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오씨는 중국성도래설에 따른 성씨이다. 신라 진흥왕 때 중국에서 건너온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이 도시조(都始祖ㆍ元始祖)이다. 그의 후손 병부상서(兵部尙書ㆍ지금의 국방장관)를 지낸 오수권(吳守權)의 큰아들 오현보(吳賢輔)는 고려 때(고종5, 1218년) 거란이 침입하자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서 동생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과 함께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큰아들 오현보는 해주군(海州君), 차남 오현좌는 동복군(同福君), 삼남 오현필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봉군(封君) 지명에 따라 해주, 동복, 보성의 관향으로 각각 분적 됐다.
이 삼군(三君)의 자손들은 삼군의 묘가 실전되어 그들을 추모할 삼군영단(三君靈壇)인 '금양단(錦陽壇)'을 충남 공주시 신관산의 기슭에 설단하였다. 그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이 금양단에 매년 향사를 지낸다. 조상을 함께 추모하니 그들은 모두 한 뿌리임을 알 수 있다.
오현좌의 후손들은 동복을 본관으로 삼았다. 동복은 화순군 동복면의 지명이다. 오현좌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오영(吳寧 1151-1215년)은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오영을 기세조(起世祖ㆍ1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오영의 증손 오대승(吳大陞)은 고려 원종 때 시중(侍中ㆍ從一品) 벼슬을 지낸 후 전남 화순 동복으로 낙향하였다. 그의 차자 오광명(吳光明)이 무과에 급제하여 재신(宰臣ㆍ宰相ㆍ二品 이상의 벼슬)을 지냈다. 오광명의 큰아들 오인경(吳仁景)은 좌찬성(左贊成ㆍ議政部의 從一品)을 지내고 해남으로 이거해 왔다. 고광명은 재신공파(宰臣公派)의 파조가 되고, 오인경은 동복오씨의 해남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동복오씨 재신공파 28세 해송 오영대(海松 吳榮大ㆍ전 전남 교육감ㆍ86세) 선생은 고향 월강 마을 뒷산 자락에 3대조부터 7대조까지의 양위(兩位)를 천영(遷塋)하고, 그 자리에 가묘(家廟ㆍ집안의 祠堂)인 '숭효사(崇孝祠)'를 창건하여 그 선조들의 신주를 봉안(奉安)하였다.
오늘날은 숭조사상의 상실, 웃어른의 권위 실종, 조상을 우상화한 종교관, 씨족공동체 의식 해이(解弛) 등이 팽배하다. 그래서 요즘은 옛날과 달리 문사를 추진하기 매우 어렵다. 월강문중 종손 오태식(吳泰植 74세)씨는 집안의 세적을 설명하면서 "당숙(해송 선생)께서는 평소에 숭조효친을 강조해 왔고, 선영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였으며, 숭효사도 사재를 많이 털어 추진했다."고 귀띔해 준다.
이런 일은 돈만 가지고는 할 수 없다. 효심과 덕의(德義)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성인 효(孝)와 덕(德)의 실천이다. 그래서 숭효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 숭효사는 해남군 송지면 월강마을 뒷산 자락에 있다. 해남읍을 통해 '땅끝'을 가다보면 현산면 경계를 조금 지나 우측에 있는 마을이 월강(月江)이다. 이 마을을 미처 가지전에 우측 길을 따라 가면 '금전정(錦 전亭)’이라는 정자가 나오고, 거기서 약간 가면 숭효사가 나온다.
숭효사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깨끗하게 단장한 건물과 담장과 비석이 정결하고 신선해서 성스럽게 보인다. 주위의 산들이 낮고 단아하며 부드럽다. 그 뒤편 멀리 솟은 귀사귀봉들이 다정한 표정들이다. 뒤에는 동동산('둥글다'는 우리 말의 이름)이 받쳐주고, 좌우에는 청룡백호가 알맞은 높이로 감싸주고 있다. 밝고 평온해서 편안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앞이 확 트였다. 들판과 바다가 펼쳐져 있어 가슴이 시원스럽다. 옛날부터 가묘도 풍수에 의해서 그 터를 잡아 왔었다. 풍수에서 명당 길지는 그 땅을 필요로 하는 대상의 기능에 따라 달라진다. 사찰 터, 공장 터, 주택 터, 묘 터 등 각각 그에 상응한 땅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 터는 한 조상의 영혼들이 모여 영생을 누릴만한 땅이다. 양명하고 편안한 땅이다. 그 터가 양명해야 향화(香火ㆍ祭祠)가 자자손손 끊어지지 않는다 했다.
숭효사를 지키고 있는 산은 구암산(龜岩山)이다. 해남 대흥사를 품고 있는 두륜산에서 출맥한 주룡이 활발하게 행룡하다 용신을 크게 낮춰 서남쪽(坤方)으로 방향을 틀고 평강세(平岡勢)로 낙맥하여 평지세(平地勢)를 이루다가 구산천(九山川)과 바다를 낀 들판을 만나 행룡을 멈추고 솟은 산이다. 구암산은 거북이 형상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거북이의 형상은 금구음수형(金龜飮水形)이다. 거북이가 산에서 물가에 내려와 물을 마시는 형상을 말한다. 이런 형국은 그 앞에 연못, 호수, 바다, 논 등 물이 있어야 한다. 이곳도 거북이 머리 앞에 들판이 있다.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물 배출 집안은 명당이 있다
동복 吳씨 월강문중 선영: 金龜飮水形
예닐곱 살에 세상을 떠난 누나를 잊지 못해 80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미수(米壽)를 앞둔 동생이 고향 산천이 감싸준 길녘에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예쁜 정자를 지었다(2008.7.)
