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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8) 2024. 7. 7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
행2:22-24
<두 종류의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히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소모시켜 주변을 따뜻하게 데웁니다.
‘온도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변 온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온도계는 아무리 크고 많이 있어도 방 안 공기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히터처럼 삶을 주도하고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 그들의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믿음으로’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바로 ‘히터’같은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도 나로 인해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순절에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4). 이를 본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조롱했습니다.
<요엘의 예언 성취>
이때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들 앞에 서서 당당히 말씀을 선포합니다. 지금 시간이 ‘제 삼시’(오전 9시)인데 무슨 술에 취했다고 하느냐며, 이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오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약 성경 중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6~18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말세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그리고 이어 베드로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베드로 설교의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을 증거하시려고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 목적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성령의 역사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비슷한 역사가 악령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누가 영광을 받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영광을 받는가? 그것을 보면 이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똑똑하기 때문에 아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사건 없이는 성령 사건도 없습니다.
요즘 광고 한국의 메이저급 언론들 광고 수입에 눈이 멀어 반기독교, 반사회적 집단의 광고를 연일 실어 주고 있습니다. 특히 동아일보가 심한데, 이단으로 판명되고, 소위 ‘타작마당’이라는 폭력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과천 은혜로교회(현재는 해빛교회-신옥주)의 주장을 광고 지면에 1주일 단위로 게재하고 있습니다. 그 광고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도 하나님께서 절대 듣지 아니하신다’(동아 2024년 6월 27일) ‘성자 예수라는 거짓을 심판하시는 하나님’(동아 2024년 6월 20일) ‘영원히 멸절당한 예수’(동아 2024년 6월 13일) ‘악인 예수에서 선한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동아 2024년 6월 7일) ‘예수의 이름으로 걸린 치명적인 약한 병’(동아, 중앙 2024년 5월 30일) ‘사망하여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기억도 아니 하신다. 이미 죽은 지 이천년이 다 된 예수는 어떠하겠는가’(동아 2024년 5월 23일), ‘타작, 주의 징계가 없는 사생자인 예수’(동아 2024년 5월 17일) ‘사망하여 소멸한 자 예수’(2024년 5월 10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예수와 예수를 섬기는 귀신의 처소’(동아 2024년 5월 3일) ‘예수의 부활이 거짓인 증거’(동아 2024년 4월 19일) ‘인생 예수의 모든 증거는 허사다’(동아 2024년 4월 12일) ‘똥처럼 망한 예수’(동아 2024년 4월 5일). 언론이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사로 지면을 채운다고 하여도, 광고란에는 세계인 수십 억 명이 믿는 종교를 부정하는 반기독교, 반사회적 광고를 지속해서 내보내는 것은 언론의 수준을 스스로 추락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광고의 주체인 신옥주는 공동상해, 특수 폭행, 특수 감금, 사기 등으로 7년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있다. 신옥주 집단은 종교를 가장하여 신격화, 범죄 행위를 일으킨 집단이다. 그런데도 동아일보가 이런 자들의 광고를 주기적으로, 수년간 게재한다는 것은 언론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사회 질서, 공공복리,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마땅한 역할을 내팽개친 것이다. 언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진실 보도’일 것이다. 세계 인구의 1/3이 믿는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이단의 광고를 게재하는 것은 언론이 스스로 고유 종교가 가진 교리와 진리를 폄훼하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인용(2024. 6. 28) |
이제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얼마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4복음서를 통해 보면, 일반적인 사람은 능히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로 분류해서 대표적인 기적 3가지씩만 소개하려 합니다.
1) 각종 질병을 치유하신 기적이 17회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고쳐주신 기적’(마9)과 ‘맹인 바디매오를 고쳐주신 기적’(마20),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기적’(요5) 등을 들 수 있습니다.
2)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이 3회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을 살리신 기적’(마9),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기적’(눅7장),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요11장) 등입니다.
3)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이 9회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말 못 하게 하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마9)과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신 기적’(마15), 그리고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눅8장 - 돼지 2천 마리 몰사) 등입니다.
4) 그 다음 자연을 제어하신 기적이 12회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요2)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기적’(마8),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마14) 등입니다.
왜 기적이라고 말합니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통의 사람은 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많은 사람이 몰렸습니다. 쉬시지도 못하고,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습니다(오병이어의 사건 배경 –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벳새다로 쉬러 가심. 사람들이 알고 모여듦).
요즘 같으면 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SNS –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지난 금요일(5일), 경기도 용인 체육공원에 뜬 축구선수 손흥민(32·토트넘 홋스퍼)을 보기 위해 구름 인파가 몰렸습니다. 이날 손흥민은 골키퍼 김승규(34·알샤바브 FC)와 함께 저녁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반인들로 구성된 축구팀과 경기를 펼쳤는데, 손흥민이 등장했다는 소식은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퍼졌고, 경기장엔 순식간에 수천 명의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손흥민을 가까이 보기 위해 주변으로 몰렸고, 아이들이 종이와 펜을 들고 달려들었고, 주변에서 서로 밀치거나 큰 소리로 욕설하며 싸움까지 하는 바람에 결국 경찰까지 와서 통제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요즘 오셨다면…. 다들 삭개오처람 너무 위로 올라가고….
사실 이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는 이 모든 기적을 옆에서 보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산 증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놀라운 표현을 씁니다. 그 모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셔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임을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말씀하십니다.
23절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신 결과가 너무 허탈합니다. 기적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 눅 16장> 물질에 노예가 되어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 한 사람 돌보지 않은 채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던 한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자신의 형제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세 번이나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히 기적이 아닌 말씀에 근거해 있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고 요구했던 기적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죽어가는 예수님 앞에서도 믿음의 조건으로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위한 기적만 요구하다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니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여기서 ‘법 없는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비록 뒤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조종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너희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과 하수인들을 이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다. 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희들이 죽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이 바로 거기에 있던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예수를 다른 사람들이 죽였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네가 죽였다’고 하면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요한은 이 기막힌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요1:10-11“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런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허락)하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어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서 그렇게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일에 쓰임 받은 악한 사람들입니다(가룟 유다, 빌라도….).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당신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를 이미 예언케 하셨습니다. 갑자기 잡혀서 죽은 게 아니라, 미리 알고 계시다가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누가복음의 구조 –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4:14-9:50)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이야기(9:51-19:27)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사건을 포함하는 예수님의 나머지 행적(19:28-24:53) 즉,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셋째, 하지만 하나님은 더욱 크신 능력으로 사망의 밧줄을 푸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셨다는 것입니다.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 그 사망의 올무에 매여 있지는 않으셨습니다. 본래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사망이 잡아둘 명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죽음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말하게 하신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은 당시 얼마나 위험한 표현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입니다.
지금 로마의 군대는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고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호시탐탐 박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직설적’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 목숨 부지하겠다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었는지 말입니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령이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대로 담대하게 선포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성령의 감동과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번에도 부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소위 ‘영혼 불멸’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자연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나는 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 신앙’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일관된 주제가 보입니다.
일관된 주제는 구원의 계획과 과정과 완성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 모두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함께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2절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선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예수님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님은 임재하십니다. 내 몸을 성전 삼고, 내 안에 임재하십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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