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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사회조직과 사회생활에 나타나는 변혁
우리는 현재 일반원리만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수입을 지방과 연방정부 간에 분배하는 문제와 같이 이 원리들을 적용하게 될 때 발생하고 있는 세부적인 문제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이런 문제를 논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원리가 확립되면 세부적인 문제는 자연적으로 조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간 정성들이지 않고서는 사회의 기저(基底)를 재조정(再調整)하고 있는 변화가 초래하고 있으며 또한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변혁에 유의할 수는 없는 것이지 만 중요한 몇 가지만은 주의해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대단히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질서를 보존하고 군대를 유지하며 법원을 운영하는 이외에, 조세를 징수한다든지 탈세를 방지한다든지 처벌한다든지 여러 명확한 원천에서 염출되고 있는 세입을 기록하거나 재기록하는 것은 정부사업의 약 4분의 3 내지 8분의 7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거대하고 복잡한 조직은 이와 같이 해서 생략되어 버리는 것이다.
법원의 운영도 역시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다. 민사재판의 대부분은 토지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실질적인 유일의 토지소유자로 인정되고 모든 점유자들은 다만 실제적으로는 지대지불소작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게만 된다면 분쟁은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결핍이 없어짐으로 인한 도덕적인 성장으로 법원의 다른 민사소송도 한결같이 감소되는 것이다. 부채를 징수하며 개인 간의 계약을 강요하고 있는 모든 법률을 폐기하여야 한다는 벤담의 상식적인 제안이 채택된다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촉진될 것이다. 임금이 인상되고 모든 사람이 안일(安逸)하고 안락(安樂)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개방된다면 부의 불균등한 분배에서 발생하고 있는 절도나 사기꾼이나 기타의 범죄자들이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탐정이나 형무소나 교화소 등을 구비하고 있는 형법의 운용도 민법의 운용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생산력에 대한 부담으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심도 끌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판사나 집달리나 서기나 형무관 등을 없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자의 비용으로 유지되고 있는 대부분의 변호사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며, 법원의 그늘에서 낭비되고 있는 재사(才士)들도 더 고차적인 사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부의 입법, 사법, 행정적 역할은 이런 방식을 통하여서 대단히 단순화되는 것이다. 봉건적 토지보유제로부터 자유지(自由地)적 토지보유제로 변천하는데서 오는 역사적인 산물이었던 공채(公債)와 상비군제가 국민이 국가의 토지에 대해서 공동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구(舊)사상으로 복귀한 후에도 장기간 존속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채는 노임을 감소시키지도 않으며 생산을 억제하고 있지도 않는 조세로 용이하게 지불될 수 있는 것이다. 전술(戰術)을 혁명시킬 발명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반대중들은 지적인 성장과 독립심의 성장을 하게 되므로 상비군도 곧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는 제퍼슨이 제창(提唱)한 민주주의와 허버트 스펜서가 말한바 있는 약속된 땅과 정부의 철폐라는 관념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철폐는 명령하고 억압하는 힘으로서의 정부에 한해서이다. 그리하여 이와 동시에 또한 동일한 정도로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되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기능에 대한 모든 단순화나 폐기는, 현재는 실현시키는 데 곤란을 느끼고 있는 다른 기능들도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정부는 우편업무나 송신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건축사업이나 철도업무를 취급할 수 있으며, 공로(公路)를 개설하고 유지하는 업무도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기능이 단순화되고 감소된다면 상기와 같은 기능을 아무런 위험이나 긴장도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공공감독도 받게 되는데 공공감독은 현재 혼란에 빠지고 있다. 가속도적으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물질적 진보가 지대를 부단히 증가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토지가치에서 징수하는 수입에는 잉여금이 대폭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공동재산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수입은 스파르타의 수입과 마찬가지로 공공복지를 위하여서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공식탁을 만들 필요는 없겠으나, 공동목욕탕, 박물관, 도서관, 공원, 휴게실, 음악 및 무용실, 극장, 대학, 기술학교, 사격장, 운동장, 체육학교 등등을 건립할 수 있는 것이다. 열, 광선, 전력과 수도가 공공비용으로 시가지를 통하게 될 것이며 도로변에는 과수가 즐비하게 될 것이다. 발견자와 발명가는 보상을 받을 것이며 과학연구가들은 부양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입은 천태만상인 방법을 통하여서 공공복지를 위한 노력을 함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의 이상(理想)에 도달하는 것이나, 정부의 압력에 의하여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본래의 성격을 변화하게 되어서 거대한 협동사회의 행정부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다만 공공복지를 위하여 공동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대행기관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같이 생각되는가? 이제 노동자에게 자기들의 완전한 보수를 확약해 주며 결핍과 결핍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하며 겸허한 자유가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게 하고 있는 변화를 통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거대한 변혁을 잠시 생각하여 보기로 해보자.
