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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iN 2008/07/29 23:53
연봉 19억원 받는 슈퍼 샐러리맨
휠라코리아 윤윤수 사장
“하루에 520만원 정도 벌지요”
송평인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휠라 코리아 윤윤수(52)사장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지난 95년 1백대 종합소득세 납세자의 의료보험료 납부액 순위에서 그가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 회장들 사이에서 3위를 차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올해는 연봉이 정확히 얼마나 됩니까. 『지난해 18억원보다 약 1억원 늘어나 19억원 정도입니다』 어림해서 따져보니 한 달에 약 1억6천만원, 하루에 약 5백20만원씩 벌어들인다. 약 1억원 안팎인 국내 시중은행장이나 대기업 사장의 연봉도 윤사장의 월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세금만 10억원
―소득세다 주민세다 해서 국가에 내는 세금만 해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금을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습니까.
『작년 한해만 약 10억원을 냈습니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낸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자기 소득 밝히길 꺼리는데 사장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의외입니다.
『저라고 밝히고 싶어서 밝히겠습니까. 돈 많이 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만큼 도와달라고 손 내미는 사람도 많아지는 법이니 누구든 골치아프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왕 알려진 이상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습니다』
인터뷰도중 누군가로부터 윤사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윤사장은 『그래 주려고 갖고 있어. 많지 않은 돈인데 언제든지 얘기해. 오 케이. 내일 줄게. 그래 그래』라며 상대편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누굽니까.
『영화감독 이장호예요. 고등학교 동기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환경이 어렵다 보니 조금 돕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돕다보면 막상 본인이 쓸 수 있는 돈은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5억 정도 될까요. 제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척들이 많아요. 집안 전체가 가난해 돈 만지는 사람은 저뿐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나가는 돈도 많습니다』
―앞으로는 연봉을 적당히 줄여서 얘기해야 되겠네요.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투자법인은 뭘 숨기고 감추고 할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세무공무원들이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깨끗하고 투명한 돈이라는 사실도 증명되는 셈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연봉이 얼마냐는 것보다 연봉이 얼마인지 밝힐 수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 와서는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가정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처지의 젊은이들이 절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사장 자신 결혼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30만원짜리 단칸셋방을 구해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지금까지 이사만 무려 9번을 다녔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양지차지요. 돈도 많이 벌고 해서 지난 봄에 서초동 우성아파트 50평짜리에서 90평짜리로 옮겼습니다. 복층으로 된 아파트인데 컴퓨터를 전공하는 아들녀석이 미국 UC데이비스에 유학가 있어 우리 두 부부와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생 딸 하나가 살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큽니다』
윤사장은 광복되던 해인 지난 45년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윤사장이 태어나면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고등학교 2학년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님이 한분 계시지만 초등학교 선생으로 계셨기에 윤사장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 처지는 되지 못했다.
물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나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빠르게 자수성가한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윤사장은 이런 경우에 속하지도 않는다.
대학에 세번 실패
윤사장의 젊은 시절은 실로 실의에 가득찬 나날이었다.
『공부는 잘해 서울고를 다녔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법대에 갈 생각을 했어요. 당시엔 다들 법대에 가려고 했죠. 아버지도 「너는 판사가 돼야 한다」고 늘 말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폐암에 걸리셨어요. 아버지는 삶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내가 시골에 내려가기만 하면 나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애원하던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돕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어요.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때 아파서 괴로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암을 연구하는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수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64년 서울대 의대를 지원했다. 실망스럽게도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러나 의대를 향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재수를 해 다시 서울대 의대에 도전했다. 또 낙방이었다. 하늘이 캄캄했다. 2지망인 치대에는 합격했지만 8개월만에 중퇴를 하고 삼수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할 말이 없었다.
