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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8) 2024. 8. 7
듣는 마음을 구하는 솔로몬
왕상3:1-15
오늘 본문에서부터 솔로몬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애굽 왕 바로와 혼인 동맹>
다윗의 유언을 완수한(아도니아 제거, 아비아달 제사장 추방, 요압과 시므이 제거) 솔로몬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든든히 세우는 데 힘을 쏟습니다.
1절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견고히 한 솔로몬은 이제 대외적으로도 자신의 왕권을 안정화시키는데 노력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강대국 왕의 딸과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 나라가 애굽입니다. 솔로몬은 애굽의 왕 바로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냥 봐도 ‘정략결혼’입니다(‘사랑’은 개나 줘 버려!).
그런데 이러한 정략결혼은 이방 민족들이 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의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약속입니다(제사장 민족 - 출19장).
아마도 솔로몬은 나이에 왕이 되다 보니 내심 불안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현듯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과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략결혼’을 솔로몬 왕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첫 절(3:1절)에서 언급하는 것은 열왕기 기자의 ‘복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명기 사가). 이스라엘이 각종 우상 숭배로 망해가는 첫걸음을 바로 이 솔로몬의 ‘정략결혼’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관례화되어 나중에 후비(后妃=임금의 아내)가 700명이요, 빈장(嬪嬙=궁녀)이 300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결국 그 부인들이 섬기는 이방 우상들로 인해 자신마저 오염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산당에서 제사>
열왕기 기자의 ‘복선’은 또 하나 있습니다.
2~3절 “그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바로 ‘산당 제사’입니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산당’의 형태는 흙무덤 같은 작은 언덕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하나의 '제단'으로 구성되었지만, 때로는 제단 곁에 여러 개의 부속 시설을 갖추는 등 꽤 정교하게 구성된 산당도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 시대에 산당 제사가 보편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엘리 시대에 블레셋 족속들에게 법궤를 탈취당한 이후(삼상 4:11), 그 법궤가 실로 놉(삼상 21:1-9) 기브온(대상 16:37-40) 예루살렘(삼하 6:16) 등으로 옮겨 다닌 결과 백성들은 제사의 구심 장소를 상실하고 각자 나름대로 산당을 만들어 제사 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
솔로몬이 산당을 찾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솔로몬의 초기 행적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여호와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3절).
그러니까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산당을 찾은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다윗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3절)
다윗의 유언을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왕상2:3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오늘날 예배당을 찾는 동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개인의 신앙적 동기. 둘째, 가문의 신앙 이어가기.
그런데 3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열왕기서를 기록하는 기자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3절b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비록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한 것이 첫째는 여호와를 사랑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버지 다윗의 유언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가 부정적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복선’입니다(훗날에 일어날 일을 암시). 그러니까 ‘산당’은 지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지만, 결국은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된 이후에도 ‘산당’은 훼파되지 않았습니다(민 33:52). 성전 중심의 제사를 방해하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산당을 적극적으로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산당 제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정략결혼’을 통해 얻은 여러 이방신을 섬기는 부인들로 인해 우상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림>
이제 산당에 가 솔로몬이 행한 제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4절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m가량의 이스라엘 중부의 주요 성읍입니다. 가나안 정복 후 처음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수 18:25), 후에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습니다(수 21:17). 이곳 기브온의 산당이 특별히 유명하게 된 것은 사울의 놉(Nob) 제사장 학살 사건(삼상 22:11-19) 이후, 놉에 있던 여호와의 장막이 기브온으로 옮겨지고 나서부터였습니다(대상 16:39, 대하 1:3). 즉 그때 이후로 여호와의 장막(모세의 장막)이 있는 기브온과 여호와의 법궤(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2대 제사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라는 큰 제사를 드렸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천 번의 예배’나 ‘천 번의 번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그런 뜻이 아니라 ‘천 마리의 희생 제물’을 의미합니다(대하1:6).
요즘도 ‘일천번제’라는 제목으로 헌금을 바치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것처럼 매일 헌금을 드리면서 천일(千日)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예배하고 헌금을 드리면서 기도하는 그 정성과 믿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하나님 앞에 속죄함을 받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계획된 것이라도, 본래의 의미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많은 희생 제물을 한꺼번에 드렸을까요?
역대기하의 평행구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하1:2-3a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하여/ 3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6절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그렇습니다. 이때 솔로몬 혼자서 기브온에 가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 같은 군지휘관들과 재판관이나 방백, 족장과 같은 사회적인 지도자들을 총동원하여 그들과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천 마리의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 예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천 마리의 희생 제물’은 ‘번제’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번제’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제단의 사방에 뿌리고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완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러한 ‘번제’의 목적은 바로 ‘속죄’입니다(레1:4). 그래서 번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에 먼저 안수하고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천 마리의 희생 제물’은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대하1:1-6).
