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좋은 영화평이다.
영화도 예술이기에
결국은 진실과 아름다움 찾기 작업일 것이다.
진실이 뭔가를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
you의 평은 나이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자기 입장에서의 솔직한 느낌을 얘기했다고 볼 수 있다.
<초록물고기>는 흥행위주의 기획이 주류를 이루게 된 영화판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영화다. 영화는 그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아야한다.
<초록물고기>에서는 산업화 시대에 해체된 가족을 통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해 묻고 있는 작가주의 영화이다.
사람들은 <초록물고기> 를 시장에 틈입하기 위한 무명 신인감독의 타협으로, <박하사탕>은 사자후처럼 터져나온 이창동 감독의 진정한 데뷔작이라고 평가하는데, 그 시대에 작품을 냄으로써 영화만들기 자체에 문제의식을 제시한 것은 <초록물고기>가 오히려 더 강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평
좋은 생각들은
남들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you가 누군지 모르지만................
강대춘 선생님의 게시판에 무례하게 저의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 선생님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단지 제가 좋게 봤던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초록물고기
감도:이창동
주연:한석규 문성근 심혜진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중3때였다.
영화를 그렇게 즐겨보지 않는, 내가 이 영화를 택한 것은 순전히 빨간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고입을 치른 중3 말, 대입처럼 수능 이후에 논술이나 면접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고3 보다 더 널널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하루는 친구녀석의 집에 놀러갔다가, 서로에게 꼬롬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비디오대여점에 들려 한참을 머뭇머뭇 거리다가 집어든 것이 "초록물고기"였다.
친구가 왠만한 유명 빨간 비디오는 모두 섭렵한 뒤라 그리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연소자 관람불가"로 붉게 두른 빨간 띠와 뭔가 이러날듯한 한석규 심은하 문성근의 검은 썬글라스, 그리고 비디오 뒤쪽 한두컷의 스틸사진에 문성근이 심은하의 한쪽 어깨를 쓱~ 벗기는 장면과 한무리 조폭들이 야구배트를 뒤흔드는 장면이 다른 빨간 테이프와 달리 나의 마음을 몹시 끌었다. 나는 그때 이 영화는 에로와 폭력이 적절히 어우러진 좋은(?) 영화인줄로만 알았다.
주인 아줌마에게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학생인척 연기를 하며 빌려온 이 빨간테이프를 아무도 없는 친구집의 비디오플레이어에 짚어 넣을 때 솔직히 말하건데, 그 때 친구와 난, 남자와 여자가 그냥 맘놓고 뒹굴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여간, 이렇듯 사춘기 소년의 건전한(?) 호기심이 발단이 되어 영화관람은 시작되었다.
경주고등학교에서 자랑스러운 경고인(慶高人)으로 자라와, 순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빨간 테이프를 멀리한 친구나, 영화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미개인을 위해 간략히 '초록물고기'의 줄거리를 설명하겠다. (혹, 초록물고기를 이미 본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 주기 바란다.)
군대를 막 제대한 막동이는 기차로 고향에 내려오게 되는데, 기차안에서 깡패에게 희롱 당하는 미애(심혜진)을 도와주려다 깡패들과 시비가 붙게 된다. 결국 시비 끝에 깡패들에게 쫓겨 기차를 놓치고만 막동이는 우연히 얻게된 미애의 빨간 스카프만을 간직한 채 고향에 도착하게 된다.
막동이는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고향집은 막동이의 쉼터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고향집에는 파출부 일을 나가는 늙은 어머니와 뇌성마비 큰형이 있을 뿐이다. 낡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계란장사를 하는 둘째형, 술주정뱅이 형사 셋째형, 다방 종업원 일을 하는 여동생은 모두 집을 떠나 각자의 3류 인생을 근근히 이어갈 뿐이다. (그래서 막동이의 소원은 온가족이 모여 작은 식당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막동이는 어머니와 뇌성마비 큰형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고, 그러던중, 미애의 빨간 스카프를 돌려주기 위해 미애가 일하는 나이트클럽에 찾아가게 된다.
미애는 배태곤(문성근)이라는 조직폭력배 두목의 애인이다. 스카프를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 막동을 미애는 배태곤에게 부탁해 일자리를 얻게 해준다.
