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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孝行)이라 함은 부모(父母)를 잘 섬기는 행실(行實)이다. 즉 부모가 근심치 않도록 항상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니 형제(兄弟)가 사이좋게 우애(友愛) 하고 가족(家族)이 화목(和睦)하여야 합니다. 文貞公 韓 忠(문정공 한 충) 동영상 공의 직함은 승지(承旨) 이다.나이 열살 때 어머니가 숙환(긴 병환)을 앓았는데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간병 하였다. 공이 몰후 에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가 공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韓 麟 瑞(한 인 서) 공은 할아버지가 병이 낫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회생(回生) 하였다. 그 일을 조정(朝廷)에 보고하자 정문(旌門: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이나 효도,절개가 뛰어난 사람집앞에 나라에서 표창 하고자 세운 붉은 門)을 내렸다. 韓 以 周(한 이 주) 공은 효성(孝誠)이 지극(至極) 하였므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는 유록(遺錄)만이 있으므로 상재(上梓)한다. 韓 道 濟(한 도 제) 공이 효성(孝誠)을 가상(嘉尙)히 여겨서 부역(賦役)을 면제(免除) 하여 주었다.는 유록(遺錄)만을 싣는다. 僉知公 韓 命 烈(첨지공 한 명 렬) 공의 관작(官爵)은 첨지(僉知) 이다. 성품(性品)이 매우 효성 스러워 90세의 나이에도 친상(親喪)을 당하여 三年 동안이나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사림(士林:선비)들이 공의 효행(孝行)을 누차 감영(監營)에 상정(上程) 하였다. 判書公(韓 淳)(판서공 한 순)명종 5년(155)~인조3년(1625) 19세 자는 호원(浩源)이요, 청원위(淸原尉:景祿) 의 아들로 증 영의정 부사공 승권(府使公:承權)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중종의2녀 의혜공주(懿惠公州)시다.음보로 여러관직을 거쳐 선조29년(1596)온양군수 동왕32년 장단부사,광해군8년(1616)동지돈녕부사에 이르고 인조3년(1625)에 별세 하니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도사 도총부 도총관에 증직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대한 효성이 지극 하였다 한다.항시 슬하를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모셨으며 부모께서 향리(鄕里)에 낙향하시자 관직을 떠나 부모따라 낙향 하여 봉양(奉養)에 전력을 다하였고,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연명(延命) 하셨다 한다. 배위 정부인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참찬공 세장(參贊公:世章)의 따님이고 슬하에 1님1녀를 생육하니 아들은 감찰공 사일(監察公:師一)이다.묘:충남 보령군 천북면 하만리 동음부락, 배위 정부인 창녕성씨 합조 세향일 음 10월15일. 參判公(韓 天 賚)(참판공 한 천 뢰) 중종30년(1535)~선조1년(1568) 18세 공의 자(字)는 몽설(夢設)이다. 별제공, 극공(克恭)의아들이고 감사공 윤창(監事公 胤昌)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광주이씨(淑夫人 光州李氏)로 현감 수진(縣監 守震)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中宗)30년(1535)1월29일생이며 명종(明宗)13년(1558)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0여세로의(義)와효(孝)를 위해 지려(砥礪)하여 효(孝)를 다하니 효문(孝門)으로 소문(所聞)이 났다. 공은 선조(宣朝) 1년(1568)10월8일 34세로 졸하니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 의금부사(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同知 義禁府事)이다.공의효행(孝行)을 전해들은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선생은 먼훗날 갈명(喝銘)을 찬(撰) 하였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원주변씨(贈 貞夫人 原州邊氏)는 병사 명윤(兵使 明胤)의 따님으로 열행(烈行)으로 정려(旌閭)를내렸다.아들은 석탄 효중(石灘 孝仲),처사 효삼(處士 孝蔘),사마 효상(司馬 孝祥)이다.공과배 증 정부인 원주변씨(贈 貞夫人 原州邊氏)의 묘가 성남시 단대 선영 월록 임좌(城南市 丹垈 先瑩 越麓 壬坐)에 쌍조(雙兆)로 안장(安葬) 되었는데 월사 문충공 이정구(月沙 文忠公 李廷龜)가 묘표(墓表)를 찬(撰)하고 지봉 이수광(芝峰 李수光)이 묘지(墓地)를 찬하였다. 성남의 도시계획에 따라1969년2월14일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입봉하 진좌로 이장 합조 되었다.세향일 음 10월 7일. 韓 瓘(한 관) 공은 어버이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회생시켰으므로 사람들이 세효(世上에 뛰어난 孝)라고 일컬었다, 그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부역을 면제 해 주라고 명 하였다. 韓 稷(한 직) 공의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으므로 어버이상을 당하여는 3년동안 죽을 먹으며 어묘살이를 하였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부역이 면제 되었다. 生員公 韓 孝 參(생원공 한 효 삼) 공의자는 경노(景魯)이니 참판공 천뢰(參判公 天賚)의 아들이요 승지공 극공(承旨公 克恭)의 손자이다. 부모(父母)를 일찍 잃었으므로 맛있는 음식을 먹은적이 드물었고 화려(華麗) 한 옷을 입지 않았다. 공은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의 아우이다. 久庵公(韓 百 謙)(구암공 한 백 겸19세 명종7년(1552)~광해군 7년(1615) 字鳴吉號久庵柳陰長子 明宗壬子生 光海時退居楊州勿移村學問行誼爲世所重乙卯卒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명길, 호는 구암, 류음 판관 효윤(孝胤)의 아들이고.군수공 여필의 손자이고,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평산신씨 로 예빈시정 건의 따님이다.공은 명종 7년(1552) 4월11일에 태어났다. 선조 12년(1579)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18년(1585)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맡아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참봉(中部參奉)이되었으며,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선릉참봉(宜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퇴하였다.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 하여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을 받고 귀향 갔다가, 임진왜란 때대사면령으로 석방 되었다. 석방 될 때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 하여 반란을 선동 한자드르을 참살한 공로로 관직에 재임용,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고,1595년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1601년 형조정랑, 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判決事),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서용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를 주관 하었으며,1610년(광해군 2) 강원도 안무사(江原道按撫使,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 되었다가 사암 하고.양주의 물이촌 에 퇴거 하여 있다가, 역학(易學)에해박 하다 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 하기 시작 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보았다,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여 실학의연구자로서 싫증적이며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 하고, 종래의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교양 하였으며, 그 결과로 기정고에 실려 잇는 기자도. 기전설 등의 저술을 남겼다.광해군 7년(1615) 3월 7일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배위 증 정경 부인 능성구씨는 판서 사중의 따님이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는 교위 정준의 따님 이며 아들은 우의정을 지낸 정온공 흥일 이다.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공의 배위 증 정경 부인 능성구씨 는 인조 8년(1630) 6월24일 졸하였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는 인조9년(1631) 10월29일 졸함에 부평리 가마도 계좌 에 삼합조 로 안장 되었다 우복 정경세 가 묘갈을 찬 하였다.신도비명 은 우복 정경세가 찬 과 죽남 오 준 이 써서 인조 4년 (1626)수립 하였는데 비가 16척이다. 韓 後 愈(한 후 유) 공은 어버이가 병을 앓자 다리의 살을 잘라 드리니 10일간을 더 연명하고 돌아가메 눈물을 흘리며 여묘 살이를 하였다. 그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부역을 면제 해주라고 명하였다. 直長公 韓 如 埼(직장공 한 여 기)공의 관작(官爵)은 직장(直長)으로만 유록(遺錄)에 있다.공은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다.하여 조정(朝廷)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도암(陶唵) 이재(李縡)가 묘표(墓表)를 지었다. 縣感公 韓 如 益(현감공 한 여 익) 공의 호는 백탄(白灘)이다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공의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여 향리(鄕里)에 칭송(稱頌)이 자자(藉字) 하였고 이윽고 공의 효행을 추천 하였다. 