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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遇拙堂 諱 逾 行狀
公의 諱는 逾, 字는 子高, 姓은 昌寧曺氏이다. 始祖는 신라 眞平王의 駙馬로 창성군 諱 繼龍이고, 6세는 大樂署丞으로 諱 謙이며 그 뒤 고려 시대에는 平章事가 8세나 배출 되었고, 本朝에 와서 諱 偉는 곧 문장공 매계선생으로 公의 5世祖이다. 특히 매계선생은 점필재(김종직의 호)의 문하에서 學을 닦아 도덕 문장이 당시 士林의 첫째가 되었고, 成宗의 知遇로 거듭 총탁(寵擢-특별히 사랑하여 발탁하는 것)을 입어 조만간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가 불행히 昏君(燕山主)이 들어서고 史禍가 일어나서는 西로 南으로 귀양살이하는 사이에 그만 상심이 병이 되어 별세, 마침내 묘를 파헤치는 禍까지 만났다가 中宗反正 초기에 누명(陋名)이 伸雪되어 포전(褒典)이 내려지고 자손이 채용된 것은 물론, 그 遺蹟이 있는 고장에는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아들이 없으므로 從弟인 郡守 척(倜)의 아드님 諱 士虞로 입사(入嗣), 두 차례나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가문에서 겪어온 화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출사하지 않았다. 아드님 諱 胤禧는 禮賓寺正인데 壽職으로 통정대부 品階올랐고, 아드님 諱 익(瀷)은 黙齋로 자호(自號), 젊어서 喪을 만나 죽(粥)만 마시면서 侍墓하였으므로 鄕里에서 그 孝를 칭찬하였고, 병자호란 이후로는 집안에 들어앉아 뜻을 지키면서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忠信으로 主要를 삼고 소학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연로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조행(操行)이 순수, 정대하여 기호(嗜好)나 財利에는 그저 담담하였다. 그 부인 평산신씨는 大司成 敏一의 따님이요, 牛溪 成선생의 아드님인 창랑공(滄浪公) 문준(文濬)의 외손인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行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성씨가문의 덕행이 부인에게 전수되었다” 하였고, 우암(尤庵) 宋선생도 창랑공의 墓文에서 부인의 행적을 특서하였다. 그 소생은 두 아드님으로 맞이의 諱는 孝昌인데 文章으로 알려져 文科 壯元에 뽑히고 둘째의 諱는 悌昌인데 젊어서부터 性度가 뛰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은 데다 재능이 높고 어질었으므로
모두들 遠大한 성취를 기대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별세하였으니, 바로 公의 부친이다. 母親 冶爐宋氏는 진의 따님으로 천성이 인자하여 남들과의 불화가 없었고 인조 27년(1649) 8월 5일에 금산 봉계리에서 公을 낳았는데 이곳은 바로 매계선생의 옛 집터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보통 아이와 달라 말을 배울 나이에 문자를 알았고, 어려서부터 이미 老成한 사람과 같이 언어가 진중하고 동작이 차분하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잡된 놀이에 어울리지 않고 조부님을 온종일 측근에 모시어 그 응대하고 진퇴하는 절차가 저절로 규칙에 부합되었으므로 조부님이 매우 사랑하였다. 어느 날 밤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조부님이 달의 모양이 무엇과 같으냐? 하고 묻자, 둥근 것은 자루 없는 거울과 같고, 밝은 것은 허공에 매달린 등불과 같다, 고 대답하므로 조부님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었다. 겨우 4-5세 때에 婢女가 공을 업고 길거리에 나가 노는데, 마침 한 아이가 火傷을 입어 다섯 손가락이 다 오그라지고 그 흉터가 옹결(臃結)되어
매우 흉측스럽게 생겼다. 이에 다른 아이들은 서로 웃어댔으나 공만은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았다. 옆에서 그 까닭을 묻자 저 아이가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다. 고 대답하므로 듣는 이가 옛적의 伯夷처럼 눈으로 나쁜 모양을 보지 않을 아이다고 하였다. 8세에는 사기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번 읽으면 곧 외웠는가 하면 스승이 가르치지 않아도 그 뜻을 통하였고 한번 외운 것은 끝내 잊어버리지 않았으므로 어려서부터 한번 배운 글은 일체 두 번 읽은 적이 없었다. 12세 때에는 조부님을 따라 서울 집으로 올라가 논어를 수업, 날마다 강독하여 그 대의를 터득하였고, 이로부터 앉을 적에는 언제니 무릎을 꿇고, 동작할 적에는 반드시 예절에 맞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천성이 순수하고 근신하여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능한 것이다. 14세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에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 거리가 멀어서 飯含(염습-殮襲-할 때 죽은 사람의 입속에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의식)과 殮襲등의 절차를 손수 거행하지 못한 것을 죽기로써 원통해 하였으며, 奔喪을 이어 運喪할 적에는 영구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으므로 측근이나 길가에서 보는 이가 모두 감읍(感泣)하고 칭탄(稱嘆)하였다. 제례는 일체 주문공의 가례를 의준하고 3년 동안 경대(經帶)를 벗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언제나 묘를 찾아 곡배(哭拜)하였고, 가세가 몹시 빈한하여 재물을 마련할 것이 어려우므로 손수 닭을 길러서 충당시켰으며, 喪中에 있을 때 몸이 극도로 여위어 버티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학업을 폐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독하였으며, 의심나는 곳은 반드시 표시해 두었다가 先覺者의 질정(叱正)을 받은 다음 세 번씩 음미하여 체득을
기하곤 하였고, 상을 마친 뒤에도 기일을 당하면 初喪 때와 같이 애통해하곤 하였다. 이로부터 가세가 날로 어려워진데다가 父兄, 宗族들은 모두 서울에 있고 혼자 너무 고단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모친을 모시고 외가에 가서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이에 조용한 서실에 들어 앉아 독서에 전념, 매일 첫 닭이 울면 일어나 맨 먼저 家廟를 찾아 참배하고 이어 모친, 그리고 외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 서실로 돌아와 밤이 깊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독서하기를 6년이나 계속한 바 이 6년 동안에 經史, 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 중에도 小學, 大學, 心經, 近思錄, 尙書, 등에 더욱 전력하였고, 강독한 회수는 모두 수백 번씩 되었는데, 그중에도 상서만은 일천여 번이 넘었다. 