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2>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보다 앞서 관객의 시야에 신선하고 매력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킨 이 작품을 만든 인물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카일 쿠퍼. 타이틀 시퀀스 디자인 분야의 '왕' 카일 쿠퍼의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스파이더맨 2>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먼저 원작 코믹북 출판사 마블의 로고를 본다. 붉은색을 바탕으로 수백 쪽의 컬러 만화책을 넘기듯 우리의 기억에 각인된 슈퍼 히어로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스크린 멀리서 ‘MARVEL’이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스파이더맨 2>의 타이틀 시퀀스는 이 아드레날린 만점의 속편을 3년 동안 기다려왔던 전세계 팬들에 대한 감사의 선물처럼 보인다. 역동적으로 변형되는 거미줄 틈 사이로 1편의 하이라이트를 그린 일러스트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의 일러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알렉스 로스의 화풍을 떠올리게 하는 대담한 그림이다. 제작진의 이름이 명멸하는 원색의 배경은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듯 강렬하고 산뜻하다. 펄프 스타일의 고전적인 일러스트와 모던한 색채 감각, 구상과 추상이 결합된 세련된 타이틀이다. 하나의 단편영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 시퀀스를 만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카일 쿠퍼(Kyle Cooper)가 바로 그다.
영화보다 영화적인
이제 마흔을 넘긴 카일 쿠퍼는 현재 모션 그래픽 분야의 1인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래픽’을 뜻하는 모션 그래픽은 영화와 TV, 광고 등 영상 매체에서 최근 각광받고 있는 디자인의 한 분야다. 특히 영화에서는 문자와 그림을 결합시켜 2분 안에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서 모션 그래픽이 사용된다. 카일 쿠퍼는 바로 이 타이틀 시퀀스에서 기발한 작품들을 선보여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매사추세츠대와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LA 소재 디자인 회사 알/그린버그 어소시에이츠(RGA)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쎄븐>의 오프닝 시퀀스로 격찬을 받은 뒤 몇몇 동료들과 독립해 영상 디자인 회사 ‘상상의 힘(Imaginary Forces, 이하 'IF')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쿠퍼가 직간접적으로 타이틀 디자인에 참여한 작품은 모두 150여 편. <닥터 모로의 D.N.A.> <스폰> <도니 브래스코> <미션 임파서블> <함정> <스파이더맨> <새벽의 저주> 등 오프닝 타이틀의 걸작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즐비하다. 덕분에 IF는 할리우드 거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뒤 이 분야 최고의 회사로 성장했다. 공동 대표인 카일 쿠퍼 역시 타이틀 시퀀스 디자인의 ‘왕’으로 불리게 됐다.
오프닝 타이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과 마틴 스콜세지의 파트너로 명성이 자자했던 디자이너 솔 바스가 바로 그다. 이전의 오프닝 타이틀이 극중 장면을 배경으로 이름만 평범하게 나열했던 반면, 솔 바스는 문자와 그림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실사로 촬영한 영상이 타이틀 시퀀스에 도입되면서 이 분야는 더욱 빠르게 발전했다. 1960년대 후반 활발히 활동했던 파블로 페로(<스티브 맥퀸의 블리트>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007> 영화 가운데 열네 편의 오프닝을 책임진 모리스 바인더, <알라바마 이야기 To Kill a Mocking Bird>의 타이틀 시퀀스를 만든 스티븐 프랑크푸르트 등은 타이틀 시퀀스의 유명 디자이너로 꼽힌다. ‘현대의 솔 바스’라는 평가를 들은 카일 쿠퍼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분야에 질적인 도약을 가져왔다. 그는 솔 바스처럼 타이틀 시퀀스가 영화 전체와 일관성을 이루도록 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또한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와 실험적인 촬영 및 편집 기법으로 관객들에게 시청각적 충격을 선사했다.
이제 할리우드에서 그의 명성은 너무나 자자하다. 심지어 어떤 감독들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꺼리기도 한다. 카일 쿠퍼의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는 시시한데 오프닝 타이틀만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면 어떤 감독이 이를 반기겠는가. 오프닝만 돋보였던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바로 배리 소넨펠드의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이 돌연변이 SF 웨스턴의 도입부를 본 관객들은 이후 두 시간 동안 하품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윌 스미스와 케빈 클라인, 샐마 헤이엑 등 주연 배우들의 이미지를 황금빛으로 탈색시키고 실루엣을 강조하면서 분할 화면을 탁월하게 활용한 감각적인 오프닝이었다.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DVD 음성해설에서 배리 소넨펠드 감독은 “타이틀 작업은 IF에서 했는데 정말 대단했다. 그곳의 카일이라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 격자 무늬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오리지널 TV 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리지널 쇼를 다소 모던하게 변형시킨 크레딧이다. 하지만 특별히 유사한 점은 없다”고 말했다.
