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운명(運命)이란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
사보를 다시 보내는 두 달 정도 지나는 시간 동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우선 시절이 봄을 지나 여름으로 치닫고 있고
앙상한 가지들은 혹은 꽃을 피워내기도 하였고,
잎을 피워내기도 하였다..
삭막했던 대지는 온갖 들풀과 꽃들의 천지로 덮여가고 있다..
그것들만 보다면 생동감이 있고..축하받아 마땅하지만
지구 한편에서 벌어진 탐욕과 이기심으로 시작된
더러운 이라크 전쟁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자세한 사중의 소식은 ‘산사에서’란에서 하기로 하고
곧장 주제로 넘어가보자...
자...이제 ‘운명(運命)이란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일단락을 지어볼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여러분과 함께 불교와 삶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주제들은
한정 되어 있고 각각의 주제에 따라 결론은 비슷하다.
다만 그 등장하는 소재,
즉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해내는데 쓰이는 이야기들이야
계속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류의 주제는
역시 앞으로도 여러번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가 전개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번이 세 번째 시간이니 일단락을 지어보기로 하자..
나는 지난호에서 운명에 대한 불교의 시각은
일정하게 정해진걸 인정하는 것으로 말하였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탄생후 아시타 선인이
부처님의 관상을 보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 시대에 부처님이 오시게 된 동기를
단순히 이미 태어나 관상이 그리되었으니 부처님이 된다가 아니라,
전생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를 밝힘으로
부처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해드린다 하였다..
우리는 부처님을 이시대의 석가모니불로 이해하며
인도의 가비라국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출발하지만
그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된 동기를 살펴보지 않는다면
불교를 바로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시기 위해
부처의 지위에 오르기 이전인 ‘보살’의 단게에서
이미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남에게 희생과 봉사하는 삶을 살으셨다하는데
이를 인행(因行)시라 말한다.
여기에서 아승지란 범어 asamkhya의 음사이며
무앙수(無央數)라고 번역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무한수'라는 뜻이다..
또 겁이란 한 량 없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겁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알려주는 예화를 보면
‘지도론’에는 둘레 사방 40리나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 번씩 하늘의 선녀가 입고 다니는
얇고 부드러운 옷으로 쓸어
마침내 그 돌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겁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희생과 봉사를 하는 기간인 아승지겁은
여기에서 말하는 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겁인데
우주가 한 번 이루어지고 멸하는 기간을 1대겁으로 봤을 때
1대겁은 4중겁으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중겁은 20소겁으로 이루어지므로
총 80소겁을 합하여 1대겁이라한다.
즉 위에서 예를 들은 그 겁이 80개가 모여야
비로소 우주의 생멸이 한 번 이루어지는
1대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겁을 세 번을 거치는 동안
보살로써 희생과 봉사를 계속한 결과로 부처님이 되셨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 인행(因行)시에 결정적으로
앞으로 부처님이 되실 것을 수기
(授記:일종의 예언이다.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예언적 교설을 말한다.)
받으시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불교는 운명이란 어느정도 결정되어진다는 쪽의 논리임이 분명하다..
그 예를 들어보자..
아득한 옛날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인행의 제2아승지겁 되던 때
‘선혜(범어로는 마나바카(Mӑṇavaka),유동 혹은 운이라 함)’라는 이름의
청년으로 살았었는데
이때는 연등불(燃燈佛,然燈佛)이라는 부처님의 세계였다.
연등불(Dȋpaṁkara)은 과거 머나먼 옛적에 출현하여
현재의 석가모니불에게 미래 세에 반드시 성불하여
호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준 부처님이신데
정광여래(錠光如來) 또는 정광불이라고도 부른다.
이 정광불은 우리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10재일 중 초하루에 그 위치를 지정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분이 석가불의 성불을 수기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과거와 일생을 담은 경전인
‘불본행집경이란’이란 경을 보면
이 때 진보(珍寶)라는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선혜’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어느날 선혜가 스승에게 공양하기 위해
연화성이란 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안이 묘하게 장엄되어 있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연등불”이 오신다고 하였다.
이에 뵙기 어려운 성인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처님께 무엇을 공양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꽃을 공양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꽃을 사려 하였으나 사지 못하였는데
성의 왕인 항원대왕이 부처님께 꽃을 공양하려 하므로
꽃과 향유를 팔지 못하게 했고
왕만이 꽃을 살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꽃을 구하러 다니던 선혜는
물푸는 여인인 ‘현(賢)’을 만나게 된다.
선혜는 그녀가 일곱송이 우발라꽃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꽃을 팔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녀가 옆집에서 5백전을 주며 꽃을 어렵게 구한 것이라
팔기 어렵다고 말하자
5백금전을 주며 꽃 다섯 송이를 팔 것을 다시 부탁하였다..