대저 공은 애당초 擧子業(科擧에 관한 공부)에 유의하지 않고 성리학에만 전념, 書, 史를 보는데 반드시 마음을 갈아 않히고 자세히 음미하여 기어이 체득하곤 하였으므로 그 學의 조예와 덕의 성취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顯宗 8년(1667)에 조부님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고 다시 외가로 돌아갔다가 동 11년(1670)에 비로소 金山 옛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학문에 전력하여 성찰로 마음을 수습하는 主要를 삼고 在養으로 德에 나아가는 기본을 삼아, 마음과 생각을 졸이고 모아서 그 실천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행여 뜻이 서지 못하여 공휴일궤(功虧一簣-공부에 있어 九分까지 마치고 마지막 一分을 채우지 못하여 九分의 공부가 허사로 된다는 비유)하는 후회가 있을세라 自警文 수십 대문을 지었다. 그 대충을 소개하면 “배우기전에는 배우기를 생각하고 배운 뒤에는 지키기를 생각, 온 종일 근면하여 행여 미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 하였고, 또 “나는 차라리 도를 알고 나서 죽을지언정 배우지 못한 채 살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마음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글로 써서 스스로 성찰한 것이다. 또한 課讀(매일 일과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으레 밤을 지세우곤 하였는데, 가끔 기력이 피로하여 일찍 일어나지 못했을 적에는 반드시 일기를 써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즉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한 것이 내가 세운 뜻이었건만 한번 잠들었다가 깨었을 땐 날이 이미 밝았으니 이는 겨울밤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뜻이 서지 못하여 게으름이 교예(交乂)됨인지? 하였으니, 언제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였다. 동 13년(1672) 봄에는 경렴서원(景濂書院) 享祀에 참여하여 그 動作, 容儀 등이 일체 법도에 맞았으므로 修撰 姜汝희(方+木)이 대단하게 여기고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매계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어버이의 명으로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제되자, 선비가 擧子業에 유의하면 心術에 가장 해롭다. 고 개탄하고 다시는 출세에 대한 뜻이 없었다. 이에 大學을 앞에 놓고 단정한 자세로 꿇어앉아 다시 읽기시작 16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여 한번 씩 읽고 나면 가는 바늘로 종이를 찔러서 그 회수를 표시했는데 一萬의 숫자가 다섯 번이나 되었으니 논어, 맹자, 중용, 그리고 송나라 현인의 글들을 곁들여 궁리하고 탐색하여 환히 관통하고는 이제야 성현의 글의 의미가 심장한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젊어서 읽었던 것은 부질없이 겉만 보았을 뿐이다. 하였으며, 누가 혹 經傳에 대해 의의(疑義)를 물으면 묻는 즉시 답변하는 한편, 先儒들의 注解까지 외워 설명하여 환히 깨닫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易經을 좋아하여 익히 읽고 자세히 설명하는 데 寢食까지 잃어버리고는 역경의 오묘한 이치도 대학에서 지나지 않는다. 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이치를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어서 닿는 곳마다 투철되는 때문이요, 德性을 높이고 問學을 이르는데에도 일체 그 극처(極處)에 도달하였으니, 이는 진정 精과 一로써 中庸의 道를 지키는 공부에서 얻어진 것이다. 숙종11년(1685) 즉 公의 나이 37세 때에 모친의 상을 만나 3일동안 물한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3개월 동안 죽(粥)만 먹었고, 3년동안 나물밥에 물을 마셨으며, 상복을 벗지 않은채 빈소를 지킬 뿐, 침실에 들지않고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묘를 찾아 哭拜하였는데, 묘가 15리 밖에 있었으나 혹 말이 없을 적에는 도보로 왕래, 아무리 피로하여도 거르는 적이 없고, 禮制 이상으로 애통해하다가 하마터면 생명까지 위험할 지경에 이를뻔 하였으니, 아무리 옛적의 執喪을 잘한이도 어찌 이보다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부터 집안 살림에는 뜻을 두지 않고 寒暑와 飢飽를 도외시하여 끼니가 자주 어려워도 걱정하지 않았고, 나물밥에 물마시는 생활을 남들은 견디지 못할바였으나 공의 樂은 그대로였으니, 이는 孔子의 불개기낙(不改其樂) 이라고 칭한 말에서 안자(顔子)의 樂을 찾으려는 뜻이 아닌가 싶다. 公은 외동 아우를 가르치는데 온갖 성심을 다하여 날마다 일과를 시켜 그 성취만을 기대하면서 아무리 태만한 적이 있어도 질책이나 회초리 대신 친절히 타이르고 권면해 줄 뿐이었고, 젊어서 나중에 이르도록 화기가 애애하여 한번도 불평스런 언사를 가하지 않았으니 그 독실한 우애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보통 사람의 미칠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우졸당(愚拙堂)이라 自號하여 書堂에 걸고 才,學이 모두 拙한것이 이에 愚의 실상이니 어릴때의 마음을 보존해야 당초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 하는 銘을 지어 壁上에 걸어 놓은지 며칠만에 떼어버리면서 “號를 짖는 다는 것은 자신을 남에게 알리는 결과가 되므로 나의 본의가 아니다” 라 하였으니, 초야에 묻혀 아무걱정이 없는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숙종21년(1695) 겨울 (薦狀에는 봄으로 되어있다)에 道伯이 公의 學行을 들어 조정에 추천하여 別檢에 의망(擬望)되자 나는 학행에 대한 실제가 없고 학행에 대한 虛名만 있으니, 이 어찌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개탄하면서 더욱 자취를 숨기었다. 동 22년(1696) 4월 11일에 48세를 일기로 正寢에서 별세하였는데 임종시에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끝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아우가 왔으니 라는 말만 세 차레 되풀이 하는 사이에 아우가 들어와 손목을 잡았으나 고개를 돌려 응시할 뿐, 말은 이미 거둔 뒤였다. 아! 너무도 슬픈 일이다. 이해 9월 모일에 本郡 서편에 있는 放牧里 선영 震坐에 안장되었는데, 이날에 큰 새 수십마리가 서로 바라다 보이는 內案山에 날아와 종일 오르내리면서 날아가지 않다가 返魂해 올때가 되어서야 산 밑으로 내려와 길가에 모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대저 公은인자한 천품이 자연
