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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星州)지역 유적자료집
1. 세종대왕 왕자 태실(胎室)
태실(胎室)은 왕실 사람들의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특히 나중에 오른 왕자의 태실을 태봉(胎封)이라 한다. 예로부터 태는 생명을 부여한 근원으로 여겨져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달랐다. 특히 왕실에서는 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전국에서 길지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앉혔다. 태를 호송하고 안치하는 절차와 의식도 까다롭다. 장소의 선택과 길일을 정하는 일은 관상감에서 맡아서 처리하고, 태의 호송과 태실의 조영은 선공감에서 담당하였다. 태를 호송하는 일은 당상관으로 안태사를 임명하여 호송의 책임을 맡게 하고, 배태관을 정하여 호송 도중 일어날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며, 전향관과 주시관을 따르게 하여 안태사와 배태관의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감동관을 뽑아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상토관을 파견하여 이미 선정된 자리가 길지인지를 거듭 확인시켰다.
일이 마무리되면 토지신에게 태를 안장했음을 고하고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 태신을 위로하는 태신안위제, 토지신에게 감사하는 사후토제 등의 제례를 올리며, 금표를 세워 태실 주위의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관할구역의 관원은 봄과 가을로 태실을 순행하여 살피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고의로 태실을 훼손하거나 벌목, 채석, 개간 등을 하였을 경우에는 국법에 따라 엄벌하였다.
이 곳에는 세종대왕의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 안평대군, 수양대군, 금성대군을 비롯한 여러 대군과 한남군, 화의군, 밀성군을 포함한 여러 군, 그리고 세손이던 단종의 태 등 19기의 태를 갈무리하고 있다. 1438년부터 1442년까지 차례로 세워진 것으로 전국에 산재하는 많은 태실 가운데 가장 많은 태 무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봉우리 꼭대기에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로 모두 합쳐서 19기의 태무덤이 태비를 앞세우고 길게 두 줄로 늘어서 있다. 모양은 거개가 비슷비슷해서 네모진 두툼한 기단석 위에 아래위가 잘린 공 모양의 몸돌이 놓이고, 그 위에 곱돌솥의 뚜껑이 커진 것 같은 지붕돌이 덮여있는 형태로 아주 단순한 구조이다. 무늬로는 기단석의 네 옆면에 얇고 소박하게 앙련을 둘렸고 지붕돌의 표면에도 같은 수법으로 복련을 새긴 것이 전부이다. 모양이나 무늬나 그것을 만들고 새긴 솜씨가 모두 담백하여 오히려 정감이 가고, 높이도 가슴께에 못 미칠 만큼 나직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길을 주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나란히 사시사철 솔바람소리를 들으며 한가롭게 함께 해바라기를 하고 있지만 안에 갈무리한 태의 주인공이 취한 정치적 입장과 처지에 따라 지나온 내력은 제각각이다.
단종을 밀어내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들 가운데서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과 한남군, 화의군 그리고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무덤과 태비는 넘어져 태봉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500여년을 버림받았던 태무덤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1975년 이 태실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었고 그로부터 두 해 뒤인 1977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수양대군의 태비는 경우가 이와는 반대에 가깝다. 태를 묻은 왕자가 등극하게 되면 태실을 다시 꾸미는 태봉의 법식에 따라 다른 태비와는 격식이 다르게, 작지만 귀부와 이수를 갖춘 태비가 수양대군의 태무덤 앞에 섰다. 그러나 태비는 풍화로 글자가 지워져 내용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태실 조영의 법식에 의하면 기단석 아래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항아리를 안치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태무덤은 그 위에 놓인 셈이다. 1977년 이 곳을 손볼 때 출토된 태항아리, 지석과 몇몇 유물들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태실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이 선석사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말 나옹스님이 중건하였다는 이 절은 태실이 들어선 뒤 태실을 수호하는 절이 되었고, 영조의 어필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태실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원래 이 자리에 묘를 선 사람은 성산 이씨의 시조 이장경이었다. 그의 장례를 치르는 날 한 노승이 찾아와 “저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묘를 썼으면 더없는 길지인데.”하더니, “하지만 누각을 지어서는 안되지. 이것을 어기면 당신들 소유가 아니게 될거야.”라는 덧붙이고 떠나갔다. 이 말대로 봉우리에 올라 노승이 가리킨 나무들을 도끼로 쳐 넘기니 큰 벌 한 마리가 노승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가 절 아래 이르니 벌써 떠난 노승이 그 벌에 쏘여 죽어 있었다.