이 때 현이라는 여인은 포고령을 어기고
많은 돈을 들여 꽃을 사려는 이유를 물었고
이에 선혜가 꽃을 공양한 공덕으로
미래에 보리(깨달음)를 얻고자 함이라 말하였다..
현이 그를 보며 생각하기를 그가 보리를 얻을 것이라 생각하고
꽃을 주는 대신 성도하기 전까지
자신을 아내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성도한 뒤에는 제자가 될 것이라 말하였다 ..
선혜는 망설이다가 보리를 구하는 자는 아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대상은 아내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였고,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을
막지만 않는다면 아내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고 말하였다..
선혜가 비로소 승낙하고
그녀에게 5백금전을 주고 다섯송이 꽃을 얻었는데
현은 나머지 두송이를 주며
자신의 미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발언해줄것을 부탁하였다..
마침내 연등불이 오셨는데 선혜는 멀리서 보고 그 위의에 환희심을 내었다..
항원왕이 성문에서 나와 연등불을 영접하였고
모든 중생들이 연등불을 향해 향가루와 꽃을 공양하자
그 꽃은 떨어지지 않고 일산을 이루었다..
선혜도 꽃을 공양하면서 서원하며 말하기를
“만약 내가 미래 세상에 성불할 때에
지금 연등여래께서 법을 얻음과 같이
또 저 대중과 다름이 없이 흩은 꽃이 허공 중에 머물러
꽃잎은 아래로 향하고 꽃줄기는 위로 뻗쳐서
부처님 머리 위에서 꽃 일산을 이루어
부처님을 따라가고 멈추게 하소서”
이후 한량 없는 사람들이 좋은 의상을 길 위에 펼쳐 공양하여
땅을 덮어 가득하게 하였는데
선혜는 의복을 공양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라곤 녹피(사슴가죽:鹿皮) 밖에 없어 그것을 깔았다..
사람들이 나무라고 녹피를 멀리 던져버렸는데 이 때 선헤가
”아아! 세존 연등 여래시여 저를 어여삐 여기시고
사랑하지 않으시렵니까?“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연등불께서 이를 아시고
한 땅을 진흙탕으로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피하였다..
선헤는 이 진흙탕으로로 가서
“세존님을 어떻게 이런 진흙속으로 밟고 가시게 하랴.
만약 진흙 가운데로 가시면 진흙이 부처님 발을 더럽히지 않으랴.
나는 이제 냄새나는 육신을 가지고
저 진흙 위에 큰 다리를 만들어 불․세존께서
내 몸을 밟고 가시게 하리라.“
하고 말하며 선혜는 녹피를 깔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을 덟고 엎드려 부처님을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
모든 인민들은 감히 밟고 지나가지 못하고
부처님이 최초로 머리털 위를 밟으셨다..
이 때 선혜가
“원컨대 이연등여래 세존 및 성문들은
발로 내 몸과 머리털 위를 밟고 이 진흙을 건너소서.
원컨대 미래세에 성불할 때는 연등여래와 같이 다름이 없고
이러한 위덕, 이러한 세력으로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되게 하소서.
내 이제 이몸과 목숨이 다하더라도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하시지 않으면
나는 마침내 이 진흙에서 일어나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연등불께서는 선혜의 옆으로 오셔서
선헤를 치하하고 그에게 올바르게 정진할 수 있는지를 다짐받으신다..
이에 대하여 선혜가 그러한 것을 다짐하자
연등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너는 이 마나바를 보라.
일곱 줄기의 꽃을 가지고 나에게 공양하고
몸을 엎드리고 머리털을 펼친 진흙 위에 다리를 만들어
나로 하여금 밟고 건네게 했나니
이런 까닭으로 이 마나바는 아승지겁을 지나서
마침내 성불하여 이름을 ‘서가모니’ 다타아가도 아라하
삼먁삼부타라고 할 것이며 십호가 구족하여 나와 다름이 없으리라”
이렇게 해서 서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되실 예언을 얻으셨고
지금 우리 시대 이곳에서 서가모니불이 되신 것이다..
결국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부터 부처님이 되실 운명이셨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 내에는 결정되어지는 업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정해진 업에 따라서만
움직인다고 하는 숙명론으로 본다면 그건 천만부당한 말이 된다..
어떤 것이 불교식의 운명에 대한 판단인가?
우선 부처님의 예를 들어보면서
어떻게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선혜동자는 연등불을 뵙고 그 분에게 꽃을 받치고
자신의 옷을 땅에 깔았으며
자신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머리를 진흙탕에 깔았고
자신의 몸을 흙탕물에 눕히어
부처님이 밟고 지나가시게 하기 전 까지는
부처가 되라라는 운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아름다운 선행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경지에 오르리라는 운명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비록 정해진 운명이 있다하나
어떠한 마음을 먹고 행을 행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어지며 바뀌어진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운명에 대한 관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선혜동자에게 다섯송이의 꽃을 팔고
두 송이를 주며 선혜동자의 부인이 되기를 바랏던 현이라는 여인은
어찌 되었을까?
