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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제 8 회
첫 번째 창조이야기 3 부
3회에 걸쳐 진행하는 '첫 번째 창조이야기 ㅡ 7일간의 창조(창세1,1-2,4)'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창조 여섯째 날과 마지막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살펴봅시다.
1.창조 여섯째 날(동물, 인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 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 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창세기 1,24-31: 땅에 사는 온갖 동물을 만드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 하시다)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 하셨다.
ㅡ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ㅡ 하지만 창세기 1장의 저자는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ㅡ 하느님은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신 분!
'지배하라'는 구절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의 질서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ㅡ '지배하여라'는 '돌보아 주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구도
* 1일(빛: 낮과밤), 4일(해,달,별: 계절과 축제) ⇒ 시간
* 2일(궁창: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 5일(하늘에 사는것, 바다에
사는것) ⇒ 공간
* 3공간(땅: 식물), 6일(동물과 인간) ⇒ 생명
※창조의 신학
ㅡ 혼돈 가운데 질서를 잡으시는 하느님.
ㅡ 말씀을 통한 창조
ㅡ 피조물을 손수 빚어 만드시는 옹기장이 하느님
ㅡ 피조물 하나 하나에 이름 붙이시는 하느님.
2. 창조 일곱째 날(안식일)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2,1-3: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안식일의 의미
ㅡ 안식일을 생명의 시간으로 거룩하게 살아 갈 때, 나머지 시간들도 거룩한
시간으로 바뀌어 간다.
ㅡ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은 안식일을 통해 삶 전체를 거룩하게
지낼 수 있는 힘을 얻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3. 기타
ㅡ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축복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와 다른 점은?)
ㅡ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는가? 하느님처럼 되면 안되는가?
ㅡ 인간 중심의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ㅡ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이
완성될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복음서 6,20: 참행복
이건 대단히 혁명적인 얘깁니다. 완전히 당시에 갖고 있던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은 뭡니까?
너희들은 축복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 같은 어원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란?" 그러니까 그 때 까지의 신학으로 보자면
그 사람들은 축복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에 관 한 약속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라는 내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종교가 출발할 때는 이런 구약성경 안에서 이와 같은 사고들이 출발
할 때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뭡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라는 것에서부터 구약성경의 어떤 신관 종교관은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약으로 오면서는 어떻게 바뀌는 겁니까?
세상을 살아 가면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끝에는 하는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아무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그와 같은 행복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구원이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신약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 하면서 죽음 이후에 있을
영원한 생명(구원)을 약속한다.
철학에서 또는 문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행복은 우리가 종교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구원과 동의어 입니다.
행복과 구원,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힘겨운 십자가를 두려움 없이 지고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복의 의미와 신약에서의
복의 의미와, 구약에서의 구원이라는 의미와 신약에서의 구원이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카다란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말하는 복(구원)의 의미와 신약의 복(구원)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뭐죠?
이 세상 살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저 세상 가서도 계속 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양다리는 된다는 겁니까?
적어도 복음의 말씀은 그런 양다리가 된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애요.
가끔씩 저 자신을 보고 또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우리 자신을 보면서
가끔씩 복음을 읽으면서 부끄러워 지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지내고 있는 것
같애요. 이 세상에서.
그것이 저희들 교회가 정말로 커다란 차원에서 한번 다 함께 좀 반성해
봐야 될 그와 같은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 24절 이제 중요합니다. 우리 얘기입니다.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
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창세 1,24: 천지창조)
따라서 창세기를 적은 사람의 동물학적인 관은 동물을 크게 셌으로 나누는
거지요?
첫째, 길들일 수 있는 짐승과 길들일 수 없는 짐승 그리고 땅을 기어 다니는
것들 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동물은 크게 세가지인 겁니다.
제가 어느 어린 아이에게 "너는 동물 이름 알고 있어?" 라고 물으니까,
"개, 고양이 그리고 끝이요!" 뭐 그렇게 얘기 하더라구요.
자기 본 것은 다니까.
