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선 역사의 복원은 민족자주의 핵이다.
고조선은 한머리땅(한반도를 고쳐 부르는 이름), 즉 제주도에서 평양, 요동반도를 시작으로, 산동반도와 내몽고 적봉의 홍산문화권(요하문명)까지를 포함하는 광대한 국가였다.
BC 7000년경의 신석기 말기 시대와 옥기(옥웅룡,옥저룡 등) 문화 시대부터 BC 3000 년경에 시작되는 청동기(비파형 청동검, 청동화폐, 청동거울 등) 시대까지 아우르는 오래 기간의 문명국가로, 인류 문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 사진들은 이를 증명하는 역사 유적, 유물들이다.
<민족중건총본부, 고조선유적답사회 제공 자료>
* 위 글은 큰 글자로 사진들 위에 크게 소개하는 글임.
* ( 14번 판넬 설명 글 )
비파형동검 (琵琶形銅劍)
청동기시대 무기의 하나로 검신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하며 중국 북동부의 요녕성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어 요
녕식동검(銅劍)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부여 송국리(松菊里) 유적에서 완전한 유물이 수습된 것을 비롯
하여 지금까지 함경도지역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에서 약 30여 자루가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형태는 검신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나와 비파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는 돌기부가 있고, 돌기부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으며 슴베(莖部; 경부)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 중앙부에서 등대(背脊; 배척)를 이루며 인부(刃
部)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부분에는 약간 도드라진 마디가 있어 다른 동검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이루고 있
다. 칼자루부분(劍把部; 검파부)은 ㅗ자형태로 내부가 비어 있어 검신과 결합하도록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
주로 돌널무덤·고인돌 등에서 출토되며, 돌널무덤은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등지에 산재하여 있는 점으로 보
아 당시 중국 북동지방과 동일한 문화권이 형성된 가운데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짐작되며, 한국에서는 세
형동검(細形銅劍) 전단계의 문화유물로 판단된다.
청동화폐-명도전(明刀錢)
명도전은 고조선시대인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사용되던 화폐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
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이들 화폐 가운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 관련 족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다."(길림대학 역사학과 교수 고 장보촨 교수의 흑룡강성 발행, 고고학계 학
술지 <북방문물> 2004년 제4기 논문집 ‘명도폐연구속설’). 곧 칼 모양의 청동화폐인 원절식도폐(明刀錢)은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명도전이라는 이름은 일본인이 붙인 이름이며, 연나라화폐라고 규정한 것은 중국
학자라고 한다. 이는 중국측이 연나라의 지역이었다고 보는 요서지역에서도 많은 명도전이 발굴된다는 이유
에서 였다. 당시 연과 고조선은 서로 침공하고 침공당하는 적대적인 국가였으므로 고조선이 화폐를 발행하
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 ( 9번, 10번 판넬 설명 글 )
9번- 평양 강동군 문흥리 고인돌
10번- 황해남도 안악군 고인돌
고인돌 (支石墓, dolmen)
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거석문화에 속한다. 유럽의 고인돌은 BC
4000∼3000년대에 이미 유럽 전역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는 전국에 걸쳐서 분포해 있는데, 형식
에 따라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나뉜다. 북방식 고인돌은 4개의 판석(板石)을 세워서 직사각형의 돌방(石
室; 석실)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돌을 뚜껑돌(蓋石; 개석)로 올려 놓은 것으로, 유해가 매장되
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뚜껑돌 크기는 대개의 경우 2∼4m 정도가 보통인데, 황해
도 은율의 경우처럼 8.7m 이상에 전체 높이가 2m 이상인 경우도 있다.
고인돌에서 돌검과 화살촉이 주로 출토되는데, 충북 제천시 황석리(黃石里) 고인돌에서 발견된 돌검은 세형
동검보다 연대가 앞선 것으로 알려져 고인돌은 금석병용기의 묘제가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묘제로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 외에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만 축조가 가능했으리라고 볼 때, 고인돌은 고대국가 발생 이
전의 계급사회인,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족장사회의 공동묘지이며 세습신분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
여진다. 고인돌은 바위틈이나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려 큰 바위에서 떼어낸 돌이나 자
연암석 그대로를 사용하여 지렛대와 밧줄·수로를 이용, 운반하고 뚜껑돌을 들어올릴 때는 받침돌을 세우고
그것과 같은 높이의 봉토를 쌓아 경사면을 만들어 끌어올린 후 봉토를 제거하는 방법을 써서 만들었을 것으
로 짐작된다.
* ( 15번 판넬 설명 글 )
여수 고인돌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신대(N34°53′02.8″/ E127°33′20.0″)에 남북방향, 사각형, 길이
862cm×580cm×10cm의 중국 개주고인돌보다 더 큰 한국(南韓)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본 재단에서 확인된
고인돌 덮개돌의 길이 순위는 다음과 같다.
