숙주는 1461년(세조7년) 7월 충청도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로 제수 받아 태안(泰安)에 머물며 굴포(堀浦) 운하 공사를 살피고 칠언율시 '차태안동헌운(次泰安東軒韻, 태안 동헌의 운을 빌어 짓다)을 썼다고 한다. "嶺上孤城落照邊(영상고성낙조변) 登臨只見海浮天(등림지견해부천) 風回島嶼迷驚浪(풍회도서미경랑) 地僻民居生澹煙(지벽민거생담연) 浦掘幾年功未效(포굴기년공미효) 山來一帶斷猶連(산래일대단유련) 誰能說我通漕策(수능설아통조책) 但向樽前醉惘然(단향준전취망연)" 고개 위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니 보이는 건 바다와 뜬 하늘 뿐./ 바람 불어 섬을 돌아가니 섬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몇 년 동안 파는 운하 공들인 보람 없는데/ 산은 한 줄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의 방책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망연(惘然)히 취할 뿐이네. 고려 때부터 시작된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 공사는 난관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태을암으로 올라갔다. 태을암에 대한 안내판은 없고, 대웅전 오른쪽에 중건시주공덕비가 서 있다. 태을암은 마애삼존불 덕분에 유명해진 절인데 현재 마애삼존불 보호각 설치 공사 중이어서 마애삼존불을 살피지 못했다. 태을암이 언제 창건되었을까?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태을암은 이 위쪽 약 400여m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 태일전(太一殿)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태일전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경북 의성군에 있던 단군(太一) 영정을 옮겨와 이곳 태일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도교와 관련된 태일(太一, 太乙)의 성지로서, 이후 이 지역의 호족 김해 김씨의 세력에 들어갔던 것 같다. 그를 증거하는 것이 '태을동천(太乙洞天)'과 '일소계(一笑溪)' 각자(刻字) 바위이다. '태을동천'은 1923년 김규항(1881~?)이 각자한 것이고, '일소계'는 그의 아들 김윤석(1917~?)이 각자했다고 한다.
'태을동천(太乙洞天)' 각자 바위에 새겨진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태을동천(太乙洞天)' 옆에 새겨진 '계해맹추해초김규항제(癸亥孟秋海超金圭恒題)' 각자로 보아 '태을동천'은 해초(海超) 김규항(金圭恒)이 계해년(1923) 가을 7월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오른쪽 '김해김씨장보품(金海金氏藏譜品)' 각자는 김해 김씨 족보를 보관한다는 뜻이다. 그 아래 새겨진 오언절구(五言絶句)가 멋지다. "重來非偶事(중래비우사) 詣點說前緣(지점설전연) 歷歷靈山蹟(역력영산적) 沼然一笑邊(소연일소변)" 다시 태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니/ 손가락 가리켜 지난 인연을 말하네./ 신령스런 산에 옛 자취 분명하니/ 시냇가에서 호젓이 웃음 한 번 지어보네. 그 위의 “가락기원 1883년 갑자(駕洛紀元一千八百八十三年甲子)” 각자는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42년에 건국하였으니, 가락기원 1883년의 갑자년인 1924년에 김해 김씨 김규항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계해년은 1923년이 된다. 김해 김씨 문중에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태일전터 일대를 장악하고 태을암을 후훤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을동천에서 내려와 마애삼존불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2017년 5월에 개방된 백화산전망대로 가는 출입구가 있다. 이 출입구 위쪽에, 조선시대 임금이 도교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던 태일전(太一殿)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2023년 12월 백화산성 정비사업부지 발굴 조사에서 태일전의 터전 3곳과 축대 흔적, 다량의 기와와 자기를 출토했다고 한다. 태안군에서 야심차게 발굴하고 복원하려는 태안읍성과 태일전은 동학과 더불어 태안의 새 명소로 부각될 것이다.
전망대 갈림길에서 전망대로 가지 않고, 백화산으로 올라간다. 해발 284m 백화산은 금북정맥 산줄기에 해당된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492m)에서 남하하여 충남 태안반도 안흥진(安興鎭) 지령산을 끝으로 서해 바다에 빠지는 295㎞ 산줄기를 이른다. 지난 시절 금북정맥 산행 중 홍성 오서산에서 무릎의 연골이 찢어져 결국 금북정맥을 완주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 있는데, 동서트레일 4구간은 금북정맥과 동행하는 백화산과 흥주산 구간 및 오석산 구간이 있다.
