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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은 세종 때 열일곱 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스물셋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다
유자광의 모함에 빠져 예종 때 스물여섯 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요.
추모비문은 노산 이은상님이 글씨는 일중 김충현님이 썼습니다.
여진족 토벌을 앞두고 남이 장군이 쓴 기개 넘치는 시도
현대 명필 김훙현님이 썼습니다.
"백두산 돌은 칼을 닳게 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도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1. 출생지와 살던 곳은 지금의 연건동 126번지 일대이다.
서기 1443년. 세종25년 명나라 정통 8년. 이 해가 남이가 출생한 해이다.
그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으며, 고려 때부터 말썽이던 북방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에 대비해 함경북도 회령, 은성, 종성에 성을 쌓고 6진을 개척하는 한편, 남쪽 왜구의 침입에도 대비해 일본과의 조약을 맺는 등 조선왕조 개국 이래 대 내외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몽고(원)가 쇠약해지자 이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원(元)나라 대신 명(明)나라가 군림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남이의 집안은 家門으로나 지체로나, 부러울 것이 없는 이름난 명문족벌(名門族閥)이였다
남이의 고조할아버지이신 남재(南在)는 조선왕조 개국1등 공신으로,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일급정치가로 의령부원군에 피봉 되신 분이였다.
남재의 손자 代에 지(智), 휘(暉), 간(簡) 3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지(智)는 문종 때에 우의정에 이르렀고, 둘째 남이의 할아버지인 휘(暉)는, 태종대왕의 넷째 딸 정선공주와 결혼하여 왕실의 최측근으로 네 차래나 조선을 대표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는 등 화려한 외교활동을 펼친 공로로, 문종 때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산군(宜山君)에 봉해 지신 분이며, 셋째 간(簡)은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기 까지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남휘는 태종 16년 2월 2일 정선 공주 (貞善公主 : 태종의 넷째 딸, 세종대왕의 여동생)와 결혼한 후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져 처음에는 수강궁(지금의 창경궁)에서 살았다.
그 후 정선공주가 1424년(세종6년) 1월25일에 1남1녀를 두고, 21살의 젊은 나이에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세종대왕은 수강궁과 가까운 곳에 새집을 지어, 이듬해인 세종7년 7월 25일 남휘의 어머니 方씨 앞으로 영숙택주(寧淑宅主)라 봉하면서, 이사를 하여 살게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남휘가 1454년(단종2년)에 돌아가셨으니, 남이는 10여 년간을 그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남이의 아버지인 남빈(南份)은 이(怡), 초(招), 개(愾) 3형제를 두고, 남이가 13세 되던 해에 일찍 죽었다는 족보상의 기록 외엔 알려진바 없다.
그러므로 남이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남휘의 슬하에서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던 것이다.
▲ 한국 방송 통신대학 맞은편 인도상에 세워져 있는 생가터 표지석
남이장군의 생가터가 지금에 와서 정확히 어디였는지 밝혀주는 책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1994년 12월 관할지역인 종로구청 문화 공보실에서 발행한 <종로의 명소」477P에 명확히 증언해 주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남이장군(南怡將軍)집터라는 제목하에 소재지는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로 서울대학병원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울대학 수의과대학 그 안쪽으로 창경국민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현제 한국국제협력단과 주택가가 경계하고 있는 곳이다.
1468년(예종원년)10월27일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勳舊)세력들의 비호로 유자광의 모함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처형 당하고, 그 집은 유자광에게 하사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 조차 그곳에 살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26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원한 때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廢家)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광해군 4년 7월6일 실록에 “남이 장군의 집이 파손된 곳이 없이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 있더라”라는 보고가 있었고,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의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이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
순조 18년(1818)에 공식으로 남이장군의 해원복권(解怨復權)이 된 이후의 이야기로 남이장군이 태어날 무렵 남이장군 집터에 정기가 빼앗겨 3년 동안이나 낙산(駱山)에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하며, 장군의 집터의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 있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사당을 짓고 남이장군 신을 모셨다고 한다.