西恩君 (韓 世 斗)(서은군 한 세 두) 1651~1742 32세 공의 자는 망경(望卿)이요,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서성군 전, 의 아들이요 동몽교관(董蒙敎官)하다가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공헌(貢獻) 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에 증작(贈爵)된 정칙(正則)의 손자이다. 공신(功臣)의 후손으로 일찍이 경학(經學)에 통달(通達)하고 종가(宗家)의 범절(凡節)을 익혀 전례(典禮)에 밝았으므로 주위(周圍)의 칭송이 높았으며 상봉 하솔(上奉下率)의 표상(表像)이 되었고 특히 효심(孝心)이 지극 하였다. 공의 성품(性品)이 활달 하고 내심(耐心)이 강하여 대인(大人)에 너그러웠다고 전해진다,습봉(襲封)으로 서은군(西恩君)에 봉(封)해지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증작(贈爵) 되었다. 배위 안동 권씨(配位 安東權氏)는 공과 합조(合兆)이다.(초사(初仕)를 어떻게 했는지 또 효행(孝行)의실상(實相)도 기록(記錄)으로 남는 것이 없으므로 선세보첩(先世譜牒),효행록(孝行錄)으로만을 남긴다., 參判公 韓 重 朝(참판공 한 중 조)공은 첨지로서 효행이 뛰어나 이조 참판 에 증직 되었다. 判事公 韓 克 大(판사공 한 극 대)공의 관직은 판사로 유록에 있다. 공이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연명 하도록 해 효성으로 칭송을 받았다. 韓 이 基 (한 이 기) 공의 효행이 뛰어나 여러 차례 추천(상주기를 천거 한다는 뜻)하였다는 유록만이 있다. 韓 赫(한 혁)공은 참봉의 관작으로 녹봉을 받은 것은 공의 효행이 뛰어났으므로 인한 것이라는 유록에 있다. 韓 峻(한 준)공의 관직은 승문원 정자이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 슬퍼하다가 야위어 끝내 죽고 말았다, 나라에서 이 사연을 알고 효행을 기려 홍문관 수찬에 증직 하엿다. 將軍公 韓 商 藎(장군공 한 상 신)공은 효심이 지극하여 10년동안 어버이의 병시중을 들면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찌기 꿩고기를 먹고 싶어 했는데 꿩이 방안으로 들어 왓다. 아버지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7일간 연명 시켰다. 마침내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다고 한다. 공은 절충장군이었다. 淸原君 韓 聖 輔(청원군 한 성 보)광해 12년(1620)~숙종23년(1697) 22세 (학행록 참고) 參判公(韓 聖 佑)(참판공 한 성 우) 인조11년(1633)~숙종36년(1710) 22세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자는 여윤(汝尹), 청홍군 수원(淸興君 壽遠)의아들로 청녕군 덕급(淸寧君 德及)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처사공 영원(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우암(尤菴 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현종10년(1669)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에 천거 되었으나 마치 모독이나 당한 듯 사양 하였다. 동왕15년 우암등이 삭탈관 당하고 유배되자 수백명의 선비를 이끌고 소(疏)를 올려 우암이 무고 당하였음을 주장하고 충청도에 숨어 지냈다.숙종6년(1680)우암등이 다시 등용된뒤 숭릉참봉,봉사,직장 등을 역임 하고 동왕1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여 좌랑,함경도사,지평,예빈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동왕 15년 노론(老論)이 몰락 하고 우암도 제주도에 유배 되었다가 사사(賜死) 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갔다.동왕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의 세력이 무너지자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수찬,교리,응교,집의.승지,병조,호조참의,대사간,판결사,병조,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회양,삼척,철원부사와광주목사,전라도관찰사,개성,유수 등을 지냈는데 선치수령으로서 명성이높았다. 광주에서는 공의덕망(德望)을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향년78세에 졸하니 왕은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추증 하였다.공은 천자(天姿)가 굳세고 뛰어났으며 어버이를 지효(至孝)로 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부모를 모신 사람은 의술을 몰라서는 안된다 하고 의술을 깨쳤으며 상기(喪期:상중)에는 여막(廬幕)살이를 하며 풍우(風雨:비,바람) 도 피하지 아니하고 조석(朝夕)으로 곡배(哭拜:통곡을하여성묘함)하였고 말이 선인(先人:돌아가신아버지)에게 미치면 오열(嗚咽:목이메어울음)하고 눈물을 흘림이 늙도록 여전 하였다. 공은 유학(儒學:공자의가르침을닦는학문)을 사모하여 대현(大賢:지덕(智德)이 아주높은사람)에게귀의(歸依:돌아가의지함)하였으며 비록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 없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주희(朱喜)가 주장한 유학)에 힘을 쏟아 탐색 연구하여 일생을 두고 체험코자 하였다.많은 저서를 님겼으나 대부분이 산일(散佚:흩어져없어짐) 되었고 증조부인 충정공(忠靖公 應寅) 의 유고(遺稿:죽은뒤에 남은 시문의 원고)를 수집(蒐集)하여 백졸재유고(百拙齋遺稿)를 편집 하였으며 공의 연보(年譜)와 유고만이 전하여 온다. 공의 후손들중에는 문숙공(文肅公:翼暮 領議政),익정공(翼貞公 用龜 領議政),문간공(文簡公:章錫 大堤學)을 위시하여 많은 고위명관(高位名官)과 학자(學子)가 배출(輩出)되었다.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貞夫人 南陽洪氏)는 감사공 처후(監司公 處厚)의 따님이다.슬하에 3남을 생하니 장남은 우윤공(右尹公 配義)이요 차는 배도(配道) 인데 성거(聖擧)에게 계후입양(系後入養) 되었고 차는 치숙공 배문(致淑公 配文)의이며 부실(副室)에서 유 1남 하니 창보공 배희 (昌甫公 配熙)이다.세향일 음 10월 첫주일요일 韓 必 壽(한 필 수) 공의 호는 인묵이다. 공은 지극한 효행이 있었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사림들이 여러차례 정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 하였다.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부역을 면제 해 주라고 명 하였다. 參議公 韓 泂 (참의공 한 형)공의자는 자정이니 덕천부사를 지낸 복기의 아들이요 자를 백고라 한 주의 손자이다. 효행이 투철하여 어머니의 병이 위중 하여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연명케 하였다. 장간공의 후손으로 충의공 온 의 7대손이다. 후에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 되었다.배위는 증 숙부인 순흥 안씨 이고 아들은 승지 주국, 주서, 주식,의 삼형제 이다. 韓 啓 亨(한 계 형) 공은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어사 박문수가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부역을 면제 해 주라고 명 하였다. 공의 관직은 살필수 가 없고 다만 가자만 가선대부라고 유록에 있어 상재 한다. 察訪公 韓 震 (찰방공 한 진)공은 효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다고 유록에 있으며 후에 찰방에 증직 되었다고 되어 있다. 韓 仲 愈(한 중 유)공은 효성이 독실 하였다. 어머니 최씨가 일찍이 유암을 앓았는데 자기 다리 살을 잘라 드렸다. 韓 季 愈(한 계 유)공은 중유의 아우 인데 역시 어머니 병에 다리 살을 잘라 드려 5개월간 연명시켰다. 조정에서 이 효성을 기려 포상 하였다. 質景公 韓 致 亨(질경공 한 치 형)상신록참고 韓 致 明(한 치 명)공은 효행이 뛰어나 여러번 포상의 대상으로 추천 되었다고 유록에 잇어 이제 싣는다. 韓 東 卨(한 동 설)공은 효성이 지극 하여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연명케 한 바 있음이유록에 잇어 이에 싣는다. 直長公 韓 述(직장공 한 술)공의 관직은 직장이다. 효성이 지극 하여 나라에서 정문을 하사 받았다. 그 사실이 삼강행실록(삼강이라함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아내, 각각 지켜야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에 있다. 또 해설을 붙여서 풀이 하면 위의(삼강)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씻 뽑아 그 덕행을 찬양항 책으로 조선조 세종 13년에왕명으로 지은 것이다. 여지승람(우리나라 지리서)에 나타나 있다. 進士公 韓 震 台(진사공 한 진 태) 공은 효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다. 공이 진사의 신분으로 효성이 지극 하엿음을 감안 하여 후에 호조좌랑으로 증직 하였다. 韓 命 錫(한 명 석)공은 충성과 효도로 도백(도지사)의 추천을 받았다. 持平公 韓 宗 彦(지평공 한 종 언)공은 효성이지극 하여 지평 벼슬을 추증 받았다고 유록에 있다. 持平公 韓 聖 時(지평공 한 성 시)공은 지극한 효성이 세간에 알려져 지평 벼슬이 내려졌다 고 유록에 잇다. 府事公 (韓 後 裕)(부사공 한 후 유) 숙종 39년(1713)~정조15년(1791) 26세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효자로 자는 백창(伯昌),대사헌공, 증 좌찬성 용모(大司憲公:贈左贊成:顯暮)의 아들로 진사공 증 영의정 사범(進士公 贈 領議政: 師范) 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니 목사공 봉휘(牧使公 鳳輝)의 따님이다. 영조13년(1747)생원시에 합격,음보로 여러관직을 거쳐 다섯고을의 수령과 돈녕부도정을 역임 하였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순조조(純祖朝)에 아들 익정공 용구(翼貞公 用龜)의 현달(顯達)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되었다.공은 평소 부모에대한 효성이지극 하였다.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글을 지어 명산(明山)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애처러웠다. 할머니 유씨(兪氏)와 어머니 심씨가 모두 고령(高齡)을 누렸는데 자주 병석(病席)에 누웠다. 공도 이미늙고 아들넷이 곁에 있었으나 대신 시중을 들 게 하지 않고,조석(朝夕)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밤이깊어 물러가라고 명하면 물러나와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자주 침실(寢室)밖에가 기미를 살피다가 코 고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서 물러나왔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만나면 흰수염에 성애가 엉기기도 하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민씨(驪興閔氏)니 좌찬성 문충공 익수(文忠公 翼洙)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넸을 낳았으니 장남은 감사공 용화(監司公 用和)요 2남은 길채공 용현(吉哉公 用鼎)증 참판이고 3남은 참봉공 용중(參奉公 用中) 증 판서공인데 사문공 호유(士問公 好裕) 증참판에게 계후 입양되었다. 4남은 영의정 익정공 용구(翼貞公 用龜)이다.묘 용인군 남면 창리 선영하. 韓 箕 宗(한 기 종) ?~정조16년(1792) 24세 공의 휘(諱)는 기종(箕宗)이고 자(字)는 창운(昌運) 이다. 선조(宣祖) 사부(師傅) 윤명(胤明)의 후손이며,생부(生父)는 규(逵) 이며 통덕랑(通德郞) 적(迪)의 계자로 정랑공 린서(璘瑞)의 손자 이며 참의공 전(參議公