『세 번에 걸친 도전에 실패하고 나니 완전히 자신감 상실 상태에 빠지더군요.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 하고 해서 삼수하던 해 후기대학 중 외대를 지원하게 됐어요. 원래는 영어과에 가고 싶었는데 「이번에 또 떨어지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전 지원을 하다보니 영어과도 지망하지 못하고 정외과를 지망했어요』
윤수군은 이렇게 해서 66년 외대 정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시작된 대학생활 또한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때 친구의 부정시험 행위를 도와주다 정학을 맞게 된 것이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인데 이 친구가 시험 때마다 「커닝」을 시켜달라고 끈질기게 졸라 할 수 없이 보여주곤 했는데 한번은 아예 답안지를 통채로 바꾸다가 들킨 거죠. 지도교수한테 끌려가 호되게 혼이 나고 결국 정학처분까지 받았어요. 당시 형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형님 식구가 딸 일곱에 아들 하나였어요. 초등학교 선생을 하시는 분이 이렇게 많은 자녀를 키우는 것도 어려운데 형님 뵐 면목이 서지 않더군요. 1년을 빈둥거리다 안되겠다 싶어 일단 군대나 갔다 오자는 마음으로 입대하기로 결심했어요』
직장 도전에도 실패
67년부터 3년간 군대를 다녀온 뒤 70년 1학년으로 복학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복학해 보니 아는 친구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막상 졸업을 앞두고 직장을 구하러 나섰으나 직장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당시만 해도 일자리가 많지 않아 대학을 졸업하고도 노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상경계열 출신이 아니면 아예 원서를 내밀기도 어려운 때였어요. 특히 정외과 출신들은 기피대상이었죠. 정외과 출신은 아예 입사원서를 받지 않는 곳이 허다했어요. 한번은 코트라(KOTRA)에 원서를 낸 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친구였던 최규하 당시 총리의 아들을 찾아가 「아버님께 말해 취직을 좀 도와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했어요. 물론 그런데도 떨어지고 말았어요』
직장도전에 여러 차례 실패한 윤씨는 74년 어느날 한진해운의 전신인 대한해운공사 신입사원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해운공사는 모집요강에 학과제한을 두지 않았다. 윤씨는 해운공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원서를 냈고 어렵지 않게 입사했다. 나이 30살 때였다.
『더 이상 형님에게 신세를 질 수 없고 또 나이도 많이 들어 장가도 가야 했기 때문에 일단 다니기로 했어요』
당시는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이 서서히 본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하던 때였고 윤사장은 영어만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종합상사에 들어가 수출세일즈맨으로 활동하고 싶었다. 회사생활을 끝내고 퇴근하면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워 아내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타자기로 영문이력서를 작성했다. 이 영문이력서를 들고 국내의 종합상사란 곳은 안 찾아가본 곳이 없었다.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 대우실업 국제상사 등 일부 종합상사에서는 「영어실력은 괜찮다. 해운회사 경력을 인정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들어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대학입시에 삼수를 한데다 군대생활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치고 직장생활 약 2년정도 한 상태라 지금 와서 신입사원으로 들어가서는 이미 과장이 돼 있는 친구들과 너무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에 그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윤사장은 우연히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에서 JC 페니(Penny)라는 미국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게됐다. 처음에는 JC 페니가 단지 미국계 무역회사라는 것 정도만 알았지 우리나라의 대미수출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있는 회사인지는 몰랐다고 한다. JC 페니사는 1명 채용광고를 냈는데 무려 90여명이 몰려왔다. 윤사장은 90대 1의 경쟁을 뚫고 채용됐다.
JC 페니사는 미국에 수천개의 점포를 갖고 있던 체인 스토어였다. 우리나라 수출 초창기만해도 미국 최대 소매점인 시어스 로벅(Sears Roebuck)나 몽고메리워드(Mongomaryward) 다음으로 우리나라 상품을 많이 사가던 회사였다.
JC 페니사 입사는 절망과 실의로 점철된 과거를 끝내게 해준 기회였다. 75년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윤사장은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근무하는 요즈음 아침에는 미국과 통화하고 오후에는 이탈리아와 통화를 하는 게 주된 업무다. 대화는 영어로 나눈다.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닌데 영어는 언제 배웠습니까.
『당시만 해도 영어회화를 잘 하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저도 읽는 거야 잘했지만 회화는 또 성질이 다른 거 아닙니까. 카투사에 의무병으로 근무했던 게 영어를 배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어떻게 카투사에 가게 됐나요,
『당시 카투사 요원은 전원 차출이었어요. 이게 참 우연인데 대학에서 정학처분을 받고 자원입대를 해 남들처럼 논산훈련소로 갔죠. 저도 처음에는 육군보병으로 근무하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훈련소 인사참모가 절 부르더군요. 이 양반 이름이 윤광국 중령이었어요. 아직도 이름을 기억합니다. 이 분 아들이 초등학교 교사이던 제 형님반에 있었어요. 형님이 절 좀 잘 봐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운좋게 카투사 의무병으로 가게 된 거죠』
―카투사로 복무했다고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죠.
