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헤미야 강해(8) 2023. 9. 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헤미야4:12-23
<지난 시간 요약 – 물리적인 위협>
산발랏과 도비야는 자신들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이 성벽의 복구해 나가자, 그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계획합니다. 주변의 민족들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8)며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세웠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데에 외부적인 장애가 사람들의 비웃음과 협박이라면, 내부적인 장애는 바로 ‘낙심’입니다.
그 소식은 당연히 유다 백성들을 위축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잘 견디는 듯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 공동체 내부로부터 피하지 못할 위기가 터져 나왔습니다(세 가지).
첫째, 육체의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그들은 성벽을 쌓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방해꾼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힘이 다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한계입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한계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음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10절)고 말합니다. 마음이 낙심한 것입니다. ‘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겠구나’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입니다.
육체의 피로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마음이 낙심되어 있으면, 힘이 생겨도 의욕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낙심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비전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낙심한다는 말은 ‘믿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낙심은 전염력이 강합니다. 금방 옆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함께 의욕이 상실됩니다. 결국, 전체 공동체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셋째,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적대자들의 말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아직 그들이 쳐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레 겁을 먹은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담대함을 얻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느헤미야의 간증을 들었을 때는 힘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함께하신다는 간증을 듣고 그 순간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던 눈이 ‘엉뚱한 곳’, 즉 적대자들을 향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하였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방해>
한 가지 더 그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족(특히 가족)들의 방해였습니다.
12절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는 먼 지역의 마을에서 지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애원하는 겁니다. "개똥이 아빠~~여기 위험해요. 소문도 못 들었어요. 산발랏의 군대가 여기로 쳐들어온대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러기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10번이죠. 10번은 단순히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12절a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란 말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대적들은 자신들과 가까이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소위 ‘가짜 뉴스’를 전파한 것입니다. 마치 곧 쳐들어갈 것처럼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벽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나 가족을 도로 데려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가족의 지지는 참 중요합니다.
목회자 – 준회원 과정 진급심사 – 아내가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하는지?
어떤 일을 하든지 가족의 지지는 큰 힘이 됩니다.
지금 육체적 피로가 한계가 달했습니다. 지금 마음이 낙심했습니다. 거기다 공포심과 경계심으로 정신적인 충격이 심합니다. 그런데 이웃 사람과 가족들이 와서 ‘돌아오라’고 하니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위기의 순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번에도 성벽을 쌓는 일이 실패할 것입니다.
<빛나는 느헤미야의 리더십>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다시 느헤미야에게 쏠립니다. 계속적인 위기가 닥쳐오는 가운데,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요?
13~14절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7절부터 12절까지와 13~14절에서 자칫 쉽게 넘어갈 수도 있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 변화는 인칭의 변화입니다. 7절~12절까지의 인칭은 '우리'입니다.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10절에도 “우리가”, 11절에 “우리의”, 12절에는 “우리에게”, “우리에게로”, 계속해서 '우리'라는 인칭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13~14절에 기록된 인칭은 무엇입니까? 13절에 "내가", 14절에도 "내가 돌아본 후에", 즉 주어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 한 사람의 믿음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모두가 낙심할 때, ‘지도자’ 한 사람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 우리나라는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과 H조에 묶여 조별리그를 치렀습니다. 우루과이하고 0:0으로 비기고, 꼭 이겨야 할 상대인 가나에게 3:2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포르투갈이었는데, 이기기 힘든 강팀이었습니다. 반드시 이기고, 우루과이가 가나를 2:0 이하로 잡아주어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의 수였습니다. 전반 시작 5분 만에 포르투갈이 먼저 골을 넣었습니다. 패색이 짙었습니다. 선수들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저는 당시 주장을 맡고 있던 손흥민 선수의 몸짓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얼굴 뼈가 함몰되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동기 부여). 그마저 낙심했다면 선수들은 구심점을 잃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을 독려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영권 선수가 동점 골을 넣고, 후반 45분이 지나고 추가시간에 손흥민 선수의 마지막 질주와 함께 교체로 들어간 황희찬 선수가 역전 골을 넣어, 2:1 기적 같은 역전승을 만들며 한국 16강에 올랐습니다. 물론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가 2:0으로 끝나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위기의 순간에 리더 ‘한 사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중꺽마).
