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커튼 자락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온 바람은 일상의 세계를 판타지의 세계로 바꾸기 시작한다. 벽을 메운 꽃무늬 벽지에 바람이 닿자마자 잠자던 꽃들이 하나 둘 살아나기 시작한다. 무늬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황금색 꽃무늬가 탐스런 꽃송이로 피어나고, 꽃송이는 나비를 불러온다. 바람이 샤샤 소리를 내며 풀밭 사이를 스쳐 가면 어디선가 얼룩말이 역동적인 줄무늬를 뽐내며 달려온다. 얼룩말이 목을 축인 강물에 살며시 바람이 스치고 부드러운 물결 무늬가 나타난다. 책장을 넘기면 물결 무늬를 흔들며 물고기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쳐 온다. 이렇듯 하나의 무늬가 또 다른 무늬를 불러오고, 하나의 이미지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연상을 통해 아이들은 어느 새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 책은 하나의 무늬를 보고 연상되는 사물을 떠올리는 연상 놀이 그림책이다. 아이들은 이 책을 보면서 즐거운 연상 놀이를 이어 가며 이미지의 연상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아이들이 판타지로 빠져들 때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이다. 어른이 안내하는 판타지의 세계가 허술한 것을 눈치채면 아이들은 뒤쫓아오지 않고 돌아가 버린다. 따라서 아이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현실과 판타지를 이어 주는 끈을 놓치지 않도록 치밀하게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현실과 판타지를 매개하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벽지의 꽃무늬를 살려 내고, 풀밭을 스치고 지나고, 물결을 찰랑 일으키고, 먹구름을 몰고 오고, 그리고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바람이 건드리고 지나간 무늬는 얼룩말로, 물고기로, 거북이로, 앵무새로, 그리고 무당벌레로 살아난다. 그림을 세심하게 살펴본 아이라면,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하늘에 구름이 점점 많아지고, 동물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가롭게 꽃 위에 앉아 날갯짓을 쉬던 나비와 달리, 얼룩말도, 물고기도 어디론가 달려가고 헤엄쳐 가고 있다. 심상찮은 기운은 거북이들이 숲으로 가면서 뚜렷해지는데, 거북이들이 향하는 숲 위로는 먹구름이 잔뜩 덮고 있다. 앵무새들의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이어 드디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툭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무당벌레가 놀라 날아가고, 동물들도 모두 사라진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면, 꽃무늬 벽지 속에 숨어있는 동물들. 비를 피해 벽지 속으로 숨어든 것일까? 판타지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현실의 공간은 이미 처음의 그곳이 아니다. 언제든지 판타지와 맞닿을 수 있는 신비로운 장소로 남는 것이다. 이제까지 판타지의 세계에서 만났던 동물들이 현실 속으로 숨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결론을 열어 두는 작가의 재치가 아이들을 판타지 세계로 안내하고 아이들은 즐거운 상상 놀이를 이어 갈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안윤모는, 그림책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동안 미술계에서 상상력과 기지가 번득이는 다양한 세계를 보여 주는 화가, 원색의 간결한 도상으로 재미있고 쉬운 일러스트를 만들어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메시지를 순발력 있게 표출시키는 솜씨가 돋보이는 화가로 평가받아 왔다. 이 책은 독특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안윤모의 첫 번째 그림책이다. 안윤모는 원시 미술, 어린이 미술, 낙서화 등에서 봄직한 형상들을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여 그려 낸다. 흔히 원시 미술과 어린이 미술이 아직 미술에 관한 규범이나 관념 및 기교들에 물들지 않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꾸밈없고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안윤모는 어떤 고정 관념과 선입견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고, 그런 그가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순수한 어린이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미지의 연상으로 이어 가는 이 책에서 화가 안윤모는 얼룩말, 무당벌레, 거북이 등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무늬들을 자기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그려 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아이들은 보면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그림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세심한 글이 그림의 세계로 더 쉽게 안내하고 있다. 나비, 얼룩말, 거북이 등 사물의 이름을 그림과 맞춰 보는 재미를 주고 있다. 또한 시적인 운율과 "나풀나풀", "푸드덕푸드덕" 등 아이들의 입말에 맞는 의성어가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