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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출판사가 그림책을 고르는 지향점
뭔가 특별한 것을 찾는다.
"보림은 워낙 까다로워서요, 쩝 " "보리무스 한 책이 하나 있는데, 검토해 보실래요? 이 책은 보림에서 출간 못하면 향후 몇 년간은 한국에서 보기 힘들겠네요." 에이전트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언제부터 인가 에이전트들은 보림다운 책을 일컬어 '보리무스'하다고 부른다. "보림은 이중적 이야. 두 얼굴을 하고 있다고!" 편집자들과 작가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보림이 내는 창작그림책과 외국 그림책이 상이 하다는 점을 꼬집어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보림 책에 대해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보림의 책에 어떤 특징이 있다고 계속 말해주고 있다 '까다롭다'는 말은 '보림이 책을 보는 눈이 있다' 라는 걸까? 두 얼굴? 좋다는 얘기인가? 보리무스 하다는 것은 과연 뭘 의미하는 걸까?
세계 걸작 그림책 '지크'가 생겨나기까지
보림의 외국 그림책에 대해 말하려면 1980년대 발간한 '위대한 탄생' 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위대한 탄생'은 100여권 가량 되는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묶은 것으로 레오 리오니, 하야시 아키코,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고미 타로, 헬메 하이네, 레이먼드 브릭스, 에릭 칼, 피터 스파이어, 야노쉬, 월리엄 스타이그 등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보림이 전집 출판사에서 단행본 출판사로 전환을 하고 우리 창작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무렵 아직 정식 계약이 안 되어있던 '위대한 탄생'도 저작권 계약을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책은 불과 10퍼센트 정도다. 한편 이 시리즈에 있던 책 가운데 지금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 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회사자료실에 있는 '위대한 탄생' 시리즈를 보다 보면 '와 이렇게 좋은 책도 있었네 이거 냈으면 대박이었겠다. '고 생각틀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보림은 왜그런 베스트셀러들을 놓쳤을까?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창작 그림책을 낼 계획을 세운 보림으로서는 우리의 정서에서 담아내기 힘든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만 엄선하기로 했던 것이다. 같은 작가의 작품들은 비교. 검토하여 가장 좋은 책을 추려내고 이론서에 실린 유명책들은 지금의 '세계 걸작 그림 책 지크' 속에 남아 있다. '지크' 시리즈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고 보니 보림이 외국 그림책을 시작한 것은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서도 왜 빨랐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외국 그림책을 시작한 다른 출판사들의 경우 출간 종수가 이미 100종을 훌쩍 넘겼지만 보림은 단지 53종의 외국 그림책을 출간했을 뿐이다. 보림이 다른 회사들에 비해 게으른 걸 까? 아니면 스피드 있게 일을 못하는 걸까? 사실 보림 이 다른 회사 들에 비해 게으르거나 느려서라기보다는 보림 나름의 외서에 대한 세 가지 기준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서로 담아내기 힘든 독특한 상상력의 작품
보림은 창작 그림책을 만드는 출판사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작가가 충분히 펴낼수 있는 정도의 외국 작품은 관심사 밖이다. 보림은 우리의 정서로 담아내기 힘든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에 초점을 두고, 파격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독특한 소재 , 발상의 전환 등 다분히 실험 적이고 때로는 도발적 이기까지 한 작품을 출간하기도 한다.