『물론 그렇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어요. 제가 근무하던 미군부대가 65 메디칼 그룹(Medical Group)이었는데 건국 대 근처에 있었어요. 이 부대는 청계천 복개공사로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평화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어요. 이때 미군 의사들 데리고 다니면서 고궁 구경시켜주며 영어를 배웠습니다. 미군 의사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돈이 필요해 미군병사들의 보초근무를 대신 서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쓰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때 쌓은 영어실력은 일생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 됐다. 암울했던 20대를 보내고 JC 페니사에 입사해 어엿한 수출세일즈맨으로서 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 바로 이때 쌓은 영어실력이었다.
전자레인지 수출로 명성
JC 페니사에 입사해 수출세일즈맨이 된 후 그는 윤윤수라는 한글 이름외에 진 윤(Jene Yoon)이라는 영어 이름을 얻게 됐다.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있는 지금까지도 그의 명함 뒷면에는 이 이름이 적혀 있다.
막상 입사를 하고보니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수출상품이던 섬유제품은 이미 선임자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진윤에게 돌아온 것은 당시로서는 경쟁력이 없어 수출판로가 막막하던 전자제품류. 그러나 진윤은 남들이 어렵다고 기피하던 전자제품에서 보란 듯이 성공을 거둬 수출세일즈맨으로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 수출이었다. 만년 적자행진을 계속하던 당시 삼성전자의 흑자반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이 전자레인지였고 이 전자레인지의 대미수출에 기여한 사람이 바로 진윤이었다.
『삼성전자는 76년 전자레인지 개발팀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강진구 사장은 미국 일본 등의 산업관련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전자레인지가 세계적으로 도입단계에 있는 제품이란 것을 알고 개발을 시작한 겁니다. 전자레인지는 음식물의 겉을 태우지 않고 속부터 단시간에 음식물을 익힐 수 있는 데다가 음식물을 직접 불에 구울 때 생기는 탄화된 부분이 암의 요인이 된다는 의학보고가 있어 각광을 받고 있었죠. 때마침 미국에서 전자레인지 개발기술자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해 개발이 중단된 상태였어요. 강사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 전자제품을 신뢰하지 않는 미국 바이어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삼성전자는 기술개발은 마친 상태였지만 아직 생산라인조차 완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이어 접대를 위해 서울 시내 좋다는 룸살롱을 전전할 때 강진구 시장은 일본에서 전자레인지 1백50대를 비행기로 공수해와 선풍기 생산라인 곳곳에 얹어놓고 마치 전자레인지 생산라인인 것처럼 꾸몄습니다』
30대 중반에 이사가 되다
우여곡절 끝에 바이어는 2천5백만 달러 분량의 전자레인지를 구매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계약으로 진윤은 수출세일즈맨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됐고 이후 여러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삼성전자측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어요. 당시 삼성전자의 유성재(兪珹在) 전무가 서울고 선배였는데 절 잘봤어요. 제 영어실력을 보더니 삼성에 와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했어요. 자리를 옮길까 생각도 해봤는데 전자제품이란 초기단계에서는 세일즈맨이 중심이지만 좀 시간이 지나면 판매자체도 상품을 잘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중심이 될 것 같아 결국 포기했습니다』
여러 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물리치고 그가 선택한 곳은 (주)화승이었다. 화승 측은 그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수출담당이사 자리를 제시했다. 81년 당시 그의 나이 36세. 지금 같으면 신문에 났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6년 전 첫 직장인 해운공사를 다니면서 영문이력서를 써서 이곳저곳 종합상사를 기웃거리던 때가 생각났어요. 친구들은 모두 대기업의 과장급이 됐는데 30살이 넘어 새로 신입사원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며 승강이를 벌이던 일 말입니다. 그런데 화승에 이사로 들어가게 돼 친구들의 직급을 단번에 넘어선 것입니다』
윤사장이 화승의 이사로 갈 수 있었던 데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일로 인해 뼈저리게 체험한 「정직」과 「성실」의 중요성을 아직까지도 신조로 삼고 있다.
『JC 페니에 있을 때였어요. 당시 섬유나 신발산업은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 근거지였기 때문에 JC 페니는 일본 중간상들을 경유해 물품을 수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젠인가부터 일본 중간상들이 구입선을 화승의 전신인 동양고무로 바꾸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동양고무 제품이 품질이 나빠 외국의 소비자들로부터 클레임이 걸렸어요. 본사에서 지시가 내려와 부산까지 내려가 조사를 마치고 올라왔습니다』
윤사장이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까지 JC 페니 본사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윤사장의 아파트 문을 두들겼다. 나가보니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동양고무 현승훈(玄承勳)사장이 보낸 것이라며 신문지로 둘둘 만 두툼한 뭉치를 건네주고 가버렸다. 얼떨결에 그 뭉치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풀어보니 현금이 잔뜩 들어있었다.
