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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브릿지 미니스트리 원문보기 글쓴이: israel
8월 1일 : 영적 아마추어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기를 마치고 (마태복음 11:1)
*예수님이 ‘가라’ 또는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것을 왜 따르지 않을까요?
(A)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자세 =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에 촛점: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성도의 가장 주된 문제는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을 다 안다!”라는 교만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방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라’ 고 한 때와 ‘머물러 기다리라’고 하시는 때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방법만을 고집하며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 경험보다 주님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자칫 자기 경험을 더 신뢰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의 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변화산상에서 놀라운 것을 본 세 명의 제자 중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눅 24:49)라 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막 예수님을 떠나갈 때에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 습니다. 바로 베드로처럼 성도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영적 섭리의 아마 추어 노릇을 하려는 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제는 변화산 아래로 다시 내려 가실 때가 됐습니다. 더 이상 변화산상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는 ‘가라’고 하실 때와 ‘기다리라’고 하시는 때를 온전히 분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 프로페셔널은 예수님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요, 영적 아마추어는 상황과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늘 예전에 듣던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새로운 영적 지경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늘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도가 편협한 영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다양하게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만나주시는 방법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를 늘 새롭게 하시려고 다양하게 만나주십니다
(B)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방법 =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에 촛점: 예수님도 다양한 방법으로 아픈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만 고치시고, 때로는 안수하여 고치시고, 때로는 침으로 흙을 발라서 고치시고,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기도를 하고 고치셨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의 친밀함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데로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주님의 음성에 촛점을 맞추어 삶을 살고, 사역을 하고,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자기 고집대로 살지 않고,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에 촛점을 맞추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를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시키기를 원하 시기 때문에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려고 합니다. 만약 성도가 다양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에 있는 것 입니다.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힘들어서 침체상태에 빠지시 겠습니까? 아닙니다. 성도들이 다양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침체된 영적 상태로는 주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성도를 늘 새롭게 만들어 가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점검 질문:“예전보다 더 다양하게, 더 깊이 주님을 경험하고 있는가?”
8월 2일 : 환난의 훈련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성도가 환난가운데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 존재가 됩니까? 상식 vs 십자가
(A)성도가 실패하는 이유 = 상식에 근거한 삶을 추구: 오스왈드 챔버스는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 상식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라고 말합니다. 룻기의 나오미의 가족은 흉년을 만났을 때 ‘상식’을 따라서 모압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상식을 따라서 모압땅으로 간 결과는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고, 모든 재산도 탕진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상식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반면에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상식’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들어갑니다. 십자가를 따라간 결과는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를 만나고 나오미의 가문이 새롭게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성도가 상식에 따라 살면 살수록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세상은 상식에 근거해서 말하기를 “더 많은 지식, 돈, 명예, 권력을 가져라!”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지식, 돈, 명예, 사람들의 인정 등을 더욱더 많이 가지라고 말합니 다. 그런데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계속 불안감을 심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더 두려움에 휩싸여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결핍된 마음상태에 빠져가게 됩니다. 더 많이 가졌는데, 더 불행해지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B)십자가가 아닌 상식을 따르는 삶의 열매: 상식 즉 자기 경험과 지식, 사람 들의 합리적인 생각과 충고에 따라 살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형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상식은 영적, 육적 결핍으로 이끄는 장본 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육신의 상태였습니다. 사실상 사라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를 얻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습 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다른 여자,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얻으려 고 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의 자녀인 이삭을 괴롭히고 핍박한 것은 상식적으로 행동해서 얻는 이스마엘 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식의 결과물인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주님은 명령 하셨습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자기 상식으로 얻는 결과물은 내쫓김을 당해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서도 자기 상식으로 하는 헌신과 봉사는 내쫓김을 당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자기 상식적인 신앙의 내용물들은 다 내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약속이 내 삶에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성도를 더욱 더 ‘결핍’(lack)가운데 빠져들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꾸 ‘상식’으로 살면 육체의 썩어질 것을 자꾸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그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염려, 걱정, 근심, 시기와 질투 입니다. 즉 성도들이 이방인들처럼 세상적이 되어갑니다. 이런 성도의 삶에는 영적 어둠의 결과가 늘 따릅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는 육체에 썩어질 것을 자꾸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에다 심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상식적으로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성령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정죄하면 성령의 열매가 온전히 맺힐 수 없습니다.
*자기점검질문: “내 삶을 지배하는 ‘상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8월 3일 : 강권하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 18:31)
*하나님의 때(time)를 온전히 분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A) 하나님의 때를 분별치 못하는 이유 = 자기 영광을 추구: 예수님의 형제들 은 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모이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을 나타내라고 재촉했습니다. 즉 자신이 더 유명세를 타도록 능력을 보일 좋은 기회라고 설득하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요 7장).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가 원하는 데로 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 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려 한다”(요 5:30)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초막절에 자기 뜻대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 내가 원하는 때에 일하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께 전혀 영광 돌려지지 않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사역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을 추구한다면 유월절이 아닌 초막절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을 선택해서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전혀 계수(count)하지 않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성공이던 실패이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time)에 일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에 당신은 서 계십니까?
(B)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것의 중요성 = 하나님의 영광 추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신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 를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시험의 하나가 바로 가나안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신뢰했습 니다. 하나님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더 신뢰했습니다. 가나안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이 당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으로 올라가서 정복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직접 실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고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또 가나안에 올라가겠다고 하며 올라갑니다. 모세가 이미 하나님의 때가 지나갔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올라갑니다. 완전히 패배합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 땅의 성도들도 “언제든지 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며 자기 뜻대로, 자기가 원하는 때에, 자기 방법대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나사로에게 가지 않고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서 이틀을 더 계시다가 나사로가 죽은 4일이 지나서야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갑니다. 왜 일까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는데 바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 마땅 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2일을 더 기다리시다가 죽은 나사로에게 가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 하시기를 “이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 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 복음 11:4)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인정과 상식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도록 빨리 달려가서 기도를 해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실상, 마리아와 마르다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이 계셨다면 자기들의 오빠,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원망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받도록 환경을 조성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때’에 나사로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가운데 있던 나사로를 생명으로 무덤에서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생명 주시는 하나님으로써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받는 기회입니다. 상식과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누가 못받겠습니까? 모든 사실과 상황보다 더 크고 더 높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심을 믿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에만 하나님 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부어집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분별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8월 4일 : 하나님의 동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 (누가복음 18:31)
*하나님은 성도를 동역자로 부르셨는데, 그런 동역자의 특징은 무엇일까 요?