사회적 조직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동기 중에서 탐욕이 가장 강력하며 행정제도는 처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을 정직하게 한다는 관념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과, 또한 이기적인 이해관계는 전체적인 이해관계보다 항상 강력하다고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너무나 멀다.
인간이 순수하고 고상한 것을 모조리 짓밟는 것을 개의치도 않으며 생의 모든 고차적인 가능성을 희생하며, 또한 정중함을 불성실한 허식으로, 애국심을 치욕으로, 종교를 위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이득욕은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가? 정중한 존재들을 교활하고 기만하는 것이 자기의 무기인 이스마엘과 같은 투쟁적인 존재로 만들면서도 만족하고 있는 이득욕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결핍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칼라일은 현대의 영국인이 가장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빈곤이라는 지옥이라고 말하고 이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빈곤이야말로 문명사회의 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냉혹한 지옥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옥인 것이다. 부샨다라는 현명한 까마귀가 비슈누 신이 타고다니는 독수리에게 가장 예리한 고통은 빈곤이라고 말한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은 없다고 베다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빈곤은 박탈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빈곤은 치욕이며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빈곤은 도덕적 내지 정신적 성격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뜨거운 철로 무감각하게 하며 가장 강력한 충동과 가장 감미로운 애정을 부인하고 있으며 약동하고 있는 신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며 자식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족들이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은 아니겠는가? 우리가 생에 대해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물의 본능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인데 문명사회에 있어서는 매일같이 빈곤의 공포를 면해 보려고 음독하는 사람과 머리에 총을 대는 사람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원하고 있는 사람은 백 사람도 될 것이나. 다만 본능적인 공포나 종교적인 고려나 혹은 가족관계로 인하여 실천을 주저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곤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기보존에 대한 충동과 자기만족에 대한 충동이 고상한 감정과 결합되며 사랑도 두려움과 같이 투쟁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을 결핍 내지는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구하려고 많은 사람들은 비천한 일과 불명예스러운 일과 수전노(守錢奴)적이며 탐욕적이며 부정직한 일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서, 전취(戰取)하며 유지하려는 투쟁에 있어서 강박력(强迫力)과 같이 인간행위 중에서 가장 강력한(많은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것임) 원천인 여론(輿論)이 발생하는 것이다.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 친우로부터 존경심과 경의와 동정을 받으려고 급급하고 있는 감정 등은 본능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감정은 가장 원시적인 야만인에 있어서나 상류사회의 고도로 교양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세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며 교양인으로 되면서 시작하여서 죽기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이한 사랑이나 고통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 등을 극복하고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며 가장 미미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행동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귀여운 장난이 관심을 모으고 웃음을 자아냄으로 인하여 새로운 노력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계의 주인은 죽어가면서 왕이 되는 것같이 별세하기 위하여서 자기의 예복을 두르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어머니들은 작은 버선으로 딸들의 발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이며, 유럽의 부인들도 유사한 유행을 따르려고 자기들의 안락과 가족들의 안락도 희생하는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자기의 아름다운 문신에서 존경받기 위하여서 악어의 이빨이 자기의 살을 찢고 있는데도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며, 북미의 인디언들은 화형기둥에다 자기 몸을 묶고서는 한마디의 신음소리도 없이 극악한 고문을 견디어 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경의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 고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새로운 다른 고문을 하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한줄기 희망이라도 가져보려고 하는 것은 존경을 받기 위한 것이며, 창백한 학생이 등잔을 닦고 있는 것도 존경을 받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무리로 노력하며 고생하며 그리고 죽는 것도 존경을 받기 위함이다. 피라미드가 세워지고 에페소의 원형극장이 불탄 것도 바로 이런 존경을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폭풍우를 만난 사람에게는 안전한 항구가 얼마나 감미롭게 보일 것이며,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이, 갈증 난 자에게는 마실 것이,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따뜻함이, 피곤한 자에게는 휴식이, 약자에게는 강자가, 지적인 것에 대한 정신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얼마나 감미로워 보일 것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결핍에서 오는 고통과 결핍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부의 소유를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유하게 되면 존경도 받고 칭찬도 들으며 세력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돈을 벌어라 – 되도록 정직하게 벌되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벌어라! 