執義公(韓 孝 友)(집의공 한 효 우)중종26년(1531)~선조19년(1586) 18세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희중(希仲)이고, 종부정공 원(宗簿正公 垣)의 아들이고 별제공 세침(別堤公 世琛)의 손자이며 참의공 전(參議公
한 효 우(韓 孝 友)1531(중종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희중(希仲). 숙(숙)의 증손으로, 통례 원(垣)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성수(尼城守) 이존관(李存官)의 딸이다.1555년(명종 10)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562년 중종의 능을 천릉할 당시 재궁시위집사로 임명되었고, 다음해 사서를 지냈다.1564년에는 지평, 다음해 헌납, 1566년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그뒤에도 지평·병조정랑·장령·봉상시첨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명종실록》 편찬시에는 직강(直講)으로 춘추관에 관여하였다.1573년(선조 6) 장령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대간의 체모를 생각하지 않고 출사를 청탁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1582년 그가 사예로 있을 때 명나라의 황태자가 탄생하자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사신이 왔다. 사신들이 성균관에서 문묘를 참배하고 존경각(尊經閣)에 들어가 《국조오례의》를 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조가 진노하여 《국조오례의》를 명나라의 사신에게 보게 하였던 사성 이하는 모두 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그도 책색관(冊色官)으로 하옥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한 진(韓 縝)1607(선조 40)∼1659(효종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홍(景弘), 호는 해천(蟹川). 대간 효우(孝友)의 증손으로, 합천현감 위겸(위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섭(申燮)의 딸이다.1638년(인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서 관직생활을 한 뒤 전적이 되었다.그뒤 공조·예조·병조의 낭(郎)을 역임하고, 정언·문학·필선·지평·장령을 지냈다.1646년에는 지평으로 있으면서 인조에게 시폐(時弊)를 진언하여 가납되기도 하였다. 執義公 韓 垽(집의공 한 은) 기미 광해11년 1619년 2월14일生~무진 숙종14년1688, 6, 1,卒 자 중징(仲澄) 호 만은(漫隱) 집의 이조참의 追贈 문정공 계희 6세손이며, 삼등공 士信(사신) 5세손이다. 병조참판 亨吉(형길) 의 막내아들 갑신 인조22년 1644년 9월28일 병조참판 인 형길(亨吉)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집상하여 매일 해시(亥時:밤9-11시 사이)면 저녁 곡을 하고 축시(丑時:새벽1-3시 사이)에 아침 곡을 하며, 장사전에는 죽을 먹고 졸곡 후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삼년동안 시묘 살이 하며 조석으로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고 곡하며 너무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결국 수척해지는 병에 걸렸다. 현종즉위년 기해 1659년 6월 2일에 영상인 양파(陽坡)정태화공이 공을 효행이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선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공은 안에 들어가 어머님께 고하기를, “천거한 조목이 사실과 같지 않아 감히 출사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고, 그 후 현종 6년 을사1665년 1월 7일 모친인 정부인의 상을 당해서도 부친상 때와 같이 집상하여, 몸을 더욱 상하여 이후로는 벼슬길에 더욱 뜻이 없었다, 오직 경전연구와 특히 중용(中庸)을 중히 여겨 몸소 실천하여 실제를 얻는 일에 힘썼다. 보령 칠십이시다. 행장은 정조14년1790,2,초하루, 순암 한산인 안정복지음 中樞公 韓 淑(중추공 한 숙)공의 관작은 동지중추부사이다. 어머니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수명을 연장 시켰다. 韓 時 遇(한 시 우) 공이 타고난 성품이 매우 효성 스러웠다. 집안에 불이 났는데 화염을 무릅쓰고 사당으로 들어가 신주를 받들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어 죽었으므로 포상을 청 하였다. 韓 再 泰(한 재 태)공은 효성이 뛰어낫다. 조정에서 이사실을듣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 시켰다. 韓 駒(한 구)공은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고 대변의 맛을 보아 차도를 살폈다. 조정에서 정문을 세우라고 명 하였다. 主簿公 韓 忠 孫(주부공 한 충 손)공의 직위는 주부이다. 공의 효성이 뛰어나 군자 감정의 증직이 내려졌다. 韓 後 愈(한 후 유)공은 수의 아들이다.효도함이 투철 하였으므로 나라에서군자감정의 증직을 받았다. 韓 士 敏(한 사 민)공의 구의 증손이다. 업이의 병 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회생 시켰다. 韓 克 금(한 극 금)공은 후유의 아들이다. 지극한 효도로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졌다. 韓 忠 彦(한 충 언)공은 효심이 지극 하여 어버이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 敎官公 韓 士 英(교관공 한 사 영)공은 교관으로 있으면서도 효성이 뛰어나 관작을 받았다고 유록에 있다. 韓 文 彦(한 문 언)공은 지극한 효심으로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韓 滓 世(한 재 세)공의 효심이 뛰어나 어버이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고 상을 당하여는 죽을 먹으며 지냈다는 유록이 있다. 韓 성(한 성)공은 효행이 순수하고 독실 하였다.어버이의 병에 대변의 맛을 보아 병의 차도를 살피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한 달포를 연명 시켯다. 선비들이 조정에다 포상할 것을 요청 하였다. 韓 思 愈(한 사 유)공의 투철한 효행이 있었으므로 사림들이 포상할 것을 요청 하였다. 監司公(韓 用 和)(감사공 한 용 화)영조8년(1732)~정조23년(1799) 27세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예지(禮之),호는 광암(廣庵),동지중추부사공 증 영의정 후유(同知中樞府事公 贈 領議政 後裕) 의 아들로 대사헌공 증 좌찬성 현모(大司憲公 贈 左贊成 顯暮)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여흥민씨는(麗興閔氏) 문충공 익수(文忠公 翼洙)의 따님이다. 영조30년(1754)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여러관직을 거쳐 군자정,춘천부사, 참의,승지등을 엮임하고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평소(平素) 부모에 대한 효성(孝成)과 숭조정신(崇祖精神)이 지극(至極)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공경이 독실하여 항상 저녁에 시중을 들고 나서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코고는 소리를 들은뒤에 물러나왔다, 상을 당 하였을 때 나이60이 되었으나 항시 상복을 벗지 않았다.어느날 전(奠 제물)을 늦게 올리자 집안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땔 나무가 없어 그랬던 것을 알고 그 뒤로 자신이 거쳐하는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상기 5년동안을 거상(居喪부모상을 당하고 있음) 하면서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은 정조17년(1793)양절공 확(養節公 確)의 신도비대석(神道碑臺石)을 보수할 때 여러 일가들과함께 장남인 제천공 상리(提川公 象履)과 부자(父子)가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많은 헌성과협조로 이 사업을 완수(完遂)하고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시조부군(始助府君)의 산소에 참배하고 그 재실을 보니 기둥이 기우러지고 담장과 뜰이 허물어졌으며 또 건축 한지가100년이 지난지라 몹시 노후(老朽)되었음을 보고 곧 자기 녹봉에서출연(出捐하며 일가들과 힘을 모아 두해를 걸쳐서 공사를 마치고 그 재사(齋舍)의 이름을 세일재(歲一齋) 라 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니 시직공 치만(侍直公 致萬) 증 영의정의 따님이다.슬하에2남3녀를 낳으니 장남은 제천공 상리(提川公 象履) 이고 2남은 판관공 경리(判官公 景履) 증 좌찬성인데 익정공 용구(翼貞公 用龜)에게 계후 입양 되었다.묘 용인군 창리 선영하. 韓 師 民(한 사 민)공의 아버지는 덕화이다.공은 어버이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수명을 연장 시켰다. 韓 達(한 달)공은 지극 한효심으로 부모 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잠시 연명 시켰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부역을 면제 해 주었다. 