(A) 하나님의 동역자된 자들의 고백 = “나는 할 수 없고 주님이 하신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동역자의 특 징을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나는 무익한, 무가치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목적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목적 성취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성을 깨닫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택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만 관심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때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연적 소질, 성품, 자식 , 경험들과 같은 자원을 가지고 자력 으로 선한 존재가 되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소용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원의 무가치 함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원만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중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신앙관계에 중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과의 신앙관계에서만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열매 맺게 됩니다. 주님중심으로, 주님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B) 하나님과의 동역 = 자기 스스로의 열심이 아닌 주님의 뜻만 추구: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하나님에게 유용한 존재이지, 그리고 내가 없으면 하나님께는 큰 손실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유능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온전히 구하지 않고 자기 능력과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기에 자기 스스로 열심히 사역을 합니다. 사역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아이러니 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과 같이 일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수 (count) 하는 때에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일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31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당신곁에 동역자들을 불러 놓으시고 말씀하시고 같이 행하십니다. 나의 행함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행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내가 예수님의 뜻을 매일 매일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계속적으로 친밀한 관계 가운데 이해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주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알고 계신다!”는 마음의 감동을 받고있는 것이 동역자가 된 증거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제자들을 ‘종’이라 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시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관계처럼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하나님과 동역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8월 5일 : 우연과 섭리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들은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누가복음 18:31,34)
*성도의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복잡한 사고와 생활 vs 단순성과 여유
(A)성도의 영적 성장의 증거 = 단순성: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성도의 삶은 더 단순성과 여유감이 충만해집니다. 현재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에서 단순성과 여유감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도 점점 복잡해지고, 재정관계도 점점 복잡해지고, 생활도 왠지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것은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침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생각이 복잡해질까요? 성령의 감동으로 순종할 부분에 대해서 육신적으로 불순종 하고 있는 부분이 마음가운데서 갈등관계가 계속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 불순종에 대해서 합리화할 구실을 찾기 때문에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자꾸 사람의 믿음과 사람의 선함과 희생을 강조 하는 윤리적, 도덕적 설교와 이해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사람의 믿음과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 십자가상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과 구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희생적인 태도는 복음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따라죽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의 선함은 무가치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단순하게 주님께 순종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되기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복잡하다는 것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부분 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복잡하게 생활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복잡하게 말씀 하시지도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도에게 감동을 주시면서 단순명쾌하게 '예(yes) ‘ 아니면 ’아니요(no)’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 중간에 회색 지대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B) 복잡한 사고와 생활의 원인 = 인간적 관점으로 주님의 역사를 판단: 사람 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실패 그 자체입니다. 주님 은 사람들앞에서 십자가상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대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 의 목적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인간적 관점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이해 하려고 한다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 태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이 우리르 그의 목적 성취에 담아 놓고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들이 무엇인지 찾아 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해 가노라면 이 일이 점차 쉬워진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이 이일 저일을 일어나게 하였을까?’라고 묻는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든 일 뒤에는 하나님의 통제력이 작용하고 있다. 즉 우리들의 목적을 다듬어 가는 신령한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굳게 믿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적이해 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단순성과 여유감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점검질문: “나의 생각과 삶은 단순명쾌한가? 아니면 복잡한가?”
8월 6일 : 기도의 십자가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 16:26)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와 십자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A)기도의 목적 = 십자가앞에서 하나님과의 일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늘 초대하는 영적 지성소가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혼연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늘 이루려는 것입니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려면 영적 지성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앞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응답해주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사는 존재 이다”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통과하여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응답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B) 기도하는 이유 = 예수님과의 친밀한 밀착관계: 기도에 대한 주님의 약속 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성도가 기도하는 이유가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 하고 가장 우선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응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라. 당신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이유가 있다는 것과 그 이유가 당신에게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기도하는 마음의 동기 ( motivation)가 중요합니다. 기도응답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예수님 자체이어야 하는 데, 기도응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기도 이므로 하나님의 임재(=하나님의 응답)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응답이 없이 수년, 수십년을 신앙행활하다보니 자기 생각, 자기 상식으로 생활하는 육신적 삶이 생활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기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8월 7일 : 내 아버지의 집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9)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일 =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삶된 것: 주님을 찾아 헤매던 부모님에게 주님은 말씀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눅 2:49)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기도하거나 주님께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늘 우리가 주님과 거룩한 교제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려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늘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정, 직장, 학교 등에서 늘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땅에 있는 교회, 가정, 학교, 직장, 나라와 사회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할 때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관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통로가 됩니다.
(B) 하나님의 일 =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는 것: 오스왈드 챔버스는 “우리 주님의 대속적 생애가 당신의 단순한 신앙 생활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람가운데 사셨던 그 생활방법이 당신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의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생명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구속의 은혜로 살아가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삶가운데서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내 삶에서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하는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그리고 사회생활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 와는 상관없는 자기 나름데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믿음안에 있는 신앙생활인지를 점검하라!” 라고 말합니다. 믿음안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방법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서 계신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한다면 믿음에서 실격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실격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증거가 없다면 믿음생활에서 실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생활에서 실격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도 끊어진 사람이기에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 일은 내 안에서 살아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움직이게 해드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 찾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움직이는 데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종교적인 일에 열심인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가?”
8월 8일 :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기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누가복음 1:3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24)라고 사도바울이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A) 주님께 영광돌리는 길 = 몸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은 이제 성도의 삶과 마음가운데 거하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소개된 것이 사실이듯이 모든 성도에게서도 체현적 사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해 내 속에서 태어 났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도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성도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살아계심이 성도의 몸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의 몸을 통한 주님의 드러나심은 십자가의 길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성도의 몸과 삶을 통해서 증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는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증거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능력과 열성이 증거됩니다. 사람이 증거될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온전히 세워지지 않습니다.
(B)주님께 영광돌리는 길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으로 동참: 골로새서 1:24에서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성도가 기꺼이 십자가의 길에서 지고 나아갈 때에만 가능함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아직도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역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 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겪고 계시는 고난을 자기 몸에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으로써 이 땅에서 주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 고난을 몸으로 동참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돌리는 길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내 몸을 주장하는가? 주님이 내 몸을 주장하시는가?”
