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사적 제 125호)는 역대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을 자칭하는 말로 고려시대에는 태묘(太廟)라고도 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在位 : 1392∼1398)는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먼저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그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국토를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세우도록 하였다. 종묘는 왕가의 조상을 모신 곳이고, 사직단은 국토의 신을 모신 곳이어서 이 둘은 나라의 역사와 뿌리를 상징하는 곳이 된다. 그래서 종묘·사직하면 나라의 기틀을 의미하는 말로도 통한다. 종묘는 조선조 태조 3년
12월에 건축이 시작되어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고 세종대왕 때에는 종묘의 부속 건물을
지어 영녕전이라 하였다.
현재는 종묘라 하면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쓰이지만 본래의 종묘는 지금의
정전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종묘에서는 지금도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제례가 펼쳐지는데 종묘는 극도로 절제된 건축양식에 엄숙한 제례의식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화려함 속에 제례의식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지만 제례의식을 치르는 마음과 이 종묘의 단순한 건축양식이 잘
어울린다고 본다. 종묘는 다른 건축보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보이려고 했다.
나라의 문화적 가치를 외국에 알리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종묘는 다른 고궁과 같이 같은
성격을 가지지는 않았다. 보기에도 뭔가 없어
보이고 다른 고궁에 비하여 구경할 것이 없어
보이는데 세계문화유산에 가장 빠른 해에 등극되었다는 것은 종묘가 가지는 건축양식보다는 종묘에서 거행하는 종묘대제가 지금까지 잘 이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묘는 전통유교가 가득 담겨진
하나의 영원이 담긴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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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중-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 리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 일곽을 바라보면 누구나 고요하고
괴괴하나 존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간결한 형태이면서도 어딘가 힘이 있고, 한눈에
모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게 들어선 건축이면서도 거기에 감도는 정밀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600년 전에
세워진 건축이지만 지금도 매년 5월 한 차례씩 제례가 행해지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문화 유산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종묘는
1995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해 보존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종묘의 '종(宗)'은 마루,근본,으뜸을 뜻하고,
'묘(廟)'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뜻한다. 종묘는
태묘 혹은 대묘라고도 한다. "대묘에서는 모든 것을 삼감이 예의 중심이라는 논어의 문구처럼, 종묘는 의례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의 제례를 위한 으뜸되는 공간이다. 조상 받들기를
효성으로 여기고 돌아간 분 섬기기를 생존한
분 대하듯 하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예를 중시하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기반이자 국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종묘가 도성에 들어설 위치는 『주례(周禮)』「장인(匠人)」조에 제시되어 있다.
임금이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하였을 때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고 하였는데, 이로써 종묘는 도성 안에 자리잡고, 그리고 그 위치는 궁궐의 왼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사직은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중시한 토지의 신(神) '국사(國社)'와 곡식의 신 '국적(國稷)'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년을 빌며 제사 지내던 곳이다.유교사회에서 종묘와 사직, 즉 종사는
국가의 기틀을 뜻하였으며, 국가의 흥망은 곧
종묘·사직의 존망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의 존재는 정치이념상 국가 기틀의 완성과 왕조의 뿌리를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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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후부터 종묘
건설과 전도에 큰 관심을 갖는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이고, 도읍지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8월
13일에는 한양 천도를 계획하고 이념을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그 수리가 끝나는 대로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계획을 유보하였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태조는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그 땅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했다. 그 후 태조는 전도
후보지로 계룡산, 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1394) 8월 13일 최종적으로 한양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고, 그 해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 이후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신도읍지 한양에 종묘를 먼저, 그리고 궁실을
다음에 지은 후,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는 순서로 도성을 건설했다. 한양 도성건설은 조선
왕조 건국 후 시행한 국가 차원의 첫 대역사였다. 종묘는 천도하던 해 12월 4일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태조 4년 9월에 준공됐다.