예! 여기서 이 사람이, 창세기 저자가 갖고 있는 그런 동물을 구분 하는
법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란? 길들일 수 있는 것들, 길들일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다리가 없이 기어다니는 것들 이 정도가 되는 겁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들짐승을, 이건 나중에 율법쪽에 가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구분하면서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할 때 그것을 구분하는 하나의 카테고리(Category)를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조금은 기억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창세 1,25: 천지창조)
약간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는 맞지 않습니다. 점점 진화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종류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창세기의 저자는 다윈을
반박하려고 이걸 쓴 것은 아닙니다. 다윈이 훨씬 나중에 나왔지만.
제 종류대로 만드시고 그것을 보시니 좋았다. 일단 보시니 좋았다가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또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26: 천지창조)
여기서 말하는 게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첫째, 우리와 비슷함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의 형상에 따라 신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그와 같은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본질.
따라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존재라는 겁니까?
하느님을 닮아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그 하느님의 형상을 완성해야 하는 겁니다.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닮아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완성해 가야 한다.
인간의 본질
그렇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꼴, 아까 얘기한대로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하느님의 형상을 내 안에서 완성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화(神化)'라고 합니다.
하느님화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화'라고.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건가? 라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성화(聖化)라는 단어로 바꿨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구절은 하느님과 우리들이 갖고 있는 동질성에 관해서
얘기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복음에서 어떤 얘기를 합니까?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찿아와서 당신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가 시편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시편에서 뭐라고 시편의 저자가 율법에서 얘기 했느냐?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라고 가르치는데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너희에게
그토록 이상하냐 ?라는 얘기를 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습니다.
중대한 문제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요한복음 10,34)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 일까요?
우리들은 이미 하느님의 권능에 내지는 하느님의 신성에 일정 부분
참여하고있습니까? 어느 순간?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도 그런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해 있는 겁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권능(신성)에
참여하고 있다.
반대로 나중에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쫒겨날 때 뱀이 그들을 유혹할 때
뭐라고 그럽니까? "이걸 따먹으면 너희도 눈이 열려서 하느님처럼 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 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3,5: 인간의 죄와벌)
따라서 이부분에서 우리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하느님처럼 되면 안되는 겁니까? 그 부분이 성화라는
신학적인 논의에서 가장 우리들이 혼돈에 빠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대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세상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코 복음서 10,45)
우리가 뱀이 하와에게 얘기 했을 때 "이걸 멱으면 너희도 하느님 처럼 될
수 있어!" 라고 얘기한 그 하느님이라는 단어와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는
그 율법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그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내용(內容, Content)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존재로써,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로써의 하느님!" 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능력과 권능으로 채우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 성화는 사실은 같은 문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정반대
방향에 있는 겁니다.
이해 하시기 어렵지요?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성화, 신화라는 것은 하느님이 꿈꾸는 것을, 하느님이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의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는 것을 얘기합니다.
※성화(聖化):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는 것.
반대로 뱀이 하와를 유혹 했을 때 "너희도 하느님 처럼 될 수 있어"라는
것은 뭡니까? "너도 이제 하느님과 일대 일로 맞대결 할 수 있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너희도 신처럼 되어서 하느님의 뜻이 뭐든 이제는 너희
맘대로 할 수 있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그 성화의 차원과 "주님, 당신이 뭐라고 그러든 나는 내 맘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신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 되었다." 라는 것은 뭡니까?
그런 하느님의 본질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고, 그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삶으로써 하느님과의 어떤 일치를 지향하는
요한 복음과 이 부분을 연결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간
하느님 본질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지향해야 한다
결국 중세 철학에 와서 하느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세 단어로 요약이 됩니다.
미스 코리아랑 관계가 있습니다.
진(眞), 선(善), 미(美).
진: 참되고 , 선: 선하고, 미: 아름다운 존재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본질: 진 (眞), 선(善), 미(美)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들은 진실할 수 있고,
참 될수 있고, 우리들은 선한, 착할 수 있고, 우리들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런 형상 안에서, 그런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진,선,미)을 닮아 창조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알기 위해서,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나는 누구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겁니까? 하느님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내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까?
인간에 관한 이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 29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십니다.
아, 그 앞에 중요한 문장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 하셨다.
(창세기 1,27: 천지창조)
이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셨는데 "본래부터 남자와여자로 창조 하셨다." 라고 얘기 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저자는 아마도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겁니다.