백화산 정상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1902년 음력 2월 이기석 군수가 느티나무 2그루를 심고 각자한 '쌍괴대(雙槐臺)' 바위가 있으며, 남쪽에 봉수대지 및 전망대가 있다. 그리고 북쪽 백화산 정상에 해발 284m 정상표석이 서 있다. 서해랑길을 걸으며 무한한 동경으로 바라보던 백화산 정상에 올라 감개가 무량하다. 백화산에서 동남서쪽을 조망하지만 미세먼지가 자욱하여 풍경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근흥면 연포항과 안흥진의 지령산, 몽산포와 청포대 및 마검포와 안면도, 천수만과 굴포운하 유적 등을 가늠하지만 그림의 떡도 보이지 않는다.
태안의 새로운 명물 백화산 구름다리로 올라갔다. 남쪽에 백화산 북봉 제2전망대가 바로 눈앞이다. 백화산 북봉 북쪽의 구름다리는 2023년 3월에 개통되었으며, 길이 74m, 폭 1.5m, 지상높이 19m라고 한다. 구름다리는 봉봉대(峰峰臺)라고 불리는 두 개의 암봉을 잇는 출렁다리 형태이지만 흔들림은 거의 없다. 구름다리 준공비에 적힌, "구름 위를 걷는 듯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맛을 느끼게 하며 태안의 수려한 경관과 가로림만을 바라보며 백화산의 상서(祥瑞)로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백화산 구름다리'를 조성하다."라는 문구의 흥을 느끼고 싶지만, 미세먼지로 인하여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의 풍모를 살릴 수 없었다. 투명하지 않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 본다. 천수만의 부남호, 굴포운하 유적, 오석산과 팔봉산, 가로림만과 구도항, 산후리 들녘과 금굴산을 까만 어둠 속에서 찾아냈다. 투명하게 맑은 날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7km
전체 탐방 시간 : 5시간 32분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태안초등학교 옆 주차장에서 백화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와 태안초등학교를 바라보았다.
태안읍 행정복지센터는 태안읍성 목애당(牧愛堂) 옆에 자리한다. 느티나무 뒤쪽에 목애당이 있다.
느티나무 옆에 근대식 건물이 있고, 그 뒤 차고 벽에 태안읍성 사진그림막이 붙어 있다.
태안읍성 동문 안쪽의 목애당(牧愛堂) 뒤쪽에 건물 2채가 있는데 두 번째 건물은 근대식 돌벽돌집 형태이다.
태안읍성 목애당 뒤쪽의 주택은 언제 지어진 것일까? 오른쪽에는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건물이 있다.
태안읍성 목애당 뒤쪽의 돌벽돌 근대식 건물은 어떤 용도로 언제 지어진 것일까? 오른쪽에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차고가 있다.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안쪽 태안읍성 위에서 성황단길을 올려보았다. 큰별미술학원 왼쪽에 동서트레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 뒤에 태안향교 대성전이 보인다.
백화로 남쪽에서 백화산을 올려보았다. 성황단길 출입구 오른쪽 큰별미술학원 옆에 동서트레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산비탈에 교장바위, 오른쪽 뒤에 백화산이 보인다.
백화로가 동쪽으로 달리고, 태안읍성 성곽 오른쪽에 동서트레일 이정목이 서 있다.
태안읍성 성곽 북쪽 백화로 보도 옐로카펫 옆에 동서트레일 이정목이 서 있다. 팔봉산주차장 12.6km, 몽산포항 13.6km 지점이다.
태안향교 예절관 뒤쪽, 큰별미술학원 옆에 동서트레일 3·4구간 시종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트레일 4구간은 태안읍에서 백화산을 넘어 흥주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 오석산을 거쳐 태안과 서산의 경계인 어송리 및 팔봉산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입니다.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을 비롯해 상옥리의 삼층석탑, 만세루 및 천연기념물 제156호 은행나무 등이 있는 고려시대 고찰 흥주사와 초가집 형태의 고택인 가영현 가옥, 도내리의 파명당산 등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구간입니다.
백화로 건너편에 태안읍 행정복지센터가 있으며, 백화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성황단길 옆 동서트레일 3·4구간 안내도 앞으로 왔다.
성황단길을 따라 백화산 등산로 나들목으로 이어간다. 왼쪽 앞에 태안 문화관광안내소, 중앙 뒤 산비탈에 교장바위가 있다.