『당시 저는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상이군인들이 주로 살던 신생아파트에서 1백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어요. 당연히 돈에 욕심이 났죠. 게다가 당시 영동에 부동산 투기붐이 불고 있었어요. 본사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 후 직장을 그만둬도 이 돈만 있으면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돈을 놓고 고민에 빠졌어요』
이때 흔들리는 진윤을 바로잡아 준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단호하게 돈을 돌려주라고 충고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도 궁금합니다. 아내의 간곡한 충고를 받아들여 돈을 돌려줬고 현사장에게는 「회사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는 것을 없다고 허위보고할 수는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유혹을 뿌리치다
현사장은 이 일로 당장은 회사가 어려워지는 곤란을 겪었지만 진윤이란 사람을 깊이 신뢰하게 됐고 바로 이 점이 진윤을 화승의 수출담당이사로 스카우트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생은 정도를 걸어가면 언젠가 좋은 기회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화승에 이사로 왔지만 그는 맨손으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회사는 그에게 텅빈 충정로 종근당 빌딩 3층을 통채로 내주며 「사람 채용하는 문제, 집기 들이는 문제부터 모두 당신에게 맡길 테니 화승 USA(미국지사)를 차리라」고 주문했다.
『이사가 됐다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태산 같은 걱정이 찾아왔어요. 인사 관리를 해본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 꾸려가야 하나. 앞길이 막막했어요. 스트레스로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아 아내의 권유로 난생 처음 성당에도 나가 봤습니다』
현사장은 자신을 샤이(shy)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넉살좋게 아무데나 나서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뭘 부탁하면 모질게 거절하지도 못해 관리자로서도 문제가 있다고 자평한다.
―샤이한 사람이 어떻게 수출세일즈 같은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지요.
『모든 세일즈맨이 마찬가지겠지만 수출세일즈맨에게 필요한 것은 끈질김입니다. 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끈기는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윤사장은 화승에 있으면서 그 끈질긴 성격으로 미국 바이어에 달라붙어 첫번째 오더로 6백만달러어치의 신발수주를 따낸 얘기를 들려줬다.
『수출전선에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다 달라 붙어 싸웁니다. 특히 JC 페니 바이어같이 막강한 구매력을 가진 사람은 만나기조차 쉽지 않았어요. JC 페니에 있을 당시 함께 일했던 전중현이란 사람을 통해 로저 마틴이라는 미국인 신발 바이어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어요.
신발업계에서 미국인 바이어는 한국인 세일즈맨을 슈독(shoe dog)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이어로서는 많은 슈독 중 하나일뿐인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다른 슈독들을 엿먹이는 일이 되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마침 이 바이어의 상관인 매니저 리처드 믹이 새로 부임해 한국 신발업계를 구경나왔어요. 이때다 싶었지요.
「바이어가 안되면 매니저를 뚫자」고 생각하고 전씨에게 부탁해 믹이 동양고무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씨가 힘을 쓴 덕분에 믹이 홍콩으로 떠나기 전날 시간을 내 동양고무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신발은 서울이 아니라 부산지역을 기반으로 하다보니 직거래가 안되고 미쓰비시 히라오카 등 일본 중간상을 통해 거래되고 있었어요. 저는 중간상을 통한 거래를 직거래로 바꾸면 JC 페니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믹에게 설명했습니다. 믹도 새로 부임해 과거부터 해오던 불합리한 관행을 바꾸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어요.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다
그러나 믹의 호의와는 반대로 바이어는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서는 우리 신발에 대해 이것저것 고치라고 잔뜩 주문했어요. 분위기를 보니 믹이 홍콩으로 떠나기 전 바이어가 지시한 대로 고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애써 믹을 만난 노력이 허사가 될 것 같았어요.
할 수 없이 밤새도록 작업을 해 주문한 대로 샘플을 고친 다음 서울로 가져와 김포공항 VIP룸을 빌려 믹이 비행기로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 샘플을 볼수 있도록 전시했습니다. 바이어가 VIP 룸으로 들어오면서 「쉿 쉿(shit shit)」하며 중얼중얼 욕을 해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어요.
