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차 마시던 날
차인의 초대를 받고 차회茶會를 마련해준 집주인의 마당에 들어서니 온통 꽃밭이다. 게다가 작은 인공 연못에는 무더위를 누르면서 올라왔을 커다란 연잎들이 못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앙증맞은 수련이 물 위로 얼굴을 내밀어 객을 반긴다.
손님을 위한 찻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거실로 들어가니 주인의 바느질 솜씨가 느껴지는 연잎 모양의 삼베 다포茶布가 찻잔을 얌전히도 덮고 있다. 팽주烹主 앞에는 백색 다기 안에 꽁꽁 얼린 백련 봉우리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시음회를 위한 집주인의 정성이 대단하기만 하다.
차 우릴 준비를 다 한 팽주 앞에 객들이 나란히 앉는다. 차를 우리겠다는 팽주의 말에 맞절하듯 가볍게 허리 숙여 예를 차린다. 잘게 썰어서 덖은 연잎으로 끓인 물을 다기 안에 부으니, 수증기가 그릇 위로 부옇게 뒤덮는다. 뜨거운 물과 식은 물을 번갈아 바꿔 입은 봉우리는 그제야 겉잎 한 장을 열어 준다. 팽주가 뜨거운 물 속에서 부드러워진 꽃잎을 나무 집게로 정성스럽게 한 장씩 펼쳐내니 드디어 꽃술과 꽃받침이 보인다. 연잎에서 우러나온 녹두 빛 속에서 만개한 백련이 물빛을 머금었나 싶을 때 차향이 은은하게 퍼져온다. 어릴 적 맡았던 엄마의 분 냄새 같기도 하다. 백련차의 완성에 지인들은 차 맛을 보기도 전이건만 누구랄 것도 없이 감탄부터 쏟아 낸다. 눈과 코가 먼저 음미했나 보다.
정성스럽게 우려낸 잎차를 마시다 보면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동안 욕심도 한 줌 덜어내고, 근심도 시나브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꽃차를 마시다 보니 지난날 연의 속성도 모르고 어리석음을 범했던 때가 떠오른다.
초여름 휴일 낮이었다. 화초를 사려고 꽃집에 가보았다. 형형색색의 연꽃에 넋을 잃고 구경하다가 진한 보라색의 연을 골라내었다. 꽃집 주인은 내가 골라놓은 키 작은 벤저민 나무와 연꽃을 배달해 주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꽃 놓을 자리를 만들어두고 기다리는데 어둑해서야 초인종 소리가 났다. 꽃을 배달하는 총각은 배달이 밀려서 늦었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물건을 현관 입구에 내려놓고는 재바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연꽃을 담아 온 검정 비닐을 풀어본 순간 깜짝 놀랐다. 배달이 잘못된 것이었다. 곧바로 꽃집으로 전화를 해서 내가 고른 꽃이 아니라고 하자, 주인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잘못 배달된 꽃 때문에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하소연했다. “제가 낮에 골라 놓은 연꽃은 분명히 보라색 꽃송이가 여러 개나 핀 연꽃이거든요. 그런데 배달된 꽃은 모두가 꽃봉오리만 있어요.” 하니 그제야 주인은 허허 웃었다. 이제야 내 말을 인정해 주나보다 했다. 그런데 “연꽃 종류는 처음 사봤지요?” 하더니 연꽃은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이 되면 다시 봉우리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값을 치른 꽃은 연꽃이 아니라 수련이라고 덧붙여 알려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이런 일을 다 보았나. 내가 낮에 꽃집에서 보았던 그 꽃은 저녁이 되자 저들의 습성대로 꽃을 오므린 것인데, 그런 상식을 미처 몰랐다니. 식물의 종류와 속성도 모르면서 우겼던 일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 연유가 계기가 되어서였는지 훗날 차 예절을 배우게 되었다.
잎차를 우려내고 따르는 올바른 절차와 생활예절을 배울 수 있다기에 지도자 과정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복을 입고 차를 우려내는 과정은 고풍스러웠다. 옛사람들의 차 문화에 빠진 듯한 착각도 들었다. 차 예절을 배우면서 정성 들여 우려낸 차 맛에 길들다 보니 잘 볶은 커피 맛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다기에서 우려낸 잎차의 맛을 앞지르지 못했다.
연꽃은 상처를 받아야 재탄생된다고 한다. 잘 익은 연 씨앗의 한쪽을 갈아서 상처를 내어 물에 담가 두면 거기에서 싹이 트고 새로운 연 포기가 탄생한다. 그래서일까, 상처는 고뇌와 반성의 시간으로 헤진 속을 채우게 되기도 한다. 때로는 상처가 주는 통증은 연꽃 씨앗에 난 상처처럼 재탄생의 기회를 주어 발전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연못에는 새 생명이 탄생하는 소리로 부산하다. 수로를 쉼 없이 순환시키며 소리 없이 제 몫을 하는 연잎 부딪히는 소리가 있어서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자연의 오묘한 진리에 고개를 숙인다.
* 차회茶會: 차인들이 집이나 야외에서 준비한 차를 끓여서 마시는 모임
* 다포茶布: 차를 끓이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덮는 천
* 팽주烹主 : 차를 우려내어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