이것이 사회가 매일 매시간 각 구성원의 귀에다 대고 외치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덕과 진실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나, 결핍에서 오는 고통과 결핍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하여서 부자를 더 강하게 사랑하며 재산가를 더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공정한 것은 훌륭한 것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詐欺)와 불공정으로 백만 불을 획득한 사람은, 그것을 거절한 사람보다는 더 존경을 받으며 칭찬을 들으며 세력도 더 행사할 수 있는 것이며 마음으로부터의 친절은 아니라 하더라도 눈과 입술의 친절은 더 받고 있는 것이다. 돈을 거절한 사람은 장래에 자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유혹에 대한 승리자로써 흰 옷과 종려나무가지가 주어지겠으나 다른 한 사람은 현세에서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의 이름은 “명사(名士)” 명부에 기록되어서 남성들로부터는 호감을 살 것이며 여성들로부터는 아첨을 받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가장 좋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능변적인 목사를 개인적인 후견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목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다이브즈)의 복음을 설교하고 있으며, 부활절 설교 때에는 낙타와 바늘구멍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예술의 후원자이며, 문학에 있어서는 매케나스와 같은 존재이며 그리고 지성인과 이야기함으로 이득을 보며 신사들의 도움을 받아 세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선(施善)은 빈곤한 사람들을 부양할 것이며 고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인 장소에는 광명을 주는 것이며, 그가 죽은 후에는 고상한 공공기관이 그의 이름과 명성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뿌리와 꼬리를 가지고 있는 무서운 괴물로 가장하고서 인간의 자식들을 유혹할 뿐만 아니라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고서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약속은 이 세상 왕국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왕국과 세력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동물적인 욕심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도 동물 이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약동하고 있는 열망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번연의 환상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름갈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들은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부를 충분히 저축한 후에도 부를 더 축적하려고 일하며 계획하며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명사”(名士)가 되어 보려는 욕망과 또한 그것보다도 고상하고 막대한 유적을 남겨 놓겠다는 욕망으로 인하여 돈벌이로서의 생을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가능한 요구가 충족된 다음에도 더욱 강요하며 탐욕에 만족하지를 못하여서 마치 굶주린 것같이 이들을 독촉하고 있는 것은 포학(暴虐)한 성격의 힘 때문이 아니라 부를 소유하므로 체험할 수 있는 권세의 위력(威力), 우러러 보이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감정, 부는 결핍을 만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명사”로 만들고 있다는 감정 등이 초래하고 있는 흐뭇한 만족감때문인 것이다. 부자가 자기의 화폐와 분리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며 더 획득하려고 고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성격에 대하여 가장 강열한 충격을 주고 있는 유혹과 대결함에 있어서 법의 제재(制裁)라든지 종교의 교훈들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과도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보다 이기주의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현재의 환경 아래서는 인간은 보다 탐욕적이며 보다 불성실하며 보다 이기적일 수 있겠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을 보면 인간의 성정에는 선함과 진실성이 있다는 것과, 인간의 도덕적인 성격을 보양(保養)하고 있는 끊임없는 영구적인 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자식들이 있으며, 또한 신앙과 순결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조정이 아무리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비이기심을 완전히 제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악에 대하여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선에 대하여서도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제안한 바 있는 변혁안은 그 자체가 유덕(有德)한 충동들을 왜곡시키고 있는 상태들을 파괴할 것이다. 또한 현재는 사회를 분해시키고 있는 힘을 변화시켜서 사회를 결합시키며 순화시키는 힘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분야와 자기들의 완전한 소득을 주며 전(全)사회의 복지를 위하여서 사회가 성장됨으로 창조한 기금을 취득하게 된다면 결핍과 결핍에서 오는 공포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생활의 원천은 자유롭게 되며 거대한 부의 증가로 극빈자들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호흡할 공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같이 일자리를 얻으려고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며, 들의 백합화와 같이 생활필수품을 위하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 발명의 발달, 지식의 보급 등이 만인에게 복지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결핍과 결핍에서 오는 공포가 제거된다면 부에 대한 부러움도 미약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부를 획득하며 과시하는 방법 이상의 방법을 사용하여서 자기동료들 간에서 존경과 칭송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공무관리나 공공기금행정에 있어서 현재까지는 다만 사적(私的) 이익을 위하여서만 존재하였던 기술과 관심과 충성과 성실 등이 공공목적에 사용되는 것이다. 