8월 9일 : 아버지가 들으시는 기도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요한복음 11:41)
*성도가 ‘상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A)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식 VS 상식으로 인식: 오스돨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기도할 때에는 한 가지 의식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기도를 항상 들으신다. 아버지의 아들이 내 속에 형성되었다면 아버지는 내 기도를 항상 들으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 육신속에서 드러나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삶과 몸에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상식’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상식이 참견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한 쪽으로 몰아내는 일이 절대 로 없어야 한다. 상식은 하나님이 인간본성에 주신 선물이지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아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초자연적인 감각이다. 상식을 왕좌에 앉혀서는 않된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나 상식은 아버지를 결코 식별하지 못한다”라고 합니다.바로 성도의 삶속에서 ‘상식’을 삶의 왕좌에 앉히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몸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성령의 성전 이라 고 말합니다. (고전 6:19) 따라서 성도는 몸을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드러내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것처럼, 성도는 성전된 ‘몸’을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상식을 따라 행하게 되면 예수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B)사람의 상식의 뿌리 = 자아(self): 상식은 자아(self)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나온 것은 다 부인(denial)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생긴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한 내용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은 상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과 길을 인식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거듭난 ‘나의 영‘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식하여 하나님의 의식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서 일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해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성도의 삶과 성도의 영적 생활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인식해야만 가능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되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온전히 인식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들으시는 기도역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인식함 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늘 변화 받아야만 하나님의 생명되신 주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상식’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초자연적인 감각을 사용하는것을 가로막는 주된 이유 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말씀을 성령으로 이해하나? 지식적으로 이해하나?”
8월 10일 : 고난의 단련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베드로전서 4:19)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과 ‘자기연민’은 어떻게 다릅니까?
(A)하나님의 일 = 하나님 사랑으로 행함: 오스왈드 챔버스는 “고난을 택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록 고난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고난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다.”라고 말합니다. 일부러 고난을 택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스럽던, 아니던간에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적인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억지로 일부러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 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연민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은 동정(연민)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하여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위하여 중보기도할 때, 무조건 육신적으로 좋은 방향을 위해서 기도하면 동정과 연민 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단지 문제해결을 위해, 사업번창을 위해, 건강회복을 위해서 하는 기도들 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정적, 연민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돈의 우상’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사업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OO집사님의 사업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육신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을 때, 3년이 라는 흉년이 오도록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가 “내 남편(내 자녀)이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남편 사업도 망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까? 마귀가 그 한 영혼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돈, 명예, 권력으로 묶어놓고 있는데, 여전히 그런 것을 유지하면서 구원도 받게 해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되는 생각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난해질까봐 두려 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실현=구원과 치유를 위한 온전한 기도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으신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온전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극히 인간적이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되는 방향으로 기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B) 하나님의 생각가 원수되는 것 = 연민과 동정: 예수님은 자기 연민(self-pity)은 마귀에게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3) 그래서 참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남을 동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것을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사람의 생각으로 연민의 감정을 가지 고 동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인간적인 동정심 뒤에 바로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아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자기 연민’ 으로 인해서 방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동정과 연민을 받으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예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가장 쓸모없는 장소 에 놓고 삶을 낭비하게 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있게 한 것은 내게 그만큼 유용하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시간을 자기연민 때문에 거부하거나, 고난의 시간가운데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높은 뜻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사랑은 자기연민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을 따라 기도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선’을 행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사랑인가, 동정인가?”
8월 11일 : 받아야 할 체험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열왕기하 2:12)
*성도에게 있어서 진실로 참된 스승과 참된 제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A) 영원한 스승 = 예수 그리스도: 성도는 살아가면서 엘리야와 같은 의지할 만한 영적 스승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스왈드 챔버스는 “당신이 엘리야에게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한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가야만 할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때는 엘리야가 당신의 길잡이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계속 머물러 있게 하여 당신이 항상 그만 의존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당신은 ‘나는 엘리야 없이는 계속할 수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엘리야 없이 계속해야 된다고 말씀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좋은 스승은 크나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스승을 만나 같이 다니면서 영적인 주의 종으로 훈련받고 성장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 입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만을 받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스승삼아서 걸어가야 할 날이 온다는 것 입니다. 즉 엘리야 스승을 따라다니며 배운 것들을 이제는 직접 하나님을 의지해서 실행해 보아야 하는 믿음의 테스트에 직면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 믿음의 테스트 현장에서 영적 스승인 엘리야를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혼자서 행해야 합니다. 비로서 이 일을 주님과 같이 홀로 행하고 나서 선지자 엘리사로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B)참된 스승 = 주님께 자리를 돌려드리는 사람: 디모데후서 4장3절은 “때 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참 스승은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때에 엘리사에게 자신에게 있는 능력의 갑절을 부어주고 주님께로 가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해주는 스승을 많이 둘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특히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보다 자기의 육신적 욕구를 살살 긁어주는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스승을 많이 둔다는 것입니다. 참 스승은 엘리야처럼 주님께 들려올라가서 더 이상 제자 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자인 엘리사는 더 이상 스승인 엘리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스승 엘리야와 같이 걸어왔던, 행했던, 경험했던 일들을 그대로 실천하게 됩니다. 갑절의 능력으로 역사가 일어 납니다. 참 스승은 진실로 제자를 자기의 종(slave)을 삼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 제자는 스승을 자기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합니다. 스승이 주인이 아니요, 제자가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나의 영적 아버지’라는 식으로 부르지도 말고, ‘나의 영적 스승’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 모두의 아버지요, 예수님이 성도들 모두의 ‘선생’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성도 모두의 아버지가 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 모두의 ‘선생’되셔야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몸과 삶을 통해서 성취되어지십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는 하나님이 중심되시는가?”
8월 12일 : 휴식의 신학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의 신학)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 하시고 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마태복음 8:26)
*믿음과 기도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A)벼락치기 기도 = 믿음부족의 증거 : 오스왈드 챔버스는 “우리는 무서우면 하나님께 다급한 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자기를 꼭 믿기 때문에 어떤 위기에서도 신뢰감을 갖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한계가 지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올리는 유치한 벼락기도를 한다. 우리는 당황하면 하나님과 그의 세상 지상권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전무하다는것을 드러낸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는 벼락기도는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위기에 반응하는 성도의 모습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위기가 오면 실제로 누구를 신뢰하고 있는지,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지가 드러 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 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기도가 믿음있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주님께 부음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기도를 한 사람은 믿음으로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차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선택하면 성도에게는 불투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자기 존재기반 (돈, 직업, 명예등,,,)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 목숨을 계속 버리는 선택의 길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자기 존재기반을 버리고 하나님 자신을 나의 존재기반으로 삼는 영적 활동입니다. 기도를 많이해도 내 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면서 육신적으로 기도하면 그런 기도는 영적인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마귀가 틈타고 역사하는 구실을 주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과 친밀해지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육신적 기도입니다.
(B) 주님이 허락하신 위기 = 믿음이 성장하는 자양분 : 위기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라는 세상의 매세지에 넘어지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잘 알듯이 예수님은 풍랑이 몰아치는 순간에 배 아래에서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성도는 위기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배 아래에서 잠을 자며 안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안식 하는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위기는 성도의 삶의 기반, 교회의 삶의 기반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시간이 됩니다. 위기가운데서 주님을 더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위기가운데서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의 외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짊어지려는 온전한 기도만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도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자기존재기반을 늘 버리며 살고 있는가?”