韓 碩 元(한 석 원) 공의효도함이 지극 하여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한 달포를 연명 시켰다고 유록에 있다. 韓 繼 周(한 계 주)공의 지극한 효심은 뛰어나 어버이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회생 시켰다. 韓 海 漸(한 해 점)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웠다.어버이가 종기를 앓자 입으로 빨아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 시켰다. 韓 증(한 증)공의 직위는 절충 장군으로 효심이 뛰어나 지극한 효도를 한 포상으로 오결의 전답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나 사양 하였으므로 특별히 벼슬을 하사 하엿다. 將君公 韓 厚 明(장군공 한 후 명)공은 절충 장군 으로 효성이 뛰어나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는 유록이 있다. 韓 起 良(한 기 량)공의지극한 효심으로 어버이 중병을 당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 잠시나마 연명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參奉公 韓 世 昌(참봉공 한 세 창)공은 참봉으로 자는 희세이다. 어머니 상사에 예절을 다하엿고 아바지 상복을 소급해서 입었다. 縣令公 韓 翼 文(현령공 한 익 문)공은 현령이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으므로 트별히 음직에 임명 하였다. 훗날 영조 신해년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다. 韓 霖(한 림)공은 무과출신으로 효도함이 뛰어나 나라에서정문을 내렸다. 進士公 (韓 이 浩)(진사공 한 이 호)공은 진사이다. 효성이 지극 하여 어버이 병환이 위독하자손 바닥을 불에 태우며 하늘에 기도 하여 회생하였.다이와같은 효행으로 향리에서 효자로 추천되었다. 韓 以 咸(한 이 함)공은 임의 아들이다. 공에게 지극한 효행이 있음을 조정에서 알고 특별히 포상 하라고 명 하였다. 韓 光 福(한 광 복)공은 어버이 병에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살폈고 또 어버이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꿩이 저절로 이르는 기적이 있었다.선비들이 그의 효행을 여러차례 예조에추천 하였다. 韓 駿 發(한 준 발)공은 규원의 아들이자 헌납 백후의 손자이다.호는 취은이다.어버이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렷고 병자호란 뒤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韓 光 錫(한 광 석)공은 덕주의 아들인데 자는 백심이요 호는 유촌이요 생부는 덕순이며 서천군 사문의10세손이다. 공은 어버이 병에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살폈다.효도로 그 고장의 추천을 받앗다. 공의배위는 진주 류씨로 묘는 남산동 간좌(艮坐)에 있고 계배 전주최씨는 공과 쌍조로 선영하 남산동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아들은 치정, 치두,치대,치규,치삼,치형,등 6형제 이다. 參判公 韓 重 朝(참판공 한 중 조)공의 작위는 첨지 이다. 현령 백기의 아들이고 연흥공 사게의 7대손으로 자는 원규 이다.성품이 매우 효성 스러웠고 행실을 갈고 닦아 의로운 일을 하였다. 기사년 이루로 은거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인재를 성취항ㅆ으므로 품ㄱ몌를 올려 주었다. 세상을 떠나자 효도로 이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배위 정부인 파평 윤씨는 공과 합조로 신촌 선영 경좌에 안장 되었다.,아들은 명현 이다. 韓 壽 箕(한 수 기)공은 창우공 여옥의 아들이고 영흥공 의6세손인데 자는 일경이다.일찍 아바지를 잃어 약시중을 들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해 하여 종신토록 약을 먹지 않았다. 공의 배위 밀양박씨 묘는 공과 더불어 여주 점면 수성산에 있으며 아들은 생원을 거쳐 봉사이다. 僉知公 韓 翼 新(첨지공 한 익 신)공의 직위는 첨지이고 자는 문중이다. 후유의 아들이고 전랑 명여의 손자 이자 영흥공 사개의11세손이다.일찍붐를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여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나이가 62세에 아버지의 상복을 소급해 입어 조석으로 전을 드리고 슬퍼 곡 하는 바가 막 초상이 났을 때외 다름 없었다. 계묘년은 바로 어머니가 별세 한지61년의 돌이었고 또 공이 결혼한지 61년의 돌이기도 하였다.자손들이 회혼의 잔치를 열었는데 공이 슬퍼서 통곡 하고 연회의 자리에 나가지 않으니 모인 손님들이 너너없이 90세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정서에 감탄 하였다.공의배위는 우봉 이씨이니 묘는 광주군 도척면 유정리에 있고 공의묘는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소무선곡 자좌 이다. 아들은 처사 응종과 응주인데 응주는 의신의 계후이다. 韓 東 식(한 동 식)공은 지량의 계자인데 생부는 명량으로 참판공 계신의11대 손이다. 공은 어버이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고 그의 아내 정씨도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사림(선비)들이 정문을 세울 것을 청 하였다. 韓 僖(한 희)공의 아버지는 태용이요 할아버지는 무과에 판관 하고 이어 충훈부도사를 지낸 습의 손자 이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부역을 면제 하였다.공의배위는 단양우씨로 양위의 묘는 강화삼간리 선영하로 되어 있고 아들은 명탁으로 하계는 무후인지 수단 불입으로 된 것인지 살필길이 없이 무주로 되어 있다. 參議公 韓 世 埼(참의공 한 세 기)공은 이양공 명진의 10대손으로 효성이 뛰어나 어버이의 병환에 약을 구해가지고 소나기를 맞고 오다가 마을앞 개천에 이르러 방황하며 통곡 하자 물이 뚝 끊겨으므로 돌아와서 약을 달여 드렸더니 어버이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도백(도지사)이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공 생전에 정문을 세우라 명 하였고 죽은 뒤에는 공조참의의 증직을 내렸다. 韓 世 璋(한 세 장)공은 참의 세기의 아우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 스러웠는데 보고로 인해 부역을 면제 해 주었다. 持平公 (韓 聖 時)(지평공 한 성 시) 23세 공의 자는윤중(允中)이니 통덕랑(通德郞) 성우(聖羽)의 아들이요 정일재(精一齎) 여기(如琦)의 손자이다. 일찍이 수암(遂菴) 권선생 문하(權先生 門下)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완수(完修)하고 부모(父母)모시는데 추호도 불편함이 없도록 성심(誠心)으로 봉양(奉養) 하였으며 부모상(父母喪)을 마치니 향리유림(鄕里儒林)이 효자(孝子)라고 칭송(稱頌)함에 나라에서 공이 몰후(歿後)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공의 배위(配位)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봉사(奉事) 사징(思徵)의 따님으로 묘(墓)는 공과 합조(合兆)이고 아들은 무육(無育)하여 성조(聖朝)의 장자(長子) 명익(命益)이 계후(系后) 하였다.묘.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양변리 通德郞公 (韓 聖 維)(통덕랑공 한 성 유) 23세 공의자는 지국(持國)이니 통덕랑(通德郞) 정오(廷五)의 아들이요 병절교위(秉節校尉) 여회(如晦)의 손자로 숙종14년(1688)에 태어났다. 일찍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철리(哲理)를 깨달았으므로 자타(自他)가 천생효자(天生孝子)라 하였다.공의 母夫人 趙氏가 여러해 동안 유종(乳種)으로 와병불기(臥病不起)하니 저녁에 옷벗을 겨를도없이주야 간호 하였으나 끝내 효(孝)함을 얻지 못하고 장차임종(臨終)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輸血) 하였으나 종명(終命)하니 초종지례(初終之禮)를 마친 후에도10여년을 미움정도로 연명(延命)하여 향리(鄕里) 유림(儒林)이 천성(天性)효자(孝子)라 하였다. 공(公)의배위(配位)는 예안이씨(禮安李氏)와 계배(繼配) 거창신씨(居昌愼氏)로 묘소는 공과 三位合兆이고 아들은 진악(鎭岳) 명상(命相 系昌朝后) 명주(命周)이다.묘.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동촌리. 韓 逵(한 규)숙종 18년(1692)~영조24년(1748) 23세 공의 휘는 규(逵) 이고 자(字)는 도원(道源) 이다. 선조(宣祖) 사부(師傅) 윤명(胤明)의 후손이며, 정랑공 린서(正郞公 璘瑞)의 아들이고 중추공 세상(中樞公 世上)의손자 이며, 참의공 전(參議公
韓 宗 吉(한 종 길)공의자는 군상이다.아버지는 철화요 이양공(명진)의13세손이다.공이 13세때에 어버이가 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 韓 用 盾(한 용 순)공의자는 맹집이요 호는 국암이니 경유의 아들이고 취현의 손자이다 참판공(계선)의13대손이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는데 이 효행을 함평영에서 알고 포상 하였다. 공의배위가 두분으로 초배는 문화류씨의묘는 공과 합조로 근흥면 안기리산 54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 계배는 김해 김씨이다. 아들은 승리,병리,긍리,계용위후),장리 이다. 韓 思 直(한 사 직) 공의 자는 화익이요 호는 회춘헌 이니 공의 아버지는 동훈이고 할아버지는 계삼이요 양혜공 후 이다. 공의 어버이 병환에 황새가 감응 하였고 거상 할 때 정원의 꽃이 피지 않았다. 사림들이 포상할 것을 여러번 청 하였다는 유록 이 있다. 공의 배위 진주 정씨는 공과 합조로 부평 진전 안산에 산소가 있으며 아들은 정렬, 정문 이다. 韓 範 基(한 범 기)공은 양절공 의 9대손으로 지극한 효도와 독실한 행의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承旨公(韓 時 晦)(승지공 한 시 회) 공의 자는 여양(汝養)이니 초휘는 시망(時望)이다. 고위(考位)는 조은공(釣隱公) 몽삼(夢參)이요 조고(祖考)는 종묘봉사(宗廟奉事)를 지낸 계(誡)이다. 공은 기국(器局)이 크고 풍모(風貌)가 수려(秀麗)하여 일찍이 가훈(家訓)을 이어받아 시례(詩禮)를익히고 효행(孝行)으로 향리(鄕里)에서 칭송(稱頌) 받으니 이는 선대(先代)로부터 학덕(學德)과행의(行誼)로 성망(聲望)이높은 가문(家門)에서 자기수양(自己修養)에 면려(勉勵)함이었다. 공이 평생(平生)을 효(孝)와 수신(修身)으로 일관(一貫)하니 공의 배위(配位) 재령이씨(載寧李氏)또한 효부(孝婦)로서 그의 부덕(婦德)은 주위(周圍)의모헌(模憲)이되어 급기야 나라에서 알기에 이르니 모든부역(賦役)을 면제(免際) 받기에 이르고 공에게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에 증직 하였다. 