성(性)을 주제로 한 "엄마가 알을 낳았대 !"는 1996년에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 책을 출간하기 전 유아교육과 교수님, 유치원 원장님들에 게 리뷰를 부탁했었는데, '힘을 모으는 장면' 이 너무 적나라해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어머니들 역시 이 부분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기우일 뿐 어린이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이혼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따로 따로 행복하게"를 1999년에 출간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혼이란 문제를 어린이 그림책에서 직접 다룬 적이 없었는데, 그러한 '불미스런' 주제는 어린이책에서는 일종의 금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사회 실정을 고려하여 일정보다 많이 늦추어 출간되기도 했다 지금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주제이지만 말이다.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늑대 입장에서 뒤집어 본 기발하고도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점과 가치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완벽하게 풀어낸 패러디 그림책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화 속 괴물"의 경우 아주 재미있는 반응을 끌어내었다. 캐릭터의 눈 모양을 실제 사람의 눈 사진을 오려 붙인 일러스트레이션이 너무 충격적 이어서 무섭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끊임 없이 건드리는 신화와 괴물을 소재로 아주 독특한 그림 책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림으로 공포를 주는 것도 또다른 시각적 자극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작품들을 출간하다 보니 보림은 늘 한 발 앞서 나간다는 평을 받는다. 사실 반 발 정도면 좋을 텐데. 너무 앞서 나가 당장에는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보림의 책은 나온 지 2-3년 지나야 탄력을 받아 잘 팔린다는 징크스가 있다. 최근 한 전시회에서는 보림의 그림 책을 펼쳐보던 한 어머니가 "이런 그림 애들교육에 안좋아요!" 하면서 얼른 책을덮어버리고 가는 걸 보았다. 바로 "그림자"였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검은색 실루엣으로 처리된 이미지가 아직은 낯설다는 눈치였다. "그림자"는 그림책이긴 하나 대상 연령도 상당히 높아 일반 독자들보다 일러스트레이터나 출판 관계자들 평론가들이 더 좋아하는 책이다. 그림자 라는 익숙하지만 추상적인 자연 현상을 이토록 다양한 차원과 층위에서 심도있게 바라보게 하는 예술적인 그림책이 또 있을까? 징크스처럼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이 책의 진가를 알게 되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유명 저자의 베스트셀러에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는 작품의 완성도이다. 이름난 작가의 작품이라도 모든 작품이 좋다는 보장은 없다. 저자의 명성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면 작품 자체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도 있다. 보림은 가급적 저자의 명성에 연연하여 작품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한권 한권 비교, 검토하여 그 중 가장 낫다고 판단되는 책만 출간한다. 작가보다는 작품 자체에 중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작가는 으레 좋은 작품으로 가릴 수 있게 마련이다. 특히 보림의 '지크' 시리즈는 작가군에서나 작품 면에서나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이미 국내에 소개된 유명한 작가들보다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숨은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보림이 소개한 유수 작가들 가운데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지 못해 아쉬운 작가가 있다면. "구두장이 꼬마 요정"을 그린 카트런 브란트일 것이다. 과감한 생략과 강조, 강렬하고 생생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카트린 브란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활동한 작가이다. 작품 대부분이 절판이 어서 아쉽기 그지 없다. 2003년에 소개한 작품 중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하면 딜런 부부의 작품 두 편을 들 수 있다. "북쪽 나라 자장가" 에서는 자연을 너무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의인화하였고 "모기는 왜 귓가에서 앵앵거릴까?" 에서는 낮과 밤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 대를 한 화면에 조화롭게 배치하여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글의 형식을 그림의 형식으로 세련되게 구현했다. '같은 작가가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두 편 모두 독특한 그림책 세계를 보여 준다.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딜런 부부의 공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들인 것이다.
올해는 사라 파넬리의 작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마술연필'이란 전시회를 통해 국내에 조금은 알려진 작가로서. 아주 세련된 콜라주 기법을 사용한다. 신화 속 괴물을 독창적인 캐릭터로 형상화한 "신화속 괴물"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을 가을쯤 선보일 예정이다. 잘 팔리는 책이 꼭 좋은 책이라는 법이 없고 좋은 책이 반드시 잘 팔린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사실 보림의 외국 그림책 중에는 판매도가 낮은 책도 꽤 있다.
출판사는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 보림 역시 외국 그림 책을 기획할 때 늘 난제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보림은 '과연 이 책이 잘 팔릴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어김없이
책을 낸다. "연기 자욱한 밤", "론포포"가 그렇다. 아직은 우리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일까? 상업성에서 다소 벗어나 자기 만의 세계를 꾸려가기 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소 판매가 부진할지라도 우리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자극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과감히 소개하고자 한다.
