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신화] (12) 사랑의 여신들
雲雨로 변하는 神女는 懷王의 가슴에 불질러
농업과 의약의 혜택을 인류에게 베풀었던 신농(神農), 너무 인자한
탓에 야심가 후배인 황제(黃帝)에게
주신(主神)의 자리를 빼앗겨야만 했던 이 비운의 신에게는 딸들이 많았다.
그 중 셋째 딸을 요희(瑤姬)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하면
‘구슬 아가씨’라고나 할까. 보석처럼 예쁜 소녀였던 모양인데 불행히 시집도 가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산기슭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혔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한 죽음이란 없다. 그녀는 요초(瑤草)라는 풀로 거듭 났다. 이 풀은 잎이 겹으로 났고 꽃은 노란데 열매는 토사라는 약초의 씨앗과 비슷하였다.
신기한 것은 이 열매를 먹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사랑의 묘약(妙藥)이었던 셈인데 아마 사랑도 해보기 전에
죽은 요희의 간절한 소망이 그 풀에 깃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묻혔던 무산(巫山)이라는 곳은 양자강(揚子江) 중류에 위치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산이었다.
후일 그녀는 이 산에서 다시 한번 변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국(戰國)시대 어느 날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이라는 임금이 무산에 놀러왔다. 회왕은 무산의 수려한 경치를 구경하다가 고당관(高唐觀)이라는 누대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데 회왕이 피곤해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홀연히 한 예쁜 여인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녀는 자신이 신농의 딸로서 이곳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밝히고 요염한 자태로 회왕을 유혹하였다.
무산신녀의 모습에 반한 회왕은 그 자리에서 그녀와 사랑을 맺었다.
사랑의 행위가 끝나고 그녀가 수줍은 듯 떠나려 할 때 회왕은 아쉬워서 언제 또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되어 걸려 있다가 저녁이면 산기슭에
비가 되어 내리는데 그게 바로 저랍니다.” 문득 그녀가 사라지자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회왕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잃은 듯 멍한 상태로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과연 산기슭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회왕은 더욱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으나 더 이상 만날
기약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회왕은 그녀와의 짧은 추억을 기념하여 무산의 남쪽에 조운관(朝雲觀)이라는 누대를 지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회왕이 죽고 아들 양왕(襄王)이 어느 날 무산에 놀러왔다. 선왕의 놀던 자취가 아직도 뚜렷한 고당관과 조운관을 양왕이 돌아보고 있을 때 궁정 시인 송옥(宋玉)이 과거에 선왕이 겪었던
무산신녀와의 로맨스를 자세히 아뢰었다.
양왕은 선왕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에 감탄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그
일을 두고 읊을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송옥의 ‘고당부(高唐賦)’와 ‘신녀부(神女賦)’이다.
신농의 요절한 딸 요희, 그녀는 요초라는 사랑의 묘약으로 거듭났으나 남의 사랑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결국은 스스로 사랑의 화신이 되어 무산신녀로 다시 태어났다.
아침에는 구름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비가 되는 무산신녀와의 사랑,
이로부터 사랑의 행위를 두고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맺는다’라는
멋진 표현이 생겨났다.
송옥 이후 시인들은 이 신비롭지만 찰나적인, 그렇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랑에 대해 너도 나도 찬미의 노래를 바쳤다.
저명한 시인 소동파(蘇東坡)도 그들 중의 하나였는데 심지어 그는 어린 애첩을 ‘조운(朝雲)’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이한 로맨스가 지니는 종교적 함의(含意)를 간과할 수는 없다. 무산은 문자 그대로 무당의 산으로 샤머니즘과 관련이
깊은 산이다.
우리는 무산신녀와 초회왕과의 로맨스가 고대의 신전에서 여사제(女司祭)와 순례자 사이에 종교적 차원에서 행해지던 성적 결합을 문학화한 표현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여사제는 신을 대리하였고 그녀와 관계 맺음은 곧 신과의 깊은 교감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의 사랑이야기는 평범한 인간이
신과의 합일을 통해 종교적으로 승화된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인신연애(人神戀愛) 유형의 이러한 이야기들은 중국의 경우
대개 여신과 인간 남성 사이에서 빚어지는데 서왕모(西王母)를 만났던 주목왕(周穆王)이나 무산신녀를 만났던 초회왕처럼 인간 남성은
고귀한 신분인 경우가 많다.