공은 배위 재령이씨(載寧李氏)와 합조(合兆)이고 아들은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攻臣) 익세(翼世)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 된 영세(榮世)이다.묘.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정수. 韓 弘 朝(한 홍 조) 공의자는 제경이요 호는 신곡이니 원기의 아들이요 참판공 여해의 손자로 영흥공의 9대손이다. 공은 행실을 갈고 닦아 의로운 일을 하였고 효성이 지극 함은 타고난 성품으로 어버이의 상에 소상때 까지 죽을 먹으며 근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의 배위는 연안 김씨로 묘는 공과 합조로 여주 군흥면계신리상현에 있으며 아들은 수직가선 명성, 그리고,명중이다. 參奉公 韓 仁保 (참봉공 한 인 보) 공은 만은 기장의 이들로 호운재이다. 공은 효행이 뛰어나 어버이 병에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살폈다,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 하자 참봉을 주었으며 또한 공은 학문도 잘 햿고 행실도 모범 이었다. 府事公 (韓 泰 箕)(부사공 한 태 기)숙종39년(1713)~순조5년(1805) 22세 공의 자(子)는 도백(道伯)이다 증 참판공 여천(贈 參判公 如川)의 아들이고 지평공 필명(持平公 必明)의 손자이며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中)의 증손(曾孫)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8대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풍양조씨(贈 貞夫人 豊壤趙氏)로 증 참판 동(贈 參判 凍) 의따님이시다.공은 숙종(肅宗)39년(1713)9월1일생이다. 음직(蔭職)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공은 위태9危殆)로운 친병(親病)에수장(手掌)을 째어 주혈(注血)하여 낫게 하였으나 상애훼절 (喪哀毁節)하였으며 순조(純祖)2년(1802)90세에수직(壽職)으로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嘉義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순조5년(1805)1월20일에 졸하니 수(壽) 93 이다.배위(配位)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군수상익(郡守 商翼)의 따님이며 아들은채조(采朝),처조(處朝),통덕랑 치조(通德郞 致朝)이다.공(공)의배위(配位)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정조(正祖)12년(1788)11월20일 졸함에 계신리(桂信里) 산13-2자좌(子坐)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공과 합조(合兆)이다.묘: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세향일 음 10월6일. 陶谷公 (韓 述)(도곡공 한 술) 중종36년(1541)~광해8년(1616) 18세 공은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문신이다. 자(子)는 자선(子善) 호(號)는 도곡(陶谷)이다. 청련공 지원(靑蓮公 智源)의 아들이고 도정공 석(都正公 碩)의 손자 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현손(玄孫)이다. 그의 어머니는 정부인 무송 윤씨(貞夫人 武松 尹氏)로 감찰 박(監察 璞) 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 36년(1541)12월 3일 생이며 어려서부터 문장(文章)에 힘썻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 이높았다.선조3년(1570)진사시에 1등로 합격하고 선조,13년(1580)알성문과(謁聖文科)에2등으로 급제 하였으며 선조(1596)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1592년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가 삼척부사(三陟府使)가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거 곧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서천군수(舒川郡守)로 있으면서 접전(接戰)하여 공(功)을 세워 명(明)나라 제독(提督)의 접대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선조32년(1599)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으며, 같은해 문과(文科) 시관(試官)이 되었고, 이듬해 정주목사(定州牧使)를 거쳐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 그러나 70세 이상의 부모를 둔 수령은300리밖의 외직(外職)에 임명될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부사직(府使職)을 내놓았다. 선조38년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光海君) 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을 겸하였으며,관직(官職)이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겸(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總管)에 이르렀다.공은 월정 윤근수 (月汀 尹根壽)상촌 신흠(象村 申欽)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와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 윤신지(尹新之)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양난의 호성원종지공(扈聖原從之功)과청난지공(淸難之功)으로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세자좌빈객(贈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 弘文館 大堤學 藝文館 大堤學 判義禁府事 世子左賓客)이 되었다.거가효우(居家孝友)하고 위관근고(爲官勤苦)하니 모든사람이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광해 8년 2월29일 76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감찰 운(監察 韻) 의 따님으로 태종대왕(太宗大王)의8대손녀이다. 아들은 율헌공(栗憲公) 명욱(明욱)과 참군 명직(參軍 明職)이다. 공의배 정부인 전주이씨(配 貞夫人 全州李氏)는 광해13년(1621)8월2일 졸하니 80세이다. 고 청련공묘우록 간좌(考 靑蓮公墓 右麓 艮坐)에 공과 쌍조(雙兆)로 안장(安葬) 하였다. 묘갈(墓碣)이 있으며 해숭위 윤신 (海崇尉 尹新)이 찬서(撰書)하였다.묘:성남시 고 청운공묘 우록 간좌(考 靑蓮公墓 右麓 艮坐). 苔巷公(韓 懷)(태항공 한 회) 명종5년(1550년)~광해군13년(1621) 18세 공은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문신(文臣)이다. 자(字)는 민망(民望), 호는 태항(苔巷)이다.청련공 지원(靑蓮公 智源)의 둘째 아들이고 도정공 석(都正公 碩)의 손자로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고손자(高孫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무송윤씨(贈 貞夫人 茂松 尹氏)로 감찰공 박(監察公 璞)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5년(1550)년생이다.선조(宣祖)15년(1582)진사(進士) 생원(生員)양시(兩試)에 합격(合格)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정자(正字)를거쳐 선조(宣祖)19년(1586)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가 되었다. 선조27년(1594)진주사(陳奏使: 조선(朝鮮)조때 중국(中國)에 통고(通告)할 일이 생겼을때 임시(臨時)로 파견(派遣)하던 사신(使臣)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여러번 외직(外職)에 전보(轉補) 되었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승리(勝利)의 공(功)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策錄) 되었다. 효성(孝誠)이 남달리 지극(至極) 하였으며 글씨도 잘쓰고 시문(試文)에 통달(通達) 하였다. 광해군(光海君)13년(1621) 졸하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 되었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전의 이씨(贈 貞夫人 全義 李氏)는 군수공 용(郡守公 鏞)의 따님이고 아들은 맹운(孟雲) 군수 명윤(郡守 明潤), 명건(明建) 이다. 공(公)의묘(墓)는 배 증 정부인 전의 이씨(配 贈 貞夫人 全義 李氏)와 율동 후산 선영하 간좌 (栗洞 後山 先塋下 艮坐)에 쌍조(雙兆) 이다.묘경기도 성남시 율동 후산 선영하 세향일 음 10월10일. 修撰公(韓 峻)(수찬공 한 준) 선조9년(1576)~광해군7년(1615) 공의 자는 탁이 (卓爾)이고 호는 설사(雪蓑) 이다.별좌공 일휴(別佐公 日休)의 아들이고 부사공 기(府使公 琦)의 손자 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9대손이다. 공은 선조 9년(1576) 10월18일생이며 재예(才藝)가 뛰어나고 면학(勉學)한지 수세(數歲)에 학업이 대성(大成)하여 동왕 38년(1605)사마(司馬)가 되고 광해(光海)4년(1612)명경제(明經第)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홍문관정자(弘文館 正字)가 되었더니 공을 모함하는자가 있어 3년만에 학정(學正)이 되었다. 마침 광해정란(光海政亂)을 당하여 고향에 와서 부친 별좌공(父親 別坐公)을 효행(孝行)으로 지성껏 봉양하였으나 별좌공이 광해(光海)6년(1614년)에 졸하니 공이 애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득병(得病) 다음해(1615년)6월4일 40세로 졸하였다. 방정리 안산(方井里 安山) 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증 중훈대부홍문관부수찬지제교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중학교수한학교수 (贈 中訓大夫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 經筵檢討官 春秋館記事館中學敎授漢學敎授)이다. 아들은 여명 진영공 (震英),명영(命英),통덕랑 득영(通德郞 得英),동몽교관 사영(童蒙敎官 士英)이다. 공의 배위(配位) 숙인(淑人) 신평이씨(新平李氏)는 찰방 의(察訪 宜) 따님이며 후배(後配) 숙인 상주 이씨(淑人 尙州 李氏)는 첨지 사덕(僉知 師德)의 따님으로 공과 청주시 수곡동 고묘하 임좌(淸州市 秀谷洞 考 墓下 壬坐)에 삼합조(三合兆) 되었다.