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유람기
금강산을 향해 떠난 여행길이었다. 내가 탄 버스 말고도 수십 대의 버스가 길게 줄지어 자유의 다리를 건넜다. 조금 전 38선을 넘어섰지만 아직 우리 땅이었다. 차창 너머로 ‘철마는 달리고 싶다’란 패찰을 단 기차가 녹슨 철로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 민족이 짊어지고 가는 분단의 아픔이 느껴졌다. 남과 북의 혈을 막고 있는 이념 응어리를 빻아서 뿌리면 금강석이 되어 반짝이는 별처럼 이 강산을 아름답게 수놓을 것 같았다. 금강산 관광은 우리에게 설렘과 즐거움도 주지만 이산가족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기회로 한몫할 듯했다.
차가 북한 땅으로 들어섰다. 금강산 관광객들을 위한 도로가 산자락을 타고 시원하게 뚫렸다. 차창 밖으로 추수가 끝난 들판이 펼쳐졌다. 텅 빈 들판은 쓸어놓은 마당처럼 깨끗하다 못해 삭막했다. 주변에는 인가나 비닐하우스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저토록 넓은 땅에 트렉터를 몰고 와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배로만 가다가 2004년부터 육로로 갈 수 있게 되었다. 3박4일 걸리던 여행이 1박2일로 가능하니 사람들이 여행 갈 마음 내기가 수월했다. 나는 발 빠르게 2005년 1월 1일 출발하는 일정에 예약했다. 같이 갈 친구들 의견도 묻지 않고 결정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내 의견에 선선히 응해 주었다. 내 예측이 맞았다. 우리가 다녀온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관광객 피살 사건이 생겨 금강산 여행은 중단되었다. 친구들은 그때 잘 갔다고 두고두고 말했다.
오십여 대의 버스가 내뿜는 어떤 기세 같은 게 드넓은 광장을 꽉 채웠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북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저쪽 숲으로 하얀 돔과 낮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그 뒤로 금강산이 그림처럼 둘러쳐졌다. 그 웅장한 풍경이 어쩐지 낯익었다. 내 살던 곳에서 마주친 듯 정다웠다. 매서운 바람이 볼을 스치자 번쩍 정신이 들며 여기가 북한 땅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가이드가 재촉했다. 소나무 방풍림에 둘러싸인 외딴 건물을 손짓하며 서둘러 짐만 내려놓고 오라 했다. 신계사에 들렀다 서커스 관람 후 저녁까지 먹고 숙소로 들어간다 했다. 하루 남짓 빠듯한 일정이기에 일 초를 아끼려 우르르 달려갔다. 우리를 맞이하는 호텔도 기분이 좋은지 덩달아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흔들리는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해금강 호텔은 바다에 뜬 한 척의 커다란 배였다.
신계사에 들어섰다. 양지바른 산자락에 죽 늘어선 부도탑을 지나 대웅전과 마주했다. 육이오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절이 소실되었는데 새로 지었다 했다.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 서까래의 나이테가 선명한 절집은 소나무 향내를 물씬 풍겼다. 부도탑 이외에는 고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황토로 다져진 드넓은 절터가 인상 깊었다. 세계 각국에서 고고학자들이 찾아온다는 가이드의 설명처럼 옛 고승들의 명성과 함께 그 위용이 느껴졌다.