철도나 가스 등은 현재의 주식회사형태보다 더 경제적이며 효과적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단일소유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이며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국책기관이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전 그리스를 통하여서 가장 분투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올림픽운동의 상이래야 야생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머리띠를 얻기 위하여서 사람들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야 돈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행동 중에서 이기심이 가장 주요한 동기라고 하는 철학은 근시안적인 철학인 것이다. 이 철학은 세계를 충만하게 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 철학은 현재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려면 어디에다 호소를 하여야 하는 것인가? 돈지갑에다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해야 할 것이며, 이기심에다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심에다 호소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기심이란 말하자면 강력한 기계적인 힘으로, 대규모적이고 광범위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정이란 화학적인 힘과 유사하여서 용해시키며 융합시키며 압도시키므로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준다”라고 한다면 이기심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고차적인 충동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의 생명까지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간의 모든 연력(年曆)이 많은 영웅과 성인으로 장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역사의 매 페이지마다 고상한 행위가 장엄하게 기록되고 있으며 인자한 생활들의 부드러운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은 이기심 때문은 아닌 것이다. 석가모니가 왕가를 등진 것과 오를레앙의 소녀가 성단에서 칼을 든 것이라든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서 발휘된 300명의 용감성이라든지, 빙켈리트의 가슴에 창이 집중적으로 꽂힌 것이라든지, 뱅상 드 폴을 배의 의자에다 묶어 놓은 것이라든지, 인도의 기근이 발생하였던 시기에 굶주린 어린이들이 비틀거리면서도 굶주려서 허약해진 아기들을 안고서 구호본부로 온 것 등은 이기심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라고 해도 좋다. 애국심이라고 해도 좋다. 동정심이라고 해도 좋다. 인간애를 위한 열정,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추출(追出)하는 힘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도덕세계에 전기(電氣)와 같은 힘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없으면 다른 것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힘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생존하였던 곳이면 이 힘이 작용하였던 것이며 현재도 여전히 세계는 이 힘으로 충만되고 있는 것이다. 이 힘을 보지도 못했으며 느끼지도 못한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위를 한번 보라! 일반남여들 속에 매일의 생활을 걱정하며 고뇌 중에서 그리고 소란한 거리의 아우성 속과 결핍이 숨겨져 있는 불결한 장소 등 도처에 불꽃이 어둠을 비춰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눈을 감고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플루타르크가 말한 바와 같이 “영혼은 그 자체 속에 친절의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지각하며 생각하며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힘 중의 힘인 이 힘은 현재 소비되고 있거나 혹은 왜곡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파괴력만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였던 물리력을 현재는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같이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사회를 강화하고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힘을 자유를 얻고 자기역량을 발휘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불균등을 조성하고 있는 불의, 풍족한 중에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인간을 결핍의 공포로 괴롭히고 있으며 육체적으로 인간을 저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인간을 저락시키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있는 불의(不義)야말로 조화적인 사회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장본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모든 것이 신의(神意)이다. 우리들은 발과 같이 손과 같이 눈꺼풀같이 상하의 치열과 같이 협동하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존하고 있는 사회상태보다도 더 훌륭한 사회상태를 머릿속에 상상도 해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들은 탐욕이 자취를 감추며 형무소를 비우게 되며 개인적인 이해가 전체적인 이해에 복종하게 되며 누구도 훔치지도 않으며 자기이웃을 괴롭히지도 않는 사회상태에 대한 관념을 실현불가능한 몽상가들의 한낮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들 실제적이며 평범한 두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꿈의 소유자들을 대단히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책을 저술하고 대학의 교수직에 있으며 성단(聖壇)에 설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고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만일 이들이 나이프와 포크가 테이블에 끈으로 매어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빈민촌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줄곧 하였다면 이들은 아마 자기가 식사할 때 사용하던 나이프와 포크를 가져가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교양있는 한 쌍의 남녀가 같이 식사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이런 경우에는 식사를 하려고 싸움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이웃 사람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기도하지도 않을 것이며 탐식하거나 식기를 가져가려고는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들은 자기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이웃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애쓸 것이며 훔치기는 고사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장 좋은 식기를 사용하게 할 것이다. 