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동춘 송준길 (正憲大夫 議政府 左參贊 同春 宋浚吉) 묘표찬(墓表撰)이 있으며 1990년 5월17일 청원군 남일면 송암리 (淸原郡 南一面 松岩里)산18-1로 이장(移葬) 삼합조(三合兆) 하였다. 淸興君 韓 壽 遠(청흥군 한 수 원) 선조 35년(1602)~현종 10년(1669) 21세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자는 자구(子耉) 청녕군 덕급(淸寧君 德及)의 아들로 충정공 응인(忠靖公 應寅)의 손자이며 어머니 정부인 광산 김씨 (光山 金氏)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따님이다.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의 문인 으로 인조 11년(1633)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동료 들과 함께 율곡(栗谷:李耳)과 우계(于溪:成운)를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配享) 할 것을 여러번에 걸쳐 상소 하였으나 윤허(允許: 임금의허가)를 받지 못하자 과거 시험도 단념하고 응시 하지 않았다. 그 뒤 강릉(康陵)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4년간이나 충청도에 은거 하였다. 동왕18년(1640)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음보로 사산감역,감찰, 정랑, 예산현감,의금부도사,사도시주부, 종묘서령, 안성군수,등을 역임 하였고 강화부경으로 있을 때 효종의 북벌 정책을 도와 강화를 요새와 하는데 노력 하였다. 그 뒤 조부인 청평부원군 응인(淸平府院君 應寅)의 작위를 이어 받어 청흥군(淸興君) 에 습봉(襲封)되었고 이천부사,한성부서윤,대구부사, 등을 역임 하였으며 상주 목사때 임지에서 작고 하니 향년68이다. 공은 수령으로 있을 때 임지마다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의 존경과 칭송이 자자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바 있고 경종(景宗)때 손자(諱 配夏)의 현달(顯達)로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공은 50년간이나 양친(兩親)을 섬기는데 부모의 뜻에 따라 순종(順從) 하여 심신(心身)을 편안히 하여 드리고 절기에 맞는 의복과 구미(口味)에 맞는 음식을 언제나 소홀(疏忽)함이 없이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 하였으며 청녕군이 안질(眼疾:눈병)로 심사(心事)가 안정되지 못하고 무료하게 지내므로 공은 온종일이라도 그 측근에서 떠나지 않고 악기(樂器)를 울리며 노래를 부르거나 장기나 바둑 또는 웃음 거리 이야기등을 그 앞에 놓아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노력 하였고 또는 평소에 친애 하던 사람들을 초청 하여 주식(酒食)을 대접하며 연일(連日) 놀다 가도록 하였다.현종 1년(1660)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이듬해 거듭 모친상(母親喪)을 당하니 전후상기(前後喪期)가 4년인 장시일(長時日)에 여막(廬幕)에서 거쳐하면서도 단 한번이라도 내당(內堂)에 들러본일이 없었다. 명재 윤 증(明齋 尹拯)찬 행장(行壯) 과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찬 병서의 묘갈(墓葛)이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니 처사공 영원(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슬하에 7남 2녀를 생육하니 장남은 청원군 성보(淸原君 聖補)요,2남은 판관공 성익(判官公 聖翼)증 이조판서,4남은 참판공 성우(參判公 聖佑)증 이조판서 대제학이고,5남은 생원공 성좌(生員公 聖佐) 증 사복시정이며,6남은 증 참판공 성량(贈 參判公 聖亮) 이고 부실에서 성비(聖비)가 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찬(撰) 하고 또 비문(碑文)도 썻으며 대제학 김만중(大堤學 金萬重)이 전자(篆자)를 써서 숙종12년(1686)에 세웠다. 그리고 이 묘갈(墓葛)은 타(他) 묘갈보다 특이(特異) 하다. 비신(碑身)은 198Cm로 형태(形態)는 정사각형이다.현종(顯宗) 1년(1660)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재직중에 부친상(父親喪)으로 인하여 사직하니 백성(百姓)들이 석별(惜別)의 정(情)을 잊지 못하고 추렴하(追斂)여 부사한공수원무(府使韓公壽遠撫) 라고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恩德)을 칭송(稱頌)하였다. 3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천 설봉수원지 옆에 우뚝 서 있다.묘: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삼화리 청원군과 배위 증 정부인 함평이씨 합폄이다.세향일 음 10월11일. 生員公 韓 聖 佐(생원공 한 성 좌) 인조 15년(1637)~현종 12년(1671) 22世 동영상 자는 여량(汝良) 청흥군(淸興君 壽遠) 의 아들로 청녕군 덕급(淸寧君 德及)의 손자 이며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처사공 영원(龍溪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과 형제간(兄弟間)의 우애(友愛)가 극진(極盡) 하였다.다섯째 아들로서 형들의 앞에서 재롱이나 부리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형들을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 존경(尊敬)하고 숭배(崇拜) 하였다.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 하지 아니 하고 항시 공부에 열중 하였으며 그 총명 함은 천동(天童)과 같았다. 따라서 아는 사람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 하였다. 현종 10년 (1669)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같은해12월 8일 부친상을 당하여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여막(廬幕:상제가 무덤옆에 오두막 집을 짓고 거쳐 하던곳)살이를 하던중 이듬해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계속 여막 살이를 하였다. 부모(父母)를 잃고 매일 여막에서 통곡(通哭)하는 애절(哀切)한 모습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 로서 주위 사람들은 공의 건강을 몹시 염려 하였으나 결국은 이를 이기지 못하고 현종(1671) 집상중(執喪中) 에 요서(夭逝) 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가상(嘉常) 하여 사복시 정(司僕寺 正) 에 추증(追贈) 하였다.배위 증 숙인 백천 조씨(淑人 白川 趙氏)는 군수 석록(郡守 錫錄) 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을 생하니 장남은 첨정공 배휴(僉正公 配休)이요 차자는 판관공 배유(判官公 配愈) 인데 처사공 성필(處士公 聖弼)에게 계후 입양(系后 入養) 되었다. 1991년 12대 종손 필규(弼奎)와 영규(英奎) 형제(兄弟)가 근구(謹具) 하였다.묘: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삼화리 63의6 생원공(生員公) 성좌 (聖佐) 배위(配位) 증 숙인 백천조씨(淑人 白川 趙氏) 함폄 세향일 음 10월11일. 한 배 주(韓 配 周)1657(효종 8)∼1712(숙종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문경(文卿). 홍주출신.수원(壽遠)의 손자이며, 판관 성익(聖翼)의 아들이다. 윤증(尹拯)으로부터 수학하였다.1682년(숙종 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89년 향리로 되돌아왔다.1694년 사림의 추대로 태학장의(太學掌議)가 되었으며, 1697년 초사(初仕)하여 금부도사를 거쳐 감찰에 이르렀다가 다시 낙향하였다.17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主簿公 韓 守 性(주부공 한 수 성)16세 공은 평해공 탁 (平海公 倬)의 4남중 둘째 아들로 장도공 치의(章悼公 致義)의 손자 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함평이씨 (淑夫人 咸平李氏) 이니 첨지 계림(僉知 桂林)의 따님이다.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통훈대부 행전생서 주부(通訓大夫 行典牲署 主簿 )가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 한데다가 형(兄) 부사공 수정(府事公 守貞)의 효성에 감동(監動) 하여 소년 시절부터 매일 사당(祠堂:신주를 모시는 집) 모신 선조(先祖)의 신주(神主:돌아가신분 의 위패)에 참배(參拜) 하고 부모(父母)에게도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을 올려 그날 그날 할 일과 한일을 일일히 보고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드리고 계절(季節)에 따라 새로운 음식과 의류 등을 지성으로 봉양(奉養:부모를 받들어 모심)하였다.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자 사직(辭職) 하고 여막(廬幕)에서 형 부사공과 함께 3년간(상기)을 조석(朝夕)으로 제전(祭奠:제사)을 올리며 애모(哀慕: 돌아가신분을 슬퍼하며 사모함) 애열(哀咽:슬퍼 목메어 읆)하니 공을 아는 모든사람들은 고래(古來: 옛부터 지금에 이를기 까지)에 보기 드문 효자(孝子) 라고 칭찬하였다. 배위는 숙인 진주 강씨(晋州 姜氏)니 동지 문한(同知 問翰)의 따님 이다. 슬하에 2남을 생육 하니 장남은 호군공 (護軍公) 이조 참의요 차남은 자경공 욱(子敬公 頊) 이다. 묘:대전광역시 대덕구 용호동산26-8 세향일 음 10월5일. 韓 永 湜(한 영 식)영조37년(1761)~헌종11년(1845) 28세 공은 효자(孝子)이며 학자(學者)이다.초명(初名)은 영언(永彦),자는여대(汝大)요 호는 매봉(梅峯)이다. 송정공 성림(松亭公 聖林)의 아들로 청강공 덕형(靑岡公 德亨)의 손자이며 공안공 치인(恭安公 致仁)의14대 손이다. 음보(蔭補)로 여러관직을 거쳐 헌종(1840)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天性: 타고난성품)이 온후(溫厚: 따뜻하고 인정이 많음)하고,부모에게 효성이 지극 하였다. 정조13년(1789)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간을 여막(廬幕)에사 거처(居處)하면서 상기(喪期)를 마쳤고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 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니 신(神)도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음인지 치유(治癒)되었다. 