그러니까 솔로몬은 자신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를 위한 ‘일종의 공식적인 속죄예식’을 진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까? 기록이 다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한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속죄예식’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음으로, 자신이 다스리는 새 왕국을 성결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듣는 마음을 구하는 솔로몬>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날 밤에 직접 꿈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의 소원을 물으십니다.
누군가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것만큼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평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소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가난한 나무꾼이 산에 올라가 참나무에 도끼질하고 있을 때, 요정이 나타나서 제발 나무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소원이든지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참나무를 놔두고 무슨 소원을 빌까를 고민하며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아내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소시지 하나만 먹으면 좋겠다’고 혼잣말하니까 정말 천장에서 소시지가 뚝 떨어지는 겁니다. 깜짝 놀란 나무꾼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아내가 버럭 화를 내며 고작 소시지 하나 먹겠다고 그렇게 소중한 소원을 썼냐고 구박하면서, ‘저 소시지 당신 코에 확 붙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정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시지가 나무꾼의 코에 가서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떼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지막 소원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입니다.
숫자의 제한이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6절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솔로몬은 어떤 특정한 소원을 아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를 상기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앉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솔로몬의 응답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대표적인 고백입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간구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소원을 아룁니다.
7~9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먼저 솔로몬은 ‘종은 작은 아이라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석가들은 이때의 솔로몬의 나이를 보통 20세 전후로 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수많은 백성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의 막중함에 비해 자신의 경험 미숙과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고 고백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의 이 고백은 반드시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솔로몬의 자기 겸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에 임하는 인물들은 대개 이와같이 자신의 부족함과 부적격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출 3:11, 삿 6:15, 렘 1:6~7등).
그러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라고 구합니다.
솔로몬의 소원을 통해 우리는 당시 왕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재판입니다.
왕정(王政) 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士師)들의 임무는 재판관(쉐파트, '사사'로 번역됨)으로서 사회의 각종 분규를 매듭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재판은 통치의 주된 기능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 국가의 왕들은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재판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통치하고 재판하기 위해 요구되는 첫 번째 것은 ‘듣는 마음’입니다. ‘듣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잘 들어야 잘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백성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신명기의 ‘쉐마’(신6:4-9)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무엇을 잘 들어야 할까요? 왕은 물론 민심을 잘 듣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잘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과 악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이 맡겨주신 백성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솔로몬의 대답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10~13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은 그가 구했던 ‘듣는 마음’ 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광과 장수의 복까지 덤으로 주셨습니다.
장수(長壽)와 부(富)는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입니다. 솔로몬에게도 그런 소원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를 위하는’ 사사로운 소원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이스라엘의 왕’ 답게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과 명예까지도 덤으로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633(예수님의 산상수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속적인 순종이 중요>
여기에는 물론 한 가지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14절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단 한 번의 행함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기준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행적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열왕(列王)들의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9:4, 15:11 등). 그런데 후일 솔로몬의 행적은 다윗의 기준에 못 미쳤던 것으로 판정되고 말았습니다(11:4, 6). 솔로몬이 60세 안팎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결코 그가 장수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한순간 선두에 섰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하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꿈에서 깬 솔로몬>
솔로몬은 꾼에서 깨어났습니다.
15절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깨어 보니 꿈이더라!” 사실 이 말처럼 허망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약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꿈을 통한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 다윗 통치 이후 솔로몬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장막이 있었다. 하나는 기브온에 있는 원래의 장막이고(대하 1:3),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 위에 있는 임시 장막이다(삼하 6:17). 그런데 기브온 장막은 원래 모세의 장막과 같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여호와의 궤(법궤, 언약궤)가 없었다. 반면 시온 산 위의 장막 속에는 여호와의 궤가 안치되어 있었지만, 온전한 장막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즉 두 개의 장막이 불완전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다윗 시대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양쪽에서 이중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왜 언약궤와 장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영구한 여호와의 성전 건축 계획이 있었으므로, 무리하게 한쪽을 철회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
구약시대에 이러한 꿈은 외부의 변화 없이 인간 내면의 사고 작용과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계시 방편이었습니다(창 20:6, 삼상 28:6, 단 2:4). 따라서 이러한 꿈을 꾼 자는 꿈을 깬 이후에도 꿈의 내용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의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야곱(창 28:10-22), 요셉(창 37:5-11), 바로(창 41:1-7)도 이같은 꿈을 꾸었었습니다.
기브온 산당의 제사를 모두 마친 후 솔로몬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법궤가 있는 시온 산 제단에서 새로 번제와 감사의 제물(화목제)을 드렸습니다(레 3:1-17, 7:11-21, 28-34).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이 타락의 길로 가게 했던 단초와 지혜의 삶을 살게 된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의 단초와 승리의 삶의 비결, 이 두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둘은 그리 멀리 떨어진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을 기울이느냐, 아니면 인간의 꾀와 생각으로 인생을 계획하느냐 이 차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인간의 꾀와 수단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타락한 솔로몬’이 될 수도 있고, ‘지혜로운 솔로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지혜를 구한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므로,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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