이씨 문중에서는 노승의 말을 절반만 따랐다. 그 자리에 묘를 쓰되 세우지 말라던 묘각을 함께 세운 것이다. 그 뒤 이 자리는 태를 묻을 자리라는 소문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널리 퍼졌다. 왕실에서 지관을 내려보내 소문을 확인해보도록 하였다. 처음에 지관은 전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신통찮은 지형과 산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잠시 쉬려고 묘각에 오른 지관은 크게 놀라며 “과연 명당이 여기에 있었구나.”하며 무릎을 쳤다. 몰려있던 안개가 걷히며 봉우리가 확 드러난 것이다.
이윽고 태실이 들어서게 되고 이장경의 묘는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묘를 썼을 때는 그의 아들 다섯 형제가 모두 큰 벼슬을 하고 자손 가운데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오더니, 장지를 옮긴 뒤부터는 전처럼 번창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장경의 묘는 대가면에 있다.
2. 선석사(禪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92년(효소왕 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에 혜묵(惠默)·나헌(懶軒) 등이 중창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순조 4)에 서윤(瑞允)이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왕각·어필각(御筆閣)·정법료(正法寮)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곳이 어필각이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칠성각·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이 절의 어필각 주위에는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쌍곡죽(雙谷竹)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의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길 바가 아니었으며, 이를 교방적(敎坊笛)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남아 있지 않다. 성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3. 덕암서원(德巖書院)
조선 후기 학자인 유학자 이천배(李天培), 이천봉(李天封), 이주(李紬)를 숭모하여 세운 서원으로 1994년 4월1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1672년(현종 13)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76년 덕암서당으로 중건하였으며, 1928년 중수하였다.
《교남지(嶠南誌)》에 따르면 덕암사는 효종 때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덕암서당의 시초는 덕암사라 추정되며, 고종 때 서당으로 개칭한 것 같다. 상량문은 성주목사 성종인(成種仁)이 지었다.
서원에 제향된 분으로는 이천배, 이천봉 형제분과 이주이다. 특히 이주는 호가 학가재(學稼齋)로, 가장(家狀), 동규(洞規), 향약을 정비하였고, 8촌형 이윤과 함께 백인당(百忍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1) 삼익재(三益齋) 이천배(李天培,1558∼1604)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경발(景發)이고, 호는 삼익재(三益齋)이다. 부친 이침(李忱)과 모친 이수(李樹)의 딸 광주이씨(光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흥우(金興宇)의 딸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오건(吳健)과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 ‧ 서사원(徐思遠)‧여감호(呂鑑湖) 등과 서신왕래로 교유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傳心)하니 모든 선비들이 공경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져 여러 번 벼슬의 천거를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근 향리에 천곡서원(天谷書院)을 중건하고, 평생 경전을 연구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1567∼1634)
본관은 경산(京山)이며 자는 숙발(叔發), 호는 백천(白川)이다.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 정구가 죽자 그의 사당을 짓고 신도비를 세웠으며, 문집을 간행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경상도 성주(星州)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관직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마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이듬해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다. 성주군 월항면(月恒面)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문집에《백천문집》이 있다.
3) 학가재(學稼齋) 이주(李𦁖,1599∼1669)
자는 신언(愼彦), 호는 학가재(學稼齋)이다. 증조부는 이팽석(李彭錫)이며, 조부는 이순(李恂)이고, 부친은 이천증(李天增)이다. 외조는 경주이씨 이증달(李曾達)이고, 처부는 창녕성씨 성변규(成辨奎)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취학하여 겨우 성동(成童)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일컬었다. 한 가지 말을 듣고 한 가지 행실을 보면 문득 사모하고 본받아서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스승이 돌아가시자 수암(修菴) 유진(柳袗),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와 선생의 후사를 다스리매 법도에 맞음을 강구하여 복상(服喪)을 예대로 하였으며 더욱이 후진을 인도하는 데 능하여 당대의 석학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여헌문하십철인(旅軒門下十哲)이란 칭호를 얻었다.