*세계1위-북한 은율 관산리고인돌-8m75cm.
*세계2위-여수 율
촌면 산수리 왕바위재고인돌-8m62cm(본 재단 재계측/8m65cm).
*세계3위-중국 요녕성 개주고인돌-
8m60cm.
* ( 5번 판넬 설명글- 5번사진은 새로 보낸 것으로 교체바랍니다. )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 BC 3500년경, 즉 5500년전 유적.
고구려의 광개토제릉을 연상 시킴. >
묘제의 하나. 목곽적석총(木槨積石塚)·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 등이라고도 한다.
지상 또는 지하에 피장자(被葬者)와 껴묻거리(副葬品; 부장품)를 안치한 목곽을 구덩식(竪穴式; 수혈식)으로
설치한 다음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로 덧널(槨; 곽)을 덮어 돌무지시설을 하고 다시 그 바깥에 점토 등
의 흙을 입혀 다지는 방법을 사용한 묘제이다.
적석봉토분은 그 구조로 보아 전통적 널무덤(土壙墓; 토광묘)과 덧널무덤(木槨土壙墓; 목곽토광묘)이 고구려
식 돌무지무덤(積石塚; 적석총)의 영향을 받아 적석목곽분으로 변모하고 다시 한강유역의 원형봉토분이 남
하하여 지금의 고총고분이 경주지역에 등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석곽묘(石槨墓)
중국 북동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돌로 덧널을 만든 무덤. 석곽묘(石槨墓)라고도 한다. 돌널무덤(石棺墓; 석
관묘)과 돌방무덤(石室墓; 석실묘)과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고 혼용되기도 한다. 덧널(槨; 곽)이란 나무널(木
棺; 목관) 등 유체를 넣는 널과 껴묻거리(副葬品; 부장품)를 넣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직접 유체를 안
치하면 규모가 커도 돌널무덤이라고 해야 한다.
돌덧널무덤은 지면을 깊게 파고 석재로는 판석이 아닌 자연괴석이나 자갈돌을 사용하며, 묘실은 목관을 전
제로 한 구조와 같은 정도로 깊게 만든다. 그 좋은 예로 중국 북동 지방 남산근(南山根)· 호두구(胡頭溝) 돌덧
널무덤에서 볼 수 있고 한국에서도 발견된다. 돌덧널무덤의 전형은 중국 요녕성에서 발견된 서주∼춘추시대
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길이 약 4m인 직사각형의 구덩이(竪穴; 수혈)를 파고 주위의 벽은 자갈을 쌓아
올렸으며 이 덧널 안에 나무널과 껴묻거리인 청동기 등을 넣었다. 한국의 돌덧널무덤은 대전광역시 괴정동,
충청남도 아산시 남성리, 부여군 연화리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대부분의 고인돌 무덤방은 석곽묘이다.
* ( 제 12번 판넬 설명 글 )
<고조선 초기의 무덤; 강상(崗上墓)무덤, 누상(樓上墓)무덤>
BC 8∼BC 7세기 고조선 초기의 무덤으로 두 무덤이 같은 유적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요동반도 남쪽 끝에
위치하며 지금의 요녕성 여대시(旅大市) 감정자구 후목성역 강상언덕에 있다. 1964년에 발굴된 강상무덤은
남북길이 20m, 동서길이 28m의 넓은 묘역(墓域)을 차지하는데 구덩이를 파지 않고 땅 위에 널방(墓室; 묘
실)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모두 23개의 널방이 있는데 각 널방에는 수십명분의 뼈가 발굴되어 당시 무덤주
인의 하인들이 함께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6자루의 비파형단검을 비롯해 창끝· 활촉· 비녀· 질그릇
등 총20여종 874점의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당시의 청동기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상무덤 묘역 한가운데는 잘 다듬은 판석을 깐 2개의 돌덧널무덤이 있고, 둘레에는 보통의 돌덧널무덤이 8
개 있다. 가운데 2개의 돌덧널무덤에는 비파형 단검·방패·도끼·끌, 수레의 부속품들 등 90여 점의 청동기와
여러 가지 청동장식품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 50여 명 분의 사람뼈가 발굴되었다. 따라서 이
무덤은 중앙 2개의 무덤이 주인공이고 주변의 무덤들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BC
7∼BC 5세기경 고조선의 지방귀족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무덤과 강상무덤은 고조선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
다는 주장의 한 근거가 된다.
