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에서 목포로
10월 20일 실상사에서 열리는 민회를 참석하기 위해 그 전날 목포행 배에 몸을 실었다. 목포에 도착하면 광주, 남원을 거쳐 실상사로 갈 예정이다.
아마 중간에 어디선가 잠을 청해야 하겠지...
혼자 떠나기 때문일까? 길지 않은 여행이지만 마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 같이 느껴진다.
하늘인 나를 찾아가는 여행 말이다.
"우리가 하늘이다"
요즘 나를 홀리고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 목포에서 광주로
배는 밤 10시에 목포에 도착했다. 원래 9시 20분경에 도착하는데 역조 현상으로 예정 보다 늦었다. 택시를 타고 목포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곧바로 광주행 직행버스에 올라탔다.
광주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 남원행 버스는 이미 끊겼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모텔 방을 잡아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을 컵라면으로 간단히 때우고 남원행 버스를 탔다. 실상사로 가기 위해서는 남원에서 인월로 갈아타고 인월에서 실상사로 다시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오전 중으로 실상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두를 필요가 있다.
생명평화대행진이 시작된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간다. 행진단은 그동안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전국 방방곳곳을 누비며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보고 느낀 "우리가 하늘이다"는 어떤 것일까?
실상사에서 행진단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삶의 실상을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혹시 그들로부터 섬광같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까지도 들면서 말이다.
*** 실상사 가는 길
남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인월행 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해 급하게 올라탔다.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지리산에 가까운 탓인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참 아름답다.
이번 여행의 화두인 "우리가 하늘이다"를 곱씹어 본다.
어찌하면 우리가 하늘이 되는 생명평화의 새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정녕 그것은 꿈에 불과한가?
그런데 우리가 하늘인 세상을 꿈꾼다면 나부터 하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늘처럼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가? 그건 모순이고 위선이 아닌가?
니체도 "그 날이 온듯이 살라"고 했다.
그럼 내가 하늘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하늘이란 가장 높은 것,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하늘은 우리 삶의 궁극적 이유이자 목적을 나타내는 메타포이다.
그런데 그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하늘이라면 하늘은 나를 초월한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안에 하늘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 실재, 즉 삶의 궁극적 이유나 목적을 바깥 어디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하늘이 되는 길이 아닐까?
자기실현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늘의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모두가 하늘이 되는 세상이란 모두가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각자가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닐까?
*** 실상사에서
실상사에 도착하니 강동균 회장님 등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모두들 건강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조약골님, 돌고래님, 둥글이님 등 행진단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가 하늘이라는 구호는 너무 좋은 것이기는 하나 모호하다는 지적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한다. 우리끼리만 감동하는 행사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또한 난개발, 비정규직 문제로 고통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장의 해법을 원하는데 답답하기만 하고 일반시민들은 반응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술 밥에 배부르겠냐는 반문도 한다.
공감이 간다. 모두가 하늘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문득 율곡선생의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공자도 먼저 백성을 배부르게 하고 그 다음 가르치라고 했다.
매슬로우도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등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고차원적인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겨날 수 있다고 했다.
하늘이 되는 삶, 즉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기본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직장을 잃고,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며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상황에서, 경찰과 용역의 폭력에 시달리며 어떻게 자기실현의 삶을 제대로 추구할 수가 있겠는가?
생명평화단이 만나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신들의 삶을 그대로 살게 해 달라는 것 아닐까?
권력과 자본의 횡포로 인해 도저히 하늘처럼 살 수 없으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그냥 놔두라는 울부짖음이 아닌가?
헌법상 기본권의 실질적인 보장은 우리가 하늘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기본권이 유린되는 상황을 외면한 채 하늘이 되라고 외치는 것은 기만과 허위에 불과하다!
*** 실상사를 떠나며
인월에서 부산가는 막차가 6시 5분에 있다고 하여 민회 도중에 부득이하게 자리를 떴다. 현실을 돌이켜보면 답답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하늘인 세상에 대한 열정과 바람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마 우리가 하늘인 세상이 도래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눈물과 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길게 내다 보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야 하지 않을까?
20대 시절 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다.
"주님, 진리가 뭔지 제게 알려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그 진리를 위해 죽겠습니다."
건방진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 여행을 통해 진리가 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건 나됨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이 내가 하늘이 되는 삶이요, 진리의 삶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고, 똥싸고, 밥 먹고, 출근해서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나의 그런 일상의 삶이 진정한 나됨의 삶이요 하늘에 이어지는 삶인 것이다. 순간 순간의 삶이 영원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난 내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눈 앞에서 섬광이 빛날 줄 알았다. 근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진리는 싱거울 정도로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됨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집착에 사로잡힌 내가 죽어야만 참된 나의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래야 순간 순간을 영원으로 느끼며 살 수가 있겠지....
*** 마치며
11월 3일 서울 행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어우러지는 신명나는 판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권후보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국민과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생명평화대행진이 불씨가 되어 21세기 동학혁명이 시작되고 모두가 하늘이 되는 생명평화의 새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첫댓글 개인 페북에 올렸던 글을 수정,보완해서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