4. 백세각(百世閣)
초전면 고산리 음달뜸마을에 자리한 백세각은 조선전기 문신이었던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가 지은 것으로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한 건물이다. 송희규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있을 당시 세도가였던 윤원형(尹元衡)과 영의정 이기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高山, 현재의 완주)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방면되어 고향에 돌아와서 백세각을 지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원래는 고산(孤山)이었는데 귀양살이 하고 고향에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高山)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규모는 정면 7칸·측면 7칸이고 평면은‘口’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손도끼(자귀)로만 다듬어 만든 건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를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장날이 서는 날에 배포할 태극기를 이 건물에서 제작· 보관하였으며,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써서 만세운동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1919년)의 모의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제작· 배포한 곳으로서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다.
그러나 1995년 대형화재로 건물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건물에는 倻溪古宅, 百世閣, 巖下, 鳳河 등의 간판이 붙어 있다. 또 뜰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다.
5. 월회당(月會堂)
월회당은 조선 중종11년(1516)에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1481~1553)이 향토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고 이를 시행하기위한 강회소(講會所)로 창건한 건물이다. 월회당이란 이름은 월일강회(月一講會)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인데,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모여 향약강회를 가져야 된다라는 훈계조로 만든 이름으로, 그 강회에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게 했다. 월회당에 들어가는 정문의 현판은 ‘禦侮門’으로 공부하고 지식을 축적하여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자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여희림이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알렸는데, 그 이듬해인 중종 12년(1517)에 전국에 여씨향약을 시행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향약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여씨향약의 발상은 중국 송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사는 여씨(呂氏)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중(呂大中)·여대방(呂大防)·여대약(呂大約)·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鄕里)를 위해 자치행동규범으로 만든 것인데, 남전현에서 시작되었다하여 ‘남전향약(藍田鄕約)’이라 불리기도 했다.
향약의 주요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정어상수(庭語相守) 등의 조약(條約)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주자(朱子)가 수정을 해‘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다.
6.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신도비
* 김우옹의 생애 : 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 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조식(曺植)과 이황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 ‧ 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82년 홍문관 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 ‧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 ‧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 ‧ 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 신도비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1725년(영조 1)에 건립되었다.비문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에 의해 1689년(숙종 15)∼1704년간에 지어졌고,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사후 그 글씨를 집자하여 사용하였다. 거북이 형상을 한 비좌와 비신, 그리고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비두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질은 비좌와 비두가 화강석이고, 비신은 오석(烏石)이다.
크기는 비좌가 폭 250㎝, 길이 780㎝, 높이 88㎝, 비신이 폭 104㎝, 두께 28㎝, 높이 216㎝이며, 비두가 폭 150㎝, 두께 47㎝, 높이 100㎝이고, 전체 높이는 404㎝이다. 비신에는 전후면에 각 27행, 측면 7행으로 비문을 새겼다. 이 신도비는 그 주인공의 역사적 비중과 더불어, 비문 찬자와 집자한 서체 등에 특색이 있다.
7.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한강이 선조 16년(1583년)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었다. 한강 사후에 문도들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인조 5년(1627년)에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한강을 주향(主享)으로 모신 서원을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지냈으며, 숙종 16년(1690년) 사액받았다.초기에는 강당· 사당을 위시하여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양현청(養賢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고종 5년(1868년) 서원훼철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祠堂)을 1976년에 동·서재 신축하고 담을 보수하는 등 서원의 위용을 회복하였다.
현재 문루는 見道樓이며 회연서원 본 건물에는 景晦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경회당의 좌우에 玉雪樓와 望雲齋라는 미수 글씨의 현판일 걸려 있다.
한강은 동방 5현의 한 사람인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학문의 연구대상을 온 우주의 공간으로 삼고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예학 등 여러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였다.
서원의 묘우(廟宇)에는 한강을 주향,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배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鄕賢祠)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서)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서원 앞뜰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 등 유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8. 사도실(思道室)
1) 청천서원(晴川書院)
청천서원은 1729년 사림이 동강 김우옹을 향사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그 뒤 1738년에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을 추향하였다. 1868년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3년 경상도 유생들이 복원을 주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천서당을 건립하였다. 현재의 서원은 1992년 유림과 후손이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건물은 사우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일중당(一中堂), 동재인 소원재(溯遠齋)와 서재인 경성재(警惺齋), 장판각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2) 청천서당(晴川書堂)
서당은 영조 5년(1729) 사림에 의해 창건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하던 청천서원(晴川書院)이 고종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金頀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한 것이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후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교육구국운동으로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하였다.