성황단길 건너편에 태안향교가 있으며 은행나무가 솟아 있다. 건너편 마을은 향교말이다.
성황단길 동쪽에 태안향교 예절관, 그 아래에 동서트레일 3·4구간 시종점, 백화로 건너편에 태안읍 행정복지센터가 있다.
태안초등학교 동쪽, 성황단길 서쪽에 태안 문화관광안내소가 자리한다.
태안읍행정복지센터 앞 백화산로를 건너 성황단길을 따라 동서트레일 안내판, 태안향교 예절관, 태안 문화관광안내소를 거쳐왔다.
성황단길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오른쪽 백화산등산로 4코스 나들목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뒤에 깃발이 솟은 당집이 있다.
백화산 정상 0.9km, 백화산 구름다리 1.6km 지점. 백화산등산로 나들목에 백화산등산로 4코스 이정목과 동서트레일 4구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에 보이는, 2021년 10월 개관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을 관람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백화산 등산로 4코스 출입구에 백화산 산수길 구간안내도와 정자가 서 있다. 왼쪽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보인다.
백화산 등산로 4코스는 태안초등학교-교장바위-태을암-백화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0.3km 지점, 동서트레일 이정목 뒤쪽에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과 그 뒤 교장바위가 보인다.
백화산 입구 표석 옆에 동학의 가르침과 사대강령을 각각 영문으로 적은 빗돌 2개가 놓여 있다.
1978년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 왼쪽 위에 있는 바위를 교장(絞杖)바위라 이른다고 한다.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에 패배한 태안 지역 동학농민군이 쫓겨 이곳에서 교살(絞殺)과 장살(杖殺)을 당하여 바위 아래로 버려졌다. 그래서 이 바위를 교장(絞杖)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며, 추모탑을 세웠다고 한다. 다른 유래는 일본인 교장의 미담 때문에 교장(校長)바위라 불렸다고 한다.
쉼터정자가 조성된 왼쪽에 지금은 폐쇄된 백화약수터가 있다.
폐쇄된 백화약수터 위쪽에 백화산약수터가 있는데, 현재 음용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중앙 뒤에 태안여자고등학교, 그 앞쪽에 태안경찰서와 삼보아파트가 보인다. 멀리 근흥면 연포와 안흥항이 보이지 않는다.
중앙 아래에 태안읍성과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그 앞에 동서트레일 4구간 출발지, 그 왼쪽에 태안향교, 오른쪽 아래에 태안초등학교, 그 앞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맨 오른쪽 바로 아래에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이 보인다. 멀리 안면도는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 대림아파트가 솟아 있고, 그 남쪽 중앙에 태안성당 십자탑이 보인다. 오른쪽에 태안읍성과 태안읍 행정복지센터가 보인다.
교장바위에서 조망한 뒤 태을암 0.4km,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0.6km 지점을 통과하여 태을암 방향으로 올라간다.
포토존 화분바위 안내판이 있는 오른쪽에 노간주 나무 2그루가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깨진 바위 틈에서 자라난 노간주나무 2그루가 특이하다. 바위화분에서 바위가 주는 영양분을 받아서인지 노간주나무가 건강하고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안내판)
바위 틈에서 노간주나무 2그루가 자란다. 그래서 바위를 화분바위라 이른다.
오른쪽은 대림아파트 0.6km 지점, 동서트레일은 왼쪽 태을암 0.3km, 백화산 구름다리 1.0km 방향으로 진행한다.
교장바위길 2-4 표지목과 돌탑이 있는 곳을 지나간다.
오른쪽으로 0.1km 지점에 있는 매바위를 가지 않고 태을암 0.2km 방향으로 이어간다. 매바위는 낙조봉으로 알려진 명소라고 한다.
낙조봉落照峰 : 백화산의 한 봉우리로서 남문거리 북쪽에 있는데, 높이가 102m임. 신숙주가 굴포운하의 해결방법을 연구하면서 이곳에 올라와 낙조를 바라보며 '풍회도서미경랑'이라는 한 편의 시를 지은 데서 유래된 이름임. - 태안군지
오른쪽 뒤에 태화산 정상이 솟아 있고, 왼쪽 뒤 바위 아래 태을암 대웅전 지붕이 보인다.