8월 13일 : 성령은 미풍처럼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 전서 5:19)
*현재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A)현재의 사람인가? 과거의 사람인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당신이 빛 속 에서 걷고 있다면 어제를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 과거는 현재 갖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신비속에 전류되어 있다. 빛에서 벗어나면 당신은 감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추억에 살게 되며 당신의 간증은 딱딱한 금속음을 내게 된다. 과거에 빛 속에서 걸었던 경험이 있다고 현재 빛 속에서 걷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현재 빛 속에서 걷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과거의 추억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추억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간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빛과 생명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간증을 듣게 됩니다. 간증은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진짜 간증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일을 나누는 것입니다. 성도는 ‘현재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울왕도 많은 간증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현재’시점으로 따라가기를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안에 거하시면서 늘 미풍처럼 성도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엉뚱한 장소로도 이끄십니다. 빌립 집사님을 사막으로 이끌어서 마침 이사야서를 읽으며 에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던 내시에게 이사야서에서 말씀 하시는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증거하게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빌립집사님을 바람처럼 데려고 가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이렇게 성도를 이끄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다윗’처럼 ‘현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했습니다. 다윗은 다윗의 장막을 짓고 24시간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세우고, 자신도 주님을 늘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했습니다. 밧세바와 의 간음으로 인한 범죄를 회개하면서도 ‘성령이 떠나가실 것’을 가장 두려워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늘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현재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과거 를 간증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간증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은 살아서 성도들에게 ‘현재’시점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예수님을 성도는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현재의 예수님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와 현재시점으로 사시는 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당신이 계속 성령을 거스리면 위기는 반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성령을 너무 거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를 통과하면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터져나온다. 하나님을 항상 찌르는 일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현재시점의 예수님을 간증할 수 있는가?”
8월 14일 : 징계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히브리서 12:5)
*하나님의 징계와 마귀의 공격은 어떻게 다릅니까?
(A) 하나님의 징계 = 성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와 마귀의 공격을 분별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징계는 그 목적이 성도의 ‘성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로써 그 자녀들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으시는 분입니다. 또한 아이를 해산하는 고통으로 성도를 낳으신 분 이십니다. 그렇게 사랑함에도 징계하시는 이유는 성도의 영,혼,몸이 온전히 거룩하게 보존되어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전 5: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부모님의 회초리처럼 영적으로 바르게 설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회초리는 아프지만 ‘폭력적으로 행사되는 공격’ 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라면 징계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돈, 명예, 권력’등을 추구하기를 쉬지 않는데, 만약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가 없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면서 삶이 만사형통하고 있다면 축복받은 사람일까요? 물론 교회도 나가고 헌금도 잘하고 봉사도 잘해서 축복받은 사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추구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가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예 없었거나,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녀하면 당연히 징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를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 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 에게는 징계가 아닌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B)마귀의 공격 = 혼란과 불신조장: 마귀는 성도들에게 거짓증언(예: “그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이다!”)을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폭력적인 분으로 왜곡시키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는 폭력적으로 성도를 괴롭히고, 또한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성도의 생각을 혼란시킵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 할수록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아가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이 점점 사라지고 단순하고 명쾌하게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성도로써 어떤 사람이 생각이 늘 복잡하다는 것은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부어주시는 축복의 통로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마귀의 공격속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을 훈련하고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의 공격을 감당할 만한 한도에서 허락 하시는 것입니다. 군사가 되려면 마귀와 마귀의 공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마귀와 죄로 부터 구출 하는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점검질문: “현재 나의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인가, 마귀의 공격인가?”
8월 15일: 신생의 증거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요한복음 3:7)
*성도의 ‘거듭난 증거’와 ‘예수님을 아는 것’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A)거듭난 증거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성도의 신생(중생)은 의식적인 회개와 무의식적인 거룩으로 드러난다”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성도의 거듭남의 증거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자신이 ‘죄인됨’이 고백되어지고, 이 회개의 고백의 과정에서 성도는 무의식적으로 거룩을 사모하는 본성이 성령을 통해서 부어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즉 목회자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Knowing about Jesus)을 ‘예수님을 아는 것’(Knowing Jesus)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 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내적 지식 = 개인적 인격적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적용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끔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짓기를 멈춘 사람이 성도입니다. (요일 3:9) 우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육신이 연약하여 죄의 부리에 넘어지는 실수를 범할지 모르지만 성도의 영혼은 더 이상 ’죄‘를 추구하지 않고, ’죄‘를 즐기지도 않는 거룩한 본성가운데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본성으로 변화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며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죄를 즐겨 추구하는 사람은 거듭난 증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분명히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현재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거듭난 증거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일주일 내내 ‘죄’를 즐기면서 살다가 일요일에 교회 가서 회개하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은 거짓된 생각이요, 자신의 삶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심각한 거짓입니다. 성경은 아내와 남편이외의 사람 과 관계하는 자, 성도라고 하면서 점쟁이를 찾는 자, 술을 즐겨 마시고 취하는 자와 같은 사람들, 특히 간음과 음행을 즐기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5:10, 6:10)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성령의 신령한 것을 맛본 적이 있다고 해서, 삶의 변화는 없지만 그 체험이 자신의 거듭남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방언을 하거나, 강력한 성령의 회오리에 쓰러진 적이 있다거나, 우울증을 치유받은 적이 있다거나 해서 자신이 거듭난 사람임에 분명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고침받은 10명의 문둥병자를 보십시오. 10명의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의 치유의 빛이 임했지만 오로지 1명만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빛을 잠깐 체험했다고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생각은 ‘신생(중생)’에 대한 오해입니다. 죄인으로 주님앞에 나와서 죄사함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B) 거듭난 과정 = 빛이 어둠을 몰아낸 심령: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생명의 빛이 임하여 어두움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은 바로 ‘죄’(SIN)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빛이 비춰서 마음으로 ‘죄인됨’ 이 고백되고, ‘죄사함 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인해서, 성령을 통해서 나의 죄로 인해 죽었던 ‘영’(spirit)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이 성도안에 살기 시작하시면서 거룩을 따라가는 새 마음을 불어넣어주시기에 거듭남의 증거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인생이 변화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의 인생이 변화된 것과 같은 거듭남 = 중생(Born again)의 증거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이 거듭남의 증거가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빛과 생명이 들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나의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인가?나는 예수님을 만났는가?”
