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2) 예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셨을 때 요단강 부근에서 외쳤던 말씀입니다. 그 이전에 이미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라고 외치면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이 있고 신앙의 세계관이 아주 잘되어 있어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사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쳐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그렇다면 그 당시에 천국관이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관이 아니고 그들은 죽어서 가는 천국관이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앞으로 오는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적 문법으로는 ‘이미 와 있다’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때 비로소 천국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오늘도 이런 회개를 반복적으로 합니다. 그러면 천국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치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고 나의 의로 나온 믿음인 것입니다. ‘중언 부언 하지 말라’ ‘중언부언’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보면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날마다 중언부언하는 삶을 삽니다.. 이는 율법을 매일 반복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매일 반복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자람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매일 반복으로 뜨고 지는 것은 생명을 살려 자라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밤낮이 적용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만 한정됩니다. 생명이 있는 것에는 밤낮이 반복되면 죽을 것은 죽고 사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중언부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회개(메타노이아)’는 ‘함께 돌이키다’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중언 부언의 기도의 삶을 마치라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돌이켜 아들로 자라가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회개입니다.
산상수훈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팔복 가운데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외친 이유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미래 시제의 천국이 아니라 현재 시제의 천국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계시록에 나오는 곳에는 눈물이 없지만 예수께서는 천국이 현실화 되어진 자들이 받는 복이 현재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도 복이 있고,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리고 환난도 핍박도 모두 우리가 천국을 현재 소유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에서 언급되는 가난이나 애통, 환난이나 핍박 등이 현재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에서 사는 삶이 없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이것은 율법적인 의를 이룸으로 장차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가난해서, 애통해서, 핍박을 받아서 사는 삶이 원인이 되어 장차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결과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불행을 참고 견디며 핍박을 이기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문법적으로 볼 때 미래시제로 나옵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작은 현재이며 마치는 것도 현재입니다. 이 말은 천국의 삶은 성장하는 상태, 즉 천국이 자기에게 들어오면서 시작하면서 영원을 향해 가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율법 아래서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면서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고난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참고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천국을 탈피해서 마음의 천국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천국은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가 심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절대로 자기 밭을 버리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천국의 모습은 처음에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한 알로 존재합니다. 그 다음에는 싹이 나고 어린 나무가 되어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한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이처럼 천국의 모습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아주 작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볼 때 아주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영과 생명이신 말씀을 아버지께 받아 마음에 받아 심습니다. 작은 씨가 천국으로 시작하여 뿌리가 땅에 튼튼히 내리고 하늘의 생명을 받아 자라기 시작하면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어 공중의 새들에게 안식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자기 속에 왔다고 하여 그것이 완성이 아닙니다. 곧 자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하나도 한 것이 없습니다. 뿌려짐을 받고 하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나고 나무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생명의 흐름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자라서 남들에게 거처까지 제공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예수님은 이 땅에 작은 겨자씨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율법을 지키라고 제자들을 달달 볶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씨앗인 생명의 말씀을 제자들의 마음판에 뿌렸습니다. 씨앗을 받은 제자들은 많은 혼란과 고통이 따르기 시작합니다.그 고통은 자신들 속에 천국이신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오는 고통과 갈등이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만 지키면 따놓은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주관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겨자씨인 천국이 자기 안에서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하면 율법의 자리가 서서히 좁아지고 없어지므로 그 율법적인 것을 버리기 아까와서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무가 생명으로 점점 자라기 시작하면 이제는 고통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치유의 역사, 생명의 길로 걸어가면서 내적인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생명의 씨인 작은 겨자씨를 심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 13:36-38)
천국은 선한 하나님의 씨인 아들들입니다. 천국은 두 부류의 씨가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악한 자를 만드는 선악의 아들을 자라게 하는 영이 있는가 하면 생명과 사랑과 거룩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가는 씨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의 밭이 없으면 결코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고전 3:9절에서 우리를 ‘밭’이라고 합니다. 마음 밭이라고 합니다. 육의 몸에 영의 씨를 뿌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아들의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입니다. 영에 의해서 우리의 몸이 영으로 구속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영의 구속이라는 것은 몸이 영으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씨가 자라서 나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며 말씀이 나를 이끌어가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곧 자라남의 과정입니다.
‘자람’이란 씨가 싹이 나서 자랍니다. 자람의 끝은 열매가 있습니다. 아들의 자람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성령을 받고나서 그분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밭에 생명의 씨, 사랑의 씨, 거룩의 씨를 뿌려 아들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아들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천국된 삶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생을 마치고 나서 영원히 아버지의 우편에 서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미래적 천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생명의 씨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이 ‘영의 구속’이 되어 한 영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속된 삶 때문에 오는 고통을 우리는 감사로 여기며 또 다른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로마 8:13-22)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에게 양자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천국이며 심령천국입니다. 심령 천국인 씨가 우리 안에 자라면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 상속이 무엇입니까? 아직 자기 안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들이 있기에 그들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아들됨의 정체성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마음 속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천국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는 슬픔과 애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지만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쁨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 거룩의 눈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하시고 영원히 아버지의 우편에 가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생애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