만일 이들이 자기들의 식욕을 다른 사람들의 식욕보다도 우선적으로 만족시키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사회는 멸시와 추방이라는 신속하고 중한 벌을 내림으로 그와 같은 행동이 일반여론으로 얼마나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인가를 보여 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일반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자연적인 사물의 상태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식량에 대하여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부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이 다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각 사람에게 충분하게 줄 수 있는 공정하고 균등한 분배를 확신하기 전에는 식량에 대하여서 탐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이 확실시된다면 식량에 대한 탐욕을 중지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분배조건이 대단히 불공정하여서 각 사람들이 충분한 몫을 확신할 수 있는 대신에 결핍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부에 대하여 탐욕하게 되는 것이다. 부를 탈취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는 것은 “지면 손해”라는 현 사회조정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정의와 자비와 종교와 감상에 대한 모든 생각 등은 발아래서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자신의 영혼도 상실하고 있으며 죽으면 하등 소용없는 것을 얻으려고 죽는 순간까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인을 결핍의 공포에서 구하는 부의 균등한 분배는 상류사회에 있어서 식사에 대한 탐욕이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부에 대한 탐욕도 파괴하고야 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초기항로 상의 붐비던 증기선에는 인간성격의 이와 같은 원리를 설명하여 주는 것같이 삼등선실과 일등선실 간의 행동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식사는 일등선실이나 삼등선실이나 다 같이 퐁족하게 제공되고 있으나 삼등선실에는 효능적인 봉사를 보장시킬만한 규정(規定)이 없으며 식사들은 탈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등선실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선객의 좌석이 정하여져 있어서 각자가 충분하게 식사하지 못할 염려도 없을 뿐 아니라 삼등선실과 같이 식사가 탈취되지도 않으며 낭비되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성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며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사실인 것뿐이다. 즉 만일 일등선객을 삼등선실로 이전시킨다면 이들도 탐욕심을 가지고서 달려들 것이며, 삼등선객을 일등선실로 이전시킨다면 곧 점잖아지며 정중해지는 것이다. 현재의 부의 불균등한 분배가 공정한 분배로 대체된다고 한다면 이와 동일한 차이가 전체사회에서도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이나 법률로써가 아니라 여론과 서로 명랑하게 하려는 욕망으로써 모든 조잡한 감정이 억제되고 있는 교양있고 세련된 사회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런 것이 사회의 일부분에서 가능하다면 전체사회에 있어서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각자가 각기 무장하고서는 인명과 재산을 철권으로 방어해야 하는 사회상태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상태 이상으로 발전하였다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핍과 결핍에 대한 공포가 제거된다면 노력하려는 자극물이 파괴되어서 사람들은 단순히 태만자(怠慢者)로 전락할 것이며 또한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행복한 상태로 된다면 진보도 자연적으로 정지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닌게아니라 노예소유자들은 채찍으로서만 인간은 일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위도 이에서 더 극한 것은 없는 것이다.
결핍이 자취를 감추게 되어도 욕망이라는 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동물이다. 인간은 탐구를 다만 시작하였음에 불과하였는데 우주는 그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전진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며 새로운 욕망으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또한 건설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건축하며 개량하며 발명하며 조합시키는 것인데, 인간이 성취한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은 새로운 일을 하려고 더 욕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자연속에서 숨쉬고 있는 지성물(知性物)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사실 이상 일 수는 없는 것이다. 바다에서 고동하고 있는 엔진으로 운전되고 있는 증기선도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바다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고래와 종류가 같은 창작물인 것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은 눈을 보조하기 위하여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임에 불과한 것이다. 부인들이 입고 다니는 부드러운 옷감이나 화려한 색깔들은 자연이 새에게 부여한 날개에 대한 대답은 아닌 것인가?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창조적인 충동이 약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햇빛만 쪼이고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람인 것이다.