하지만 믹은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바이어에게 홍콩으로 오기 전에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고 샘플을 미국 본사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믹도 직거래를 하면 최소한 5%는 이익을 볼 것이라는 내 말에 솔깃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샘플을 미국 본사로 보낸 뒤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뉴욕까지 날아가 바이어의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같은층(18층) 뉴욕 힐튼 호텔방을 잡고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어요.
이 바이어도 지독한 친구였어요. 그때까지도 샘플을 믹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거예요. 할 수 없이 다시 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팅을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고치라고 해서 벌써 3번을 고치지 않았느냐. 이제 오더를 달라」고 설득했더니 결국 오더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이어는 「일단 한국에 돌아가 있으면 오더를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오더 시트를 직접 내 손에 받아쥐고 가지 않으면 회사에서 쫓겨난다」고 버텨 결국 바이어를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바이어와의 인간관계를 이렇게 끝내서는 안됩니다. 이젠 바이어를 달랠 차례였어요. 바이어를 만나 「당신 부하중 한 사람을 연봉 10만달러에 화승 USA의 세일즈맨으로 고용할테니 소개하라」고 달래 댄 워렌마이어라는 세일즈맨을 소개받고 이 사람을 워치독(watch dog)으로 활용해 화승이 계속 JC 페니의 오더를 수주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윤사장은 한번 시도해서 안된다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미국시장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의욕에 넘쳐 일을 하던 윤사장은 그러나 큰 실수를 저질러 84년 자의반 타의반 화승을 떠나게 된다.
눈물을 흘리며 화승을 나오다
83년은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전세계에 상영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비행기 여행중 영화 ET를 다룬 뉴스위크지의 커버스토리를 보고 ET인형을 만들어 팔면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ET인형은 출시되자 마자 폭발적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ET인형의 독점적 생산 판매 라이선스를 가진 미국 코마르사로부터 제소를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윤사장은 태평양을 건너 오클랜드로 날아온 여섯 컨테이너 분량의 ET인형을 소각하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수년에 걸쳐 쌓아온 공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저작권이 문제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물건을 팔 수 있는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달려가기에만 바빴어요. 그러다가 결국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거죠. 이 일로 회사에 40만불이나 되는 거액의 피해를 주고 나니 주위의 눈총이 따가워 견딜 수 없었어요. 현사장 은 퇴사를 말렸지만 전무 상무들의 눈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내 이효슉씨에게는 윤사장이 화승에서 물러난 후 휠라의 신발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하기까지 몇년간이 최악의 시기였다.
『남편은 무일푼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월급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직원들 월급 제때 챙겨주는 일이 그렇게 힘들 수 없었어요』
윤사장은 84년 화승을 나와 예식장 한구석에 20평을 세내 럭스타(Luck Star)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는데 얼마후 대운무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는 학교 후배 중 하나가 미국 앨라배마주에 참나무숲 80에이커를 갖고 있었기에 이 친구와 합작해 나무를 베어 한국으로 들여와 인천에서 가구를 만들어 수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벌목에 대한 허가기준이 까다로운 미국 사정을 모르고 세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앨라배마주법에 의하면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나무는 벌목할 수 없었다.
윤사장은 회사를 차렸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절망에 빠졌다. 이미 자식은 둘인데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술로 밤을 꼬박 세우며 수개월을 고민한 끝에 화승을 나오기 6개월 전 한국의 신발제조기술과 이탈리아의 유명 스포츠 브랜드 휠라를 결합해 미국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가 만 계획을 재시도해 보기로 했다.
『화승에 있을 때 이미 한번 추진하다가 북미지역 판매권이 호머 알티스라는 사람에게 넘어가 있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말았던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알티스라는 친구가 문제가 많았어요. 우선 자금이라고는 마코 슈(Marco Shoe)라는 곳에서 대는 1백50만불이 전부였어요. 컨테이너 한대값에 불과한 이 돈은 회사를 시작하기에는 비스킷 값에 불과한 액수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국제 비즈니스의 경험이 전혀 없었어요. 자금을 빌린 대가로 22%,여기에 로열티 11%를 포함해 33%을 지불하기로 했다는데 그래서는 마진이 너무 작아 손가락 빨 수밖에 없었습니다』
휠라 신발사업 시작
윤사장은 알티스를 만나 동업을 제의하기 위해 매릴랜드주 볼티모어로 날아갔다. 윤사장은 화승 USA에 있으면서 한국의 여러 종합상사 관계자들을 많이 사귀어 뒀다. 종합상사란 본래 금융을 주요 사업무기로 하는 곳이다. 은행으로부터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지는 못하나 시장성 있는 상품을 개발한 중소기업을 상대로 자금을 대고 거래에 개입하는 것이 종합상사의 주요 업무였다. 윤사장은 친구를 통해 쌍용의 미국지사에서 자금을 구할 수 있었다.