도에 가까워 비루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태만한 용태를 一身에 가지지 않았는가 하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언제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여 몸 가짐과 사람 대하는 데 일체 지성으로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和悅스런 안색으로 그 뜻을 받들고 봉양하는 음식에는 그 자미(滋味-맛이 좋고 자양분이 많은 것)를 다하였다. 제사를 모시는 데는 室堂을 손수 소제하여 생존한 부모를 맞이하듯 하였고, 제물에는 정결을 다하여 조금만 예식에 어긋나면 온종일 기분이 언짢았고, 예식에 어긋남이 없으면 으레 기분이 좋았다. 집을 다스리는 데는 엄정(嚴整), 인서(仁恕)하고 사람을 道로써 부렸으며, 규문(閨門)에는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고 비복들도 함부로 실언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는 立志를 先務로 삼고, 孝悌로 근본을 삼아서 그 재질에 따라 지성껏 회유(誨誘)하였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유완(柔緩)함이 절도에 맞고 온화(溫和)함이 도리에 맞아 아무리 갑작스런 경우에 처하여도 실수하는 일이 없는가 하면, 빈객을 접할 적에는 표리(表裏-앞뒤)가 한결 같았고, 족척(族戚-친인척)을 대할 적에는 귀천의 차별이 없었다. 남의 喪事를 들었을 적에는 아무리 소원(疎遠)한 사이라도 며칠동안 고기를 들지 않았으며, 길사나 흉사를 축하하고 위문하는 데에 각기 그 정리를 다하였다. 자봉(自奉)에는 의복은 걸쳐 몸만 가리우고
음식은 꼭 배불리기를 구하지 않았으며, 사는 집이 겨우 비바람을 의지할만 하였으니, 태연히 아무 걱정이 없었다. 학문에는 이치를 궁리하여 그 知에 이르고 자신을 살펴서 그 實을 실천하며, 제장(齊莊-가지런 함)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 마음부터 먼저 존양(存養)하고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는 즈음에 자신을 더욱 성찰하며 편견에 만족하지 않고 小成에 급급해 하지 않아 날마다 노력만을 거듭하여 잠시의 중단도 없었으니, 이는 오늘도 새로워지고 내일도 새로워지게 하는 스스로 말지 않는 공부이다. 그리고 역리(易理)에 대하여는 스승의 전수도 필요없이 스스로 터득한 妙가 있었으므로 일찍이 작괘(作卦)하는 법을 연구하면서 이것은 易理의 支流일 뿐이다. 하였다. 내부에의 근본으로 말하면 자상(慈詳), 개제(愷悌-안색의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한 것)하고 근후(謹厚-삼가하고 두터움), 주신(周愼-두루 진실 함)한 데다 외부의 번뇌가 조금도 게재되지 아니하여 담담히 아무 물욕이 없고 마음 가짐이 더욱 확고하여 스스로를 속임이 없어야한다. 는 세 글자로 일생동안 간직할 지표로 삼았다. 외부의 발로(發露)로 말하면 그 기색이 공손하면서 화열(和悅)하고 그 언사가 간단하면서 신중한 데다 莊, 敬으로 스스로를 가져 온 종일 엄연(儼然-의젓한 자세)하였으며 섰을 적에는 파의(跛倚-한 다리에 의지하고 기대서는 자세)하지 않고, 앉았을 적에는 기거(箕踞-두발을 앞으로 쭉뻗고 앉는 자세)하지 아니하여 일거 일동에 모두 규칙이 있었다. 혹 피로하여 휴식을 취할 적에는 눈을 지긋이 감고 단정히 앉아서 정신을 모으고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혹 휴식을 끝내고 일어 났을 적에는 산책도 하고 헤엄도 쳐서 정신을 발양(發揚)시켰다. 언제나 한 밤중이 되어서야 취침하였고, 잠에서 깨었을 적에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날을 세웠으며, 병이 나기 전에는 한번도 대낮에 자리에 눕지 않았고, 위의(威儀)와 동지(動止)에 대한 규칙이 아무리 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잠시인들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찍이 “내가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부모를 현양시켜 드리지 못하였고 또 曾子의 부미(負米)하는 봉양이 없어 그
은혜를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채 부모를 여의었으니, 이제는 그만이다. 나의 심회(心懷)가 어떠하겠는가? 또 부모에게서 함께 물려받은 몸으로는 다만 한 아우가 있을 뿐인데 능히 한 집에서 함께 지내지 못하니 이는 다 나의 不孝, 不友한 소치이다.” 하였으니, 이 어찌 종신토록
사모하는 효행과 지극한 우애가 아니겠는가? 夫人 善山金氏는 護軍 진수(震燧)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두었다. 즉 장남 세호(世虎)는 通德郞인 平山 申命載의 딸을 맞이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목(霂)은 忠原 朴世斌(斌+貝)의 딸을 맞이하고, 운(澐)은 연안 이훤(李暄)의 딸을 맞이하고, 회(雨+淮)는 固城 남정인(南廷獜)의 딸을 맞이하고, 딸은 進仕 金必大의 아들인 處善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었다. 차남 세용(世龍)은 進仕인 安東 金선(土+單)의 딸을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방(䨦)은 通德郞 吉重龜의 딸을 맞이하고, 택(雨+澤)은 月城 金世秋의 딸을 맞이하고, 딸은 光城 金湜에게 출가하였다. 3남 世鳳은 通德郞인 星山 李星老의 딸을 맞이하였으나 早死하여 소생이 없으므로 다시 月城 李纘益의 딸을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협(雨+浹), 부(雨+溥)는 어리고 딸도 어리다. 4남 世鵬은 通德郞인 星山 裵世度의 딸을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어리고 딸은 병자호란 때에 斥和臣이요 平時署令이던 인천 蔡以恒의 손자 昌徵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命千은 성주 李挺賓의 딸을 맞이하고 命洪, 命武는 어리고, 딸은 달성 徐匡漢에게 출가하였으나 夭死하였다. 아! 公의 학문은 가정에서 私淑하고 經傳에서 체득하여 榮達을 구하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였으니, 그 숨은덕은 사람들이 다 심복하는 바이지만, 그 깊은 조예에 대하여는 속속들이 아는 이가 없다. 그 학문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그 연세는 덕과 걸맞지 않았으니, 주었다가 도로 빼앗아간 하늘의 의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遺風과 여운이 후학들을 용동(聳動-높이 솟아 살아나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니, 공의 道는 미처 당세에 행하여지지 못하였으나 공의 덕은 먼 후세에 遺傳 될 수 있다. 그럼 하늘이 혹 이를 유의해서가 아닌지? 公의 일생에 별로 저서가 없었으니 이는 文詞나 藝能 따위로써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이고, 다만 일기 몇 권과 생(彳+生)복서독(復書牘) 祭文, 만사(輓詞), 약간과 詩 몇 편이 남아 있으나 지금 이정도의 文字로는 公의 始終을 알 수 없으나 그 萬의 一은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進仕公 遇는 公의 從弟로 평소 공을 존경해 왔는데 공이 별세한 뒤에 그 사적이 매몰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行狀을 서술하였다가 마치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므로 舍弟 述이 감히 進仕公의 草本을 이어 그 아래를 보충 하였다. 그러나 公을 친형이라 하여 행여 지나치거나 거짓된 것을 함부로 다룰세라 공의 평생 행적을 百에서 하나도 멋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평소에
내가 직접 보았던 것과 인리(隣里), 향당(鄕黨)에서 다 알고 있는 것만을 이상과 같이 대충 서술한 다음, 당시 大君子의 한 마디 말을 얻어서 후세의 유전을 도모하려 한다.
아우 述이 삼가 서술한다.