이곳 지명이 연건동(蓮建洞) 이전에 연지동(蓮池洞)이었고, 연지동 이전에 남이탑동으로 불렸던 것은, 바로 남이를 위령하는 탑이 연고된 것이다.
1997년 필자가 답사 시 6.25때 까지도 사적지로 계속 빈터로 내려오다, 그 부근이 주거환경 개선 지구 지정과 함께 개발이 되기 시작하자 없어지고 말았다.“고 부동산 소개소에서 전한다.
그래서 본인이 1997년경 삼관 남씨 대종회 임원회의 시 건의하여 <남이 장군 생가터> 표석을 설치케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려 한국 방송 통신대학 정문 맞은 편 신의주 찹살 순대 가게 (T;7419993)앞 보도 위에, 위치상으로는 연건동 78-4번지로 장소는 부적합 하지만 아쉬운 대로 위안이 되고 있다.
일찍이 우리 후손들이 관심을 가졌더라면 종친회 재산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 버려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 주(註)
이와 같이 출생지와 살던 곳이 명확한데도 관광지로 부각시키기 위해, 남이섬 부근의 가평군과 충북 음성군 어디가 장군의 출생지라 주장하고 있어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참고 서적
1. 조선왕조 실록 세종7년 7월5일 : 남휘의 어미 방(方)씨를 영숙택주로 삼다.
2. “ ” 광해 4년7월6일 : 남이장군의 집 조사
3. 1994년 12월 종로구청에서 발행한 「종로의 명소」477P
(종로구청 문화공보실 T : 731-0410∼2, 이화동사무소 T : 762-6763)
2. 남이장군 묘소
장군의 묘소는 경기도 하성군 비봉면 남전2리 대장등에 있다.
의령남씨 현조록에 의하면 남이장군이 처형당한 후, 평소 장군을 따르던 장용대 군사들이, 비오는 날 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체를 수습하여, 한강을 따라 서해로 내려와, 외가인 남양 홍(洪)씨에게 인계하여 묘소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예종1년 1월26일 기록에 남양의 밭이 몰수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연고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곳 근처에 남양 홍씨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고,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을 <대장 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 무연고 분묘같이 황폐하여 오다가 1710년(숙종36년)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南九萬)이 족질 진사 남학증(南鶴增)으로 하여금 묘소를 정비하여 제사를 지내오게 하였다.
1968년 당시 수원 시장이던 남영우(南永祐) 전 남씨 대종회 상임 부총재의 노력으로 수원화수회 회장 남정사(南廷四)등 여러 종인들이 보수하고, 1971년 화성군수가 문화재 관리비 보조를 얻어 묘비를 건립하고 정화 하였다.
현제 이 묘소는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참조 ; 의령남씨 현조록
☞ 남구만공의 <남이장군 묘제문>
이문건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남구만 공이 그의 저서 약천집 권중 권에 있는 <남이장군 묘제문>이다.
이를 계기로 신설(伸雪)되기 전 남이장군의 묘역이 정식으로 정화된 것으로, 남이섬의 허묘와 혼동하는 일 없기 바란다.
[남이장군 묘 제문 해설]
묘의 소재는 양주 북면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대전리(오늘날 경기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 대장등)에 있는데, 묘터는 북쪽을 기준 했을때 9-11시방향이고, 묘터 내 장사지낸 구덩이는 임(壬)-병(丙)방향이다.
① 경인(1710년 숙종36년) 10월9일 12:00시경, 6대 재종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내 영중추부사(중추부의 으뜸인 정1품 관직)을 지내고, 치사(致仕:벼슬에서 물러남)하여 낙향한 후에도, 봉조하(奉朝賀:종신토록 정1품의 녹을받고,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함)의 특전을 받고있는 남구만이, 세월이 지나도 애절한 생각이 더하는 마음으로 삼가 고하나이다(유세차)
② 나는 이미 몸이 늙고 병이 들어, 땅을 밟고 걸어 다닐 수가 없으므로, 삼가3종질 진사 남학증으로 하여금, 무리들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으로 깨끗한 술(淸酌) 한잔을 올리면서(奠), 삼가 고 하나이다.