모란봉 서커스단 공연은 볼만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무척 아끼는 북한의 자랑거리라 했다. 자존심을 건 공연이고 훈장을 받거나 높은 성과를 낸 인민들에게만 보여주는 거였다. 공산주의 체제를 끌고 나가는데 큰 무기로 활용하는 듯했고 북한 사람들은 당에 충성하여 공연에 초대받는 것이 평생소원이라 했다. 우리는 굳이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뻗대다가는 ‘간나 새끼’ 하며 총 맞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귀엣말로 소곤거리며 객석에 앉았다. 서커스 단원들은 군인들처럼 구령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입장했다. 곧이어 비쩍 마른 아이들이 높고 낮은 곳에서 줄을 타고 오르내렸다.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공연이었다. 묘기가 아슬아슬해 어느 한순간, 손을 놓칠까 보는 내내 손에 땀이 배었다. 용을 쓰는 그들 모습을 보니 예술 아닌 강제 노동인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서커스는 내 어린 시절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을에 유랑극단이 들어왔다. 논바닥에 높이 장대를 세우고 천막을 덮어씌워 가설무대를 만들었다. 쾅쾅쾅 음악을 신나게 울리며 짙게 화장한 배우들을 태운 트럭이 동네를 돌았다. 못산 저수지 물로 농사짓는 위아래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왔다. 서커스 공연은 입장료가 없고 회충약이나 ‘동동구루무’ 한 통만 사면 되었다. 어머니를 따라간 나는 신기해 손뼉치기에 바빴다. 이쪽저쪽 건너뛰며 그네를 타거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끼우는 유연한 몸놀림에 함성이 절로 나오곤 했다. 북한의 공연은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무대가 너무 크고 동작이 극적이어서 좀 무섭기까지 했다. 달아오른 얼굴이 채 식기도 전에 식당으로 옮겼다. 빨강 노랑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흥을 돋우더니 불개미 술이 담긴 소쿠리를 들고 돌아다녔다. 기념으로 술을 한 병 샀다.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왔다. 포항에서 금강산까지 한반도를 훌쩍 거슬러 온 긴 하루였다. 호텔방이라기에는 작아 보이는 방에 여럿이 자야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만물상에 올라야 했기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속이 메슥거린다며 일어나 앉았다. 배에서 자려니 멀미가 난 거였다. 생애 처음 북한 땅에서 잠잘 기회를 놓쳤다며 다들 궁시렁대다 꿈속으로 빠졌다.
금강산은 묵언 수행 중이었다. 흐르던 물이 얼어붙고 산새 소리마저 멈춰 자박자박 딛는 우리 발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구룡폭포를 오르는 산모롱이마다 붉은 글씨를 새긴 바위들이 서 있었다. 주로 김일성 부자가 다녀갔다는 표시나 그들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북한 안내원은 마네킹처럼 미동 않고 사람들을 쏘아보기만 했다. 우리도 그저 마주 바라보았다. 언어가 통하는 한민족이건만 말도 걸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 구룡폭포는 용이 입김을 품어내듯 흰 눈을 풀풀 뿜어냈다.
만 가지 형상의 만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을 가릴 듯 쑥쑥 솟은 기암괴석의 병풍이었다. 바위에 가려 조각보 같은 하늘에 눈마저 흩날리니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계곡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병풍을 수놓은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바위 틈새를 비집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 뿌리를 내렸다. 비틀며 뻗은 가지가 바위를 껴안았다. 촛대 바위와 신선바위, 심우상 등등 만물상은 바위와 소나무가 얽히고설킨 특별전시장이었다.
상팔담 역시 바위가 만들어 낸 걸작이었다. 산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굽이굽이 여덟 곳에 소를 이루었고 여름밤에 선녀들이 내려와 더위를 식혔다는 용소는 꽁꽁 얼었다. 거대한 고드름이 되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폭포가 마치 바람에 휘날린 선녀의 옥색 치맛자락 같았다. 폭포 앞에 우뚝 솟은 바위 하나는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든 망부석이었다.
내 생애 첫 금강산 관광은 도깨비 장난 같았다. 일박이일, 짧으면서도 길었다. 상팔담 긴 눈밭을 내려오면서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에 오르기 전 식당으로 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땅에서의 마지막 식사라 생각하니 괜히 울적하면서도 냉면은 술술 잘 넘어갔다. 다음에는 평양에서 냉면을 먹어야지…. 짧은 여정이었지만 작은 소원하나 풀고 나니 마음도 몸도 가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