신간이냐 아니냐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최신 작품이냐 아니냐는 큰 의미가 없다. 새로운 것이 반드시 좋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따끈따끈한 신간보다는 묻혀 있는 숨겨진 옥석을 찾는 일을 즐긴다. 그러다 보니 저작권 문의하는 책들이 거의 절판일 때가 많다. 저작권자를 찾아 헤멜 때 도 많고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기도 한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 있어 에이전시에 확인해 보았더니 그 책을 출간한 해외 출판사가 부도나서 찾기가 힘들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번은 스웨덴의 한 출판사에 저작권 문의를 했더니 우리가 문의한 책은 절판되어 샘플을 보내줄 수 없다는 회신과 함께, 어떻게 그 책을 찾았냐며 오히려 되물어오기도 했다.
"북쪽 나라 자장가"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이 책은 199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미 절판된 지 오래였다. 결국 아는 선생님 서가에서 빌리기는 했는데 곱게 보고 돌려드려야 할 상황이었고, 이 귀한 샘플 한 권을 가지고 번역 의뢰며 색 교정까지 다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 저작권사에서 필름은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필름이 주문을 넣은 지 1년 만에 온 것이다. 겨울 책이라 여름에 낼 수는 없겠고 결국 한 해 묵혀서 나오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간이 되긴 했는데. 색 교정 하라고 보냈던 하나 있는 샘플이 뜯어져서 돌아오고 말았다. 아뿔싸!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미국에 사는 친구를 통해 헌책 방을 뒤진 끝에 겨우 한 권 구해 다행히 선생님께는 제대로 된 원본을 돌려드릴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책이 절판인 경우가 많아서 끝까지 추적해서 출판하는 경우도 있고. 아쉬움을 남기고 출간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떨 때는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든 방법으로만 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보림을 끌어가는 힘 인 줄 알기에 툴툴 털고 일어선다.
깐깐한 기준만큼이나 열심히 찾고 뒤진다.
그러면 이 깐깐한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외국 그림책들에 대한 정보는 과연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평소에는 인터넷 사이트, 잡지, 에이전시를 이용 해 책을 검색한다. 한 해에 몇 번 있는 국제 도서전에서 찾기도 하지만 도서전에서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다. 도서전은 신간과 앞으로 나을 타이틀들을 선보이는 자리여서 앞으로의 흐름을 점 쳐보거나 신인 작가들을 찾아보기에 오히려 적당하다. 도서전 행사장보다는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보림은 국제 도서전에 갈 때면 전시장 일정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 머무르는 일정을 꼭 잡는다. 누구나 가는 프낙같은 대형서점 이외에 작은 어린이책 전문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는 것도 좋다. 특히 파리의 경우 각 구마다 어린이 도서관이 잘 구성되어 있어 꼭 가볼 만하다. 현지에 살고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만히 앉아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 우리는 작가들의 작업실에 가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가면 작가들의 귀하디 귀한 서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서가에 눈독을 들이다 보면 좋은 책들과 자연스럽 게 만날 수 있다. 한 예로 "북쪽 나라 자장가"의 경우도 어느 작가 선생님의 서가에서 찾아낸 귀한 자료이다. 전문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일은 편집자들에게 정말 값진 기회라고 생각한다. 보림은 전문가로 구성된 편집위원이 따로 없다. 편집자의 눈으로 판단하고 선택한 후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에서 어린이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네트워킹을 하기도 한다. 현지의 발 빠른 정보도 정보지만 현지 도서관을 이용해 구하기 힘든 책들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림다운 외국 그림책 기획 꾸준히 할 터
담당자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한권한 권 까다롭게 책을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출판사처럼 수십 권씩 출간 대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보림에는 없다. 때로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 틈에 우리만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이 바빠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의 자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물론 보림 이 편견을 가지고 책을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판사가 지니는 나름의 기준이 없이는 그 출판사만의 색깔을 갖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색깔틀이 다양하게 존재할 때 그만큼 우리 독자들이 다양한 책과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선미 보림출판사 편집부 과장] 출처 : 일러스트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