③ 남이장군의 묘앞에 이르러 생각나는 것을 말씀드리면, 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흰비단(綺紈)같이 용모가 준수하고, 귀신같이 용감하며, 절개가 굳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였던 것입니다.
④ 때마침 현명한 임금(세조)을 만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수고롭게도(剿) 반적(이시애)을 평정하고, 북으로 더 나아가 또한 건주 여진족을 정벌하니, 나라에서 그 높은 공로를 치하 할 적에 공신으로 책훈하였고, 그 용맹스러움과 지략이 명나라 황제에게도 소문이 나, 중국 관리들에게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⑤ 뜻밖에도 집에 모래알 만한 벌레(유자광)에게, 아닌죄를 뒤집어 써(匪皐) 죽게되니, 심히 원통하고 분함이, 실로 하늘이 울부짖을 일입니다.
⑥ 따르는 자들도 또 참화를 입었고, 또한 뒤를 이을 후손들도 핍박을 당하다 보니, 무덤이 허물어져 없어지고, 오랫동안 제사도 지내오지 못해 왔으니, 어찌 이같이 지나칠 정도로 유독히 오랫동안 후손들에게 미칠 수 있단 말입니까?
⑦ 기개가 높고 포부가 큰 대장부들은 술을 먹으면, 눈물을 흘렸고, 떨친 이름과 신령스런 기상을 높이 숭상(尙)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시골에 사는 노인들 까지도, 백두산 時를 읊으면서, 서로 전하여 왔습니다.
⑧ 이제 묘소가 허물어진 곳에서 검은 표식을 하나 발견하고, 그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증명하여 가리키는 지점의 묘소에, 흙을 쌓아 올리고, 선을 그어서 외곽을 정하여, 그 터를 영구히 남기도록 하여, 징표를 삼았으니, 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옵니다.
⑨ 의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보일수 있도록, 관찰사에게 일러 묘를 파서 옮기거나, 몰래 장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근처에 있는 3기의 묘의 연고자들에 대해, 단속 하도록 하였습니다.
⑩ 이제 장차(將) 더욱 잔디를 입히고, 술을 올린 후 깨끗하게 하고 보니, 장군의 혼령이 거니는 뜰과 같아, 비로소 장사를 치른 느낌이 듭니다.
⑪ 이제나 옛날이나, 더 나아지지 않고 있는것은(不勝), 슬프고 슬픈 일이 풀리는 일이니(廷事), 미미하게 아득하게나마 문서로 전해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상고해 보건데, 엄청난 화변을 당하여, 시체를 헤아려(營) 거두어, 장사하기도 급급한데, 장군의 생년과 대수, 벼슬이름(護)을 기록한 책이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⑫ 후손들에게 부탁하노니, 철 따라는 못하더라도, 한식날이 되면, 막걸리와 밥을 차려드리고, 또 스스로 가끔씩 문안 드리기 바란다.
⑬ 이제 흉한날이 없는 날을 잡아서, 큰 비석에다 글을 새기고(鐫), 묘 앞 다나무를 심어 밝게 보이게하면,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있을지라도, 후에 사람들이 바꾸지 못하고,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⑭ 나를 비롯한 남씨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뜻이 있으면 회복함이 있으니(後有有志), 힘있는 유력한 실력자가 나오게 되어, 불가능 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후일에 높이 숭상하여(尙),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할 날이 있게되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 화성시의 <남이장군 묘 비문>
[화성의 병조 판서 충무공 남이(怡)장군 碑文 해설]
① 공은 조선 태조때에 영의정까지 지내시고 의령 부원군에 봉해지신 남재[在]의 손자의 손자이며, 군수공 남빈[份 ; 그의 처는 남양 홍씨 현감 여태의 딸]의 큰 아들로써 세종 25년 계해년 [1443]에 태어나셨다.
② 공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힘이 뛰어나시고, 타고난 기품과 외모가 남다르고, 그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속에 성장하였으며, 1459년에 무과에 으뜸으로 급제하였다.