『알티스를 상대로 「내가 자금도 대고 제품도 생산할 테니 너는 판매만 하라」고 설득했죠. 알티스도 어려운 처지라 선뜻 동의했어요. 계약서에 서명하고 서울로 와 회사 이름을 라인실업으로 바꿔 신발수출을 시작했습니다』
윤사장의 아이디어는 한국의 우수한 신발제조기술과 이탈리아의 스포츠 패션 브랜드, 미국의 광대한 시장을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맞아 떨어졌다. 이로 인해 윤사장은 완전히 거덜난 상태에서 일약 신데렐라 사업가로 변신했다. 파산 직전의 알티스는 윤사장과 합작해 큰돈을 벌었고 지금도 윤사장을 은인이라고 말한다. 휠라 역시 신발사업을 시작해 미국 시장에서의 열세를 반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다.
휠라하면 아직까지도 스포츠 신발 브랜드보다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재 휠라 그룹 전체 판매량 중에서 신발이 차지하는 비중은 65%로 의류가 차지하는 30%의 두 배 이상이다. 나이키나 리복이 신발에서 시작해 의류분야로 확대해 나간 경우라면 휠라는 반대로 의류에서 시작해 신발분야로 확대해 나간 경우에 속한다.
휠라 제품에서 신발이 최대의 비중을 차지한 점을 고려해볼 때 오늘날의 휠라 그룹을 만든 데에는 윤사장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휠라 그룹의 엔리코 후레쉬 회장은 이를 두고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오늘날의 휠라로 키운 것은 한국』이라고 말했다. 윤사장이 19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월급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금은 '샐러리맨의 우상', '18억원 연봉의 사나이'로 불리는 휠라코리아 윤윤수 사장도 처음에는 해운공사 말단 직원이었다. 운이 좋았다면 1970년 당시는 한창 종합상사가 기업의 꽃으로 불리던 그야말로 수출 중흥 시대였고 믿을 건 영어실력 하나밖에 없었던 그는 전세계를 넘나들며 무역 실무를 배울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올라탄 셈이다. 미국 최대의 유통업체 J.C.페니로 옮겨간 윤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만든 전자레인지를 미국에 들여다 팔았다. 삼성전자의 미국 진출 성공 뒤에는 J.C.페니 '진윤(윤 사장의 영어이름)'의 숨은 역할이 컸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현장 경험을 쌓은 윤 사장은 1984년 귀국해 운동화 제조업체 화승에서 수출담당 이사를 맡게 된다. 미국에 직접 수출을 하면 이익이 늘어날 거라고 판단한 그는 과감하게 중간 무역상을 없애고 직접 영업을 뛰겠다고 나섰다. 미국 바이어를 만나 수백가지 샘플을 보여주고 설득하는 것은 물론 싫다는 바이어를 공항까지 따라가 샘플을 늘어놓고 공항 로비에서 신발 전시회를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열정이 휠라코리아 사장으로 취임하던 이듬해 매출신장률 274.3%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휠라코리아는 해마다 평균 30% 이상의 매출신장률을 달성했다. 2003년 기준 휠라코리아의 매출은 2074억원, 영업이익은 265억원이다. 전세계 휠라 지사 가운데 가장 높고 외형으로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다.
2000년 9월 호주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동입장하던 남북한 선수들에게 휠라 상표가 선명하게 찍힌 유니폼을 입힌 것도 윤 사장이다. 엔리코 후레쉬 휠라그룹의 전 회장은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휠라가 꽃피운 곳은 한국"이라고 휠라코리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윤 사장은 2003년 6월 MBO(내부경영자 인수) 방식으로 3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침체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지사가 외국 본사를 인수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특별한 성공 비결이 있는 줄 알지만 별 것 없습니다. 샐러리맨에게 성실만한 성공 요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죠. 저는 직장생활할 때나 사업체를 운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성실은 제가 갖고 있는 최고의 무기였죠," 그는 새벽 5시 기상, 아침 7시30분까지 출근, 8시 각 팀장들과의 회의, 9시30분 주요 회의내용과 각종 정보를 전 사원과 함께 공유하는 오전 일과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킨다. 전날 밤의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나 외국 출장 중인 경우 전화를 통해서라도 오전 스케쥴만은 철두철미하게 완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