8월 16일: 주께서 나를 아시는가?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요한복음 10:3)
*성도가 예수님을 온전히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 vs 성령님
(A)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의 차이점: 오스왈드 챔버스는 “모든 교리를 다 알고 도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교리의 지식이 예수님과의 밀접한 교제보다 앞서 가면 그 사람의 영혼은 위험하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외우고, 지식적으로 잘 알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하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종교생활하는 기독교 교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에 그 영혼이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친밀한 관계가운데 있으면, 성령충만해서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갔던 시므온처럼 8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기 예수님일지라도 ‘메시야’로 알아보고 8일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여선지자 안나도 예수님을 만나보고 그가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 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아는 것(Knowing Jesus)입니다. 이것은 교리와 생각에 기반한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과 감동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생명없는 조화와 같고, 신앙생활은 화려하지 않아도 생명력있는 들꽃과 같습니다. 생명력없는 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생명있는 것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종교생활은 등불이 꺼져가는 어리석은 다섯처녀와 같은 사람들을 만듭니다. 즉 형태는 있지만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B)내 생각 VS 성령님의 조명: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는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실 때, 옆에서 말씀 하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을 보게 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아닌 자기 생각과 신조로 예수님을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바리새인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신조와 생각으로 살면서 지식은 있었지만 영적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성령님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바리새인의 종교생활로 나아가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늘 결과(열매)가 따릅니다. 예수님을 성령님을 통해서 인식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예수님에게서 당연히 멀어지게 됩니다. 열심히 헌신과 봉사를 하는데도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이 하던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친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최우선입니다.
*자기점검질문: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8월 17일: 헌신과낙담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누가복음 18:22)
*열린 마음 자체가 구원으로 가게하나? 구원에 이르는 마음은 무엇인가?
(A)구원에 대해 열린 마음과 구원얻는 마음의 차이점: 예수님은 ‘구원얻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얻는 길을 제시하실 때, 사람에 따라서 기준을 달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부자청년은 정말 구원얻기를 갈망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통에 잠긴 채 좌절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자 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얻는 길은 “자기목숨을 지켜 주는 존재기반을 버리고 예수님을 자기 목숨을 지켜주시는 분으로 선택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강제로, 또는 애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열린 마음 자체가 구원을 얻는 필수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을 다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구원의 문이 열리고 구원이 성취되어져 갑니다. 이 시대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구원 얻는 길을 알려고 교회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처럼 많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지 라도 자기 목숨과도 같은 돈, 명예, 권력, 지식등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사랑보다 더 움켜쥐고 있다면 열린 마음은 가졌으되 구원의 길을 선택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마음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과도 같은 자기 삶의 존재기반이었던 것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과도 같은 것들을 미워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되심을 고백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이 아무리 구원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부자청년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만 하셨습 니다. 바로 부자청년의 하나님이 ‘돈’이라는 것을 청년의 마음을 향해 폭로하신 것입니다. 영적 진단을 내리심과 동시에 구원의 길로 나아가려면 ‘돈’이라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참 하나님이신 주님을 선택하라고 선택권(Choice)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이 선택의 상황에서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갔습 니다. 주님을 따라가서 영생을 얻는 것보다 돈을 더 하나님처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졌지만, 자기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돈’이 하나님이었기에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열린 마음이 충만했는데도 말입니다!
(B)하나님의 ‘의’를 선택해야만 구원받음: 부자청년이 우리 시대에 온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말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성도라고 부를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봉사하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택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세상영광을 하나님 으로 택하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잘 지키며 교회봉사와 헌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나온 부자청년과 같은 잘못된 신앙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내 생명과도 같은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가 되신 예수님을 선택하는가, 선택하지 않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열린 마음이 아무리 많고, 구원을 사모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 해도 예수님을 택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마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열린 마음은 있지만, 예수님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거할 수도, 자라갈 수도 없습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게 가장 중요한 그것(그 사람)이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 분만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8월 18일: 무표정의 슬픔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몹시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8:23)
*‘부자’가 구원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까요?
(A)부자가 구원받는 길 = 돈을 미워하는 삶: 예수님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기를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은 “사람 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할 수 있으시다!”라고 대답하셨 습니다. 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 자체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까요?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 자기 목숨과도 같은 돈을 미워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부자인 성도들에 대해서 부요함(Richness)을 자꾸 처리하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자꾸 나눠주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바로 그 때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물질’을 자꾸 자신의 주머니에서 빼어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내어드리게 될 때, 더 이상 ‘돈’이 부자인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목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면서 ‘돈’을 움켜쥐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는 자기가 낮아 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10)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자기가 부요해서 높아진 것을 자랑하지 말고,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부자가 되어 남보다 높아진 것을 자랑삼습니다! 부자가 됐지만 낮아지는 길은 자기의 소유한 돈을 자꾸 미워하며 하나님 나라와 이웃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적 생명이 죽지않고 자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돈을 지배하는 자가 돈에 지배받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지켜가고, 성장시켜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B)물질에 관련한 삶 = 영적 생명과 관계: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매일매일 먹고 마시면서 삶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곡식 때문에 곡식창고를 늘려야만 할 정도로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와 나사로가 어느 날 죽었을 때, 그 부자는 음부(지옥)에 떨어 졌고,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어 먹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도대체 부자가 무엇을 잘못해서 지옥에 떨어졌나요? 나사로는 무엇을 잘해서 천국에 갔나요? 다름 아니라, 부자는 그 영혼을 ‘물질’로 늘 가득채운 것입니다. 마음껏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요함을 즐기면 즐길수록 그 부자는 자신의 영혼이 섬기는 하나님이 ‘물질’이 되기를 선택해 간 것입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그 육신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물질을 공급받았지만, 영혼은 물질을 의지할 아무런 여지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목숨을 미워하고 있는 성도라면 자기가 소유한 물질을 미워하여, 미워하는 물질을 자꾸 이웃에게 나눠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꾸 자기 목숨과도 같은 물질을 나눠주지 않으면 점점 물질의 노예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면 내 영혼에 심각한 위기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목숨과도 같은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영혼에 위기가 올 수 밖에 없고, 자기목숨을 미워하지 않으면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영혼의 위기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것들을 더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심각해집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자기목숨과도 같은 것들을 늘 버리고 있는가?”
8월 19일: 자의식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마태복음 11:28)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방해하는 주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A)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 자아 의식: 오스왈드 챔버스는 “자의식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온전한 삶의 조화를 파괴하는 첫 번재 요소 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의식은 예수님과의 연합된 삶에 대해서 자꾸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 의지대로 살아 가게 하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전에 사람은 자의식(self-awareness)이 없었습니다. 자의식은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자아(self)로부터 형성된 의식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의식이 발동될 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게 되었고, 부끄러워서 무화과 잎으로 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이렇게 자아의식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던 영적 상태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전에도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식하였지,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식 하는 삶을 살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자아 & 자아의식)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하나님의 뜻)를 지고 예수님(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자아의식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흐리게 하고 육적인 눈만을 강화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부인(Denial)을 해야합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그것이 내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를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생각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약속의 자녀를 주신다는 것”)을 성취하려고 생각을 해봤을 때, 사라를 통해서는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없는 조건에 사라가 처했기 때문에 하갈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행한 일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하여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아의식에 기반해서 실행한 일들은 이렇게 믿음생활에 아픔과 상처를 남깁니다.