백화산은 태안의 진산(鎭山)이자 영산(靈山)으로 태안군의 기상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음성지로서 산하(山下) 태안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풍요와 융성의 기운이 샘솟는 명산이다. 서해 바다를 끼고 있어 풍경이 아름답고 정상 아래에 전통사찰 태을암과 백제의 보물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다. 눈덮인 산봉우리 모습이 하얀 천을 씌운 듯하다고 이름 붙여진 백화산은 높이 284m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기암괴석과 소나무의 어울림이 좋다. 특히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태안 최고의 경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문리 쪽에서 백화산을 오르면 태을암을 만나게 되는데, 태을암에는 백제의 보물이라 여겨지는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솔향기길 5코스가 지나가기 때문에, 도보여행객들이 자주 찾는다. 특히 백화산 냉천골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유지하는 곳이기에 예로부터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찾았던 곳이다. 산이 높지 않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 오감관광
숲길에서 백화산솔바람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마애삼존불길로 올라와 백화산솔바람길과 동행한다.
마애삼존불길 길가에 설치된 백화산솔바람길 구간안내도를 살피니 백화산 구름다리가 없다.
바위 앞에 백조암 표석이 서 있다. 백조처럼 우아한 바위라고 하여 백조암(白鳥岩) 이름을 붙였을까?
마애삼존불길에서 오른쪽 태을암(太乙庵) 입구로 이어간다. "태을(太乙)은 중국 철학에서, 천지만물이 나고 이루어진 근원. 곧 우주의 본체를 이르며, 민속 음양설(陰陽說)에서는, 북쪽 하늘에 있으면서 병란(兵亂), 재화(災禍), 생사(生死)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령한 별인 태을성(太乙星)을 이른다고 한다."(다음백과)
태을암(太乙庵)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오른쪽 위에 마애삼존불입상이 보이는데 공사 중이다.
태을암(太乙庵)은 태안읍 동문리에 자리한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는데, 창건연대(創建 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태을암」이란 명칭은 국조(國祖)인 단군영정(檀君 影幀)을 안치(安置)시켰던 태일전(太一殿)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실증(實證)할 수 있는 문헌이 없으니 신빙성이 희박하다. 태일전은 태안마애삼존불이 있는 위쪽 약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전하나 건물은 이미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또한 이 태을암의 대웅전(大雄殿)에 안치된 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釋迦如來)·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우측에 석가여래(소형)를 배열해 놓았는데, 이는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도 아니고 또한 협시불(脇侍佛)로 석가여래를 배열해 놓은 것도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보기 드문 일이다. 이 태을암은 지난 1962년 10월 1일에 전통사찰(傳統寺刹) 제40호로 등록되어 현재 관리 중에 있다. ○태을전(太乙殿)터 : 태일전(太一殿)터. 향교말 북쪽 백화산성 안에 있는 태을전의 터. 조선 성종 10년(1479)에 경북 의성군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음. - 태안군지
태을암 대웅전 오른쪽에 백화산태을암 중건 시주공덕비(白華山太乙庵重建施主功德碑)가 서 있다. "원컨대 이 공덕이/ 널리 일체에 두루하사/ 나와 더불어 모든 중생이/ 현세에는 수복을 누리게 하시고/ 후세에는 무량수불을 친견하고/ 다같이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태을암 중건 시주공덕비 옆에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보호각 신축 공사 안내판이 있다. 공사는 2026년 4월 30일 끝난다
'태을동천(太乙洞天)' 각자(刻字)는 그 옆의 '계해맹추해초김규항제(癸亥孟秋海超金圭恒題)' 각자(刻字)로 보아, 해초(海超) 김규항(金圭恒)이 계해년(1923년) 가을 음력 7월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맨 왼쪽 바위의 일소계(一笑溪) 각자는 해초(海超) 김규항(金圭恒)의 아들 김윤석의 글씨이며, 앞에 일소계(一笑溪) 표석이 있다. 이 일대의 바위에 새긴 각자(刻字)는 이 지역의 호족 세력 김해 김씨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바둑판에서 당시 실제로 바둑을 두었다. 현재도 바둑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바다가 잘 조망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가 잘 조망된다는 망양대 바위에 1920년대 조성된 바둑판이 있으며, 실제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보호각 신축 때문에 마애삼존불입상을 가까이서 살필 수 없어서 망양대 바둑판 바위 위에서 내려보았다. 태안泰安 동문리東門里 마애삼존불입상磨崖三尊佛立像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 태안마애삼존불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에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고 한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제 시대 마애불상이다. 6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애삼존불'은 "세 분의 부처를 암벽에 새겼다"는 뜻이다. 태안은 백제가 한강을 상실한 이후부터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항해의 안전과 백제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삼존불상은 중앙에 불상을 놓고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하는 형식이지만, 태안 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보살상을 놓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이며 이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중앙에 작게 새겨진 보살상은 양손으로 보주를 감싸고 있으며 좌우의 불상은 전체적으로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오른쪽 불상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구분된다. 