아!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과 고고한 行誼와 독실한 실천과 뛰어난 조예에 대하여는 선생의 季氏가 撰한 행장에 구비되었으니, 불영(不佞-재주가 없는 것)이 어찌 새삼 취언(덧붙임)을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만, 선생의 외구(外舅-장인)는 곧 不佞의 고모부이다. 그러므로 不佞이 어려서부터 선생이 생관(甥館-처가)에 출입할 때 그 言行動止가 보통 선비에
비교할 바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들었고, 불영의 先君이 금릉군수로 계실 적에는 선생이 자주 왕래한 때문에 선생에 대해 듣지 못했던 바를 더욱 자세히 듣게 되었다. 즉 선생은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執喪을 禮制대로 따랐으며, 아우를 사랑하되 和氣를 다하여 잘못을 타이르고 자제를 가르치되 재질에 따라 회유(誨誘)하였으며, 功令文(과거 응시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 문체)을 단념하고 성현의 학에 전념하되 고심해서 탐색하고 涵養(학문과 견식이 차차 몸에 베이도록 양성시키는 것)해서 확장하여 세상의 일체 영욕이나 득실 따위가 털끝 하나로 요둉 시키지 못한 때문에 선생을 방문하는 이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대뜸 조은사(曺隱士)의 집으로 지칭하였다. 하니, 아! 참으로 존경할 만하다. 만약 하늘이 충분한 壽命을 주어서 그 포부를 펴도록 하였다면 그 성취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자질만 원만히 주어놓고 재빨리 빼앗아 갔으니, 하늘의 의도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불영은 그저 애모(愛慕)하는 정성을 스스로 걷잡지 못하고 평소에 들은 바를 대충 기술하여 경앙(景仰)하는 충심(衷心)을 표하였을 뿐, 뚜렷이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일만한 문자에 대하여는 세상에서 그 임무를 맡을 大君子가 따로 있을 것이므로 아직 이만 보내는 바이다.
坡平 尹昌來가 삼가 쓰다.
*尹昌來의 본관은 파평, 현종5년(1664)-(미상) , 숙종25년(1699) 36세로 식년시에서 생원합격
43.遇拙堂諱逾墓碣銘
先師 寒水齋先生이 愚拙堂 曺公의 간독(簡牘)뒤에 쓰기를 “公의 고고한 操行과 독실한 공부는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하였으니, 자연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고루하여 한 번도 여택(麗澤-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강론하고 수양을 힘쓰는 것)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유감스런 일이다. 내가 일찍이 先師의
이 글을 읽고 나서 공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大君子(여기는 한수재 선생을 이름)推重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그 행장을 보니, 공은 진정 숨은 선비요 독실한 학문으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은 분이다. 公의 諱는 逾, 字는 子高이다. 遠祖 諱 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駙馬로 창성군에 봉해져 창녕의 大姓을 이루었고, 몇 대를 지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平章事가 8대나 배출 되었고, 諱 偉는 세칭 매계 선생인데 문학으로 성종의 知遇를 받았다가, 燕山主 때 혹심한 史禍를 만났으니, 곧 公의 5대조이다. 高祖 諱 士虞는 가문에서 겪은 禍難을 마음 아프게 여기어 여러 번 벼슬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曾祖 諱 胤禧는 벼슬이 寺正에 이르고 祖父 諱 瀷은 自號 黙齋로 병자호란 이후로는 집안에 들어앉아 뜻을 지켰고, 祖母 申氏는 大司成 敏一의 따님이요, 牛溪 成선생의 外曾孫으로 어려서부터 특이한 行이 있었으므로 우암(尤庵)선생(송시열)이 申氏의 외조부 滄浪공의 墓文에 특서하였고, 父親 揮 悌昌은 일찍 작고하고 모친 宋氏는 진(日+進)의 따님으로 인조 27년(1649)에 金山 봉계리에서 公을 낳았으니, 이곳은 곧 매계의 옛 집터이다. 공은 천성이 자상, 端雅하여 어려서부터 自然 道에 가까웠고, 여러 아이들과 잡된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4-5세 때에 화상을 입어 그 모양이 매우 흉측스럽게 생긴 아이를 만났는데 대뜸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았다. 옆에서 그 까닭을 묻자, “저 아이가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고 싶지 않다.” 고 대답하므로 듣는 이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공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자를 알았고 8세에 입학하여 능히 글의 大義를 통하였다. 15세에는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 거리가 멀었으므로 밤을 불구하고 분상(奔喪)하여 어른과 다름없이 집상(執喪)하였다. 弱冠이 되어 이미 爲己之學에 전념, 經, 史와 송나라 현인들의 글을 모조리 강독하여 정밀히 推究하고 반드시 실천하기를 힘쓰되, 첫닭이 울면 일어나 맨 먼저 家廟를 찾아 참배하고 이어 모친에게 인사를 드린 다음 글을 읽기 시작하여 밤이 깊어야 취침하였고, 또 “배우기 전에는 배우기를 생각하고 배운 뒤에는 지키기를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道를 알고 나서 죽을지언정 배우지 못한 채 살지는 않겠다.”는 등의 自敬文을 지어 책려하였다. 또한 일찍이 “大學의 修身, 治國의 要法에는 모든 의리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꿇어앉아 대학을 다시 읽기시작, 16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는데, 그 회수는 일만여 번을 넘은지가 여러 차례였다. 이제야 나의 의지와 趣向이 각별해진 것을 알겠다. 이전에 읽었던 것은 참으로 신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은 격이었다.” 고 말하였으며, 누가 혹 의의(疑義)를 물으면 묻는 데로 명백히 답하여 듣는 자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였다. 公의 학문은 一身을 근본으로 삼아서 儀容은 반드시 공손하고, 언사는 반드시 자상하였으며, 衣冠은 반드시 단정히 하고, 起居는 반드시 조심히 하였으며, 마음가짐에는 담허(淡虛)하여 외부의 물욕에 집착되지 않고, 일 처리에는 공신(公愼)하여 사사로운
뜻이 게재되지 않았으며, 어버이 섬기는 데는 그 기색이 和氣스러웠고, 제사 받드는 데는 그 敬이 생시를 뵈듯 하였으며 집안은 엄격과 관용으로 다스리고, 사람은 정성과 진실로 대하였으며, 공부 과정에 있어서는 날마다 근면하여 잠시도 間斷이 없었다. 하루는 기력이 피로하여 늦게 일어나게 되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한 것이 내가 세운 뜻이건만, 한번 잠들었다가 깨었을 땐 날이 이미 밝았으니, 아는 겨울밤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뜻이 서지 못해서인지“ 하는 일기를 써서 스스로를 책려(策勵)하였으며 그 학문의 편모(片貌)를 엿볼 수 있다. 숙종 11년(1689)에 모친의 상을 만나 삼일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3개월 동안 죽만 먹었고, 3년 동안 나물밥에 물을 마셨으며, 상복을 벗지 않은 채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고, 침실에 들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반드시 묘를 찾아가 죽기로써 애통해 하였으니, 옛날 少連과 大連 형제의 執喪도 이에서