(B)마귀가 성도들을 유혹하고 공격하는 통로 = 자아 의식: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보다는 예수님을 더 바라보게 됩니다. 타락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의식으로만 살았을 때,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 의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결정체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듯이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그 유혹의 주된 대상은 바로 자아(self)이고 ‘자아’를 유혹해서 ‘자의식’을 더 강화하여 자꾸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의식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즉 “나는 돈을 얼만큼 소유 하고 있는가?” “나는 어느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는데!” 그리고 “나는 어떤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라고 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생각을 자꾸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를 낙심시키거나 교만에 빠뜨리기 위해서 자아를 자꾸 건드려서 자기를 의식하는 자의식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기쁨이 자녀, 학벌, 돈, 명예, 권력, 선행등으로부터 오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계략에 속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만 참된 것들입니다. 자의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식 가운데 지배받아야 합니다. 자아는 철저하게 부인(denial)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관심이 늘 자신의 성취와 자신의 성공에 있다면 자아가 부인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늘 예수님과의 연합을 방해하는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자아의식으로 가득차 있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하루속히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에 분주하기 그지없습니다. 돈, 지식, 사람들 의 인정과 칭찬, 명예, 그리고 권력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채워넣고 나면 쉬겠다라고 마음먹지만, 채워 넣으면 넣을 수록 더 궁핍함을 느끼는 것이 자아의식의 본질입니다. 어느 정도 채워지면 만족함을 누리고 그런 것들을 채우려는 노력을 그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요. 그들은 하나님처럼 이미 살고 있었지만 자아의식이 발동 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시게 하는 말씀 =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한가지 계명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식에는 만족함이 없다는 증거 입니다. 내가 현재 주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자아의식 입니다. 내 온 관심이 내 가정에만 있다면 나는 현재 하나님을 주되게 의식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내 자아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이 내가 먹고 있는 ‘선악과’입니다. 내가 현재 하나님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돈’에 대한 내 자아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바로 내가 먹고 있는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를 먹고나서 벌거벗은 몸을 보게 된 것처럼, 점점 돈, 지식, 명예, 그리고 권력등에 대해서 내가 벌거벗은 상태 = 결핍된 상태에 있는 것을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의의식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결핍입니다. 이 결핍이 사람의 노력으로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기점검질문: “현재 내 삶의 주된 관심사 (=자아의식)는 무엇입니까?”
8월 20일: 완전무결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태복음 11:28)
*자아 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것을 어떻게 방해할까요?
(A)자아의식이 드러나는 모습 = 자기 연민: 자아 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중심으로 인식하게 하는 의식의 기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더욱이 자아 의식은 필연적으로 ‘자기 연민’(self-pity)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게 만듭니다. 특히 성도가 어떠한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자아의식’은 상황과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면 상황과 자기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윗은 13년을 넘게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발과 같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래서 배은망덕하고 모욕을 일삼은 나발을 죽이려고 나설 때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만납니다. 그 때 다윗은 아바가일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진실을 재확인받고 환기(reminding)하는 말을 들음으로 ‘악’(evil)을 ‘악’으로 갚는 상황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만약 다윗이 여전히 ‘자아 의식’으로 충만했다면 다윗은 나발과 같은 악한 자를 당연히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아바가일의 입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의 위치를 지킵니다.
(B)자아 의식 = 자기 중심적 삶의 원동력: 자아의식이 치명적으로 위험한 이유는 무의식가운데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떨어진 자기 중심적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인식없이,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성도의 심령에 대해서 말씀하지만, 자아의식으로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지속적으로 무의식 가운데 거부하면서도 자신이 자기 중심적이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의의식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 중심적 삶의 원동력입니다. 성도는 늘 하나님 의식으로 충만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인식하듯이 성도는 하나님을 무의식적으로 늘 의식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일부러 자의식을 극복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늘 소망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놓고 도망간 제자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삶을 시작한 것처럼, 자기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충만함 을 얻는 하나님의 의식을 늘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이키는 ‘말씀’의 씨앗이 자라가게 해야 합니다. 자아의식 을 극복하는 길은 자기 생각, 경험보다도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게 될 때, 극복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 라는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면 마귀를 이겼을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모든 상황을 ‘하나님 의식’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8월 21일: 눈에 안 띄는 사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A)영적 영향력 =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활동: 한동안 젊은 기독교인 들 사이에 유행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영향력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길,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영향을 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시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신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무의식적으로 늘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가셨습니다. 실제로 영향력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식으로 충만해서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B)영적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 = 바리새인의 마인드: 만약 에 우리가 영적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마인드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적 영향력은 내가 사람들에게 줄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영적 소영웅주의의 마인드로 비전을 추구하고, 영적 영향력을 추구한다면 바로 바리새인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리새인의 마인드로 영적 영향력을 추구하면 사람의 노력과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몰고 가려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결단과 노력을 촉구 하는 설교와 말씀은 문제가 있다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경고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주 듣는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내리시오!”라는 구호는 우리 주님이 결코 신뢰한 적이 없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주님은 결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단호하게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남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늘 영향력있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온전한 영적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준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천국가는 길을 가로막는 지옥선생 들이었다고 예수님은 평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살아 갈 때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도 성령님을 통해서 흐르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해서 영적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자기점검질문:“나의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을 때 나의 반응은 무엇인가?” & “내가 끼치는 영적 영향력은 주님의 것인가 내 것인가?”