최초 발견 당시 삼존불의 1m 정도가 흙에 묻혀있어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없었지만 국가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작업을 하면서 삼존불의 하반신과 백제 시대 연화대좌가 발견되어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삼국 시대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였던 태안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문화교류를 통한 새로운 불상 양식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백제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보주寶珠 : 원하는 대로 뜻이 이루어진다는 구슬. 연화대좌蓮花臺座 : 조각상에서 부처의 자리를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것. - 예전의 설명안내판
국보로 지정된 태안泰安 동문리東門里 마애삼존불입상磨崖三尊佛立像을 줌으로 당겨보았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백화산 중턱에 있는 높이 394cm, 폭 545cm의 감실(龕室) 모양의 암벽에 새겨진 백제시대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과는 달리 중앙에는 보살, 좌에는 석가여래, 우에는 약사여래불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또한 좌우의 여래상은 큰 반면에 중앙의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은 작아 1보살(一菩薩)·2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통견의 불의(佛衣)가 두껍고 힘차게 처리되었으며, 앞자락이나 두 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는 등 부처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北齊) 불상 양식의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연대는 6세기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당시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리역할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사원 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현재의 설명안내판
미세먼지가 자욱하여 망양대에서 바다는 조망되지 않는다. 왼쪽 아래에 태을암이, 오른쪽 아래에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다.
바둑판이 있는 망양대에서 백화산성 뎈길로 가지 않고 태을암 위쪽 마애삼존불길로 내려왔다.
마애삼존불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백화산전망대 출입구가 있다. 이 위쪽에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던 듯. "충남 태안군은 11일 백화산성 정비사업부지 발굴 조사에서 조선시대에 건립된 태일전의 터전 3곳과 축대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다량의 기와와 자기도 출토됐다. 태일전은 조선시대 임금이 도교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태안 연합뉴스. 2023.12.12.
"태일(太一)은 천지의 시조를 일컫는 것으로서 곧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전(殿)은 대궐을 뜻하므로 태일전(太一殿)은 하느님을 모시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일컫는 하느님이란 우리 나라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태일전은 곧 단군의 영정을 안치(安置)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의성현(義城縣)의 고적조(古跡條)에 보면 「태일전은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에 임금께서 향을 내리시어 제사를 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 태안군으로 옮겼다.」「太一殿在氷穴傍每歲上元降香以祭成化十四年戊戌移忠淸道泰安郡」이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성현에서 태일전을 성화 14년에 태안군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성화 14년은 조선조(朝鮮朝)의 성종(成宗) 9년(1478)에 해당된다. 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의 태안군의 사묘조(祠廟條)를 보면「태일전은 백화산 고성(古城) 안에 있다. 성종(成宗) 10년 기해(己亥)에 경상도 의성현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안치하였다.」「太一殿在白華山古城內 成宗十年己亥自慶尙道義城縣移安干址」이 기사에서 보면 성종(成宗) 10年 기해(1479)에 의성현에서 이곳으로 이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 태안군지
반백년 오르지 못했던 우리의 백화산 북봉! 희망찬 태안 행복한 군민 시대의 염원으로 군민의 품에 돌아오다. 2017년 5월 26일 개방.
마애삼존불길 오른쪽에 백화산 정상 출입구가 있으며, 백화산성안내판과 백화산구름다리 안내도 등이 설치되어 있다.
백화산 정상 출입구의 백화산구름다리 안내도 옆 나무 줄기에 금북정맥 등산로 '꽃과 바다 태안' 표지판이 묶여 있다.
출입구에서 올라오면 입구에 쌍괴대 각자, 그 오른쪽에 백화산성 안내판, 왼쪽 위 백화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화산(白華山) 정상 아래에 '쌍괴대(雙槐臺)' 각자 바위가 있다. 그 옆에 '군수이기석수식 임인중춘(郡守李基奭手植 壬寅仲春)’ (임인년 1902년, 중춘 음력 2월, 서산군수 이기석이 심다)가 새겨져 있다. 이기석(李基奭)이 1902년 봄날 느티나무 두 그루를 심고 이 바위에 쌍괴대(雙槐臺)를 음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괴(槐)는 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를 뜻한다.