스토리를 함축한 디자인
카일 쿠퍼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호평을 받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쎄븐>과 <도니 브래스코>다. 이 영화들의 DVD 음성해설 역시 쿠퍼의 작업 과정을 짐작하는 데 꽤 유용하다. 먼저 <쎄븐>의 타이틀 시퀀스는 수백 편의 영화와 광고에서 모방할 정도로 선구자적인 작품이다. “<쎄븐>의 오프닝을 따라 한 영화 17편과 광고 8백만 개를 봤는데, 이 오프닝이 가장 아름답다”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자화자찬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핀처와 쿠퍼는 연쇄 살인자 존 도가 강박적으로 살인에 관한 책을 만드는 과정을 타이틀 시퀀스에 압축해 보여 주기로 했다(이는 쿠퍼가 <알라바마 이야기>의 오프닝에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하다). 면도날과 바늘, 편집증적인 글씨와 사진들을 이미지 소스로 활용했으며 흔들리는 글씨로 크레딧을 만들었다. “이게 바로 존 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세상이 약간씩 흔들리고 뭔가 잘 안 맞는 것.” 핀처의 설명이다. <쎄븐> DVD 서플먼트에는 이 오프닝에 대한 카일 쿠퍼의 해설도 담겨 있다. “나는 존 도가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연쇄 살인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미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미쳤던 건 쿠퍼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는 직접 모든 프레임을 바늘로 하나하나 긁어 이 전대미문의 효과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완성했다. 이 모든 과정이 순전히 아날로그적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쿠퍼는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고통스런 수작업과 전통적인 옵티컬로도 이처럼 세련된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도니 브래스코>의 타이틀은 서정적이면서 비극적인 정조를 담고 있다. FBI 직원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마피아 갱스터에게 접근해야 했던 주인공 도니 브래스코의 상황을 압축해 보여 준다. 주연인 조니 뎁의 눈동자를 크게 클로즈업한 이미지 위에 비열한 거리의 야경과 뜨내기 갱스터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관찰자인 조니 뎁의 시점을 상징하는 흑백 밀착 사진 속에서 갱스터 알 파치노와 마이클 매드슨이 등장하는 것. 마이크 뉴웰 감독은 “카일 쿠퍼는 이 영화에 외로움이 배어 있다면서, 오프닝 신을 한 남자의 머리에 고정시키고 눈 부분만으로 화면을 채우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갱들을 바라보는 계속적인 시선을 통해 뭔가가 시작되기 전에 오랜 과정이 있었다는 걸 말하고, 동시에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슬픔이나 쓸쓸함 같은 감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 했다”고 덧붙인다. 조니 뎁의 눈동자 이미지는 쿠퍼가 만들어낸 것. 프로덕션 스틸 사진의 일부를 취해 아비드로 합성한 뒤 새로 찍은 촬영 소스를 섞어서 완성했다.
이처럼 카일 쿠퍼의 오프닝 크레딧은 언제나 영화의 내용과 접점을 갖는다. 영화의 소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뒤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주제를 압축해 보여 주거나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쿠퍼는 자신의 작업이 항상 스토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해왔다. 영화를 맡으면 늘 먼저 시나리오를 읽고 줄거리의 한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것이다. <더 팬>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16mm 카메라로 찍은 소스를 사용했으며, <스피어>에서 일렁이는 바닷물과 해양 전설처럼 보이는 클래식한 도판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관객들은 단지 배우와 스탭들의 이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화의 내러티브 속으로 더 적극적으로 빠져들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쿠퍼의 타이틀 시퀀스는 항상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전체 영화의 맥락에서 떼어 놓고 보더라도 한 편의 영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편집과 구성이 탄탄하다. <함정 Arlington Road>이나 <드림캐처>의 타이틀 시퀀스는 마치 과감한 실험 영화나 뮤직 비디오처럼 보인다.