8월 22일: 나는 ... 그러나 그는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 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3:11)
*참으로 성령세례 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회개가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A)죄에 대한 인식 = 죄의식이 아닌 무가치에 대한 인식: 오스왈드 챔버스는 “회개 는 죄의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형용할 수 없는 무가치함을 가져온다. 내가 회개할 때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세례 는 회개를 통해서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가치성’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끄시는 이유 는 바로 더 이상 내 발로 서고, 걷고, 뛰겠다는 끈질긴 집념을 완전히 부셔 드리고,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고, 걷고, 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라는 ‘자아(self)'의 끝자락에서 내 삶 가운데 ‘그’(He)의 빛과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바람같이 인도하시는 성령님에게 몸을 의탁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회개할 마음과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회개할 능력 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때 “아멘, 할렐루야!” 라고 외치며 나아가면 회개의 능력이 임하고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변화받게 됩니다. 성령세례는 ‘나’로 살던 내가 ‘그분’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B)성령세례받은 증거 = 내 무가치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가치만 추구: 만약,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도 경험한 적이 없고, 자신의 무가치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도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한다고 해서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나의 무가치함이 온전히 고백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가치만이 전적으로 인정되어 성령을 좇아살게 되는 것이 온전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 받은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의 자신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좇으며, 돈을 좇으며, 명예와 지식을 좇으면서도 방언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착각입니다. 만약에 실제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인데도 세상과 돈, 명예, 권력을 따라 살고 있다면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위험 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방언 자체가 성령세례 받았음을 표현하는 충분한 증거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방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받은 사람은 방언과 예언과 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더욱더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은 성령님을 통해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가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심각한 위험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는 사모해야 하지만, 그 은사 자체만을 믿고 하나님과 친밀한 상태에 있다고 자부할 때, 남들을 위하여 예언하고 방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은 주님과 상관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8월 23일: 은밀한 기도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 이다. (마태복음 6:6)
*성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임재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A)온전한 기도가운데 나타나는 영적 현상들: 성도의 은밀한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도가 어디에서 기도하던지 늘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기도하는 목적은 자의식을 버리는 것 입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불’이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함으로 자기연민, 자기성취, 그리고 자기비하와 같은 일체의 자아의식이 청소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까요? 자아의식을 버리고자 하는 신령한 욕구 = 가난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오히려 육적인 기도와 육적인 예배와 육적인 찬양을 하고 있다면 자기 연민, 자기 욕구, 자기비하와 같은 육신적 본성이 더 강화될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를 많이하는데도 육신의 본성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바로 성령안에서 하는 기도와 예배가 아니라 육신의 본능데로 기도하고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선지자처럼 자기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떼를 쓰며 ‘자기 욕구를 실현하려는 기도’가 육신적인 기도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이 발락왕에게 가지 않는 것임을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 하고 거듭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Yes’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그 앞길을 가로막는 상황가운데 죽음의 위기까지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결국 발락왕에게 가서 자기 육신의 욕구를 실현 하게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공격할 때, 가나안 족속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육신의 본능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기도, 예배, 찬양은 성도를 더욱 더 종교적이고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며, 결국 ‘교만’의 영적 어두움에 빠뜨리는 근거로 작용하게 됩니다.
(B)골방에서 기도할 이유 = 하나님과만 대화하는데 촛점: 성도는 기도할 때 만큼은 최소한 나 자신에 관련된 일체의 생각, 감정, 의지의 문을 닫고 하나님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 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도로써 은밀한 기도가운데 들어갔을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바쁜 사역가운데, 그리고 그 짧은 사역 기간 가운데서도 은밀한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기도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 였습니다.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어린 아이 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듯이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의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골방에서 하는 은밀한 기도입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가?”
8월 24일: 영적 색인표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마태복음 7:9)
*기도응답이 없을 때 성도는 제일먼저 무엇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까?
(A)하나님의 복받는 통로 = 복받는 말씀의 구조를 옷 입기: 기도응답이 없는 것도 응답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먼저 기도응답이 없을 때 영적 색인표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관계들-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이웃관계 등에서 하나님이 세우진 질서에서 벗어난 점은 없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폭력적이면서 ‘복’받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서 ‘복’받기를 바라는 것도 잘못 입니다. 동료와 이웃에게 무례하면서 축복의 통로가 원활하기를 바라는 것도 잘못입니다. 바로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있지 않습 니까? 남의 것을 가로챘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료와 이웃을 부당하게 대우하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는 자비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써 빛 가운데 걸어 다니며 선한 자녀의 모습을 가지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성경말씀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겠는가.”(마 7:9)라는 말씀만을 하나님께 들이대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에서 막혀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B)하나님의 복받는 통로 =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 하나님의 자녀로 빛 가운데 거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 얻을 것입니다. “너희 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4:13)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빛 가운데 거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기도’가 기독교인의 전유물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슬람 사람들도 라마단이라고 하는 특별 기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힌두사람은 10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까지도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과 내 가족이 잘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기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과 상관없는 기도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분명히 신령한 빵(신령한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기도할 때,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기도는 응답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이름으로 한 기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주님이 직접 응답하시고 성취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점검질문: “현재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주된 것은 무엇인가?”
8월 25일: 우정의 열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5)
*예수님이 성도들에 대하여 ‘친구’라 하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예수님과 친구관계 =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계시: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 관계로 부르셨지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 중의 한명으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도를 친구의 관계까지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다 알려 주는 관계로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친구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 누구 보다도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음성데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친밀한 관계가운데 시편 40:8절의 말씀처럼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 하는 사람’으로 성도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형성된 우정은 예수님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아 성도 삼으신 것처럼, 그렇게 생명을 내놓는 열정적 사랑의 관계에 기반한 것입니다. 친구된 우정의 관계, 사랑의 관계는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 헌신의 사역입니다.
(B)예수님과의 친구관계 = 생명을 주는 관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생명을 성도를 구속하시려고 내어주셨습니다. 친구관계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생명을 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전우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그 전쟁터에 내어던지는 것처럼, 깊은 친구관계라며 바로 생명을 내어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듣는데 도무지 순종하지 않는 삶이라면 거기에는 친구같은 관계로 성장할 수가 있는 기초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과 친구관계를 맺은 사람입니다. 성령받은 사람들은 바로 친구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들 입니다.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친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점검질문: “친구처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가?”
8월 26일: 흔들리는 마음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 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아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과 예수님께로 온 것이 아닌 평강은 어떻게 다릅니까?
(A)사람의 인간적 평강 = 조건과 환경에 따라 영향: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받을 평안은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만이 온전한 평안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인간적인 평안은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소용돌이 치고, 인간적인 평강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쏠림으로 생긴 것이기에 거짓된 안심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오해는 인간적 평강을 성령님의 위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comforting)가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 평강을 주는 사람의 위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기의 행위를 더 의지하게 만듭니다. 자기 스스로를 회개의 길이 아닌 자기 위로의 길을 걸어 가게 만듭니다. 이사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주장했던 “괜찮다. 괜찮다!”의 메세지에 마음이 쏠려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은 외면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런 상태에서는 허무와 허탈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 평강은 조건과 환경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쁨과 평강이 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평강이 아니요, 조건과 환경에 따른 기쁨과 평강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닙니다. 조건과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는 인간적 평강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오는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평강입니다.