공은 또 학자로서도 명성이 높아 여러고을의 유림(儒林)이 공의 학덕(學德: 학문과덕행)을 열거(列擧: 여러 가지를 들어 말함)하여 나라에 상소(上蔬)하니 나라에서도 이를 알고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하사(下賜)한 바 있고 공의 유문(遺文: 죽은 사람이 생전 에 써서 남긴 글) 으로는 진안군지(鎭安郡誌)에 천지 인설(天地人設), 정론변(政論辯)등이 실려 있다. 배위는 두분인데 숙부인 조양임씨(兆陽林氏)는 기효(基孝)의 따님이고 숙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상봉(祥鳳)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2녀를 생육(生育) 하니 장남은 옥당 효근(玉堂 孝根)이고 차남은 송당 성근(松堂 性根)이다. 孝子 韓 仁 瑞(효자 한 인 서)1827~1881 24세 공의 초명(初名)은 인중(仁重)이니 생부(生父)는 국율(國律)이요 백부(白父) 국신(國臣)에게 입양(入養)하고 조부(祖父)는 시열(始悅)이다. 공(公)이 젊어서 서당(書堂)에서 공부하여 선비의 범도(凡度)를 읽혀으나 집안이 어려우니 어른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거느리는데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효성을 실행하기 힘든 경지를 이어 갔으나 우연히 아버님의 병환을 맞아 백방으로 봉양을 하여도 효엄을 얻지 못하함에 이웃이 감동 하여 서로 도와 보재(補材)가 떨어짐이 없었고 대소변(大小便)을 맛을 보아 병(病)의 차도(差度)를 살피고 북두칠성(北斗七星)에 빌어 아버님의 병환이 낳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감동(感童) 하였다. 공(公)의 효행은 새벽에 문안(問安) 하고 저녁에는 금침(이부자리)를 깔아, 덥고 추운가를 몸소 살피어 주위의 모범으로 칭송을 받으니 민심(民心)을 살피고 수령(守令)들의 정사(政事)가 공평(公平:公正)한 지를 감시하기위해 암행(暗行)하는어사(御史)에게 표창해줄것을 연명(連名)으로 건의 하는 글을 올리는 등 사회(社會)순화(醇化)에 앞장서는 인서공(仁瑞公)의 행적(行蹟)을 후세 까지 전(傳)해지도록 한 선행미담(善行美談)의 기록을 남겨 후인(後人)에게 모범(模範)이 되었다. 孝子 韓 鎭 奎(효자 한 진 규)1829~1903 공의 자는 주여(周汝)이다. 아버지 홍형(弘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 성기(聖機)의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읽혀으니 공은 본래 매사에 자상하고 부모님 모시는데 지극함이 더 했다. 일찍이 어머니 탁씨(卓氏)부인이 우연히 목에종기가 나서 날로 독기(毒氣)가 성해지니 백약(백藥)이 무효(無效)하고 정성으로 간병(看病)하여도 차도가 없으매 공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선뜻 베어서 어머니의 종기에 붙여 드렸다. 하늘이 감동 하였음인지 종기는 증세가 날로 나아져 완쾌 되어 오래도록 수(壽)를 누리다가 마침내 별세(別世)하니 산소(墓所)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三年 시묘(侍墓)하는 사이 때는 계곡(溪谷)길이 험하여 혹 길을 잃으면 홀연 노인(老人)이 나타나 길을 인도 해 주는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가르켜 산신(山神) 이라 하였다. 공의 이와같은 효성에 감복(感服)한 선비 들이 암행어사(暗行御史)와 도백(道伯:도지사)에게 몇차례 포항에 줄 것을 상서(上書)한 바 있음을 살필수 가있다.公의 행적(行蹟)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만 되어 있어 관작(官爵)을 살필수가 없으며 다만 1996년 봄에 公의 효행을 기리는 효행비문(孝행1碑文)을 문학박사 강희근(文學博士 姜凞根) 이 찬(撰)한데서 볼 수가 있고 배위(配位) 신안 주씨(新安 朱氏) 또한 효부(孝婦)로 칭송이 높다.낙원(洛元), 상원(相原),형제소생(兄弟所生)이 번연(繁衍)하여 화목한 문중(門中)이다.(通政大夫 淸州韓公 鎭奎 孝行碑 碑文은 문학박사 강희근 文學博士 姜凞根이짓고 광산후인 김영건光山後人 金永乾이 썼다). 琴樂堂 韓 璟 履(금락당 한 경 리)순조30년(1830)~광무(7년(1903) 28세 공은 효자(孝子)로 자(字)는 도명(道命)이요 호는 금락당(琴樂堂)이다.증 참판 하경(하경)의 아들로 성집공(聖執公:元瑞)의 손자 이며 만회당 필성(晩晦堂 必聖)의 7대손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전주최씨(戰周最氏)이니 창손(昌孫)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9살의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여의니 그 슬퍼함을 조객(弔客)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으며 성장(成長) 하여서도 항상 어릴 때에 아버지를 잃었음을 탄식하면서 어머니를 섬기기에 온갖 정성을 다 하고 그 뜻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명산(名山)에 오직 어머니만이라도 오래오래 살으시기를 기도 하기 무릇 30년에 이르렀다.때로는밖에 맛있는 과일이나 색다른 별미라도 생기면 이를 먹지 아니하고 기어히 가져와 어머니께 드린 다음 맛보고, 또 어머니가 부스럼으로 오래 고생 하여 의사가 수술 하여도 낫지 아니 하니 그 부스럼을 입으로 빨아 낫게 하고 어머니 나이 80의 고령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효성이 자극 한지라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다. 고종 12년(1875)어머니가 돌아가게 되자 이 때에도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3일간을 더 살 게 마침내 작고 하니 눈이오나 비가 오나 날마다 무덤을 찾아 3년간을 하루같이 성묘 하였다. 이때 마침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개도 항상 공을 따라 무덤길을 왕래 한지라 향청(鄕廳:지방관청)에서 누차 효자로 추천 하였던바 호군(護軍)의 벼슬을 내리고 광무7년(1903) 공이 사망 하자 본도 관찰사가 왕에게 상소 하여 비서원승(秘書院丞)의 벼슬을 내림과 아울러 정려(旌閭)의 은전을 베풀었다,공의 효행이 이러 하였거니와 아들 남사공 흥교(南史公:興敎)도 아버지 못지 않게 효성이 지극 한지라 사람들은 효부(孝父)는 효자(孝子)를 낳는다더니 공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하여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금락당 경리琴樂堂 :璟履)와 남사공 흥교(南史公:興敎)부자의 쌍효각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다.배위는 증 숙부인 나주 임씨(羅州林氏)이니 영진(映震)의 따님이다..아들은 남사공 흥교(南史公:興敎)이다. 韓 鎭 洙(한 진 수)철종14년(1863)~(1942) 공의 자는 극재(極才) 호는 만송(晩松)이다. 미언공 병관(美彦公:炳觀)의 아들로 옥당공 효근(玉堂公 孝根)의 손자 이며 공안공 치인(恭安公 致仁)의 17대손이다. 공은 조부 옥당공 때부터 3대에 걸쳐 용담 향교(龍潭鄕校)의 전교(典校)를 지낸 독실(篤實)한 유교가문(儒敎家門)에 태어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였다.1920년 청주 한씨 제5교 경신보(庚申譜) 수보후(修譜後) 청주 한씨 종약원(淸州韓氏宗約院)이 해체(解體) 되어 동종약원에 모셨던 문성대왕(文聖大王:箕子)의 영정(影幀)을 봉안할곳이 어뵤어 난처(難處)한 압장에 처하였을 때 자원(自願) 하여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에 인현묘(仁賢廟)를 창건(創建) 하고 이에 봉안 하여 매년 3월5일 군내 기관장밀 유림의 참여로 향사(饗祀)를 봉행 하고 있던중 1997년 영정을 도난당하고 또한 인현묘 건물이 땜건설로 수몰지구(水沒地區)로 책정(策定) 되어 1998년 춘계(春季) 향사를 끝으로 소멸(消滅) 하게 되었다. 참으로 애석(哀惜) 한 일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대책(對策)을 강구(講究) 하고 영정은 계속적(繼續的)인 탐색(探索)으로 회수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배위는 두분인데 슬하에 자녀는 아들 상충(相忠) 뿐이다. 東愚公 韓 景 錫(동우공 한 경 석)(1878)~(1945) 30세 공의 자는 경행(景行)이며 호(號)는 동우(東愚)이다. 양절공(襄節公) 下 장도공(章悼公)의 후손으로 고(考)의 휘(諱)는 철교(哲敎)요 조부(祖父)의 휘(諱) 용일(用馹)이다. 공은 자품(資稟: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착실(着實) 정직(正直)하고 관인돈후(寬仁敦厚: 너그럽고 인정이 후하여 어질다) 하여 대인(對人)의 폭(幅)이 넓었다.일찌기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율곡선생(栗谷先生)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정독(精讀)하였다. 부친상(父親喪) 을 당하여는 묘하에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를 살았고 모친(母親) 모시기를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에 문안 하고 병환중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喪)을 당하여 삭망(朔望)을 거르지 아니하며 상중(喪中)에 술과고기를 멀리하여 조상을 받드는데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으로 삭발(削髮)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 성性을 바꾸고 이름을 고치는 행패)를 강제하던 시절에도 굽힘이 없이 당당히 항거한일들은 당시 형편으로 죽음을 각오한 애국(愛國)의 표본이었다. 공의 생전(生前)의 행의(行誼: 올바른 행위를 칭송하여 많은 후학(後學)과 선비(士林) 들이 비(碑)를 세웠으니 1959년 기해(己亥)년 3월의 일이다.묘: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산34번지 心齋 韓 元 植(심재 한 원 식)고종30년(1893)~(1965) 31세 공의 자(字)는 공선(公善) 호(號)는 심재(心齋) 이다. 성택(聖澤)의 둘째 아들이고 백능(百能)의 손자 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7대 손이다.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로 종화(鐘和)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 30년(1893)6월30일생이다. 천성(天性)이 학업(學業)을 좋아 하더니 회당 윤응선(晦堂 尹應善) 선생의문하(門下) 에서 소학(小學: 松나라 유자징(劉子澄)이 주희(朱熹)의 가르침을 받아 지은 아동요敎訓書) 사서(四書:論語,盟子,中庸,大學)을 익혀 삼경 (三經:詩經,書經,周易)에 능통(能通)하였다. 사친애경(事親愛敬)하고 안빈수도(安貧修道) 하니 향리인(鄕里人)이 우러러 봤다. 왜정시(倭政時) 강제단발령(强制斷髮令)에도 불구 하고 평생을 유발(有髮)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에도 불복(不服)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도 반대해온 꿋꿋한 표상(表像)이 되었다. 