후세에 이르러 여신과 평범한 인간 남성과의 연애 이야기가 증가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견우(牽牛), 직녀(織女) 신화이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성립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에서 이미 베짜는 직녀와 수레 끄는 견우, 그리고 은하수를 노래하고 있어 이 신화의 연원도 그리 얕지는 않다. 견우 직녀 신화가 문헌상 비교적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한(漢) 나라 무렵에 와서이다. 이 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은하수 동쪽 편에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바로 천제(天帝)의 딸인 직녀였다. 직녀는 솜씨가 뛰어나서 훌륭한 옷감을 잘
짰으나 너무 일에만 열중하여 얼굴을 가꾸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천제는 직녀가 외롭게 지내는 것을 안쓰럽게 여겨 그녀를 은하수 서쪽의 견우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냈다.
그랬더니 부부간의 금슬이 너무 좋았던지 베짜는 일도 하지 않고 친정에도 한번 오질 않았다. 천제는 노하여 딸을 꾸짖고는 은하수 동쪽
편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부부가 일년 중 칠월 칠석날 한번만 만나도록 하였다.
이때 은하수를 건너기 위해 직녀는 까치를 시켜 다리를 놓게 했다. 칠석 무렵 까치 머리가 밋밋한 것은 다리 노릇을 하느라 털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칠석날 자정이 지난 후 흔히 비가 내렸는데 이것은 견우, 직녀가
이별을 슬퍼하여 흘린 눈물이라고 한다.
이 신화에서는 견우 직녀가 비록 신분상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천상에 사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민간에서 견우 직녀 신화는 보다 극적인 구성을 갖춘 이야기로 재탄생되어 널리 유행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그것이다. 근대 무렵 중국에서 수집된 선녀와 나무꾼형 견우 직녀 신화는 다음과 같다.
우랑(牛郞)이라는 청년이 계모 밑에서 소를 치며 고생스럽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홉 명의 선녀가 세상에 내려와 호수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는데 소가 그것을 알고 우랑에게 기슭에 벗어둔 옷 한 벌을 훔쳐
갖고 오게 하였다.
그래서 선녀 한 명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직녀였다. 그들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천제가 이 사실을 알고 직녀를 하늘로 불러 올렸다.
우랑이 아이들을 데리고 뒤쫓아 올라 갔을 때 서왕모가 비녀를 공중에 한번 긋자 은하수가 생겨나서 우랑과 직녀는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서왕모는 그들에게 이후로 일년에 한 차례, 칠일 동안만 만나라고 못박았다. 그런데 그들은 매년 칠월 칠일에 한번 만나는 것으로 잘못 들어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녀와 나무꾼형 견우 직녀 신화는 중국에 여러 이본(異本)이
있고 한국과 일본에도 기본 줄거리는 같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내용이 달라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만큼 이 신화는 동아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덕흥리(德興里) 고구려 고분 벽화에 이미 견우 직녀가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신화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고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견우 직녀 신화는 인류가 농경사회에 진입하면서 남자가 밭을 갈고
여자가 길쌈을 하던 직능 분화 현실을 반영하는 자연신화인 셈이기도
하다.
이들은 실제로 농사나 길쌈의 형편을 점치던 별자리였기 때문이다.
가령 직녀성은 10월달 새벽녘 동쪽 하늘에 나타날 때 그 빛이 붉고 밝으면 그 해의 길쌈 결과가 좋고 어두우면 나쁠 것으로 점쳐졌다.
견우성의 경우는 여섯 개의 별 중 가운데의 한 별이 소와 관련되었는데 이 별이 흔들리면 소에 문제가 생기고 어두우면 곡식이 익지 않을
것으로 점쳐졌다.
무산신녀와 직녀, 이들은 인간과의 사랑을 추구한 여신들이다. 그러나 중국신화에서 이러한 로맨스는 많지 않다. 중국신화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흔치 않은 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만 유독 사랑 이야기가 많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후세에 문학적으로 보다 각색되고 인간적인 관점이 깊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 漢나라 '동영이야기'
한 나라 때 유향(劉向)이 쓴 ‘효자전(孝子傳)’에 실린 동영(董永)이야기 역시 견우 직녀 신화의 변형이다. 동영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를 따라 농사짓고 살았는데 그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나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동영은 부잣집에 몸을 팔아 그 돈으로 우선 삼년상을 치르고
약속대로 종살이를 하러 갔다. 길을 가는 도중에 그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동영의 아내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둘은 부부가 되어 부잣집엘 갔다.
부자는 몸값 대신 옷감 백 필을 짜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동영의 처가 열흘만에 그 일을 다 끝내고 자신이 천상의 직녀임을 밝혔다.
동영의 효성이 지극하여 천제가 그녀로 하여금 그를 도와 빚을 갚게
해준 것이라고 말한 직녀는 공중으로 올라가 사라졌다.
이 이야기에서 견우 직녀 신화는 한 나라 때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유교의 효 사상에 의해 적지 않게 변형되었다.
견우가 졸지에 효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한 나라에서
가장 필요로 했던 모범적인 인물형이었다.
입력시간 2002/07/2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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