(B)주님께로 온 평강=조건과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영적 충만: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싶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서 평정심을 가지고 ‘평강’을 반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평강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주님이 부어주시는 무한한 평강으로 덧입게 됩니다. 성도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흠뻑 젖어서 사로 잡힌 바 되기를 소망할수록 참 평강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평강은 말로 풍성하게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가운데 영적 충만함으로 느껴지고 경험되어집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의 실체를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과 평강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흔들리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되내이고 말할지라도 흔들리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평강을 경험하면 더 이상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평강’입니다. 옆에서 풍랑이 일듯 이 엄청난 어려운 현실들 – 사업이 망할 처지에 있고, 사람들이 비웃고, 건강 에 문제가 생고 하는 것과 같은 현실속에서도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것은 바로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에 성전에서 가슴의 통곡을 드리며 기도하고 나서 엘리 제사장의 축복(“평안한 마음으로 돌아 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 이오."-삼상 1: 16)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나가 돌아갈 때는 슬픈 기색을 더 이상 띄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번째 말씀이 “평안하뇨?” 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을 죽음으로 잃어버린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느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조건과 환경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강할 수 없는 조건과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에게 참 기쁨과 평강을 주시고자 합니다. 흔들림없는 기쁨과 평강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점검질문: “내가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는?”
8월 27일: 살아있는 신학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요한복음 12:35)
*성도가 빛 가운데 걸어 다니며 빛 가운데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A)성도가 살아있는 영적 상태라는 증거 = 그리스도의 빛을 경험: 성도가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속 ‘빛’을 성도들의 삶가운데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도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진리’를 빛처럼 성도의 마음에 비추어 주십니다. 그런데 성도가 빛처럼 비추어주시는 진리를 외면하거나 순종하기를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영적 생활은 건조해지고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태양에서 빛이 오는 것이 멈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성도에게 계속 진리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런데 성도가 만약 과거의 어떤 경험만을 추억으로 삼고 들먹이며 혼자 흐뭇해하고만 있다면 실제 영적 생활에서는 그 경험을 살리지 못하고 건조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현재 경험하고 있는 진리의 빛을 온전히 반사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꾸 초점맞추게 하는 것은 진리의 빛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방해받으면 성도의 마음은 어두움, 즉 지옥같이 변해 버리게 됩니다. 현재 빛 가운데 거룩하게 거하는 실제적 삶이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신앙과 신학은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가고 있는 현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성도를 빛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빛은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B)성도가 어두운 영적 상태라는 증거 = 갈 바를 알지못하는 어두움: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둠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른다”라고 하셨습니다. 빛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모르고, 어떻게 주님을 따라가야지 온전히 순종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아!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 라고 추측하며 주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가운데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온전히 받지 못하는 어두운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할 바를 다 알았습니다. 구약이던, 신약이던 믿음의 신앙인들은 모두 빛되신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십자가의 길 = 좁은 길 = 하나님의 뜻만 따르는 길을 걷기 시작 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따라 행한 것이 믿음 입니다. 그 순종의 과정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진노가운데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편으로써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세상사람 에게는 상식이 없는 사람과 같은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신앙인 들은 빛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Favor)를 입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앞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소경된 상태처럼 헤매이지는 않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빛이 마치 광야의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비추이기 때문에 갈 바를 알고 주님을 늘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거룩’을 삶 가운데서 실증하고 살고 있는가?”
8월 28일: 기도의 유익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누가복음 11:1)
*“기도와 성도의 영적 생명”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A)기도의 능력 = 육신을 거스리는 성령안에서의 기도: 오스왈드 챔버스는 "기도는 육적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이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성도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통 받는 분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육적 양식이 아닌 ‘기도’로 영양공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더 풍성 하게 영양공급을 하기도 하고, 또 이 생명을 굶어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해 지면 질수록 나 자신은 변화되고 그 결과 사물을 보는 눈도 바뀌게 됩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육신을 거스르게 하시고, 육신의 욕망데로 따라 살지 않도록 역사하십니다. (갈 5:17) 그리고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안에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자라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B)무익한 기도 = 육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 기도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번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두번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번째 기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심적인 세가지 요소를 모르고 기도를 하면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하더라도 육신을 위한 기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위 말하는 “비나이다, 비나이다!”와 같은 주문과 같은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 육신을 위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갈 수 있는 영적 생명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방인들처럼 ‘증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가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처음 영적인 삶중 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모르는 사람은 잔느 귀용 여사의 말처럼 “주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하면서라도 기도의 대상, 기도의 목적, 기도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점검질문: “기도할 때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해짐을 어떻게 아는가?”
8월 29일: 믿음의 시험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복음 11:40)
*하나님은 왜 성도의 믿음을 테스트하실까요?믿음의 테스트는 필수일까요?
(A)육신을 벗어나게 하는 법 = 믿음의 테스트: 성도의 믿음 테스트는 필수 입니다. 사람은 자꾸 상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식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절대 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은 육에 속한 것이며, 믿음은 영에 속한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상식이 아닌 믿음에 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테스트하실 때 성도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상식으로 살 것인가? 믿음으로 살 것인가?”하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따르게 되면 그 믿음의 성도 개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는 과정은 이 믿음의 테스트가 필수적으로 계속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육신을 벗어나게 하는 법이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테스트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점검질문: “최근에 나는 어떤 믿음의 테스트를 받았는가?”
8월 30일: 성공적 사역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누가복음 10:19~20)
*‘성공적 사역’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A)가치있는 사역 =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닌 나를 통하게 일하게 하심: 유용성 과 효용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인간의 삶에서 주목해 보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값어치가 될 수 있는 신앙관계이다.” 라고 말합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기쁨을 얻고 생수의 강물을 마셔야 합니다. (눅 10:19-20) 그런 상태에서는 어디에 가던지 하나님의 빛 속에 거하므로 인해 성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많은 주님의 자녀들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빛 가운데, 영광 가운데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공적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해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운데 있다고 자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공적으로 사역하고도 버림받은 능력자들이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마 7장) 관계가 중심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고 말씀한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만족을 느끼고, 삶의 자원을 삼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보람이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주님이 주시는 자원이 내 안에서 역사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점검질문: “나는 ‘사역’으로 보람을 느끼나, ‘관계’로 보람을 느끼나?”
8월 31일: 나의 기쁨, 너의 기쁨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 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졌던 충만한 기쁨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A)주님의 충만한 기쁨 = 자아의식을 부인하고 하나님 의식으로 충만: 오스 왈드 챔버스는 “예수님의 기쁨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자아포기와 자아 희생이었다. 이 기쁨은 아버지가 그에게 하라고 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도 바로 이런 기쁨입니다. 성도가 기쁨을 얻기 원하다면 자아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는 순종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믿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믿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믿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아니고, 예수믿으므로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의로 부터의 충만한 영적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만 충만한 기쁨이 부어지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이 성도안에 바로 주님의 기쁨을 넘치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점검질문: “나에게 예수님의 기쁨이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