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집 앞 외 4편
박미영
한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과 함께 갔던 밥집 앞 지나간다. 죽은 관엽, 귀퉁이 깨진 화분, 더께먼지 앉은 마른 풀들, 뽀얗다. 그 사람, 흰 뜨물처럼 흐릿하게 건너편 길 지나간다, 또렷한 기억 한 점 없지만 밥집 갈치찌개 들큰하던 무맛처럼, 짝 안 맞던 젓가락처럼, 형광빛 냅킨처럼 한때의 소란(騷亂) 느린 걸음으로 지나간다, 오래된 지병처럼 소소리바람 처마끝 해진 천막자락 버팅긴다,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갔을 뿐이에요, 갈잎 서걱거리면 곧 잊힐, 자갈 깔린 밥집 주차장 옆 대속(代贖)하는 죄책(罪責)인 양 죽은 관엽 다시 보며 지나간다, 오종종 모여 선 옅은 잔나무 그림자 밑을 지나간다, 문 닫힌 밥, 집, 앞, 그 사람보다 조금 더 뒤늦게 우리 지나간다, (2012년 『대구의 시』)
영화 찍듯 되살아나는,
삐그덕거리는 수레바퀴에 서리 서린다. 삐그덕 마른 풀들 온몸 뒤튼다. 삐그덕 죽은 꽃은 한숨을, 삐그덕 기어코 흙 밖에 뿌리를 내밀며 우는 집, 그예 우린 다 죽은 거니, 엄마욕망이 묻는다, 진짜 죽은 것 맞니, 아버지욕망이 묻는다, 숨 쉴 수가 없어 난 나가 버릴 테요 오빠욕망이 주먹으로 거울을 친다, 방사상으로 퍼진 거리에 예쁜 상품 언니욕망이 걸린다, 흑흑,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커다란 눈망울로 눈물 훔치며 난 시멘트도 덜 마른 지하실 바닥에 오도카니 앉아 사각틀 밖 지나는 수많은 발들 본다, 가죽구두 신은 발, 슬리퍼 신은 발, 뾰족구두 신은 발, 군화 신은 발, 터진 운동화 신은 발, 자전거 바퀴, 삼륜차 바퀴, 사륜구동 지프 바퀴, 다시 수레바퀴, 에, 서리 서린다, 커엇! 커엇! 커트! 리와인더 스톱! 가위 눌린 내 가 안간힘 다해 죽을 힘 다해 소리쳐도, 시치미 뚝 떼며, 삐그덕거리며, 엄마욕망이, 아버지욕망이, 오빠욕망이, 언니욕망이, 커억! 커억! 컥! 컥! 지하실, 시멘트도 덜 마른 바닥에 오도카니 앉은 날 기어코 뭉개고, 사각 수레바퀴 덜커덩 쿵 덜커덩 쿵 굴리며 지나간다, 컷! (2013년 『시와 표현』봄호)
불순한 절멸
죽은 말들을 나는 왜 밟고 내려가는가, 맨발바닥 닿는 말들의 잔털과 희번득 내 몸에서 문장을 읽는 눈알은 왜 이다지 부드러운가, 불온한 임검(臨檢)처럼 내 오랜 잠을 열어젖히는 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당신과 곧 다가올 계절과 그리고 온갖 악다구니를 나는 왜 말의 얼굴에서 읽어내는가, 가련한 이력의 새벽은 왜 끝없이 반복되는가, 발밑에 드러누운 말들은 일찍이 내 군집당해 있던 그 기억의 흔적인가, 말더듬이 혀 근육을 절개하던 그 차가운 가위, 그 배냇말, 옹알거렸던 양수, 따뜻한 탯줄 싹둑 잘라내던 그것, 아니 단지 한 점 씨앗으로 콩닥거렸을 내 작은 화단의 옅은 싹, 더없이 낮은 심박동, 그것, 그것들, 흰 건반 밟듯, 사뿐사뿐 눈 뜨고 죽은 말들의 층계를 나는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가, 선어처럼 푸드득 히히히힝거렸을 말들아, 너는 왜 이 죽음의 진경을 눈 앞에 펼쳐 놓는가,
엉덩이
삶에 더럽게 머릴 처박고 있을 때도 사실 나는 엉덩이가 부끄러웠다. 내 삶에 엉덩이가 있다니, 머리만 있은 줄 알은 내 삶에, 언제 엉덩이가 달라붙었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나는 거짓말을 짓기 시작했다. 엉덩인 내 삶의 아주 사소한 일부, 없어도 되는 맹장 같은 것, 처박은 머릴 절래절래 흔들며 끝없이 부인했다. 저거 내 게 아닌데요, 어느 날 갑자기 내 손등에 올라앉은 물사마귀, 나무전봇대 붙은 목버섯처럼, 더러운,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처럼, 하지만 삶은 엉덩이에 머릴 처박는 거짓말을 비웃듯, 비죽 비어나온 치질처럼 엉덩일 헤집고 빙긋 나를 향해 웃었다. 잇바디 환한 햇살마냥 해바라기마냥 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흥, 내 삶에 엉덩이라니! 엉덩인 내 몸에 없어요, 그러면서 나는 아침이면 밥그릇에 코 박고 숨가쁜 숟가락질에 바빴다. 숟가락 뒷면에 비친 동그란 엉덩일 슬쩍 곁눈질하면서,
삶에 더럽게 머릴 처박고 돌아오는 그 밤길은 힘들었다. 회식 날 술자리에서, 전봇대 밑 토해놓은 토사물에도, 그렁그렁 맺히는 눈가 눈물방울에도, 엉덩이는 제모습 비춰가며 계속 내 등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엉덩이라니! 엉덩일 내 삶에 한 번도 들여놓은 적이 없어! 나, 웩웩 외쳤다. 웩, 웩, 두 팔로 벽을 짚으며 외쳤다. 밥알, 내 머리에 달린 구멍에서 튀어져 나와 구멍 옆 볼에 웩! 웩! 창자 떨어져 나갈듯, 그렁그렁 떨어지는 눈물처럼, 내 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밥알 손가락 끝에 들고서 나는 서럽게 울었다. 밥아, 나는 너의 기생충, 아니, 나는 너의 숙주, 엉덩이야, 네가 내 삶이니? 그날 나는 어디 가서 더럽게 코 처박고 죽고 싶었다. 차가운 빗줄기 내 엉덩일 쳐대고, 머리로, 얼굴로, 코로 온갖 것들이 나를 밑으로, 밑으로 처박아대고,
반지하생활자의 수기
책이 빠져나간 책통 속 허전한 손가락을 넣는다 온기 빠져나간 매음굴 같다 아침에 나는 시든 꽃들 옆에서 기침을 했다 눈자위가 붉은 수레국화가 시든 그것처럼 컵에서 흔들렸다 주유차가 창을 흔들며 지나간다 부르르 몸을 떠는 유리, 호오 입김 내뿜는 티벳의 인중 까만 소녀처럼 새가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우짖어라 새여, 허전한 공중에 네 소리라도 집어넣어라 새야, 훠어이, 저기 누가 아버지의 손을 끌며 간다 60-2번지의 눈 먼 아버지 손을 잡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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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2003년 시집 『비열한 거리』상재
계간 『낯선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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