뭘 까요?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먼저 남자를 창조
하지요. 그리고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이것 저것 다 만들어
주시는데 그래도 남자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찿지 못하니까 나중에
그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가지고 여자를 만들잖아요.
※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기 2,22-23: 에덴동산)
이것은 여자에게 유리한 얘깁니까? 남자에게 유리한 얘깁니까?
어떤 분은 여자에게 유리한 얘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 졌고 여자는 본차이나다. 그렇게 해석 하기도 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것은 그 당시의 창세기 2장 이후에
창조설화를 쓰고 편집한 그 전승이 갖고 있었던 사회적인 양상을 반영 합니다.
즉 여자는 남자로 부터 나왔다는, 여자를 약간 남자의 아래에 두는 그와
같은 양상을 얘기합니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그걸 받아들이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남자로부터 나왔다고 그러는데 아니다.
본래부터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라는
이야기입니다.
※ 창세기 1장의 저자는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
남자와 여자를 창조 됐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제가 많은 분들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고개를 끄덕 끄떡 하시다
갑자기 고개를 꺄우뚱 합니다.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가 세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한국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될 첫째는 통일이라는 문제입니다.
남과 북이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둘째는 세계 교회와 함께 우리가 고민해야 될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환경이라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여성이라는 문제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 통일이라는 문제와 환경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 끄떡 하십니다.
그런데 여성의 문제 만큼은 고개를 꺄우뚱 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여성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는 넘어선 문제 아닙니까
하고 말씀 하십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 나라 한국 사회 안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자기 자신의
본래의 삶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기회를 갖고 있느냐?
이 문제에 관해서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아직 굉장히 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한민국 사람 중에 반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올바로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나머지 반에게 그건 행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머지 반에게도 역시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여성 해방의 문제는 곧 남성 해방의 문제입니다.
여성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가졌을 때 남성도 훨씬 더
행복한 그와 같은 여성 해방의 문제는 곧 남성 해방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탈출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해방 사건이기도 한 겁니다.
※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의 해방일 뿐 아니라
이집트의 해방 사건이기도하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폭력이나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서 그 사람의 자유를 구속했을 때 그렇게 구속 받는 사람만이
피해자가 아니라 그렇게 구속하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은 구속 안에서의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해방의 사건은 단지
이스라엘의 해방사건 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해방사건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해방은 여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기도 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본래부터) 괄호 안에 여기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만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7)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문제입니다. 물론 창세기 1장은 고대 시대에 갖고 있던
여성의 어떤 사회적인 제약이나 불평등한 상황에 관해서 도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한 줄을 넣으므로써 하느님은 본래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 하셨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들은 동등한
존재다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ㅡ28)
이게 문제입니다. "다스려라" 라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배하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앞서 말씀 드렸지요. 창조의 행위는 어떤 행위입니까?
혼돈 가운데 질서 잡는 행위지요?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지배라는 것은
뭡니까? 계속해서 하느님의 질서 잡힌 세상의 그 질서를 완성 하라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지배하라는 말입니다.
※ 창조 행위는 혼돈 가운데 질서를 잡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는 하느님 질서를 완성하는 것!
오늘날 만약에 저보고 이 구절을 번역 하라하면 저는 이렇게 번역하겠습니다.
"돌보아 주어라." 그들을 돌보아 주어라.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아 주어라라는
얘기를 합니다.
※창세기의 '지배하여라'는 '돌보아 주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기 1,29-30)
따라서 이 부분의 말씀만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됩니까?
풀이랑 과일을 먹어야 됩니다.
소. 돼지. 닭 등 이런거 먹으라고 허락 되지 않은 겁니다.
씨 있는 과일과 풀들을 먹이로 준다고 하십니다.
제가 사춘기를 겪을 때 중학생 때 입니다.
굉장히 심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심해서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심한 우울증이었는데 그 우울증의
출발점이 뭐였냐 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좀 사춘기 때 부정적으로 보이고 이랬을
때 갑자기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어떤 생각이냐 하면 모든 생명은 존재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
시키는 거예요. 내가 암만 착하게 살려해도 나는 뭔가를 먹어야 되는 겁니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소를 죽여야 되고, 돼지를 죽여야 되고, 닭을 죽여야 되는 겁니다.