위에서 말했듯이 월강마을의 주산은 구암산이고, 이 산의 형국은 금구음수형이다. 거북과 관련된 명당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다. 성현, 큰 벼슬, 학자 등이 나오고 건강 장수한다. 혈은 거북의 등이나 머리 부분에 있다.
그런데 이 거북이의 형상은 물가에서 양쪽 앞발을 바짝 버티며 목을 길게 빼고 물을 마시는 형국이다. 목을 너무 길게 빼 머리가 청룡백호 밖으로 나가있다. 이런 머리에는 혈이 없게 된다. 이 거북이의 힘은 버티고 있는 앞다리에 모아진다. 이런 경우 혈은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다리에도 있게 된다.
이 거북이 등에는 해송 선생의 조부모 묘와 선친의 형제들 묘가 있다. 두륜산에서 달마산을 거쳐 '땅끝'으로 뻗은 간룡(幹龍)에서 출맥한 지룡(枝龍)이 살기(殺氣)를 털어내고 생기를 품고 내려온다. 이 생기가 융결된 곳이 거북의 등이다. 이 거북명당을 동복오씨 월강문중에서 차지했다. 조부 오병원(吳炳元) 공의 유택이 금구음수형의 명당 혈이다.
거북의 양쪽 앞다리가 청룡과 백호가 되어 혈을 감싸고 있다. 앞은 들과 바다가 펼쳐 있다. 이처럼 앞에 산이 없고 물이 있으면 '수조(水朝)'라고 한다. 이런 것을 물이 대신 해준다고 하여 '수이대지(水而代之)'라고 말한다. 혹자 이 혈의 앞이 안 좋다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수이대지를 모르고 한 소리다.
풍수에 조진명당(朝進明堂)이라는 것이 있다. 혈 앞의 명당이 바다나 큰 호수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매우 길한 것으로 여긴다. 이곳은 조진명당이었던 것이 너른 논들로 간척된 곳이다. 이 곳처럼 넓고 평평한 논에 물이 고여 있으면 창판수(蒼板水)라 하여 큰 부귀(富貴)가 나고, 그 부귀가 오래 간다고 한다.
풍수를 알고 믿는 사람들은 이 거북 명당이 해송 선생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고, 월강문중의 발복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선생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왔다. 당시 인사 관행상 초등교원 출신에게는 극히 어려웠던 광주시 교육장, 선례가 없던 광주여고 교장, 학무국장, 교육감 등을 지냈다. 그의 이런 여정은 마치 폭풍과 같았다. 당시 교육계에서 그를 '불세출(不世出) 인물'이라고 평한 것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미수(米壽ㆍ88세)를 바라보는 지금도 얼굴에 주름이 없고 홍안이다. 직접 차를 몰고 서울을 다닌다. 그만큼 건강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특출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에는 반드시 명당이 있기 마련이다. 구암산의 거북이가 물을 마시느라고 온힘을 모아 버티고 있는 앞발 목에 해당한 산자락에는 3대조부터 7대조까지 양위(兩位)의 묘가 있다. 바로 그 하단에는 해송 선생 자신의 수묘(壽墓ㆍ살아있을 때 잡아놓은 자기 묘)와 묘비가 장엄하게 단장돼 있다. "어쩐지 이곳이 평온하고 편안해서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다."고 한다. 수묘를 자신이 직접 소점(所占)한 것이다.
어느 누가 보나 평온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땅이 있다. 그런 곳은 풍수 요건이 잘 갖춰져 생기가 융취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다. 바로 그런 곳이 명당인 것이다. 명당들 중에는 풍수 문외한이 기감(氣感)을 통해 우연히 잡은 곳이 많다. 풍수공부를 많이 했다는 지관도 마음이 혼탁하면 기감을 느낄 수 없어 엉뚱한 상지(相地)를 하게 된다.
이 묘역의 뒤편 산자락, 구산천 들녘이 내려다보이고 숭효사로 가는 길목 언덕에 새로 지은 '금전정(錦전 亭)'이라는 예쁜 정자가 있다. 해송 선생이 네댓 살이고 윗누이 금전은 예닐곱 살 때, 동생이 강물에 떠가는 해파리를 건져달라고 졸랐고, 누나는 그걸 동생에게 가져다주려고 강둑을 내려가다 그만 강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게 됐다.
80년이 흐른 지금, 그 누나를 잊지 못해 그 강이 내려다보이는 길목 언덕에 예쁜 정자를 짓고 현판을 '금전정'이라 했다. 정자 마당에는 '누나를 그리며'라는 시비(詩碑)가 있다.
'꽃 필 적에 가신 님은 잎이 져도 안 오시네/ 눈 감으면 떠오르는 안타까운 그 모습이/ 어제가 오늘인 듯 이렇게도 밝히는데/ 월강마을 오는 길을 어찌 벌써 잊었을까/ 못 다한 남매의 정 굽이굽이 사무쳐서/ 오늘도 붉은 노을 구산천에 비치는데/ 한줄기 눈물인가 홀로 우는 산새 소리'
이렇듯 남매의 애틋한 사연과 애절한 사랑이 길손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불경에 '사려 깊은 생각 한번이 천년 묵은 업을 녹인다.'고 했다. 지난 80년의 세월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온 길고 슬픈 이별이 아니던가. 인생의 희로애락은 세월의 풍화 속에 녹아나지 않던가. 이젠 이 남매의 슬픈 이별도 '금전정'에 화신(化身)돼 관세음보살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미소가 빛난 햇빛 속에 피어나리라.
동복오씨 월강문중의 숭효사와 선영과 금전정. 이 성역을 둘러보면 "조상을 기리는 위선(爲先)은 자신의 생(生)에 값하는 도리다."라는 해송 선생의 소박한 말씀이 무심코 살아온 사람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들린다. 정통풍수지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