어린이가 자기육체를 다스릴 수 있게 되자마자 그들은 진흙파이를 만들거나 인형에 옷을 입히는 것인데 이런 장난은 어른들의 작업의 모방(模倣)에 불과한 것이다. 어린이들의 파괴성은 무엇을 하여보려는 욕심과 자기가 스스로 무엇을 성취시킴으로 얻으려는 만족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즐거움이란 어떤 일을 배우거나 어떤 일을 할 때 혹은 모방할 경우에 즐거운 것이다. 우리가 호기심과 건설적인 힘에 대하여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즐거움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소설이 어떻게 종결된다는 말을 소설독자들이 듣게되면 그 소설에 대한 흥미는 감퇴되는 것이다. 카드놀이하는 사람이 카드를 섞는데 있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다만 우연과 기술뿐인 것이다. 베르사유의 사치한 경박은 왕은 왕국을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신하들은 명예와 새로운 연금(年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에게 가능하였던 것이다. 소위 유행적이며 괘락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대상물들을 목적하고 있지 않으면 권태로 죽어버릴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은 지위를 획득하고 있으며 친구를 만들고 있으며 자식들의 기회를 향상시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밀폐하고서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죽지 않으면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도 아니며 또한 사람들이 저주하고 있는 것은 노동을 하여야 한다는 자연적인 필요성도 아닌 것이다. 인간이 싫어하며 저주하는 것은 아무것도 생산하고 있지 않는 노동인 것이며 결과가 없는 노력인 것이다. 매일 생활하여도 식생활만이 경우 해결될 뿐이라면 그거야말로 정말 고역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익사나 면할 정도로 머리를 물속에서 눌리어 있는 것이나 분쇄되지 않을 정도로 바퀴 위를 걷게 하는 것과 같은 극악한 형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강압에서 해방되기만 한다면 자기의 기호에 따라서 일을 하는 것이 되므로 더 열심히 더 훌륭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이들은 자기자신과 타인을 위하여 실제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훔볼트의 생활이 과연 나태자(懶怠者)의 생활이었던가? 프랭클린이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인쇄업으로부터 은퇴할 때 다른 직업이 없어서 은퇴하였던 것인가? 허버트 스펜서가 게으름뱅이인가? 그렇지 않으면 미켈란젤로는 의식주를 위하여서 화필을 들었다는 말인가?
인류의 상태를 향상시켜 주었으며 지식을 확대시켰고 힘을 증가시켰고 문학을 풍부하게 하였으며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작품은 생활자료를 얻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인의 채찍이나 그렇지 않으면 동물적인 생존을 위하여 강제로 일을 하는 노예들의 작품들도 아닌 것이다. 더 호의호식하며 과시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작품자체를 위하여서 노력한 사람들의 작품인 것이다. 만일 사회가 결핍이 없는 사회로 된다면 이런 종류의 작품들도 증가할 것이다.
저자가 이미 제안한 바 있는 방법으로 지대를 몰수하게 된다면 부의 보다 균등한 분배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동일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대자본이 사용되고 있는 곳에서는 노동조직이 협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될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일상노동자의 고된 노역은 없어지는 것이다. 임금은 대단히 많으며 기회들은 너무나 많아서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성격의 우수한 자질을 한정시키거나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이며 모든 직업에 있어서 두뇌가 손을 보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은 비록 조잡한 종류의 노동이라 하더라도 유괘한 것이 되어 지는 것이다. 현대생산이 분업화의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능력을 건조한 것으로 만들거나 축소시키지는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의 단축과 변화 그리고 육체적인 직업에서 정신직업으로 전환되므로 도리어 해방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낭비되고 있는 생산력이 이용되며, 현재는 그렇게도 불완전하게 적용되고 있는 지식의 완전한 사용이 이로부터 오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동성과 정신적인 활동이 창조됨으로써 생산방법이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발달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성 상에서 가장 막대하게 낭비되고 있는 것은 정신력인 것이다. 문명의 발전과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힘은 잠재력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 사상가와 발명가와 조직가의 수는 대다수의 국민의 수와 비교한다면 얼마나 소수인가!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수다히 탄생하고 있으나 소수자만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환경때문인 것이다. 육체의 구조가 무한히 다양적이어서 똑같은 두 사람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자질과 기회가 무한히 다양적인 것이다. 그러나 관찰해보고 생각해 본 결과 저자는 자연적인 차이는 신장(身長)이나 육체적인 힘의 차이만큼 크지 못한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위인의 생애를 돌아보기만 한다면 그들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용이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빈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고 생각하여 보라. 나폴레옹이 몇 년만 먼저 탄생하였다고 생각하여 보라. 콜럼버스가 바다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갔다고 생각하여 보라. 셰익스피어가 구두 고치는 사람이나 굴뚝 청소부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보라. 뉴턴 경이 농부로서의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여야 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여 보라. 아담 스미스 박사가 석암공으로 출생하였으며 허버트 스펜서가 공장기사로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생각하여 보라. 