아니면 식물들은 생명이 아닌가요? 그것들도 생명이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희생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때도 신앙을 갖고 있어니까 하느님은
참 이상하다. 왜 나로 하여금 뭔가를 이렇게 희생 시켜서만이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세상 안에 나를 던져 놓았을까?
그런데 그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실제로 뭔가가
목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나를 위해 희생된 것들이잖아요. 단지 내가 거기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던지, 그들이 죽으면서 지르는 그 고함 소리를 못들을
뿐이지. 내가 뭔가를 먹는거 아니예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굉장히 힘들게
음식을 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뭐 타협이라면 타협이랄까?
이 정도의 타협을 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먹지를 말자. 그리고 재미로 죽이지는 말자.
그리고 되도록이면 많은 생명들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런 어떤 함께
사는 그와 같은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다른 것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그런 삶을 살아보자.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저 나름대로 그런 굴레를 조금 벗어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이겁니다.
그런데 제가 독일에 가서 학생 시절로 있을 때에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창세기의 이 구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천주교인들 개신교인들
포함한 그런 집단인데 이 사람들은 뭐만 먹고 사냐 하면 땅에 떨어진 과일만
먹고 살아요. 붙어 있는 과일을 떼어 먹지도 않고 그것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땅에 떨어진 과일만 먹는 것이 신의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먹는 한
집단을 만낫어요. 그러면서 혹시 제가 옛날에 독일에서 태어 났다면 내가
그때 저기 섞여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가 그런 생각은 해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신을 희생하는지에
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서 그 많은 것을 희생 한다면 우리들도 세상을
위해서 그 이상의 것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데 인간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을 잘 돌보아 줍니까?
※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세상이 우리를 위해 그 많은 희생을 한다면 우리도 세상을 위해 그 이상을
베풀어야 한다."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암적인 존재 같애요. 아니면 바이러스 같애요.
어디에 딱 한 번 서식하기 시작하면 마구 불어나면서 거기를 완전히 황폐화
시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지금 인류가 생각하는 중요한 꿈 중에 하나가 뭡니까?
나중에 지구가 못 살게 되면 다른 별로 떠나서 살겠다는 거 아니예요.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은 큰 일 난 겁니다.
얘네들 거기서 그냥 끝나야 되는데 딴 별에 가가지고 또 무슨일인가를
일으키려고 하잖아요.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거 좋지 않은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걸 잘 돌보아 주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지금 정부가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사대강
이라는 일이 있지요?
이게 창조 질서에 맞는 일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많은 주교님들이 걱정하는
그런 성명서가 나왔습니다.
지금 정부의 입장을 저는 한 편으로는 이해 할 것도 같애요.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제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가 경제 문제인데
경제를 살리자니 지금 대통령이 워낙 건설사에 있던 그런 분이다 보니까
건설쪽으로 일으켜서 경제를 살려야 겠다 생각을 하고 마구 공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 강 주변이라든지 아니면 여러군데에서 그런
습지들이 파괴가 됩니다.
여러분들 몇 년 전에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커다란 장마가 져가시고 도시가
물에 잠긴 적이 있었지요?
요즘에 미국에서 그거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그 강 주변에 습지를 만듭니다.
둑을 쌓고 댐을 쌓고 해 봤지만 그런거는 다 안되더라. 댐을 쌓아도 비가
왠만큼 왔을 때는 문제가 아니지만 비가 정말 많이 왔을 때는 댐이 무너
지면은 그땐 정말 큰 문제가 생기더라.
몇 년 전에 한 10년쯤 전에 중국에서 댐이 무너져서 어떤일이 생겼는지
우리 봤지요?
그와 같이 자연은 어떻게 대책을 세울 수 없더라. 따라서 자연이 스스로
배운 그 길이 좋은 일이더라.
그게 뭡니까? 그 주위에는 습지를 만들어야 된다. 그러면 습지들이 스펀지
같이 그런 물들이 너무 많아질 때는 그것들을 빨아 들인다.
앞서서도 왜 묵시록에서 용이 땅에다가 강을 만들어 놓으니까 땅이 입을
벌려 그 물을 받아 마시는 그와 같은 장면을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개발들은 결국 강 주변의 땅들을 죽게 만들고 그와
같은 습지들을 훼손하고 그와 같은 것들은 우리 때는 그런 일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다음 세대, 다음세대에서는 굉장히 커다란 불행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광화문이 물에 잠긴 예가 예전에 있었습니까?