더 할 수 없었다. 외동 아우에게 일과를 시키는 데는 친절히 誨誘하여 한 번도 질책을 가한 적이 없었고, 애애한 우애가 나중에 이르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일찍이 遇拙堂이라 自號하여 서실에 걸고 銘을 지어 그 밑에 붙였다가 다시 ”才學이 모두 拙한 것이 이 遇의 실상이니 어릴 때의 마음을 보존해야 당초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 하는 銘으로 고쳐 학문에 정진하는 뜻을 서술하였는데, 이윽고 ”이는 남에게 알리는 결과가 될까 염려이다“ 면서 아예 때어 버렸다. 동 21년(1695)에 道伯이 公의 學行을 들어 朝廷에 상신하여 別檢으로 擬望되자 공이 듣고 ”나는 학행에 대한 실제가 없고 학행에 대한 虛名만 있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하였다. 드디어 이듬해 4월 11일에 48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아! 공의 孝友에 대한 行과 학문에 대한 노력을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가 이와 같았으니, 당시에 大君子(여기서는 寒水齋를 이름)의 嘆賞(크게 탄복하여 칭찬하는 것)을 받았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榮達을 구하지 않고 山林에 묻혀 조금의 원망도 걱정도 없었으니, 어찌 만나기 쉬운 인물이겠는가? 영조 11년(1735)에 연신(筵臣-經筵을 관계하는 관원)의 주청으로 司憲府 持平에 追贈되었다. 夫人 善山金氏는 護軍 진수(震燧)의 따님이요, 承旨公의 玄孫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공에게 온 뒤에는 媤母를 조심으로 섬기고 조상을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공은 늘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뿐 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부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담당하여 집안일로써 공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하였고, 공이 별세한 뒤에는 네 아들이 어리어 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과부의 자식으로써 명성이 없는 자와는 서로 사귀지 말라”는 고인의 말을 들어 여러 아들들을 경계하는 한편 으레 공의 의지와 사적을 곁들여 격려하곤 하였으며, 큰 흉년이 들었을 적에는 유기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길렀다가 그 아이가 장성한 뒤에 常漢의 자식이 아님을 알고는 그 文券을 소각시키고 보내 주었으니, 이는 다 여느 부인의 미칠 바가 아니다. 참으로 女中士行(여자로써 선비의 행이 있다는 뜻)이라 이를 만하다. 드디어 영조9년(1733) 정월 4일에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들은 世虎, 世龍, 世鳳, 世鵬인데 世鵬은 進仕이고, 딸은 蔡昌徵에게 출가하였다. 이어 목(霂), 운(澐), 회(雨+淮)와 김처선의 처는 世虎의 소생이고, 방(水+䨦), 택(雨+澤)과 김식의 처는 世龍의 소생이고, 협, 부와 박동권의 처는 世鳳의 소생이고, 임은 世鵬의 소생이며, 命千, 命洪, 命五(우졸당 행장에는 命武로 되어있음)와 서광한의 처는 채창징의 소생이다. 공의 네 아들과 여덟 손자가 한 집에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 어버이를 봉양하고 和氣 또한 융융(融融)하므로 향리에서 그 효우를 찬양하는가 하면,世龍, 世鵬은 先正(한수재를 이름)의 門下에 수업하여 모두 사림의 推重이 되었는데 世龍은 지극한 효행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평소 진실한 愛와 敬이 일신에 축적되어 가정을 교화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공의 아우 述 또한 志와 行이 고매(高邁)하여 戊申變亂(영조 4년에 있었던 이인좌(李獜佐의 반란을 이름)때에 갈팡질팡하는 守令을 의리로써 설득시켜 적의 길을 가로막게 하였으니, 이 역시 공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이는 여기에 증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孔子의 經과 曾子의 傳으로 된 大學을 德에 나아가는 門戶이므로 공은 대학을 배우지 않으면 학문하는 길이 어둡다 말하고, 16년 동안 줄곧 읽어 수만 번이나 돌파하여, 가슴속에 한 책의 대학이 영롱(玲瓏)하게
투철되어 있으니, 어찌 송나라 윤돈(尹焞)이 대학을 자기의 말처럼 외웠던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고고한 操行은 효우로써 그 근원을 삼아 아내가 和樂하고 형제가 본받았으니, 가정의 교화를 본다면 공의 학문을 인정 할 수 있네. 일신의 할 일은 다했건만 수명이 짧은 데야 어찌할꼬. 先師가 글로 特書해 탄복하였으니, 그 실체가 없었다면 어찌 이 推仰 받을 수 있을 손가? 내가 이 비문 맡게 되었으니 나의 이 글 조금도 무색하지 않누나.
崇禎紀元 以後 영조 21년(1745)에 坡平 尹鳳九가 撰하다.
*尹鳳九는 숙종7년(1681)-영조43년(1767), 본관은 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구임(久菴)이다.
44.遇拙堂諱逾薦狀
생각하옵건대 記에 “探訪”은 使臣의 임무이다.” 하였는데 소위 탐방이란 전혀 백성의 변고와 세속의 폐단만을 究明해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빠진 賢者를 찾고, 숨은德을 발굴해내는 先務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朱夫子(朱憙)가 州縣을 맡고 使者가 되었을 때 충신, 효자와 先儒, 處士의 소재부터 먼저 찾아서 아무리 그들이 죽은 지 오래 되었더라도 죽은 그 묘에 祭를 드리도록 하고, 혹은 그 마을에 甥門을 세우도록 하여, 표장(襃獎)하는 典例와 표창(表彰)하는 방향에 온 심력을 다하였습니다. 더욱이 閤下의 지금 경우는 한 州縣이나 한 使者의 직무만이 아니므로 위에 말한 탐방 두 글자가 南으로 부임하신 뒤 첫 번째의 치적이 되었으니, 이는 혹 朱夫子의 故事에 감명되심이 아닌지, 이보다 더욱이 나오면 東人들이 見公至幸(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뜻)을 주고 들어오면 士庶들의 加額之望(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린다는 뜻)을 받아 지금까지 기회가 없던 斯文의 典例와 오랫동안 억울해 하던 사림의 여론이 일체 閤下의 探訪앞에 들어왔으니, 이다음 經筵에 들게 되면 어찌 임금에게 직접 아뢸 자료로 삼지 않겠습니까? 生等이 그윽이 心中에 울결(鬱結)되었던 바를 이구동성으로 정계(旌棨)앞에 드리오니 閤下는 여기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옵건대 遇拙堂 曺公 逾와 수암(漱菴) 蔡公, 지면(之沔)은 곧 지난 병자호란 이후로 독학(篤學), 力行한 선비입니다. 일찍이 寒水齋 權선생이 二公의 行狀을 撰하면서 우졸당에 대하여는 “듣건대 공은 매계의 후손이요 牛溪의 먼 외손으로 故家의 遺風을 이어받아 정확한 연원이 있는데 그 고고한 操行과 독실한 공부는 사람마다 미칠 수 없다고 본다.” 하였고, 또 漱菴에 대하여는 “공은 확실히 精博하고 行誼가 뛰어나서 이것이 文辭로 발표되는 데는 진정 내부에 쌓인 美가 밖으로 드러난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아! 