이런 경우에 이들의 재능이 무엇으로 유익하였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시저나 나폴레옹으로써, 콜럼버스나 셰익스피어로써, 뉴턴이나 스미스나 스펜서로써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심정에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일벌이 필요상 여왕벌로 변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발전에 적합한 환경만 된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영웅이나 지도자나 발명가나 교사나 현인이나 성인이 되는 것이다. 파종자가 종자를 광범위하게 파종하는 만큼 종자가 싹이 트고 꽃을 피우게 하는 생식력도 대단히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슬프다. 돌밭에 떨어지고 새가 쪼아먹고 가라지도 함께 자랐으니! 한사람이 완전히 성장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성장이 저해되며 기형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의지는 의식에 대한 최종적인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식이나 지위나 심지어는 성격에 있어서까지 가장 좋은 점 중에서 전적으로 자기에게 귀속시킬만한 것이 얼마나 적은 것이며 얼마나 많은 세력이 우리들을 형성하고 있는 것인가. 현명하며 학식있고 신중하며 강력한 사람으로서 자기생활의 내부적인 역사까지 더듬는다고 할 때 스토익파의 황제와 같이 여러 가지로 도처에서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고상한 사상을 얻게 하며 행복한 기회가 자기에게 전개된 데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의 주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의 전성기에 도달한 사람 중에서, 죄인들이 사형장으로 끌리어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저 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외친 경건(敬虔)한 영국인의 사상에 때때로 뇌동(雷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전이란 환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중에 하나는 수천년 계속된 유럽발전의 결과이며, 다른 하나는 수천년 내려온 중국인의 완고(頑固)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중국의 중심부에 코카사스 영아(嬰兒)를 놓았을 경우 눈의 각도와 머리털 색깔만 제외하고 중국인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 아이는 중국인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며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며 동일한 취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베르 드 베르 부인의 어린시절을 빈민가의 영아로 변화시키는 경우에, 백 명의 백작의 피를 주입시킨다고 하여서 이 어린이가 세련되고 교양있는 여인으로 될 것인가? 결핍과 결핍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생활에 대한 휴식과 위안과 독립과 단정함과 우아를 부여하며 정신적 내지 도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마치 사막에 양수(揚水)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황야는 싱싱한 초목들로 뒤덮히게 되는 것이며,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던 불모지에는 오래지 않아서 나무그늘과 새들의 노래소리로 활기를 띄우게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감추어져 있던 재능과 신용할 수 있는 미덕이 새로 등장해서 인생을 풍부하고 완전하고 행복하고 고상하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불만족스러운 위치를 감수하여야만 했던 사람들이나, 부유하게 되기 위하여서 약탈하는데 정력을 소모하였던 사람들이나, 공장에서는 기계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생활자료를 구하기 위하여서 의자나 보습에 얽매었던 사람들이나, 악덕과 무지로 불결하게 성장하였던 어린이 등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있어서는 최고도의 질서가 있는 능력과 가장 찬란한 재능을 구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이러한 기회들을 다만 구체화시키는 것만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만인에게 부여하고 있는 사회상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으로써 이 한폭의 그림을 완성하여 보자. 아마 색채가 너무도 명랑하기 때문에 말로는 표현할 바를 못찾을 것이다. 도덕적인 승화, 지적인 활동, 사회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수없는 작용과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사회의 각 구성원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현재와 같은 사정하에서는 사회구조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소수의 행운아라도 자기들은 비록 의식하고 있지는 못할는지 몰라도 사회의 기저를 흐르고 있는 결핍과 무지와 타락 등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가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와 같은 사실들을 한번 생각해 보고서도 저자가 제안한 바 있는 변혁안이 최대의 토지보유자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와 같은 사정 하에서 자식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는 것보다는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사회에서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남겨놓지 않았다고 하여도 자식의 장래가 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회상태가 존재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전(全)소유를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입장권을 싸게 사려고 할 것이 아닌가?
저자는 지금까지 사회의 약화와 병폐에 대한 원인을 검토하였으며 또한 구제책도 제시하였다. 저자는 모든 점을 설명하였으며 모든 반대와 대결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여온 문제들은 막중한 문제였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새로 제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정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저자와 보조를 같이하여서 먼 데까지 온 독자에게 저자는 더 고차적인 분야로 저자와 같이 동행하여 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 책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완전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양해(諒解)하여주기를 바란다. 저자는 다만 사상의 일부를 암시하는데 그치거니와 이러한 사상을 앞으로 가일층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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