어수선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면서 정종은 새
도읍지인 한양을 피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반 년 만에 옛 도읍지인
개성으로 환도한다. 그러나 개성은 형식상 일시적으로 피방(避方)한 곳일 뿐, 확정된 도읍지는 아니었다. 도읍지의 근간인 종묘와 사직은 아직 한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이 친히 한양에 가서 제향을 올리기 힘들어지자 정종은 개성에 새로 종묘를 지을 구상을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게 된다. 그러는 동안 개성에서 다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은 1400년 11월 왕위를 태종에게 양위한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적극적인 자세로 종묘와
사직이 있는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의지를 실현시킨다. 그리고 도성을 정비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종묘 주변의 지세를 풍수지리적으로 보완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종묘를 야트막한 구릉으로 둘러쌈으로써 그 안에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남쪽의 허(虛)한 부분에
인공으로 가산을 조성하여 보(補)하도록 한
것이다. 가산은 태조 7년(1398)에 일차적으로
조성되었지만, 태종 9년(1409) 종묘 남쪽에
다시 조성되었다.
다름으로 태종은 종묘의 건물 형식을 새롭게
정비한다. 현재의 종묘 건물은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는 몸체 건물과 그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현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태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됐다. 종묘에 비나 눈을 가릴 곳이 없으면 용의를 잃게
되어 신명과 사람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태종이 배위(拜位)하는 공간으로 동·서월랑을 마련케 한 것이다. 그리하여 창건
당시에 없던 지금과 같은 건축 형식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종묘제도와 다르게 새롭게
정비한 '조선의 법'이된 종묘건축 형식이다.
또한 태종은 종묘 담 밖 서남쪽 모퉁이에 있던 공신당을 종묘 담 안의 묘정 동쪽 뜰 아래로 옮기게 하고,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 등 부속건물을 지어 제례 기능을 정비하는 한편, 향관이 재계하는 처소를 재전(齋殿)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여 건축물
상호간의 위계를 확립케 했다.
마지막으로, 태종은 종묘에 담을 두르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종묘의 격식을 갖추게 했다. 태종 12년(1412) 11월 5일 종묘와 궐문을
지니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고, 다음해 정월 21일 종묘 및 궐문 입구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쓴 푯말을 세우게 했다.
영년전 건립과 함께 조선 왕조의 종묘건축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는 제도로 정착하게 되고, 그 후 종묘신위봉안제도는 종묘에는 오묘제에 의한 다석 신위 외에 불천지위가 되어
세실로 결정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영녕전에는 여기에서 제외된 신위를 종묘에서 옮겨 모시는 제도로 점차 정착되어 갔다.
그후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종묘와 별묘를 중축하게 되고, 또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이는 옛 제도를 기반으로 자기 것을 확립해 나간 조선 왕조의 종묘건축제도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해 종묘라
부르지만, 원래의 종묘는 지금의 정전만을 가리켰으며, 정전이라는 명칭은 영녕전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붙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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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건물들은 제례용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하여 배치의
축을 통일시킨 구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지세에 순응하며 어울리게 건물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각 영역을 이루는 건물별로 개별적인 축을 따라 구성되었다. 담으로 둘러싸인 종묘 일곽의 남쪽 끝에 자리한 외대문인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이르는 주도로가 북쪽을 향하여 길게 나 있고, 오른쪽으로 난 첫 번째 갈림길인 향로는 망묘루,향대청,공민왕신당이
있는 영역에 닿는다.
망묘루는 제향 때 왕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면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종묘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며, 공민왕신당은
고려 제 31대 왕인 공민왕을 위해 종묘 창건시
건립했다고 전한다.
외대문에서 시작되어 북으로 곧게 뻗어 있는
주 도로는 널찍하고 거친 돌이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깔려 있다.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제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중앙의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세자재실,서쪽에
어목욕청이 있었다.
어숙실 서북쪽에 위치한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이, 그리고 서쪽에는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가
펼쳐진다.
상월대 북쪽의 기단 위에 서 있는 정전 건물은
신위를 모신 감실 열 아홉 칸, 그 좌·우에 이어진 협실 각 두 칸, 그리고 협실 양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돼 있다. 월대의 남쪽 아래 동쪽과
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는 수복방이, 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
밖으로는 악공청이 있고, 서쪽 위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