한수재선생의 평소 著論으로 보아 사람을 경솔히 인정하는 예가 조금도 없었는데 이 두어 구절의 문자를 본다면 二公에 대한 대체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저 金陵 봉계리는 곧 매계선생의 옛 집터인대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길손들이 曺孝子의 마을이다, 지칭하는 것은 사실 우졸당의 집 또한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老成한 사람의 기량이 있어 그 언어가 진중하고 동작이 차분하였으며, 일찍이 그 조부 묵제공을 모시고 있을 때 마침 보름달이 떠올랐는데 묵제공의 달에 대한 물음에 ”둥근 것은 자루 없는 거울과 같고 밝은 것은 허공에 매달린 등불과 같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화상을 입은 아이를 만났을 때 공이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자 그 까닭을 물었는데 ”그 상처를 쳐다보면 상대방이 반드시 부끄러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 대답하므로 식견 있는 이가 듣고, 그 높은 才思와 두터운 德量을 탄복하였습니다. 겨우 12세가 되어 논어 몇 편과 장구차의(章句箚疑)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통달하였으니 이는 이때부터 이미 經學공부에 뜻을 세운 것이요, 부모의 상을 만나서는 喪, 葬, 祭禮를 일체 朱文公의 家禮에 의준하여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고 잠시도 經帶를 벗지 않았습니다. 이후부터 文章學을 단념하고 다시 소학, 대학, 心經, 近思錄, 尙書 등에 더욱 着心, 조용한 방안에 들어앉아 연구하고 탐색하여 6-7만 번이나 독파하고는 ”이제야 성현의 글의 의미가 심장하다는 것을 알겠다.“ 고 감탄하였으니 그 독실한 공부의 萬一(만분의 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저 그 학문이 성찰로 마음을 수습하는 主要로 삼고 存養(본심을 잃지 않도록 수양 히는 것)으로 덕에 나아가는 기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궁리하여 그 知에 이르고 자신에 돌이켜 그 실을 실천하였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는 세 글자로 일생동안 간직할 지표로 삼았으며,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이르는데 일체 그 極處에 도달하였고, 마음과 생각을 졸이고 모아서 그 실천에 조예가 깊은 것은 전혀 敬, 義에서 流出되고 性, 理를 쫓아 전력한 바인데, 이는 숙종21년(1695) 봄에 道伯이 올린 薦狀에 모두 언급된 줄거리요, 당시의 명류인 修撰 강여희(姜汝희-尸+木)가 ”매계는 참으로 좋은 후손을 두었다.“ 고 칭찬한바가 바로 이를 이른 것입니다. 공의 마음 세우고 몸 닦음을 전혀 검약에 두어 아무리 곤궁하여도 걱정이 없었으므로 연속 別檢의 물망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학행에 대한 실제가 없고 괜히 학행에 대한 허명만 났으니 이 어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 “ 고 하였습니다. 공을 안장할 적에는 큰 새 수십 마리가 온 종일 산소 주변에 오르내렸고 返魂해 올적에는 길 좌측에 맴 돌았으니, 이 역시 기이한 일로 遺風과 餘韻이 지금까지 후학들을 용동(聳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암(水庵)은 成宗과 中宗朝의 名臣 壽의 嫡孫으로 자품이 준수하여 이미 弱冠때부터 老成한 사람과 같다는 칭찬을 받았고, 尤庵, 同春, 白源(申碩蕃의 호)등 여러 선생에게 학문하는 법을 전수받아 마음가짐을 성실, 즉 속임 없는 것으로 주요를 삼았습니다. 한 평생 생활이 너무 쓸쓸하였으나 그저 태연하였고, 글을 보는데는 반드시 그 이치를 탐구하였으며, 송나라 현인들의 글을 좋아하되 朱子大全에 더욱 전력하여 마음 세우고 마음 닦는데 절실한 대문을 뽑아서 이름을 約覽이라 하였고, 그 저서는 되는데로 한 말 같으면서도 모두 性, 理 가운데서 流出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암선생이 써준 致知存養... 二十字는 공의 학문이 어떻다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고, 또 수암이란 액자를 써준 것도 공을 褒賞하는 뜻에서 나온 바이니, 근세에서 경학이 밝고 조행이 독실하다고 지칭받는 선비들이야 어찌 一例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그 천성 또한 지극히 효도로워 어려서 부친과 사별한 것을 늘 상심, 모친을 섬기는데 愛와 敬을 다하여 봉양할 음식을 손수 장만하였는가 하면, 상을 만나서는 상복을 잠시도 벗지 않고 한 번도 침실에 든 적이 없이 삼년상을 마쳤으므로
향리에서 그 극진한 효를 칭찬하였으며, 모친이 병중에 쇠고기를 먹고싶어 하였으나 병에 해롭다하여 섣불리 봉양하지 못한 적이 있었으므로 일생동안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그 효의 일면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잇습니다. 더욱이 감명 깊은 바로 숙종 원년(1675) 黨禍에 우암선생이 海上으로 위리(圍籬)되었을 때 우암선생에게 바친 ”사람마다 繼祖(송나라 宋繼祖가 朱子를 六대죄인으로 몰아부쳤던 고사를 인용)의 비방만 하니 누가 文仲(송나라 孔文仲이 程伊川을 비방하다가 잘못됨을 뉘우치고 피를 토하였던 고사를 인용)의 피를 토하려나. 만고에 변함없는 이 마음, 저 해와 달이 비쳐주리.“ 한 시구는 지금까지 士類들이 傳誦하고 있으니, 공의 賢人을 높이고 吾道를 부호(扶護)하는 심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사적이 겨우 司馬試에 합겨한 것과 장원서(掌苑署)에의 추천 이외에는 있지 않으니 후인들의 存愛하는 정성으로 이처럼 인멸되어 있는데 대한 유감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일찍이 寒水齋선생이 曺公에 대해 개탄해 하기를, ”巖穴에 숨은 선비로 독실한 학행이 그처럼 훌륭한데도 이름이 인멸되어 일컬어지지 않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였고 또 蔡公을 애석해 하기를,”공과 같은 재학으로 일찍부터 大賢의 문하에 종사하였으니 그 성취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끝내 林下에 묻히고 말았으니 이게 무슨 天道란 말인가?“ 하였습니다. 아! 그럼 二公이야말로 어찌 생전에는 그 의지를 같이하고 사후에는 그 유전을 같이 한것이 아니겠습니까? 世道가 쇠미(衰微)하여 正學이 부진한 이때에 生等같이 몽매한 후학들이 陰陽, 消長의 이치를 구분할 줄 알게된것은 사실 二公의 덕택을 힘입은 때문이며, 曺公의 아들 世鵬과 蔡公의 아들 微休도 다 家學을 계승 한수재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여, 선생으로부터 융숭한 勸獎과 가열(嘉悅-아랫사람의 잘한일에 대한 기쁨)을 받았으니, 二公의 학문을 倡導한 공로가 이에 이르러 거쳤으므로 道內의 칭송이 더욱 간절하고 公議의 억울해함이 더욱 더하다가 다행히 閤下가 斯文의 宿德(오래도록 쌓은 덕망)으로 사림의 重望을 모았으니, 遺逸을 탐방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성의와 先賢을 포장(襃獎)하고 후학을 격려하는 의의에 있어 어찌 미천한 賢者를 추천하는 즈음에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데 閤下는 沿道에서 앞을 막고 간청하는 사실을 들어 국정을 의논하는 御前에
주달, 포증(褒贈)하는 恩典을 하루속히 내려 융숭한 은총을 보이게 하시면,
閤下에게도 영광이 될것입니다. 이 어찌 斯文의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生等은 간절히 바라는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英祖 十一年(1735) 二월 二十三일 道內의 儒生 進仕 申鎭經등 二百여명
45.遇拙堂配貞夫人善山金氏行狀
先妣(자기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일컬음)의 성은 金, 本貫은 善山이다.