③ 공의 첫 아내는 안동 권씨로서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따님이고, 둘째는 고성 이씨로서 서윤 호연의 따님이다[호연은 강무공 남은의 외손이다]
④ 소년시에 요사한 귀신을 쫓아 급한 환자를 구한 것이 인연이 되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⑤ 1469년[세조 13년]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부사 설징과 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하고 대거 함경북도 일대를 시끄럽게 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은 구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하고 조석문, 허종, 남이, 어유소 등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토벌케하여, 그해 8월에 이시애를 죽이고 반역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조리 처 없앨 때에 으뜸으로 공을 세웠는데, 그때 나이 불과 25세였다.
⑥ 조정은 연이어 건주위[압록강 북방 야인 여진족] 이만주 부자를 정벌하여 흥경 근처에서 이를 포획하여 죽이고, 서북방을 평정하니 당시 주장은 강순이고, 좌대장은 어유소, 우대장은 남이장군이었다.
⑦ 공이 백두산과 두만강 일대를 치달리면서, 아래와 같은 시로 충심과 굉장한 포부를 펴니, 후세에 거리의 아이들과 산골의 농사꾼까지 읊조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즉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남자로 태어나서 20세에 나라를 편케 하지못하면 뒷 세상에 어찌 대장부라 하리요” 란 시였다.
⑧ 1468년[세조 14년]에 개선한 공은, 세운 공을 의논할 때 적개공신 훈 1등으로 의산군에 봉하고, 9월에 병조판서에 발탁되니, 그때의 나이 26세 였더라.
⑨ 그러나 이조판서 한계희가 젊고 억센 공에게 병권을 맡김은 불가하다고 참소하니, 이내 해직되었다.
⑩ 부윤 유흠의 서자 유자광은 사람됨이 고약하여, 평소 왕실의 가까운 친척[위산위 공의 손자]인 공의 위대한 공훈과 벼슬과 명망이 세상에 드러나자 이를 시기해 오던중, 예종[19세]이 즉위하자 때마침 혜성의 출현을 나쁜 징조라하여 물의가 분분하매 공이 새임금의 등극을 뜻하며 이는“옛것은 가고 새것이 오는 현상”이라 말한것을 유자광이 “구 왕조가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설 징조”라 하였다고 왜곡하고 또 백두산 시도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이라 날조하여, 역모를 꾸민다고 예종에게 고자질 하였다.
⑪ 공은 혹독한 고문에도 까딱하지 않고, 오직 유자광의 거짓을 한탄하며, 26세의 청년으로 태연히 죽음을 당하니 애석해 하지 않은 자 없었다.
⑫ 공모자를 추궁할 때 지난날의 전우였던 강순과 모의했다고 하자, 강순이 완강히 부인하는 것을 공이 말하되 “내가 젊은 나이로 죄없이 죽는 것을 영의정인 그대가 알면서도 모른 체 하니 그 죄 크다”하니 수긍하는 태도로 함께 형을 받았다고 한다.
⑬ 유자광은 이로서 그의 야심대로 무령군에 봉해져 크게 출세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아들 셋과 함께 귀양가 죽게되니 세상 사람들은 하늘이 무심치 않다 하였다.
⑭ 1818년 [순조 18년] 무인년에 공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져서 관직과 작위를 도로받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추증함과 아울러, 구봉서원[창녕 부곡 구산리]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려, 공의 높은 충신의 절개가 역사에 찬란히 빛나게 되었다.
⑮ 공의 자손은 없고 공의 아우 군수공 남초[招]의 후손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九萬]이 묘소에 봉분을 쌓고, 풀을 베어 잔디를 입힌 후 경건히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으며, 1968년 3월에 후손 정사, 영우등이 정성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1971년 6월에 정부의 보조를 얻어 화성 군수가 묘비를 세웠다.
⑯ 공은 실로 우리 종족만의 훌륭하신 조상이 아니라, 우리 한 민족 전체에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나라의 위대한 인물로서 영원하게 추모와 숭앙을 받는 세상에 드문 명장이시다.