서당은 장방형 토석담을 두르고 서쪽에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로 된 서당을 배치하였으며, 그 전방에 3칸 대문채와 남쪽에 3칸 일자형(一字形)관리사가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서당 담장 밖 북쪽에는 김우옹의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이 방형(方形) 토석담 안에 자리하고 있다.
3)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독립운동과 교육진흥에 일생을 바친 심산(心山) (金昌淑,1879~1962)이 출생(1879년 7월 10일)한 생가인데, 선조로부터 세거(世居)해 온 전래의 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현 안채 건물은 고종 38년(1901)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생가는 청천서당(晴川書堂)에서 우측으로 약 100m거리에 위치하며, 장방형 토석담을 두른 내에 안채와 1991년에 건립한 사랑채, 판각고(板刻庫)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김창숙의 호는 심산· 벽옹,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조선 선조조의 명신이며 학자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후손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기 이전부터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고, 강점된 후에는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가진 옥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유도회를 조직,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총장을 역임하였다.김창숙은 전생을 독립운동과 민족문화 창달·국민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민족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9. 성주향교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5호로 변경되었다. 경북향교재단 소유이며 성주향교에서 관리한다. 성주읍 예산리 교촌마을에 있는 성주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다.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강당인 명륜당을 앞뒤로 배치하는 일반적인 향교와 달리 성주향교는 대성전을 오른쪽, 명륜당을 왼쪽에 배치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기와를 얹은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향교에서는 보기 드문 내외 2출목(二出目)의 다포 양식으로 가구를 짰다. 안에는 공자와 조선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여기에서 봄가을에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석전제(釋奠祭)를 지낸다.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당 양쪽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5칸 중 3칸은 대청이고 양쪽 옆에는 앞쪽에 툇마루를 둔 온돌방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온돌방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소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서쪽에 부속시설인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향교건축으로는 보기 드문 다포 형식으로 지었으면서도 천장을 설치하지 않고 노출하였으며, 유교건축에 걸맞게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창호의 구성에서 고식들이 남아 있고 평면구성이나 가구 수법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10. 한개 마을
한개 마을은 성산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달리 말해 ‘큰 나루’가 된다. 예전 마을 앞에 있던 나루이름이 바로 한개였고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백천(白川)를 바라보며 해발 322m의 영취산에 포근히 잠겨있는 한개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산 이씨의 조상은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李友)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나이는 500년이 넘는 셈이다.
풍수지리설로 보아 영남 최고 길지로 꼽히며,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장헌세자)의 호위무관을 지낸 이석문(李碩文), 조선 말의 유학자 이진상(李震相) 등 명현을 많이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100여 채의 전통 고가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각 가옥들이 서로의 영역을 지켜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조물과 민속자료 등이 많이 있는데.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고,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북비고택,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한주종택, 20세기 초 목조 건축인 월곡댁,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등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 이석문(李碩文)과 북비고택(北扉故宅)
1774년(영조 50) 훈련원 주부(主簿:종6품)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 1713∼1773)이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추모하여 은둔한 곳으로 이석문은 1729년(영조 5) 무과에 올라 선전관 재임 시절, 영조가 장헌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 거역해 삭탈관직 당하자 낙향하여 이 집을 세웠다. 처음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었기 때문에 북비옹(北扉翁)이라 자명하고 북비고택이라 하였다.
1821년(순조 21) 사헌부 장령(掌令)이던 손자 이규진(李奎鎭)이 안채와 사랑채를 신축하였고, 1866년(고종 3) 증손자 이원조(李源祚)가 사랑채를 중건하였다. 안채· 사랑채· 아랫채· 북비· 대문채· 사당으로 구성되며, 장판각, 안 대문채, 마방(馬房) 등은 없어졌다.
북향집이며 사랑채와 안채는 입구(口)자형 건물 배치이다. 비교적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상류층 양반의 한옥으로 한옥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이석문(李碩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겸(敏謙)이고, 아버지는 형진(亨鎭)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난경(鸞慶)의 딸이다. 정언 규진(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문집에《응와문집(凝窩文集)》이 있다.
제주목사 재임 중 1841년 3월 노인(路引: 관아에서 병졸이나 보통 장사하는 사람 또는 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 발급과 관련하여 공적인 일로 출륙(出陸)하는 자는 각 청 상급자가 확인하고, 행상인과 사적인 일로 출륙하는 자는 소지(所志) 말단에 날인을 받도록 하였다.