배태곤에게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던 막동이는 어느날 배태곤에게 조직일(?)을 청탁받게 되고, 막동이는 자신의 손가락을 문에 찧어 부러트려 가면서까지 배태곤의 일을 처리한다. 이 일로 막동이는 배태곤의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또) 어느날, 배태곤이 영업하는 나이트클럽에 배태곤의 선배조폭(명계남)이 찾아와 자신이 근처 나이트클럽을 경영하고 이 지역을 접수(?)하겠다고 말한다. 당연히 배태곤은 자신이 닦아 놓은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거부한다. 하지만 선배조폭(?, 어휘상 배태곤의 선배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해하길 바란다.)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몇일 후 배태곤이 경영하는 나이트클럽은 박살이 나고, 덩달아 배태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부하들은 배신을 한다.
막동이는 가족을 위해(막동이가 구체적으로 가족을 위해 했다는 내용은 영화상에 없지만, 앞 뒤 내용상으로 볼 때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배태곤의 선배조폭을 화장실에서 살해한다. 하지만, 막동이 역시 얼마 뒤 배태곤에 의해 살해당한다.
가족들은 모두 막동의 죽음에 슬퍼하고, 막동의 죽음 뒤에야 결국 모든 식구가 모여 고향집에서 식당을 하게된다.
친구놈은 이 영화가 시작된지 10분도 되지 않아 원래 기대하던 장면(?)이 나오지 않자 부엌으로 들어가 라면을 부스럭 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겐 이 영화가 충격이었다.
물론, 당시 중3 소년이었던 나에게 미성년자 관람가에서 볼 수 없었던, 거침없는 욕과 나를 무섭게 까지 했던 시퍼런 칼날, 난자된 피 역시 충격이었으나, 어릴적 찾아 헤맸던 "초록물고기"를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막동이의 현실이 나에겐 더욱 충격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막동이 전화박스에 기대어 집에 전화를 건다. 뇌성마비 큰형에게 어릴적 잡으려 했던 "초록물고기"가 생각나느냐고 되물어 보는 막동, 막동은 현실의 물질적 기쁨이 아니라 단지 어릴적 함께 공유 했던 꿈을 다시 갖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막동의 고향집이 있는 곳은 신도시 "일산"이다. 막동의 집은 작고 허름한 집이다. 마당의 한구석에는 오랫동안 집을 지켜온 늙은 느티나무가 서있다. 작고 허름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막동의 집은 언제나 "초록물고기"를 잡으러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린시절 희망의 공간이다. 하지만 막동의 집 밖 풍경 멀리에는 막동의 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층 아파트가 서 있다. 이제 더 이상 막동의 집밖 세상은 초록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세상이된것이다. 형제들은 더 이상 초록 물고기를 잡으려 노력하지 않고, 모두 각자 세상에 찌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얼마전 한 신문 기사에서 영화 "초록물고기"의 배경이 되었던, 막동의 고향집이 카센타로 변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게 바로 현실이고 사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록물고기" 결말에는 막동이의 희생으로 온 가족이 모여 다시 살게된다. 어쩌면 막동이의 희생으로 남겨진 형제들과 어머니는 다시 초록물고기를 잡으러 떠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서 밖에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처지를 개선할밖에 없는 것이 변해가는 세상을 말해준다.
분명 막동이의 최후와 막동이 가족의 현실은 존재하는 사실이다. 고3 여름 방학 때, 서울에 올라간적이 있다. 촌놈이 티비에서만 보던 지하철을 타려고 서 있던 곳에는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줌도 안되는 나물을 다듬어 팔던 늙은 할머니와 밤에도 갈곳이 없어 기둥에 기대어 잠을 청하던 극심한 백내장 눈을 가진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쩌면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막동"의 어머니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 또 즐겨 보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초록물고기를 보게 된것도 단지 "빨간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한편이 나에게 신도시의 이면과 빈곤, 소외받은 삶, 무분별한 자본주의가 가지는 문제가 어떤것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영화는 대게 픽션(Fiction), 허구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 "초록물고기"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옆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또 막동이의 죽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나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