왼쪽에 백화산성 안내판, 오른쪽에 성곽현황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백화산성 안내판에는 동벽 구간 전경과 출토유물 사진이 있다.
백화산성(白華山城)은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산성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요한 장소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대비했는데, 백화산성도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안 1경'인 백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백화산성은 태안군의 성 중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성벽과 유물을 보면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 초부터 산성으로 사용하지 않고 내부에 봉수대를 두어 조선말까지 활용하였다고 전한다. 성벽이 남쪽과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말안장 같은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중 일부만 남아 있다. - 안내판
백화산(白華山) 봉수대지(烽燧臺址)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그 오른쪽에 전망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 나무가 1902년 봄날 이기석이 심은 느티나무일까?
날이 맑으면 전망이 좋을텐데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가 투명하지 않다. 안내판의 위치를 확인하며 조망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오른쪽 뒤 근흥면 연포와 안흥항, 지령산, 그 앞쪽으로 몽산포와 청포대를 가늠한다. 오른쪽 아래 태안여고, 중앙 아래 태안초교, 그 왼쪽에 태안읍성과 태안읍 행정복지센터 등이 확인된다.
왼쪽 아래는 생태문화샘골도시공원, 중앙에 대림아파트와 태안성당, 그 뒤에 태안중학교, 오른쪽 뒤에 안면도가 가늠된다.
왼쪽 뒤에 도비산이 흐릿하며, 천수만과 부남호가 가늠된다. 맨 왼쪽에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 유적이 있을 것이다.
백화산성은 백화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돌과 흙으로 쌓은 산성이다. 정상 남쪽에 봉수대지(烽燧臺址)가 있다.
봉수대 안내판 앞면은 봉수대(烽燧臺)를 설명하고 뒷면은 백화산 봉수대를 설명한다. "봉수대는 횃불(烽)과 연기(燧)라는 의미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조선시대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평화 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선이 해안에 접근하면 3개, 적선이 해안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군이 육지에 상륙하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안개, 구름, 비, 바람 등으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할 때에는 포성이나 뿔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하였다."
백화산(白華山) 봉수대(烽燧臺) 안내판 뒤에 백화산(白華山) 봉수대지(烽燧臺址)가 있다.
백화산(白華山) 봉수대(烽燧臺)는 조선 중기인 16세기 초를 전후하여 신설된 봉수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의 서산 북산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남쪽의 도비산 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내는 봉수는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안산, 강화, 인천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에 최종 전달되어 적의 침입을 알렸다. 백화산 봉수대는 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 특성상, 빈번하게 발생한 왜구의 약탈에 대응하는 봉수대로서 백화산성과 함께 서해안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백화산(白華山) 봉수대지(烽燧臺址)에 봉수대지(烽燧臺址) 표석이 세워져 있고, 북쪽에 백화산(白華山) 정상이 있다.
봉수대지에서 태안읍 남산리 장명수 바다, 근흥면 일대의 들녘과 연포, 안흥항과 지령산, 맨 오른쪽 만리포 방향을 가늠한다.
해발 284m 백화산 정상에 백화산(白華山)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표석 남쪽 면에는 한자 白華山이 적혀 있다.
해발 284m 백화산(白華山) 정상표석 북쪽 면에는 한글 백화산이 적혀 있다. 백화산 정상 남쪽에 백화산 봉수대지가 있다.
백화산 정상에서 동쪽 방향을 살폈다. 이 아래쪽에 태안읍 상옥리 냉천골이 있을 것이다.
백화산 정상에서 남쪽 방향을 살폈다. 백화산 장대지와 느티나무, 전망안내판 등이 보인다.
백화산 구름다리 0.5km, 흥주사 2.0km 지점, 백화산 정상 뒤쪽(북쪽)으로 내려가 백화산 구름다리로 이어간다.
백화산 정상 아래쪽에서 백화산 구름다리를 내려보았다. 구름다리를 이어주는 양쪽의 바위를 봉봉대라 이른다고 한다.
백화산 정상 뒤쪽 길에서 서쪽으로 나오면 백화산 구름다리 출입구가 있으며, 구름다리 가는 길은 뎈길로 조성되어 있다.