훗날 부처님의 정비이신 ‘야소다라’라는 설과
후궁이 되신 ‘고오피’라는 설 두 가지가 있지만
뒷날 부처님의 아내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 역시 선혜동자를 만나 그의 거룩한 행에 감화를 받고
그와 인연이 되기를 서원하며 두 송이 꽃을
연등불에 바친 인연 때문임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또 더 놀라운 것은 연등부처님
역시 과거세에 연등불이 되시기전
보살로써 수행을 닦으실 때 보체(寶體)불이란 부처님 시대에 살고 계셨는데
한 촌부였다고 한다..
그는 어느날 보체부처님을 뵙고 출가하여 수행하던 중
보체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그 다비장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기이한 보배를 하나 얻었다 한다.
그 보배는 유리 마니 보배로써
가만히 두면 광명이 나와 환희 비추었다 한다..
그 때 그 촌사람인 비구는 보체불의 사리를 거두어 탑을 만들 때
마니보배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그 마니보배로써 탑을 비추게 하였는데
이 선근 공덕으로 그 뒤 능작광명(能作光明)불 시대에 가서
앞으로 연등불이 될 것이라 수기를 받으셨다 한다..
물론 이러한 선행을 하기전에는
아직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한 예를 들어보자..
잡보장경 제4권에는 두 냥의 돈을 보시하고
인생이 바뀐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옛날 어떤 빈궁한 거지 여인이 스스로의 신세 한탄을 하며
여러 장자들이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크게 부러워하다가
“저 사람들은 전생에 복을 닦아 오늘에 부귀한데
지금 다시 공덕을 지으면 장차 더욱 훌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생에 복을 짓지 못하여 금생에 빈곤하다..
만일 지금 복을 짓지 않으면 미래에는 더욱 빈곤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나는 전에 똥 속에서 돈 두 냥을 주어
항상 아끼면서 구걸이 뜻 같이 되지 않을 때에는
이것으로 음식과 바꾸어 스스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한 일이 있다..
지금 그것을 여러 스님들에게 보시하자..
하루 이틀쯤 음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죽지는 않을테니까..”
그리하여 스님들이 공양을 끝내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그 두냥을 보시하였는데 그 스님들의 무리중
가장 으뜸이 되는 상좌스님이 그 여인을 위해 축원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상좌스님은 그 여인을 위해
자신의 밥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으로 그 여인은 크게 기뻐하며 벌써 과보를 얻었다하고
크게 기뻐했다 한다.,
그리고서 공양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다가
나무 밑에서 쉬게 되었는데
마침 그 때는 왕의 부인이 죽은지 이레가 되는 날로
왕이 사자를 보내어 왕비를 찾고 있었고
그 사자에게 관상장이가 점을 쳐주며 말하기를
‘저 누른 구름 밑에 가면 반드시 현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곳을 가보니 그 거지 여인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를 본 관상장이가 그 여인을 보며 왕비가 될 만한 사람이라 판정하자
사자는 그녀를 데려가 향탕에 목욕시키고 의복을 주니
품위 있는 귀부인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천의 수레와 1만의 기병이 좌우를 호위하는 가운데
왕궁에 이르니 왕은 크게 기뻐하고 그녀를 공경하며 존중하였다고 한다..
똥속에서 줏은 돈 두 냥이 인생을 바꾸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팔자를 고치게’ 된 것이다...
이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실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되
부처님의 경전에 등장하는 것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이야기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사상 역시
앞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원인과 결과인 인과가
부처님들에게는 천천히 오랜 세월을 두고 왔다는 것이며
그 여인에게는 잠깐 사이에 벌어진 것 만이 다를 뿐이다..
여인의 운명을 놓고 보면 두 냥을 보시하기 전까지는
그저 하루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거지 여인이었을 뿐인데
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닦은 것이 왕비가 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운명 자체에 대한 인정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인과법을 믿는 다는 것인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연이라 보지 말고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르며
좋지 않은 일은 좋지 않은 결과를
좋은 일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인과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그 많은 말씀들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현실에서
인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과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
그 것은 우리의 삶이 이생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결과물만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인과를 믿고 난 뒤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사람이 삶의 태도가 바뀌게게 된다..
아래의 사람은 위에대한 불평불만이 상대적으로 적어져
사회적 불안요소가 없어지고
마치 거지 여인이 그것을 타개 하기 위해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엿듯이 선행을 즐기게 되니,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자리가 영원불멸의 자리가 아니란걸 알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업수이 여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키거나 더 높이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니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 없이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하는 세상..
위는 위대로 아래는 아래대로 참회하며 발전해 가는 세상..
그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운명론이며
그 궁극에는 스스로의 수준을 끌어 올려 서가모니불이 되신
저 선헤동자와 같이 보살의 지위를 넘어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
이것이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운명론은 아닐까?
-금번 주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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