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창단 이후 교육 3부작, 교사 이야기 "김선생님, 지금 뭐하세요?", 학생이야기 "블루기타", 학부모 이야기 "어린 소나무 산에 옮겨 심다"를 매 해마다 공동창작, 공연하고 난 뒤... 우리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많은 단원들이 결혼을 계기로 떠나게 되고, 창작의 고통에 지친 단원들이 좀 더 손쉬운 작품 제작 방식을 주장하면서 4회 공연이 무산된 것이다. 그 무산되고 위기가 닥쳐온 시기의 한 가운데서 나는 커다란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내 중요한 부분이었던 징검다리가 와해되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시기를 견디고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 정식 공연이 아닌 워크샵 공연을 준비하기로 하고 그 중심에 섰다. 교사로서의 존재를 고민하던 작품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단원들의 자전적 에피소드들을 모아서 대본을 쓰고 어렵지만 동대문 경동성당에서 공연을 올렸다.
너무나 솔직했던 고백담이었다. 그리고 그 후 우리는 재도약을 한다. 뜨겁게 지켜내고자 고독하게 산을 넘던 그 시기는 내게 늘 힘을 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거울보기"
김순희
주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불안하다.
중추
공동체이념, 연대라는 가치 속에 살던 사람들이 그 가치가 퇴조하자 자신의 이상과
구체적인 생활여건의 괴리, 관계의 단절을 겪으며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불안해한다.
결국 거대한 꿈이 아닌 작은 나눔의 중요성을 느끼고 실천함으로써 더욱 성숙해지고
공동체의 참다운 의미를 확인해가는 이야기.
견해
불안은 사람을 잠식한다. 사람들은 불안을 극복하지 않으면 죽게된다. 즉 삶의 지속성의 동력
을 잃어버리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불안은 자기 정체성의 부정에서 오는 것이고 자기 정체성의 부정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이 괴리에 침잠하면 사람의 영혼은 피폐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탐닉하게 된다. 탐닉의 끝은 단절이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 꿈과 생활의 단절, 자아와 타인의 단절, 이상 속의 자신과 현실 속의 자신과의 단절....
우리 징검다리의 성원은, 아니 나아가 80년대에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관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은 광장 즉 정치적, 이념적, 감성적 공동체를 지향하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연대와 소통 속에서 확인하면 살아왔다. 그리고 또 80년대는 20대와 맞아 떨어졌다. 젊음의 열정과 사회변혁에의 꿈이 결합되면서 삶의 환희의 정점을 맛보았고 그것은 우리의 자아에 큰 낙인처럼 찍혔다. 그 삶의 방식은 발령을 받고 교사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전교조 결성, 해직, 복직, 참교육의 실천등으로... 그리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일종의 품성론, 도덕적이고 진보적이며 생산적인 사람으로 전위로 모범적이고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며 조직을 내 몸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고. 앞서가는... 선도하는...
이곳 현장에서도 교사라는 일은 단지 직업이 아니었다. 교사이어도 좋고 아니었다면 다른 산업체의 노동자라도 상관없고, 예술운동이어도 괜찮았다. 이러 저런 우연한 조건으로 인해 교직에 왔고 그 속에서 80년대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전 존재를 걸고 투신했다. 교직은 단지 직업이 아닌 꿈의 실현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 확실한 소리를 따라 가던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사라져감을 알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진보진영의 분열, 제도권화, 우경화 그리고 물신주의에 팽배해져 있는 어린 학생들과의 갈등, 임용고시 세대 일명 신세대라는 후배교사들과의 부조화 그리고 젊음의 퇴조와 초조. 고립감 그리고 경제불황이 닥쳤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도 변했다. 살아내는데 급급하고 많이 떠났다.
세상은 우리가 꿈꿨던 것과 다르게 변해갔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우리들은 방황하고 권태롭다. 꿈을 잃은 자리를 대치할 그 무엇이 없다. 그리고 고독하고 불안하다. 늙은 나이도 아닌데 자신의 깊은 곳은 많이 늙어가고 있음을 안다. 자신이 꿈은 유산되고 교사라는 위치로 남은 우리. 학교도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 우리는 내가 빠져버린 이 덫에서 헤어나와 예전 같은 열정으로 살고 싶어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20년 30년 후에 이 자리에서 학교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곳은 진정 내가 있고 싶었던 곳인가? .이제 나를 이끌던 소리가 사라진 지금 나를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속에서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내 속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살아본적이 별로 없었다.
욕망도 잊었다. 아니 무시하고 살아왔다. 내 속에 귀를 기울이자 그 욕망이 꿈틀댄다.
자아실현의 꿈, 음악이든 춤이든, 사랑이든, 성이든, 명예든 돈이든...
이념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전도되기도 쉽지 않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한다. 불안하다.
그리고 퇴조하는 젊음을 대신해서 구체적인 일상이 자리잡는다. 80년대든 누구든 삶이 오래 지속되었던 그 힘. 생활의 힘, 욕망의 힘이 우리를 낯선 세계로 끌고 간다. 우리에게도 생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중요치 않았을 뿐, 이제 이념과 자부심이 사라진 내게 구체적인 생활에서의 부적응과 무능은 열등감을 가져온다. 추상적인 변혁의 이념에는 추상적인 민중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일상에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다. 가족, 남편, 직장동료, 학교 아이들, 시댁 식구들, 자기아이.. 우리는 사랑하며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때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조직이고 투쟁이고 가투고 그랬지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는 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돈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하며, 그 일상의 자잘함을 깔보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겸손함과 현실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주변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인들은 강하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도 없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삶에의 집착과 에너지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비록 허탈하고 허기지고 지쳤지만, 그리고 예전에 또 다른 나의 분신이며 나의 조각들이었던 사람들이 일상을 찾아서 사라져갔지만 그 생활의 힘, 작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게을러서는 안된다. 예전엔 우리가 공장으로 농촌으로 철거촌으로 나를 낮추고 들어간다고 믿었지만 이제 우리는 성장했다. 그리고 한 번 깊이 좌절했다. 그 절망의 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나도 한 인간이구나. 그 누구보다도 훨씬 무능할 수 있으며. 비겁하며, 도망치며, 외로워하는 한 인간. 그래서 이제 타인과 나를 단절시키는 내 자신의 허위를 극복하기 위한 참회와 고통의 시간 속을 우리는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과제는
"우리세대의 힘인 연대와 소통의 깊이와 진실성을 더하는 것."
그 진실성은 무엇일까? 어쩌면 세상보다 먼저 자신이 문을 닫아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세상과 타인을 향한 소통의 문을 열 때는 우리는 변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일치가 필요하다. 일치다. 이제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이 필요하며 나도 사랑 받아야 하고 타인도 그렇게 간절히 사랑해야 한다. 80년대의 거품을 걷고 진정 80년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그 한가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진정한 의미를 묻자.
하나의 슬픔을 극복하는 힘은 더 큰 슬픔 앞에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그것이다.
주변의 더 큰 슬픔을 돌아보고 손내미는 사랑의 확인이 바로 우리 세대의 출발점이자 종점이지 않겠는가? 거기서 우리들의 유산 된 꿈, 80년대의 꿈이 다시 잉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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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인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피날레 음악은 용량이 초과되어 첨부할 수 없으니 아쉬운 데로 링크를 클릴해주세요.
http://www.ktu.or.kr/commune/view.php?board=eduhope-808&id=268&pag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