1971년 6월
15대 족 후손 상 집 짓고 16대 족 후손 봉 우 쓰다
* 편집자 주(註)
1. 세조 14년 9월에 병조판서가 되었다고 하나, 보다 정확한 기록은 8월 23일이고, 세조는 9월 8일 승하하고, 9월 7일 예종이 즉위 직후 파직되었는데, 나미장군은 조선왕조 최연소의 나이로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착오가 있어서는 안되겠다.
2. 묘역 정화에 애쓰신 근세 네 분을 다 알 수 없고 비문을 지은 상집 公은 다음과 같다.
⦁생존연대 ; 1917-86년, 충간공 부정공파
⦁안성, 부천, 파주군수. 전남 광주시장. 남씨 대종회 상임부회장 역임
3. 편집자는 구산리 고향으로 예비역 육군중령 남 인 우로 1995년 12월 27일 해설 본을 배포하였으나, 카페 운영자 남상수의 도움으로 다시 카페에 올린다.
3. 처 안동 권씨 동 거울 유품
정부인(貞夫人) 권람의 딸 안동 권씨의 묘소는 본래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내에 있었다.
71년 묘비를 건립하고 난 1973년(癸丑 3월)에 남이장군 묘소로 이장해와 쌍분으로 단장했다.
이 당시 권씨의 무덤에서 동거울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감정과정에서 일시 분실되었다가 지금은 종중에서 유물로 관리하고 있다.
4. 남이장군 묘소 가는 길 및 안내문
비봉 IC에서 비봉면 사무소- 비봉면 사무소- 스카이 빌- 남전1리- 남전2리 뒤 야산 산 145번지
묘소 옆 안내판
충무공 남이 장군 묘
Tomb of General Nam I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조선 전기의 무신인 남이(南怡,1443-1468)의 묘이다. 남이는 의령남씨로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1457)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武職)을 역임하였다. 이시애의 반란 때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족 정벌 한 공으로 26세(세조12)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 후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훈구세력과 남이에 대한 예종의 개인적인 편견이 겹쳐져 유자광의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무고로 26세에 처형되었다.350여 년이 지난 순조 18년(1818)에 이르러서야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 구조는 봉분(封墳) 앞에 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놓고, 장명등(長明燈)을 상석의 앞에 놓고, 그 좌우에 동자석(童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배열하였다. 묘비를 쓰기도 하지만 대개는 묘비를 간소화한 묘갈을 세웠으며 풍수설의 영향을 받아 봉토 뒷머리에 곤미(坤尾)를 붙이거나 담장을 두러기도 하였다. 남이 묘의 뒤쪽을 둘러싼 둔덕[사성,莎城]으로 둘러싸여 부인과 합장묘인 쌍분이 호석으로 잘 단장되어 있다. 석물은 월두형(月頭形) 묘비, 상석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문인석,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이 각각 1쌍씩 조성되어 있다.
※ 기존 안내판 중 추가 및 수정할 부분이 있어 파종회에서는 화성시에 사업체를 두고 거주하는 남상기(유촌 고향)씨로 하여금 화성시와 협조하여 2009.11월아래와 같이 추가 및 수정하였음
1. 남이 장군 묘 → 충무공 추가 2. 생년 및 년대 : 28세→26세(1443-1468년) 2. 남휘의 아들이자 → 남휘의 손자이자 3.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족 정벌 |
* 편집자 주(註)
1. 남이섬의 남이장군 허묘(墟墓)와 출생지 소문에 대하여
남이섬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상에 있는 하중도(河中島)이다,
들어가는 나루터는 경기도 가평군이고, 남이섬 자체는 강원도 춘성군 남면 방하리 이다.
전에는 방하리 주민들이 밭으로 경작해온 곳 이였으나, 청평댐의 건설로 완전한 섬을 이루게 되자, 경작이 어려워지자 자연 나무가 많아 <나무 섬>이라 부리웠다고 한다.