* ( 제 16번 판넬 설명글 ) - 문명 발자취 라는 글은 삭제
< 산동반도의 팽이형 토기-아사달 문양 >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아침 단(旦)을 나타내는 그림 아래 산(당시에는 '달'이라고 불렸음)이 그려져 있다.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팽이형토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북방 유라시아의 신석기시대를 특징짓는 토기. 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도 한다.
바닥면이 포탄모양으로 뾰족한 뾰족바닥형(尖底形; 첨저형)과 편평한 화분모양의 납작바닥형(平底形; 평저
형)의 두 종류가 있으며, 무늬새기개(施文具; 시문구)로 새긴 각종 무늬가 있다. 한국의 빗살무늬토기도 신석
기시대의 토기이며, 둥근바닥· 납작바닥의 2가지가 기본형인데 각종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유적은 해안
이나 강변 가까이에 분포하며, 조개더미를 형성하는 일이 많다. 수렵· 어로를 주로 했으나, 후반에는 철자형
(凸字形) 돌도끼· 돌낫· 돌괭이 및 멧돼지 엄니로 만든 낫 등이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잡곡재배도 한 것
같다. BC 7∼8세기 무렵에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무문토기)로 바뀌었다.
* ( 2번 판넬 설명 글 )
옥기; 결상이식 옥귀고리 등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이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1313번지 일대 890평을 발굴조사한 결과 5천년
전 신석기시대 무덤에서 구덩이 하나에 시신 2구를 하늘을 바라보게 나란히 안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패총에서 인골이 손에 찬 조개팔찌를 비롯해 결상이식(耳飾) 귀고리 등의 장식유물도 거두었는데 항공대
우실하교수는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지도(2007. 8)에서 안도패총에 대해 ‘흥륭와문화유적과 관련된 옥
귀고리(기원전 4,000년-기원전 3,000년)’라 표기하였다.
결상이식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사적 426호)에서 ‘국내 최초의 신석기시대 옥 귀고리’가 발견
되어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암리 유적은 그동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유적(기원전 6000~기원전 3000년)과 비슷하거나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므로 홍산
문화와 시기가 엇물리고 있었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형태의 결상의
식이 한반도 서남부 여수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석인상: 전형적인 한국인상
옥저룡: 홍산문화의 대표적 옥기
* 1번 전시장의 지도 설명...
(1번 전시장에는 대형지도 2개가걸리는데...이 글을 붙입니다.)
고조선의 변방 제후국가, 위만조선의 도읍지, 험독(險瀆)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正史)는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로 1142-1145년 작품이다. 그러나 중국의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히는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는 기원전 100년을 전후하여 편찬된 역사서로 무려 1천200년 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고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기록으로 이 자료를 편집하고 각주를 붙이고 이를 다시 우리식의 역사서로 재편집한 <삼국사기>의 기록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다.
▶〈한서>(漢書)지리지에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며, 물이 험한 곳에 위치해 험독(險瀆)이라 한다.’ 이어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를 바로 험독이라 한다.’ ‘패수는 지금의 하북성에 있는 ‘조백신하’(潮白新河)를 가르킨다.’
▶〈사기>(史記) ‘요동 험독현(險瀆縣)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 있다. 여기서의 요동은 당시 요수인 난하의 동쪽이다.’ 색은편에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한서>지리지의 원문
‣험독; 응소왈 조선왕 만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곳에 위치해 험독(險瀆)이라 한다. 신찬은 왕험성은 낭랑군 패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험독에 대해 ‘서광(徐廣)은 <사기집해>에 창여(昌黎)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다. / 徐廣曰..昌黎有險督縣 應注地里志遼東險督縣朝鮮王舊都/ <史記集解>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諸侯國)이 되어 있었다. 위 창려의 험독 위치에 대하여 <한서보주>(漢書補註)에는 ‘今營州古城東南一百七十里’라고 적혀 있고,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는 ‘今錦州府義州西北境’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위만조선의 초기수도는 의(義: 대릉하방면) 서북경에 있었다고 풀이되기도 한다.
* (제1번 판넬 설명 글)
< 동산취 제단 유적. >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 객라심 좌익 몽골족자치현 대성자 동남 대릉하 서안에 위치한다.
옥거북,옥촉, 옥패, 제사용 진흙 채도,통형기 등의 유물이 나오는 제단으로 원방각의 단군민족 형태이다.
* (제3번 판넬)
70여개의 성이 발견되는 등 완전한 국가 형태를 띠는 하가점 하층문화는 BC 2300년경으로 고조선 시대와 일치하고... 발굴된 인골이 고동북인 즉 동이족이며, 유물도 평양, 요동반도 등과 같은 형태이므로 고조선 유적임이 확실함.
하층은 고조선 전기, 상층은 고조선 후기 .....