遠祖는 登極使 諱 漢忠이고 중간에는 보첩이 失傳되어 그 세대를 고증할 수 없으므로 家乘에 기재된 바를 의거하면, 諱 起는 高麗朝에 벼슬하여 廣州牧使에 이르고 諱 可銘은 本朝에 벼슬하여 金山郡守에 이르고, 諱 匡佐는 吏曹參議이고, 諱 就器는 別提이고 諱 공(笻)은 左承旨이니, 이분들은 先妣의 高祖이상이다. 曾祖 諱 錫光은 通訓大夫 尙衣院 直長이고, 祖父 諱 擇善은 宣敎郞이고, 父 諱 震燧는 壽職에 오르고, 모친 坡平 尹氏는 贈 判書 諱 止善의 따님으로 先妣를 낳았다. 先妣는 천성이 검소하고 孝友가 지극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見識과 도량이 뛰어나 言辭나 思慮가 아주 사람들의 상상이외의 것이었으므로 부모가 애지중지하여, “이 아이가 만약 남자로 태어났던들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고 말하고 가내의 모든 일을 일체 선비에게 맡겼다. 우리 先君에게 온 뒤로는 先君이 젊어서부터 古人의 爲己之學(성현의 학)에 뜻을 세우고 방안에 들어앉아 글만 읽을 뿐 생업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선비가 媤母를 섬기는데 조심을 다하고 조상을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가세가 매우 빈한하였으나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다만 媤父를 섬기지 못하게 된 것을 일생의 아픔으로 삼았다. 숙종11년(1685)에 시모의 喪을 만나서는 禮制 이상으로 애통해하고 葬事와 祭祀에 예식대로를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先君의 덕이 집안을 잘 교화시킨 때문이라 하였다. 동22년(1696)에 先君의 喪을 만나서는 많은 자식들을 두고 일찍 홀로된 것을 애통해하다가 이러다가는 이 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다. 그럼 한갓 애통해 하는 것만으로 家事를 폐지하거나 예식을 빠뜨릴 수는 없다. 고 생각하고 명주베며 삼베 등 길삼을 닥치는 대로 착수하여 밤낮없이 온갖 고된 일을 다 하였으며, 제물에 대하여는 일체 미리 준비해두어 한 번도 수용에 어려움이 없었으므로 생활에는 비록 모자람이 있었으나, 제사에는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다. 先君이 별세하였을 무렵에 伯氏가 겨우 伯嫂(큰 형수)를 맞이하고 나머지는 모두 장성하지 못하였는데 先妣가 伯氏에게 바깥일을 맡기고 伯嫂에게 길삼을 맡도록 하여 가계가 이전에 비해 조금씩 나아졌고 이어 여러 형제들의 婚娶도 그 시기를 놓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야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선비는 홀로 된지 38년 동안에 화려한 의복을 입은 적이 없었고 여러 자부가 채색비단으로 지은 의상을 드리면 딱 한 차례 입어보고 농속에 넣으면서 “나는 미망인이다. 어찌 차마 이같이 화려한 옷을 입겠느?” 고 하였다. “내가 너희 가문에 막 들어왔을 적에는 너희 선군의 형제분이 매우 고단하였으나 이제는 많은 가족을 이루었으니, 너희는 서로 조심하고 서로 경계하여 和氣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일렀고 또 여러 子婦에게 “사람의 큰 도리는 조상의 재산을 받드는 일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으니 이는 나의 여러 자부가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할 일이다. 나의 여러 자부는 모쪼록 誠信을 다하여 나의 바라는 바를 저버리지 말라.”고 일렀다. 또 일찍이 불초 등에게 “고인이 과부의 자식으로써 명성이 없는 자와는 서로 사귀지 말라.”고 하였는데 너희는 이미 과부의 자식으로써 배우지도 못하고 名聲도 없다면 어느 누가 너희와 서로 사귀려 하겠느냐? 너희 선군은 그 篤學과 力行으로 草野에 묻혀 아무 걱정이 없었으니, 참으로 賢人이었다. 너희는 마땅히 先代의 아름다움을 본받아 그 유지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한다. 만약 너희가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써 멋대로 행동한다면 이는 나의 부덕을 더 과중 시켜주는 일이다.“ 고 일렀다. 子, 孫, 婦女들을 매우 사랑하면서도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嚴責을 가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가족과 화목하되 恩, 義를 갖추었고 婢僕을 무휼(撫恤-어루만져 도와주는 것)하되 威, 德을 겸하였으며, 不肖 등이 혹 동복(僮僕)을 부리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고 꾸짖거나 회초리를 가할 적에는 선비가 으레 ”신분의 귀천은 다르나 저들도 사람의 자식인데 어찌 가혹한 벌책을 가할 수 있겠느냐? “ 고 일렀다. 일찍이 乙, 丙 2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을 때 한 여자아이가 유기되었으므로 선비가 가엾이 여기어 수양하였는데 그 아이가 장성한 뒤에는 그 外叔이 나타나 찾아갔다. 원래 그 아이는 中庶層의 딸로 빌어먹고 살던 처지였는데 이때 선비가 그 문권을 즉각 소각시켜버리고 따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였으나 先妣께서는 조그만 덕을 끼친데 불과한 것이었다. 不肖가 젊었을 때 빈한한 생활이 지겨워 부귀를 그리워할 적에는, 先妣가 으레 가까이 불러놓고 ”富貴와 貧賤은 본시 천명에 매인 것이니 어찌 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나쁜 의복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복이 될 수 없으니 너는 빈한한 것을 지겹게
여기지 말라“ 고 일렀으니 선비의 엄격하고 정직한 훈계가 거의 다 이런 類였다. 외조부모가 다 高齡을 누렸는데 외조부가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先妣가 좋은 술을 빚어 내내 봉양하였고 별세한 뒤에도 忌日을 기하여 빚어 보내곤 하였다. 여러 아우들을 한 울타리 안에서 살도록 하였는가 하면 막내 世鵬의 집에 기거하면서 ”내가 이 아이를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 先君과 사별한 것이 가없어서 이다. 하였다“ 世鵬이 小科?(小科 가운데 初試나 終試에 합격한 것을 이름)하던 날에는 비감어린 표정으로 ”홀로 된지 30년 만에 이 경사를 나 혼자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였다. 평소 일이 없을 적에는 여러 子, 孫, 婦, 女들을 불러 좌우에 앉혀놓고 古今의 일을 자세히 애기해주는 한편 ”孝友와 화목은 가문을 계승하는 근본이고, 근면 절약은 살림을 일으키는 주요한 방법이니, 너희는 제발 이 점을 유념하여 나의 소원에 부합되도록 하라“ 고 으레 친절히 이르곤 하였으며, 아무리 초라한 살림이었으나, 꼭 평등하게 분산해 주고야 말았고,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꼭 골고루 나누어 먹고야 말았다. 