없어지요? 그런데 작년에는 물에 잠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걸 다 아스팔트 콘크리트를 만들어 놓으니까 그 물들이 갈데가 없는 겁니다.
결국 물에 잠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소위 말하는 인간의 문명이 얘기하는 개발이라는 겁니다.
예, 그런 것들이 해야 될지? 하지 않아야 될지? 모를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 "개발을 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모를 때는 조심스러운 것이 좋다."
사대 강 못지 않게 중요한게 뭡니까? 요즘 계속해서 화두로 떠오르는게.
예, 원자력 발전에 관한 그와 같은 문제입니다.
'원자력 폐기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사실은 인류가 알지 못합니다.
오십년 전에는 나중에 시간이 가면은 그런 것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꺼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번에도 일본에서 그런 원자력 문제가 생겼을 때 희생된 사람은 누굽니까?
50명의 근로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보면 계약직 근로자라고 합니다.
정규직도 아닌.
그런데 자신들의 어떤 그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기 들어가서 피폭 위험을 안으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건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원자력 발전을 통해서 그 많은 에너지를 가장 싼 값으로,
아주 저렴한 값으로 공급 받는 혜택은 우리도 역시 받습니다.
삼천원 낼 전기 값을 천원내고 우리가 쓰니까.
하지만 그걸 가지고 정말로 많은 이익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정작 원자력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비행기 타고 도망 갔을 겁니다.
정작 그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그 약자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겁니다. 그게 잘못 된 겁니다.
따라서 환경의 문제건, 사대 강의 문제건, 아니면 원자력 발전의 문제건
어떤 문제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어디에서 만납니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회 정의에서의 문제에 만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성경공부!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관한 그와 같은 묵상도 중요하지마는 교회의 사회 교리에
관해서 한국 교회가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 어떤 것을 얘기해
왔고 또요즘에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여러분들 굉장히
깊은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만 보면은 우리들은
채식주의자의 그런 상항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창세기 2,1)
우리가 본래 구도를 보면은 다음과 같은 구도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 : 구도 1
* 1일 ㅡ 빛: 낮과 밤
* 2일 ㅡ 궁창: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
* 3일 ㅡ 하늘 아래의 물이 모이면서 땅이 드러남
* 4일 ㅡ 해, 달, 별: 계절과 축제
* 5일 ㅡ 하늘에 사는 것들과 바다에 사는 것들
* 6일 ㅡ 동물과 인간
* 7일 ㅡ 안식일
6일동안 구조를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약간 구도화 시킨다면
첫째날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자 빛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등장하는
거는 뭡니까?
낮과 밤, 그리고 해, 달, 별 곧 큰 빛물체와 작은 빛물체들이 만들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뭡니까? 계절과 축제입니다.
따라서 첫째날과 넷째날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입니까?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일, 4일 : 시간
둘째날과 다섯째날은
둘째날 궁창, 즉 궁창을 만들어서 하늘위의 물과 하늘 아래 물이 나뉘어지고
그리고 그 하늘에 사는 것들과 그 바다에 사는 것들이 다섯째날 창조됩니다.
따라서 둘째날과 다섯째날은 공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일, 5일 : 공간
그리고 셋째날,
하늘 아래에 물이 모이면서 결국 땅이 드러나고, 그 땅위에 동물과 인간이
창조되는 그와같은 내용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날과 여섯째날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3일, 6일 : 생명
따라서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공간을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하느님께서 생명을 두셨다라는 신앙고백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틀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 그것이 창세기 1장이
얘기하고 있는 창조된 세상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 : 구도 2
1 일 : 빛 ㅣ 해, 달, 별 4 일
낮과 밤 ㅣ 계절과 축제
2 일 : 궁창 ㅣ 하늘에 사는 것과 5 일
하늘위의 물과 ㅣ 바다에 사는 것들
하늘아래 물 ㅣ
3 일 : 하늘아래에 물이 모임 ㅣ 동물 6 일
땅 ㅣ 인간
※ 창세기 1장이 전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풍요롭게 누린다.
