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one Sapiens to another!”. 이 말은 <Sapiens>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한국독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어떤 사피엔스가 다른 사피엔스에게”라는 말이 오늘 따라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현생인류의 출현은 약 3~400만 년 전의 일이다. 생김새가 원숭이에 가까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이어 호모 에렉투스,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등 모두 6 종의 인간 종(種)이 살았다고 한다. 그 중에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한 승자로 지구상에 살아남았다. 다른 종이 멸종하는 상황에서 과연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끝내 서로 속이고 죽여서 잡아먹었을까?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그 이유를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의 출현, 그리고 ‘언어’의 힘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생존전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를 적으로 몰아 제거하거나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현실을 역사에서 보았다. 그것은 곧 침략과 정복, 지배라는 정치적 야욕과 종교적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주종관계를 생각해보자. 그 결과 조선조의 사화(史禍)에 이어 동학과 구한말의 혼란은 끝내 국권상실의 과정에 접어들어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그뿐인가. 8.15 이후 제주 4.3항쟁에 나선 민중을 국방군이 적군을 살해하며 빨갱이로 몰았고 광주 5.18민주항쟁에 나선 민중을 계엄군이 폭도라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살해한 실록이 우리를 비통에 빠지게 했다. 생각해보라.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왜 그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누가 그들을 죽이라고 했을까. 그들의 원혼은 오늘도 우리의 머리 위를 떠도는 유령으로 존재한다.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강남역 사건에 이르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의 공포가 우리사회의 병리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직 나만의 이익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해를 위해 타인을 적대시 하고 파리 목숨 취급하는 무자비한 슬픈 현실을 기억하는가?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가 요구되는 사회에서 살인자와 죽임을 당하는 희생자가 악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총칼이 어느 시대고 강자의 편이 되고 약자를 짓밟고 지배했다. 현실에 침묵한 한 무리들이 정치적 이전투구(泥田鬪狗)와 종교적 신념과 언론의 편견에 휩쓸려 살인자의 들러리를 섰음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는 한갓 인민의 아편"인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다른 종이 다 멸종하는 과정에서도 어떻게 생존했을까?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3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룩을 다스렸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길가메시 왕이 죽음에 맞섰던 삶이 신화가 되어 전한다. 적자생존은 생물의 생존 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는 현상을 말한다. 스펜서(Spencer, H.)에 의하여 제창되고, 다윈(Darwin, C. R.)이 《종(種)의 기원》에서 사용한 말이다. 구석기시대의 원시인들이 주먹도끼와 찝개로 살아남았듯이 현세의 인간은 강자의 패권주의와 자본과 권력에 빌붙어 협력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일까?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형성된 인간사회의 편을 가르고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프랑스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강자와 약자(The Strong & The Week)>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힘이 지배하는 비극을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의 길을 설명한다. 강자의 불안과 약자의 절망, 이 모든 비극을 넘어서는 길은 영적인 힘으로 사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영적인 힘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강하고 약한 자연적 반응의 악순환을 끊는 힘이며, 모든 두려움과 세상의 가장 강력한 존재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라고 역설한다.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교만 뒤에 숨은 인간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영적인 인간강화(human enchancement)를 생각할 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여기로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인문학적 각성 위에 우리가 당면한 핵위협과 환경파괴, 약육강식과 빈부의 격차, 무능과 부정부패에 맞서는 시대정신을 새롭게 깨달아야 할 때다. 우리는 현실의 혼을 붙들고 옳고 그름을 통해서 삶의 질을 바로잡고 하늘을 향한 길을 올바로 닦아야 한다. 약자의 분노와 울분을 외면한 정치와 법조, 교육, 언론, 종교가 저지른 침묵의 죄악은 반드시 심판 받아야 한다. 아침 이슬이 내리면 더욱 또렷해지는 거미줄을 보았는가? 그 거미줄은 역사의 기억을 붙들고 늘어진다.
한반도를 주시하는 외신은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고 문학과 역사가 실록을 남긴다. 소설가 이성준의 <탐라, 노을 속에 지다>와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전집, 이산하의 시집 <한라산>과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보라. 제주 4.3항쟁과 광주오월민주항쟁사료에 피맺힌 절규가 그날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정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과연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이고 평화가 넘쳐흐르는 낙원이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인지 성난 얼굴로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