유물은 제 14번 판넬을 참조하면 됨.
* (제 4번 판넬)
단군민족 시원지 중 하나인 홍산문화의 중심지, 홍산의 절경
고도로 발달한 신석기, 각종 옥기, 대형 적석총(고구려 왕릉의 전신) 등이 발견되는 홍산문화의 중심지 홍산의 절경(내몽고 적봉시 소재)
신석기 소하서 문화는 기원전 7000년~6500년까지 올라간다.
흥륭와 문화는 기원전 6200년~5200년....
동석병용의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3000년까지 올라가며....
확실한 동석병용의 소하연 문화는 기원전 3000년으로 추정되며,(금속무기를 사용한 치우 한웅 시대로 추정)
청동기 시대로 들어가는 하가점하층문화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고조선 시대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머리땅(한반도를 고쳐부르는 이름), 즉 요동반도와 평양과 남한(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고인돌, 적석총 문화와 일치한다.
<출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우실하 교수> (중국 공식자료를 인용함)
* (제 6번 판넬)
<흥륭와 유적지>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 문하 유적지
대릉하 지류인 망우하 상류 우측 연안 구릉의 흥륭와촌에서 발견.
1000여개이 방 유적지, 요녕성 수암옥을사용한 옥귀걸이(한머리땅 여수 것과 비슷), 옥도끼. 옥자귀 등의 유물 출토.
요하 일대 신석기 세력이 요동 지역 신석기인(후에 예맥족)들과
상호 교류하는 한문화임을 증명.
* (제 7번 판넬)
북 평양 대박산 단군릉 < 단군단 제공 자료 >
5000년전(북 발표)의 고조선 단군릉을 개건한 단군릉....
고조선 전기는 청동기,후기는 철기 시대로 들어간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 평양 단군릉 부근에서 대거 출토되었다( 제 14번 판넬 유물 참조 요망)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부근인지, 요동반도인지, 요하 홍산인지는 좀더 연구가 되어야 하나.. 이들이 모두 고조선의 영토이며, 평양 부근과 황해도에서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 있고.. 고인돌이 밀집된 것으로 보아..고조선이 단군조선 시대에는 평양이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하 홍산 지역은 BC3500년경 제사-종교 중심의 유적이 많아, 고조선 시대 중 BC2333년의 단군조선 이전인 배달국 신시(한웅 시대) 시대의 중심지로 보여진다.
* (제 8번 판넬)- (두 그림을 잘 조합해 주십시오^^)
세계 최대의 고인돌( 황해도 관산리 소재)
황해남도 은률군 관산리 소재. 뚜껑돌이 길이 8.75미터로 세계 최대 고인돌이다.
너비4.5미터, 두께 0.31미터 무게는 40여톤으로 면적은 40제곱미터.
* 제13번 판넬
<고조선 천문도>
-평양 강동군 향목리 2호 고인돌 별자리 실측도
-북두칠성이 새겨진 고인돌( 황해남도 은천군 정동리 우녕동)
고조선의 별자리(성혈)는 대개 81개 정도이며..세계 최고의 천문도로 유명하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고조선 천문도를 이어 받았다.
-<청원 아득이 고인돌 유적>
약 2,500년 전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돌판
고인돌에서 출토된 돌판에는 지름이 15~0.5cm인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 구멍(성혈)의 분포를
잘 살펴보면 이것이 별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고인돌에서 이러한 성혈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최근 국내외학자들의 연구에 따
르면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라고 합니다.
* 제 17번 판넬
<제주도 해중 고인돌>
고조선의 영토가 최소한 제주도에서...
내몽고 적봉까지 동일한 문화권임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 제 18번 판넬
<홍산문화의 여러 형태의 옥기>
* 제 19번 판넬
<세계 3번째 크기의 요동 개주 고인돌>
고조선역사문화재단의 자료.
<별자리가있는 요동 와방점 고인돌>
강상무덤, 루상무덤과 함께 이 고인돌들은
요동반도도 고조선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 제 11번 판넬- 벽화가 아닌 고인돌 사진은 삭제 요망(19번 판넬로 옮김)
<고조선 고인돌 벽화>
세계 3번째 크기의 요동 개주 고인돌(19번 판넬 참조)에 있는 천정 벽화.
천부 벽화인데, 후대에 가필한 벽화로 추정되며.... ]
최초로 밑바탕에 그려진 시대가 고인돌이 세워진 고조선 시대인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 제20번째 판넬
<고조선 서적>
유물이 아닌 역사서적으로도
고조선과 고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 한검의 역사기록은 많다.
삼국유사를 보면 “昔有桓國”을 “석유한인” 으로 일제가 조작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 민족의 고조선 역사는 “桓國”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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