매년 생신을 맞이하여 不肖등이 음식을 마련하자고 청하면 ”나 혼자 구차히 살고 있는 처지에 어찌 차마 술잔을 받겠느냐“ 고 굳이 저지시키고는 다만 여럿이 돌아가며 한 끼씩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여 네 아들과 여덟 손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회식하면서 ”너희가 이처럼 한 상에서 식사를 들고 있으니 나는 저절로 배부를 뿐이다“ 고 기뻐하였다. 연세는 비록 높았으나 정신이 이내 왕성하였으므로 不肖등이 모두 百歲의 上壽를 빌었는데 영조8년(1732) 가을에 불행이 복병을 얻어 3년 동안의 신고(呻苦) 끝에 증세가 점차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짐작하고는 가끔 불초 등을 불러서 ”나는 이제 나이가 80이 넘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니 너희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죽거든 염장(殮葬) 제전(祭奠) 등 절차에 있어 모쪼록 형편에 맞추어 검소하게 치를 것이요, 괜히 겉 치례를 힘쓰다가 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나의 이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영혼이 없다고 여기는 일이다“ 이르곤 하였는가 하면 운명을 슬퍼하지 않았고 정정이나 언어 또한 錯亂된 바가 없었다. 이해 섣달그믐에는 돌아오는 정월 초하루를 여전히 기억하고는 ”내일 아침에 선대의 제사를 모시게 되느냐“ 고 묻기에 불초가 어머님의 병환이 이러하므로 제사를 궐(闕)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제사란 人道의 가장 큰 관건(關鍵)이니 반드시 정성과 정결을 다하여 궐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운명하던 날 저녁에는 여러 子, 孫, 婦, 女들을 불러놓고 고개를 돌려 두루 돌아보기에 불초 등이 유언을 청하였더니, “너희는 잘 있으라.“ 는 한마디 말만을 남기고 반드시 돌아누워서 별세하였으니 동 9년(1733) 정월
4일이었다. 아! 절통하다. 어찌 차마 말하랴. 先妣는 효종 2년(1651) 10월 16일에 나서 22세에 우리 선군에게 왔다가 그 뒤 25년 만에 선군을 여위었고, 다시 38년 만에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 先妣는 孝道로 시모를 섬겨 賢婦가 되고 柔順으로 夫君을 섬겨 賢夫人이 되고 恭儉으로 자손을 가르쳐 賢母가 되었는가 하면 仁과 善을 쌓고 四德(婦德, 婦容, 婦言, 婦功)을 겸비하였으니, 이 어찌 역경에서 이른 ”坤道란 먼저 주창하여 만물을 성취하는 수는 없으나 乾道가 먼저 주창한 뒤에는 坤道가 대신해서 그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 의의가 아니겠는가? 이해 2월 24일에 本郡 서쪽 봉계리 箇同山 乾坐에 권폄(權窆)되었다가 11월 8일에 堂洞 酉坐에 천정(遷葬)되었으니 이곳은 梅溪선조의 옛 집터가 있는 뒷산이요, 남쪽으로는 先君의 묘소가 있는 放牧里와 1리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은 不肖가 墓下에 머물러 執喪하는 가운데 哀慕하는 마음을 금할 길 없어 先妣의 언행을 우선 대충 기록하여 앞으로
大君子의 立言을 기다리는 바이요. 孫錄에 대하여는 이미 선군의 行狀에 자세히 언급되었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망극할 뿐이다. 아! 절통하다.
不肖子 世龍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46.訒齊公 諱 世龍 墓表 (通訓大夫認齋公碑文 譯)
公의 諱는 世龍, 字는 泰如, 號는 認齋, 本貫은 昌寧인데 新羅時代에
諱 繼龍 封號 昌城君이 그 始祖이고 本朝에 와서 諱 偉는 세칭 梅溪先生으로 諡號는 文莊道學과 文章으로 當世에 首位가 되었으니 바로 公의 六世祖이다. 高祖 諱 胤禧는 禮賓寺正인데 壽職으로 通政大夫品階에 올랐고 曾祖의 諱는 瀷, 祖父의 諱는 悌昌이고 父親의 諱는 逾
號는 愚拙堂인데 學行으로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母親은 贈貞夫人 善山金氏로 護軍 震遂의 따님이다. 公은 肅宗二年(1676)四月十七日에 태어나서 英祖十一年(1735)二月十九日에 別世, 이해 四月十九日에 黃間 馬岩山 酉坐에 安葬되었으니 이는 先代의 墓가 이곳에 있는 때문이다. 公은 침착한 천성에 操行이 단정하였고 집에서는 孝友로서 先代의 遺德을 계승하였다. 더욱이 聖賢의 글을 좋아하여 손수 베끼고 외워서 그 뜻을 탐구하였고 아우인 進士 世鵬과는 道義로서 서로 講磨 형제와의 和樂이 진지하였다. 그리고 寒水齋 權先生의 門下에서 學問의 지표를 체득하였고 일생동안 言論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尊敬하고 복종하였다. 父親喪을 만나서는 禮制(喪禮에 관한제도)를 엄수하다가 여위어 病이 되었으나 몸에 喪服을 벗거나 반찬에 양념을 쓰지 않았고, 母親의 喪을 만나서는 연세가 六十이었으나 執喪절차를 일체 父親의 喪과 같이하여 小祥이 지나도록 고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지병인 嘔逆症에다 元氣허약으로 火가 발작하여 끝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英祖四年(1728)에 李隣佐의 역모에 관한 변란이 道內에서 일어났을 적에는 本쉬(본읍의 원)를 찾아가 대비책을 激勵(격려하여 권하는 것)하고 손수 倡義文을 지어 변란에 나설 계획을 세웠으나 모친이 年老하여 公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므로 이를 결행하지 못하였다. 이상이 公의 일생에 가장 큰 志行이고 그 나머지는 그만 생략한다. 夫人 安東金氏는 進士 潭의 따님으로 二男一女를 두었고 長男 䨦은 冶隱의 後孫 吉重龜의 딸을 맞이하여 四男一女를 두었고, 次男 박(못 박)은 冲庵의 後孫 金世秋의 딸을 맞이하여 一男二女를 두었고, 따님은 光山金湜에게 출가하였다. 나는 進士君(世鵬)과 同門의 友誼가 있다. 하루는 進士君이 公의 行狀을 서술, 아울러 便紙를 보내어 그 墓表를 請하면서 先生의 行誼가 인멸되어 가는 것이 매우 애석하다고 하였다. 나는 본시 글재주도 졸렬하지만 세속에서 行狀이나 墓誌를 작성하는 자들이 괜히 없는 사실을 늘어놓다가 도리어 後世의 고증이 되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나머지 公의 行狀에서
그 큰 것만을 들어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럼 進士君의 서술이 절대 그 兄을 과찬한 것이 아니고 또 나의 글이 이처럼 質實하니 거의 德을 아는 이의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南塘 韓元震이 撰하다
*南塘 韓元震【1682(숙종 8)~ 1751(영조 27)】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발전시켰다. 권상하 문하의 강문8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