뎈길에서 흥주사 뒷산과 그 왼쪽 뒤 오석산, 중앙 맨 뒤 팔봉산을 바라보았다. 흥주사 뒷산을 태안군지에서는 흥주산이라 이른다.
뎈길에서 구름다리 봉봉대를 살폈다. 구름다리 양쪽에 있는 암봉을 봉봉대(峰峰臺)라 이른다고 한다.
왼쪽에 구름다리 준공비가 있고, 위쪽 구름다리 봉봉대로 올라간다.
백화산은 태안의 진산(鎭山)이자 영산(靈山)으로 태안군의 기상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서 산하(山下) 태안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풍요와 융성의 기운이 샘솟는 명산(名山)이다. 백화산 정상 아래 두 개의 큰 바위 봉우리인 봉봉대를 이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맛을 느끼게 하며 태안의 수려한 경관과 가로림만을 바라보며 백화산의 상서(祥瑞)로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백화산 구름다리'를 조성하다. 2023.3.24. 백화산 구름다리 준공 기념 태안군수 가세로
백화산 구름다리는 길이 74m, 폭 1.5m, 지상높이 19m이다. 일출~일몰 시간 중에 이용할 수 있으며, 일몰 이후 및 일출 전에는 이용을 금지하며, 우천, 강풍, 강설 및 관리 운영상 필요 시 미개장한다고 한다. 구름다리 시점부와 종점부의 명칭인 봉봉대는 그 한자는 전하지 않으나 봉우리가 두 개라는 의미의 봉봉대(峰峰臺)라 불려왔다고 한다.
길이 74m, 폭 1.5m, 지상높이 19m의 백화산 구름다리는 2023년 3월 개통되었다고 한다.
백화산 북봉에 전망대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가는 뎈길 중앙 위에 백화산 북봉 제2전망대가 보인다.
냉천(冷泉)이 있는 골짜기인 냉천골을 내려보았다. 계곡에 흐르는 물이 차고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동류수(東流水)로서 옛날 유두일(流頭日)에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감았다고 한다. 중앙 뒤에 천수만 부남호가 흐릿하여 보이지 않는다.
백화산 구름다리 동쪽 봉봉대에서 왼쪽의 오석산과 중앙 뒤 팔봉산을 확인한다. 바로 앞 흥주산 너머에 흥주사가 자리한다.
팔봉산을 줌으로 당겨보았다. 동서트레일 4구간 종점은 팔봉산 남쪽 아래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팔봉산 주차장이다.
팔봉산(八峯山)은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양길리, 금학리에 걸쳐 팔봉면 중앙에 솟아 있는 한국의 화강암 산이다. 팔봉산 명칭의 유래는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줄지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팔봉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8봉 중 3봉이며 높이가 362m이다. 팔봉산의 전설에 의하면 봉우리가 9개인데, 제일 작은 봉을 제외하여 이름이 팔봉산이 되었다고 하며 가장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넣지 않았다고 하여 매년 12월 말이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위키백과
구름다리 동쪽 봉봉대에서 가로림만을 조망하였다. 서해랑길 탐방 때 가로림만 둘레를 돌았는데, 풍경이 흐릿하다.
백화산 구름다리 동쪽 봉봉대에서 서쪽 봉봉대를 살핀 뒤 백화산 구름다리를 건넌다.
백화산 구름다리를 건너 구름다리 서쪽 봉봉대로 넘어왔다.
구름다리 서쪽 봉봉대에서 백화산 북봉 제2전망대를 살폈다. 제1전망대는 오른쪽 뒤에 있으며, 근흥면을 전망할 수 있다.
태안 삭선리 들녘이 펼쳐지고 아래에 태안 신동아아파트, 그 왼쪽 뒤에 태안농공단지를 가늠한다.
태안읍 삭선리와 후안리 들녘이 펼쳐지고 왼쪽에 금굴산, 그 오른쪽에 가로림만이 드넓게 북쪽으로 펼쳐져 있다.
태안읍 산후리 뒤쪽에 가로림만이 남쪽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었고, 중앙 뒤에 가로림만 구도항, 오른쪽에 오석산이 가늠된다.
흥주사 뒷산(흥주산)이 품 넓게 자리하고, 왼쪽 뒤에 오석산, 그 오른쪽 뒤에 팔봉산이 확인된다. 팔봉산 앞쪽에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 유적이 있다. 오른쪽 아래는 태안읍 상옥리 냉천골이다.
백화산 구름다리 서쪽 봉봉대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동쪽 봉봉대로 되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