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와 만공의 설법으로 가득한 예산 수덕사 답사 [2007. 1. 28. 한국의산천 우관동]
서울 상암 경기장 - 서부간선도로 - 서해안 고속도로 - 해미 IC - 덕산터널 - 수덕사 - 한국 고건축 박물관 (편도 거리 112km, 2시간 소요)
고속도로 통행료 5,200원(편도) 수덕사 주차료 2,000원 수덕사 문화재 관람료 1인 2,000원(성인) 한국 고건축 박물관 입장료 1인 2,000원
▲ 해미IC에서 덕산 터널로 진입 중(오전 8시) ⓒ 2007. 한국의산천
▲ 덕숭산 안내도 ⓒ 2007. 한국의산천
▲ 수덕사 진입로 ⓒ 2007. 한국의산천
'수덕사의 여승'이란 가요나 일제시대 신여성으로 유명했다가 출가한 일엽(一葉)스님 때문인지 일반인들에게 수덕사는 비구니의 절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게다가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은 자신을 버리고 제자와 프랑스로 떠난 이응노 화백을 그리며 수절한 본부인의 애틋한 사연마저 담고 있지 않은가.(수석여관은 현재 완전 해체하여 재 건축 중임)
경허의 선풍(禪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암자인 금선대는 경허스님과 세 달로 불리는 제자인 만공·수월·혜월 스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있다.
▲ 수덕사 일주문과 매표소 ⓒ 2007. 한국의산천
수덕사(修德寺)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덕숭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절로 공주의 동학사, 청도의 운문사와 더불어 3대 비구니 도량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비구니 사찰이다.
▲ 수덕사 사천왕문 ⓒ 2007. 한국의산천
수덕사
수덕사 대웅전 옆 길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 금선대(金仙臺), 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덕숭산을 하산할 즈음 많은 관람객이 입장한다. ⓒ 2007. 한국의산천
▲ 성보 박물관 ⓒ 2007. 한국의산천
대웅전 앞에는 1990년 황하정루라는 큰 건물을 새로 지어 성보박물관(정확히 근역 성보관이란 이름으로 불린다)으로 쓰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안의 괘불(의식용 불화)은 보물 제1263호이다.
▲ 수덕사 대웅전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 성보 박물관 지붕 ⓒ 2007. 한국의산천
▲ 국보 제 49호 수덕사 대웅전 ⓒ 2007. 한국의산천
목조건물 정면 3칸 측면 4칸. (1308 고려 충렬왕 34년)
백제시대의 사찰인 수덕사 창건에 관한 문헌은 자세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하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94~597년) 재위시에 창건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 아미타, 약사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은 1937년 수리 공사 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1308(충렬왕 34년) 건립되었다. 건축은 고려시대 유행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다. 기단에 사각형의 주춧돌을 놓았고 그위에 기둥을 세울 곳을 북돋아 조각한되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架構)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 목조건축물의 중요한 건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천정의 아름다운 공포와 배흘림 기둥ⓒ 2007. 한국의산천
▲ 단청이 없는 원목 그대로의 대웅전 처마 ⓒ 2007. 한국의산천
▲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조각한 예술품 대웅전 배흘림 기둥과 천정을 받치는 예술적인 공포( 栱包 )ⓒ 2007. 한국의산천
▲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조각한 예술품 대웅전 배흘림 기둥ⓒ 2007. 한국의산천 지붕을 받치는 아름다운 조각물 공포.
공포( 栱包 )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짠 구조, 공포(包)는 기둥 위에도 있고 처마 아래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다
▲ 예산 수덕사 대웅전의 '공포(栱包)' 축소 모형 ⓒ 2007. 한국의산천 예산 수덕사에서 3.3km 떨어진 한국 고건축 박물관에서 촬영.
▲ 대웅전 옆 정혜사로 오르는 길에서 ⓒ 2007. 한국의산천
▲ 정혜사로 오르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 향운각의 관세음 보살 입상ⓒ 2007. 한국의산천 정혜사로 오르는 도중 향운각에 있는 관세음보살입상.1924년 만공스님께서 조성 봉안 했다는 안내문이 있다.
▲ 만공탑 ⓒ 2007. 한국의산천
경허와 만공의 설법으로 가득한 수덕사
경허스님의 세 제자와 화광동진(化光同塵)
수덕사 스님들은 평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큰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공부도 뒤로 하고 온몸을 던져 앞장서는 전통이 있다고 전한다.
경허스님은 승려의 생활을 마감하고 중생들 틈에 섞여 사는 ‘화광동진’을 선택한다. 1904년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린 후 북으로 떠난 스님은 갑산에서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라는 속명으로 글방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1912년 4월25일 열반에 든다. 경허스님의 열반은 1년후에야 만공스님이 확인한다. 시신과 함께 묻은 유품 중에 만공스님이 선물한 담뱃대와 쌈지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은 경계를 비추지 않고 경계 또한 있지 않나니 빛과 경계 함께 없으면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 경허스님 열반송 -
경허(鏡虛)스님(1849~1912)의 출가
경허스님의 대오와 선풍진작
2003년 눈이 소복이 쌓인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는 100여년전 경허스님이 쓴 현판 ‘목룡장(牧龍莊)’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훗날 칠십이 된 만공스님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었다. 수덕사의 말사인 부석사 주지 주경(宙耕)스님은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시봉을 한 때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부석사 시절은 젊은 만공스님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며 가장 엄격한 시봉을 들었던 기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의 도비산 중턱에는 경허와 만공이 수행을 했다는 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두 스님의 치열했던 수행과정을 엿보게 한다.
스님의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 중에는 천장암에 머물던 30대 후반, 속가의 김씨 처자와 사랑에 빠져 1년여간 결혼한 김씨처자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일이 전해져온다. 중생의 어리석은 집착 중 하나인 애욕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무간지옥의 고통을 몸소 느껴 보았던 것으로 후세인들은 짐작할 뿐이다. ▲ 덕숭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정혜사 ⓒ 2007. 한국의산천
▲ 덕숭산 설경 ⓒ 2007. 한국의산천
▲ 수덕사 부도 ⓒ 2007. 한국의산천
▲ 수덕사 입구의 상가지역 ⓒ 2007. 한국의산천
등산코스: 수덕사 - 정혜사 - 덕숭산정상 - 정혜사 - 수덕사(6km,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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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대중가요로 듣고 여승이 거주하는 절로만 알고 있는데 불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절이군요~ 설경에 묻힌 정혜사는 시선의 세계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