2010년 8월 5일 칠레 북부 산호세 광산이 갑자기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지하 622m의 갱도에 33명의 광부가 매몰되었습니다. 매몰 17일째 광부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절망할 무렵, 600m 밑 깊은 지하로 내려보낸 탐지 카메라가 "우리 33명 모두 살아있습니다."라는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습도 90%, 온도 32도, 한정된 물과 식량, 칠흑 같은 어둠, 밀폐된 공간 속의 극한의 공포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작업반장이었던 루이스 우르주아라는 깨어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루이스 우르주아가 리더가 되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격려했습니다. 구출될 때까지 밀폐된 극한 환경에서 예민해져 싸우지 않도록 다독이고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전 세계가 전원 생환을 위해 기도했고 격려의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결국, 매몰된 지 69일 만에 33명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돌파하려면 깨어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느헤미야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격려>
느헤미야는 백성들 사이에 퍼져가는 부정적인 생각과 낙심의 그림자를 거부합니다.
구체적인 대책을 세웠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적 무장입니다. 실제적인 전투 준비를 했습니다.
13절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대적들의 기습에 대비한 것입니다.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의 종족대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도록 했습니다. 대적들이 정탐할 때 잘 보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보기에 예루살렘의 방어를 철저히 하고 있음을 공개하려는 전략입니다.
실제로 이 방법은 통했습니다.
15절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본래 산발랏을 비롯한 대적들의 계획은 실제적인 공격보다는 위협을 가해 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끝까지 읽어보신 분들을 알겠지만, 그들은 실제로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겁을 먹지 않고 철저히 방어하고 있음을 알린 것입니다.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무장하고 경계를 서게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서 그들의 의도가 먹히지 않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겁을 먹지 않고 도리어 방비를 철저히 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산발랏 일당’이었습니다.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겁을 먹지 않고, 철저히 대비했다는 소식을 들고, 일부 돌아갔던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얼마간의 기간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중단, 육체적인 피로로 많이 회복).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후에 대적자들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모르니 만반의 대비를 하며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16~23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6~23절 “그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16절을 보십시오. '내 수하의 사람들'은 느헤미야를 따라 페르시아에서 온 친위대로 보입니다. 그들 중 절반은 일하는 현장에 투입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공격에 대비해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백성들도 한 손에 병기를 잡고 일하도록 하고 어떤 사람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곁에 나팔 부는 자가 있어 철저히 경계하도록 하고 적의 공격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일하는 동안, 안전을 위해 창을 든 자들이 옆에서 동트는 새벽부터 별이 나는 밤까지 철저히 보초를 서 주었습니다.
22절을 보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갑옷을 벗지 않도록 했습니다.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병기를 손에 잡고 가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느헤미야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백성들의 무장을 튼튼히 했습니다. 유비무환으로 철저히 싸울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둘째는 영적 무장입니다. 낙심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을 믿음으로 격려합니다.
14절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저는 이 말씀이 오늘의 하이라이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려움과 낙심을 치유하는 특효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지극히 크신 분입니다. 나를 위협하는 적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만일 그 문제가 우리 주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정말 문제입니다. 느헤미야는 커다란 문제 앞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보다도 주님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불신앙은 문제를 극대화시키지만 신앙은 주님을 더 크게 보이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크게 보게 만들지만 불신앙은 문제를 더 크게 보이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하는 보고를 보십시오. 열 명의 믿음 없는 사람들과 두 명의 믿음 있는 사람들의 보고가 얼마나 다른 보십시오. 열 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8, 32~33)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모든 상황을 분석할 줄 알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8~9)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의 거인들보다 하나님이 훨씬 크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의 위협에도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에게는 골리앗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물 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넘어뜨렸고,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2) 두려우신 분입니다. 나를 위협하는 적보다 더 두려우신 분입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단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베풀 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쓰는데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왔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불려와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이라고 해석을 해냈습니다.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입니다. 왕의 시대는 끝났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이 죽었습니다. 천하의 바벨론 왕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심판의 손입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을 두려워하고 별것 아닌 사건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바로 이러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것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묵상하지는 않고, 자꾸만 문제를 되새기고 사람들의 상처 주는 말들을 묵상합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앞에는 원수가 있습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 원수들을 바라보고 그 원수들을 묵상하면, 오금이 저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내 앞에 차려져 있다고 해도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차려 주시는 분,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 밥이 꿀보다 맛있습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째려보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우리의 삶에 잔이 차고 넘쳐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14)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헤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20절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싸우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출17:8~16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움 – 모세와 아론과 훌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 - 모세가 손을 들면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김 -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잡음 -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함 -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름.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참 힘드시지요.
그래도 주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당면한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나를 위협하는 그 어떤 두려움보다 더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시면, 이기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싸워주신다’는 믿음으로, 이번 한 주간도 영육 간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