자연을 활용한 어둠의 이미지
쿠퍼의 타이틀 시퀀스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상을 취합하고 배열하는 그의 취향이 꽤 어둡고 과격하다는 것이다. 쿠퍼의 필모그래피에서 달콤하고 말랑한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로맨스영화인 <스토리 오브 어스>나 코미디 <쥬랜더>는 쿠퍼의 개성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들이다. 특히 <쎄븐> 이후 쿠퍼는 주로 공포물이나 스릴러, 극단적이고 과장된 판타지물의 타이틀 시퀀스를 만들었다. <스폰>에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악마의 얼굴이 비치는 이미지를 창조했다.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격렬히 발화하는 도화선을 메인 이미지로 사용하면서 극중 배역들의 얼굴과 각종 자료들을 현란하게 배치했다. <함정>에선 평화로운 미국 교외 마을을 촬영한 소스를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변형시켜 마치 네거티브 필름을 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을 선사한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 역시 쿠퍼의 기이한 취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일 것이다. 지구상에 벌어지는 갖가지 정치적, 종교적 테러와 분쟁을 담은 뉴스릴과 좀비 떼의 끔찍한 얼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토크 쇼 프로그램 클립이 이리저리 섞여 있다. 검은 바탕에 피가 흐르는 듯한 타이포그래피, 불규칙적으로 들리는 노이즈에 가까운 사운드 역시 현란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새벽의 저주>에서 쿠퍼는 실제로 사람의 피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로 글씨를 썼다는 말은 아니다. 이 타이틀에 사용된 소스 가운데 적혈구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처럼 쿠퍼는 종종 실제의 생명체나 자연 환경에서 타이틀 시퀀스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가령 <닥터 모로의 D.N.A.>에서는 온갖 세포와 플랑크톤, 곤충과 미생물, 곰팡이 등을 사용했다.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은 세포들이 저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원했고, 쿠퍼는 갖가지 생물학적 이미지 소스와 스타일리시한 문자로 근사한 크레딧을 만들어냈다. <미믹> 타이틀에서는 박제된 나비와 나방을 시종일관 보여 주며, <스피어>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물고기 이미지를 둥그스름한 공 모양으로 아름답게 변형되는 타이포그래피와 조화시켰다. <어벤저>에서는 기상 안전 보호 프로그램에 이상이 생긴다는 영화의 모티프에서 출발해 이상 기후와 팝 아트 스타일의 갖가지 그래픽을 뒤섞었다. <드림캐처>에도 산맥과 태풍, 눈 결정체와 고드름, 별과 꽃봉오리와 나뭇잎 등이 자유자재로 모핑된다.
<스파이더맨>의 타이틀 시퀀스는 쿠퍼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인공적인 축에 속할 것이다. 거대한 거미줄 위에 제작진의 이름이 나포되었다 부서지는 CGI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과 뉴욕 도심의 이미지가 과감하게 배치된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슈퍼 히어로를 소개하기에 적합한 과장돼 있는 타이틀”을 원했고, 쿠퍼는 마야와 어도비 애프터 이펙트 같은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과 싸웠다. 그러나 기획에서 완성까지 1년이 걸린 <스파이더맨 2>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이런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대신 좀 더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오래된 '스파이더맨' 만화책을 디지털 스캔하고 전편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삽화와 현란하게 편집했다. 또한 닥터 옥토퍼스와 스파이더맨의 결투를 담은 컷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영상 매체의 창조자들이 디지털에 목숨을 걸고 있지만 쿠퍼는 영상 테크놀로지의 기본으로 돌아간 것.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시선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아이디어가 있다면 아날로그적인 테크닉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웅변한다.
운동성의 시대를 반영
혹자는 카일 쿠퍼의 아날로그적인 방식, 즉 필름 스크래치나 빠른 속도의 몽타주가 디지털로 정의되는 지금 시대에 대한 문화적 불안감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쿠퍼는 한 인터뷰에서 “사물은 곧 지루해져서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하며,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적 범위가 점차 짧아진다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어쨌거나 카일 쿠퍼의 작품들은 우리 시대 대중들이 몸으로 느끼는 시공간적 감각을 꿰뚫는 구석이 있다. 이전의 타이틀 시퀀스가 정적인 상태로 단조롭게 디자인되었다면, 솔 바스에서 시작되고 카일 쿠퍼가 완성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현대가 움직임과 역동성의 시대임을 입증한다. 세계는 점점 더 많은 움직임을 요구하며, 그 움직임은 더욱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카일 쿠퍼의 모션 그래픽 디자인이 지금 각광받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카일 쿠퍼가 동료들과 함께 세운 회사 이름인 ‘상상의 힘’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 등장하는, ‘너의 상상의 힘이 펼쳐지도록 하라’라는 대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996년 창립 이래 이 회사는 환경 디자인, 영화 타이틀 디자인, 예고편,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헬보이>나 <블레이드> 같은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는 비록 쿠퍼가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의 짙은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IF의 웹사이트(www.imaginaryforces.com)에 업데이트된 수많은 작품들은 ‘쿠퍼 월드’의 면면을 잘 보여 준다. 현재 카일 쿠퍼는 영화뿐 아니라 게임에도 손을 대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관객이 수동적인 상태로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게임은 게임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인터랙티브가 훨씬 강조되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창조적인 디자이너로 꼽히는 카일 쿠퍼의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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