우리는 그걸 뛰어 넘을 수 있습니까?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와 같은 제한 된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 입니까? 아니면 그걸 뛰어 넘은 존재 입니까?
하느님은 그걸 뛰어 넘어 그것을 만드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존재한다라는 의미는
뭡니까? 그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얘기 합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있으니까 존재한다라는
질문 자체에 관해서 하느님은 해당이 안되는 겁니다.
※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
따라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나무가 존재하는가? 그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가?
인간이 존재하는가?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가?
그런 것들은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관념이 존재하는가? 그런 것들은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은 뭐래는 겁니까?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갖고 있는 약간 잘못된 카데고리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면 되고 하느님께서 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
하셨다라는 첫 번째 진술은 두 번째 진술 안에서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공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 생명을 두셨다는 겁니다.
나중에 제 3 이사야로가서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서 얘기를 합니다. 결국 뭐를 얘기 합니까?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 관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옛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우리가 누렸던 그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하늘인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우리가 참여 할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한
겁니까? 새로운 생명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새로운 생명은 무엇을 통해서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리라."
(이사야 65,17 :새로운 창조)
새로운 하늘과 새 땅(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은 부활을 통해서 누릴 수 있다.
그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죽고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 겁니까?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조금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좋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전에 신학적으로
몇가지만 정리를 합니다.
창조의 신학
* Creatio ex nihilo ?
* 혼돈에서 질서로 : Chaos ㅡ Cosmos
* 말씀의 창조
* 옹기장이
* 이름부름
첫째, 철학적으로 창조를 접근하는 창조론에서는 자주 '끄레아휘오 엑스
니휠로'라는 라틴말 문장을 사용합니다.
우리말로 변역 하라면은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만드셨다"
이것도 물론 철학적인 접근에서는 고백할 수 있는 얘기라 생각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창세기 1장이 얘기하고 있는 창조는 뭡니까?
※ 창세기 1장은 '무로부터의 창조' 보다는 '혼돈 가운데에서 질서를
잡으시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드셨다기 보다는 혼돈 가운데 질서 잡으시는 마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방을 정리하는 자기가 있을 곳에 있어야 될 것들을
놓아두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행위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그걸 때려 부수는데는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정리된 상황 그랬을 때 그곳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그 안에 가정이 존재할 수 있는 그와 같은 틀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Chaos에서 Cosms로 그것이 바로 창조의 밑그림 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의 창조입니다.
※ 창조신학 : 말씀을 통한 창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아까 이미 설명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 말씀의 창조는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치 마술사인 것처럼 "내가 탁 말하니까 그게 탁 나왔어!"
하느님이 요술쟁이처럼.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에 의한 창조가 무엇으로 보안되느냐 하면 옹기장이와
같은 모습으로, 그것을 만드는 모습으로 보안 됩니다.
흙으로 사람의 모습을 빚고 그 안에 당신의 영을 불어 넣는 모습으로 2장에
가서 보안이 되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은 요술처럼 세상을
노력하지 않고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으로 그것을 만드시고 그것들을
이름 붙였다라는 말씀의 신학을 조금 보완하는 모습을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창조의 신학:옹기장이 하느님(하느님은 사랑으로 피조물을 손수 만드신다)
마지막 이름 부름을 통해서 그 한가지 한 가지와 무관하게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하나 하나를 이름 붙여 주셨다.
※ 창조신학 : 피조물 하나하나에 이름 붙이시는 하느님.
내가 나를 알기 전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라는 그와같은 말씀이 단지
선택된 몇몇 존재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것들에 통용되는 그와 같은
틀을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는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다.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1-3 : 천지창조)
자, 거룩하다라는 말에 제가 굉장히 집착하는 사람이잖아요.
예, 따라서 안식일은 지상의 시간이라는 겁니까 아니면 천상의 시간이라는
겁니까? 천상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옛날 옛날 어떤 사람이 들판에 나가서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들판에
나가서 그 사람이 살려고 하니까 이 들판이 이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예요.
낮이 되면 태양 아래서 너무 덟고, 밤이 되면 너무 어둡고, 너무 춥고.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되고, 무서운 짐승이 나를 해치러 오기도 하고...
이 공간 자체가 죽음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냅니다. 어떤 꾀를 냅니까?