공의 덕망(德望)과 학식(學識)이 고매(高邁)함에 원근(遠近)의 문하생 이 다수(多數)였다. 일찍이 대부인 경주 이씨(大夫人 慶州 李氏)의 상(喪)을 당함에 묘측(墓側)에 여막(廬幕)을 짓고 애읍삼년(愛泣三年)하니 문묘유림(文廟儒林)들이 포창(褒彰)하였으며 향리(鄕里)의사표(師表)가 되었다.1965년12월25일 졸하였다.배위 천안전씨 (天安全氏)는 달호(達鎬)의 따님이며 아들은 성환(晟煥),(珽煥이다.공의 배위 천안전씨(天安全氏)는 1977년 7월15일 졸하니 묘: 경기도 미양면 서변리 신좌에 합조 하였다. 府事公 韓 守 貞(부사공 한 수 정) 16세 조선조 중기의 무신, 평해공 탁(平海公 倬)의 4남중 장남이요 장도공 치의(章悼公 致義)의 손자 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이니 첨지공 계림(簽知公 桂林)의따님이다.음보(蔭補)로 여러관직을 거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天性:타고난성품)이 순효(純孝:지성을 다하여 효도함)한지라 부모(父母)를 애경(愛敬:사랑하고 공경함)하고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을 드려 불편하심이 없는지 살피며 계절에 맞는 의복과 맛있는 음식으로 지성을 다하여 봉양(奉養) 하였고 장남으로서 아우들을 애호(愛護:사랑하고 보호함)하고 선도(善道:잘 인도함)하니 아우들도 스스로 공을 존경(尊敬) 하고 순종(順從) 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이 항상 화목(和睦)하였고 웃음이 그칠날이 없어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다. 평해공이 돌아가자 묘소의 앞에 여막을 짓고 또 제청(祭廳:장사때 제사를지내기위하여 무덤 옆에 베푼곳)을 만들어 아우 주부공(主簿公:守性)과 함께 조석(朝夕)으로 전을 올리고 추모 하였으며 3년간 하루같이 죽만 먹었다.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을 사지당(祠祉堂)이라 하였다. 배위는 두분인데 초배는 양천허씨(陽天虛氏)는 병사공 혼(兵使公 混)의 따님이고 계배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슬하에 2남을 생하니 장남은 어모장군 행 호군공(護軍公 0)이고 차남은 진사공 현(進士公 顥)이다 淸寧君 韓 悳 及(청녕군 한 덕 급)선조10년(1577)현종 1년(1660)공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득지(得之)요 호는 월곡(月谷)이다. 선조(宣祖)때 우의정인 충정공 응인(忠靖公 應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정경 부인 전주리씨(全州李氏) 니 현감공 (縣監公) 의 따님이다. 선조34년(1601)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추천(抽薦)으로 차례에 따라 봉사(奉事)에 임명하였으나 취임(就任) 하지 않으니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 되었다가. 주부(主簿)로 옮겼다. 외직(外職: 지방공무원)으로는 옥천군수(沃天郡守)외6개 군수와 해주(海州) 및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내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녕군(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소무원종공신(昭武元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공은 천성(天性:타고난 성품)이 온후(溫厚:따뜻하고조용함)하고 효성(孝誠)이 지극 하였다. 광해군때 간사한 신하들이 모함(謨陷:꾀를써서 남을 못된 구렁에 빠지게 함)으로 충정공이 삭탈관작(朔奪官爵:죄를 지은 사람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빼버림)을 당하고 광주(廣州)로 내려가게 되자 공도 관직을 떠나게 되어 충정공을 따라 내려가서 억울 하심을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여 드리고 받들어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 보람도 없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 원인으로 병이나자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비운(悲運:슬픈운수)속에 세상을 떠나니 묘소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3년간을 거기에 기거 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그 모습을 눈으로는 볼 수 없을정도였다한다.이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가까운 시대에 보기드문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다. 다섯 왕조를 섬기고84세에 별세 하니 현종은 예관(禮官:예의,제향 등을 담당하는 관원)편에 재물과 제문 등을 내리어 제사케 하였다.묘표는 동춘 송준길 (同春 宋浚吉)이 찬(撰)하고 대사헌 윤문거(大司憲 尹文擧)가 썻으며 현종 7년(1666)에 세웠다. 음기(陰記)에 쓰기를 공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공은 진실로 복인(福人) 이로다.영화(榮華)로운 환경속에 살다가 장수(長壽)를 누리고 편안히 별세 하여 감탄 하였다고 써 있다.배위는 정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니 사계선생 장생(沙溪先牲:長生)따님이다.슬하에 3남을 낳으니 장남은 청흥군 수원(淸興君:壽遠)이고 차남은 좌승지 선전관공 지원(宣傳官公: 旨遠)이며 3남은 첨정공 지원(僉正公: 志遠)이다.부실(副室)에서 증 호조참판 만호공 성원(萬戶公: 聲遠)이 있다. 寺正公 韓 師 默(시정공 한 사 묵) 경종1년(1721)~영조47년(1771) 공은 효자(孝子)이다. 자는 자혜(子惠)요 증 좌찬성 우윤공 배의(右尹公 配義) 아들로 증 이조판서 참판공 성우(參判公 聖佑)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性品)이 온순(溫順)하고 인자(仁慈)하며 효성(孝誠:부모를 섬기는 정성)과우애(友愛:형제간의 애정)가 지극 하였다. 어머니가 병(病)에 걸리자 공이 직접 지성(至誠:극진한정성)으로 간병(看病:환자를 간호함) 하였으나 불행히도 졸(卒)하니 그 통곡(通哭:소리내어 슬피 읆)하던 모습을 말로서는 나타낼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묘소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3년간을 아침과저녁으로 성묘(省墓)하고 애절하게 통곡하는 것을 본 주위사람들은 참으로 근래에 보기드문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으며 나라에서도 이를 가상(嘉賞:칭찬함)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이란 벼슬을 내렸다. 배위는 숙인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참판공 중협(參判公 中協)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찰방공 석모(察訪公 碩暮)를 양자로 삼았다. 節制使公 韓 夢 龍(절제사공 한 몽 룡) 공의 자는 견선(見宣) (현선으로도 부름)이니 임란(壬辰倭亂)때 수사(水使) 최강(崔강)과 더블어 창녕(昌寧) 과 마산포(馬山浦)에서 왜적(倭賊)을 토벌 하고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와같이 창녕 화왕성(昌寧 火旺城)을 지킨 종묘봉사(宗묘5奉事) 계(誡)의 아들이요 문과(文科)에 등제(登第) 하여 한림(翰林)을 거친 여철(汝哲)의 손자이다.또한 문한(文翰)으로 명성(明聲)이 높아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된 조은공 몽삼(釣隱公 夢參)의 형님으로 공은 선대(先代)로부터 학행과 효행이 투철한 가문(家門)에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효심(孝心)이 지극 하여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도 예도(禮道)로써 다하고 6년동안 시묘(侍墓)) 하였다. 부모 생존시에는 아침 저녁을 문안을 게을리 한 적없고 혹 출타 할 때에도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어버이에게 다녀온 사실을 아뢰어 궁금증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는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했다는 옛사람의 효행(孝行)을 실천한 표상(表像)이라 할 것이다. 공이 난세(亂世)에 당하여 병서(兵書)와궁마(弓馬)에 전력(專力)하여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결성(結城) 진도(珍島) 영원(寧遠)의 현감 군수(縣監 郡守)를 지냈고 영원전(寧遠鎭)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을 겸직 하면서 청백(淸白)으로 선정(善政)하니 고을마다 송덕비(頌德碑)를 세운 바 있다. 공이 壽68하고 선조을유(宣祖乙酉1645)5월13일 별세(別世)하여 선령유곡선영자좌(宣寧楡谷先塋子坐)에 안장하고 아우 몽삼(夢參)이 비문을 지어 묘비(墓碑)를 세웠다. 공의 배위(配位) 진양강씨(晋陽姜氏)는 선령유곡선영하(宣寧楡谷先塋下)에 公과 雙兆요 함안 조씨(咸安 趙氏)는 공과 上下兆이고 평택임씨(平澤林氏)는오부득고축좌(漁父得谷丑坐)에 그리고 초계정씨(草溪鄭氏)는하곡리영봉산오좌(荷谷里靈鳳山午坐)이다. 아들은 4형제로 長이 宣敎郞 時憲이요 차는 從仕郞 時俊이요 3남은 時達4남은時振 이다. 晩曉公 韓 得 榮(만효공 한 득 영) 공(公)의호는 만효(晩曉)이다.공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증직(贈職)된 정대(廷大)의 아들이고 역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된 사원(思遠)의 손자로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지녀 부모(父母)가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받들었으며 형제(兄弟)가 우애 하였다.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는 6년을 시묘(侍墓:산소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사는 효행) 하니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지켰주었다 한다. 이와같은 사실이 이웃 동리에 알려지니 모두 감복하여 칭송이 자자 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죽산안씨(竹山安氏)와연일 정씨(延日 鄭氏)이고 公의墓는사동후 노강산하곤좌(寺洞後蘆崗山下坤坐)에 있고 묘표(墓表)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