서울 근교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경작을 하면소 모아진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혔다고 하면서 봉분을 쌓고 <남이장군 허묘>를 만들면서 섬 이름도 <남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이섬에 도착하면 입구 좌측에 남이장군(南怡將軍) 추모비(追慕碑)가 세워져 있는데, 추모비의 글은 이은상씨가 짓고, 글씨는 김종현씨가 썼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남이장군의 약력을 적고 확실한 고증은 할 수 없으나, 무슨 연유가 있고서야 남이섬이라고 했을 것이니, 이 섬을 통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길이 기념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지 않느냐? 는 뜻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이 관광 차원에서 반듯하게 묘소를 치장해 놓고, 그 부근 어디가 남이장군이 태어난 곳이라고 사실을 왜곡하는 바람에, 남씨들 중에는 그곳에 참배하고 기념 촬영 을 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이들도 많아 시정해 나가야 할 일이다.
5. 추모 사당과 남이장군 대제(大祭) 행사
남이장군 사당은 용산구 용문동 107번지에 있다.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이시애의 난 정벌시에 용산에서 정병 300명을 모병하여 된지미(삼각지 부근)에서 훈련시켰고, 처형된 곳이 역시 한강변 새남터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효로 2가 7번지에 있는 것을 1904년 철도가 생기고 큰길이 나면서, 지금의 장소로 이전해와 1991년 3월 지금의 현대식 건물로 신축했다.
남이장군 대제행사는 옛날부터 장군의 수호적인 힘에 의해서 마을의 무병(無病)과 평안, 생업의 번창과 보호를 기원하는 공동제(公同祭)를 지내왔는데, 1983년부터 서울시 대표 민속축제로 지정되어 매년 10월초에 5일 간에 걸쳐 당시의 복장을 재현하면서 대규모 행사를 해오고 있다.
또 하나의 사당은 성동구 사근동 190-2호 청계천변언덕에 충민사(忠愍祠)가 있다.
이는 수미산에 있는 백 호랑이가 해마다 인명을 해치자, 남이장군이 맨주먹으로 때려잡아 호환이 없게 되어, 마을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음력10월1일을 기해 마을 공동제를 지내고 있다.
최근 이사당이 없어질 위기에 있어 이는 별도로 논하고자 한다.
참조 : 96 남이장군대제 홍보 유인물. 사근동 동사무소 충민사 홍보 유인물
6. 기 타
▶선바위와 남이포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는 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하나 언듯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가 선바위이고 석벽과 절벽을 끼고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루는 강을 남이포라 부른다.
선바위와 남이포는 조선 세조때 남이장군이 역모자들을 평정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곳으로 현재는 선바위 지구에 호텔, 음식점, 농산물직판장, 수변휴게공간, 민속박물관, 보트장 등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개발 중에 있다.
충남 논산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도 장군과 관련한 일화(逸話)가 전래되는 곳이 많다.
▶북한지역의 유적
북한의 함경남도 이원군 태평리에 <남이 산성>이 있는데, 남이장군이 북벌 시에 쌓았던 성이라고도 하고, 여진족이 쌓았던 치마대(馳馬臺)였다고도 하는 곳도 있다.
북한지역에는 <이시애의 난 평정>과 <건주여진족 정벌>과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북청군에 남이장군비가 있다고 한국민족 대백과 사전에서 사진과 함께 전하는 것이 있고, 길주의 장군파보(將軍波堡), 함남 단천군 하다면 고음리에 여진족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장사대, 갑산군 회림면에도 유적비가 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출 판 물
◉ 남이장군 실기
저자: 장도빈(張道斌) 발행처: 덕흥서림( 興書林)
발행일:1926-99-99 가격 : 무료
파일형태:전문 DB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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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요약
국문 .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이 지은 남이장군(南怡蔣軍)의 전기로 남이장군의 소년시절 때부터 유자광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기까지의 전생애를 쓴 순한글체로 서술한 것이다.
◉ 남이장군 만화
* 박재원(감수)/성주호(그림)/화문각/1973년(초판)/289쪽
* 판매가격 : 50,000원
◉ 영화 남이(南怡) 장군
1964.9.26일 한국예술영화사가 박원석 제작으로 신영균, 김지미, 이예춘, 허장강, 황정순등이 출연한 영화다.
천연색으로 97분짜리인데, 서초동 예술의 전당 내 한국영상 자료원에 보관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소개 자료를 찾아볼 수 있고, 영상자료원 연락처는 02-521-3147(교)115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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