7월에 큰 태풍이 불어 기근자가 많이 생겨 호남 지방의 창미(倉米) 2천 5백석을 요청하여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1,170석을 방출하여 환모곡(還耗穀)에 충당하였다. 1842년(헌종 6) 우도와 가파도에 방목했던 우마(牛馬)를 부근 목장으로 옮기고, 그 땅을 개간한 경작자에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1842년 대정현성 동문 밖에 동계정온적려유허비(桐溪鄭溫謫廬遺墟碑)를 세웠고, 1843년에는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고 정온(鄭蘊)(1569∼1641)을 봉향하게 하였다. 송죽사 현판은 당시 대정현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썼다. 1843년 영혜사 동쪽 귤림서원(橘林書院) 곁에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고 고득종(高得宗)(1388∼1460)의 위패를 모셨으며. 목민관으로서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시험을 실시하거나 또는 망경루(望京樓)에서 유생 69명에게 시취(試取)를 실시하여 각 학당(學堂)에 머무르도록 하고, 제주목· 대정현·정의현 백성에게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편술한『탐라지(耽羅誌)』,『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탐라관보록(耽羅關報錄)』,『탐라계록(耽羅棨錄)』 등이 있다. 이원진이 지은 『탐라지(耽羅誌)』를‘구탐라지’라 통칭하고, 이원조가 지은 것을‘신탐라지’라 한다.
3) 교리댁(校理宅)
1983년 6월 20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대지 600여 평에 안채·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사당· 서재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760년경 이석구(李碩九)가 지었으며, 사당· 사랑채· 서재는 1870년(고종 7)에 후손들이 중수하였다. 一자형 정침(正寢)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적으로 건립되었고, 전체적으로 ㅁ자집 형태이다. 이런 독립적인 가옥 형태는 경상북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구조이다. 돌담이 둘러진 대문채가 평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므로 중후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사랑채 앞에는 노둣돌(말을 타거나 내릴 때 발돋움하려고 놓은 돌 : 下馬石)이 있고, 안채는 중문채를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떨어져 있다. 사랑채 왼쪽에 서재가 있으며, 서재 뒤에 사당이 있다. 이석구는 조선 영조 때 영해부사(寧海府使)를 거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고, 교리댁이라는 택호는 그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 등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4) 한주고택(寒洲古宅)과 이진상(李震相,1818∼1886)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는 조카 한주 이진상은 한개가 낳은 가장 큰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주리론자로 퇴계 이황의 학통에 연원을 두면서도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였다고 하여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의 문집이 분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당호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 : 雲谷 즉 朱子를 조술하고 陶山 즉 퇴계를 법으로 삼는다)’에서 볼 수 있듯이 주자와 퇴계를 숭앙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로 독립운동가이다.
한주고택은 경북민속자료 제45호이며 안채· 아래채· 고방채· 중문채· 사랑채· 대문채· 사당· 한주정사, 행랑채· 정자대문채 등으로 구성되었다. 북비공 이석문의 차자인 1767년(영조 4) 이민검(李敏儉)이 창건하였고, 그의 증손이 되는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 1866년 중건하였다. 이진상의 호가 한주이므로 한주고택이라고 하며, 부인의 친정 마을 이름을 빌어 동광댁이라고도 부른다.
안채를 중심으로 남향의 정침(正寢), 동향의 고방채 3칸, 서향의 아랫채 3칸, 남향의 대문채 7칸이 튼 입 구(口)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으며 모두 일 자(一)형이다. 이러한 구조는 대산동 교리택(경북민속자료 43), 대산동 북비고택(경북민속자료 44), 대산동 월곡택(경북민속자료 46)처럼 모든 활동을 안마당을 중심으로 하도록 배치한 것이며 이 지방 전래의 건물 배치이다.
정자로 들어가는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약 50년 전에 초가이던 것을 허물고 다시 세운 것이다. 집에 정자(亭子)인 한주정사가 있는 것이 특이하며 그 건축기법도 색다르다.
송희준(觀善書堂 당장)
성주 군청 문화관광과 : 054-930-6773
해설사 곽명창 010-9857-8422
보물섬 식당 054-933-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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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가거라"
'신데렐라'중에 "슬픔이여 가거라" 변주곡
파가니니- 로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