작은 집을 짓습니다. 집이라는 게 뭡니까?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립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생기는 일은 뭡니까?
공간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집 안과 집 밖.
이렇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집안은 그 사람에게 생명의 공간이 됩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눈 비를 피할 수 있고, 밤이 되면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무서운 동물들이
나를 위협하면 집 안에 들어와서 그 동물이 다시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다음부터.
이 작은 생명의 공간 하나를 전체 공간에서 떼어냈을 뿐인데 그리고
그곳을 생명의 공간으로 내가 보호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을 뿐인데
이 공간이 생기고 나서 부터 천천히 천천히 이 주위에 있는 모든 공간이
생명의 공간으로 변화가 됩니다.
집을 중심으로 나중에 그 주위에 있는 땅들을 개간하고, 말뚝을 세우고,
망루를 설치하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람이 정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이 공간(집)입니다. 그 힘을 통해서 이 전체 공간이 생명의
공간으로 변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아주 신비롭고 놀라운 과정입니다.
안식일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일직선으로 나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주일의 시간 중에서 하루를 떼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이제 거룩한 시간, 그리고 그것이 거룩함으로 당연히
생명의 시간으로 우리가 살아게게 됩니다.
그런데 일주일의 단 하루를 떼어내서 거기에 벽을 쳤을 뿐인데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하루를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써 천천히 천천히
주위의 시간들이 거룩한 시간으로 바뀌어 나갈 수 있는 힘을 이 하루에서
얻어내는 겁니다.
※ 안식일을 생명의 시간으로 거룩하게 살아갈 때 나머지 시간들도
거룩한 시간으로바뀌어 간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은? 주일만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힘을 통해서 나의 한 주일의 삶을 또 그것을 통해서 나의 한 달을, 일 년을,
내 삶 전체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그 힘을 얻어내라하는 것이 우리가
시간을 일주일이라는 시간에서 하루의 시간을 잘라내는 이유입니다.
※ 따라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은 안식일을 통해 삶 전체를
거룩하게 지낼 수 있는 힘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고백 성사를 보게 되면 천명에 한명도 주일을 거룩히 지내지
않았습니다 라고 고백성사를 보는 분은 없는 것 같애요.
주일미사 두 번 빠졌는데요. 아파가지고 3주 빠졌는데요.
그런데 하느님이 궁금한건 뭐겠습니까? 일주일의 하루의 시간을 주일 미사에
왔느냐 안 왔느냐보다는 그 하루를 여행을 갔으면 여행지에서라도, 아파서
누워 있었으면 아파서 누워 있을지라도,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성당에
올 수 없었다면 그래도 그 하루를 어떻게든지 하느님께 봉헌된 하루로써
거룩하게 지내려고 했느냐? 그것이 하느님의 관심일텐데.
우리는 주일미사 그것도 어떤 이는 시작하고 한 10분 있다가 와 가지고
영성체만하고 바로 퇴장하는 극단적인 케이스를 포함해서 그것을 함으로써
그것만 하면 나의 죄책감은, 나는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조금은 이상한
믿음으로 우리가 와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시대보다도 더 율법주의적인
그와 같은 상황을 우리는 맛보게 됩니다. 내가 일주일의 하루를 정말
거룩하게 살려고 다른 일주일의 6일과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느냐?
※ "나는 일주일 중 하루를 다른 날과 달리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는가?"
제가 옛날에 논문을 쓰던 논문지도 신부님은 주일날은 저한테 공부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6일 동안 공부했으니까 주일은 다르게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어디 산에 등산을 가던지, 아니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던지.
물론 신부니까 미사는 드리지만 그리고 나서 다르게 살아보라고 저한테 많이
충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정향될 수 있도록 이렇게
노력하라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예!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우리가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여러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적어도 안식일 하루는 우리가 그와같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런 생명을 누리는 삶으로 살았을 때 또 여기서 한 발자욱
더 나아가서 얘기하자면 그렇게 일주일의 하루는 그와 같은 거룩함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문화를 우리가 만들었을 때 온 세상이 누리게 될
그런 생명의 풍요로움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장 4절까지 말씀을 드렸지요? 긴 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두 번째 창조이야기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또 그 안에서 인간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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