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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숨결 2
물에 잠긴 북녘의 상현달, 수월선사
연암산 천장사(2)
천장사 법당에는 자비의 화신(化身)인 관세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불꽃무늬로 복잡하게 꾸며진 보관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고, 손에는 연꽃봉우리 가지를 쥐고 있으며, 긴 얼굴에 반개한 눈, 단아한 입, 뚜렷한 삼도, 화려한 영락장식, 팔과 어깨에 늘어져 있는 천의 등으로 장엄하여 조각된 모습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 좌상의 오른쪽 벽에 경허선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경허진영은 몇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사의 모습은 아니며, 가사와 장삼도 낯설다. 거기다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다. 경허선사의 행장을 다룬 문헌에는 그가 9척 장신이었다고 적혀 있는데, 9척이면 3m에 해당한다. 이는 아무래도 과장인 것 같고, 6척은 족히 됨직하다. 6척이면 대략 2m인데, 그만하면 법당이 장엄하므로 가끔 단청불사를 할 필요가 있었을 법하다. 오해의 여지가 없지않은 선사의 단청불사에 얽힌 행각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므로 나중에 따로 짚어 보겠다. 벽에 경허선사가 천장암에 머무실 때 지었다는 선시가 한 폭 걸려 있었다.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山自靑水自綠
淸風拂白雲歸
盡日遊盤石上
我捨世更何希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니 흰 구름 돌아가네
종일토록 바위 위에 앉아서 노나
내 세상을 버렸거니 다시 무었을 바랄 것인가
나는 다시 밖으로 나온 뒤 천천히 인법당을 살펴보았다. 건물은 “ㄷ”자 형으로써, 축대를 2단으로 높게 조성한 뒤 자연석 덤벙 주초석 위에다 원주를 세운 정면 6칸 측면 2칸의 목조 와가였다. 겹처마 팔짝 지붕으로 된 법당의 기둥에는 모두 합해서 9쪽의 주련들이 내걸려 있었다. 오른쪽부터 살펴나가던 나의 시선이 세 번째 주련에 가서 머물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무슨 뜻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몸의 육근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온다.’ 는 말이다. 방광을 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인데, 나는 그 구절을 새기다가 나름대로 수월선사라는 베일에 쌓여있는 수수께끼 인물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코드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수월의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수월당 음관선사는 1855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전 씨인데 온전 전(全)을 사용했는지 밭 전(田)자 전 씨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실부모한 다음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는 그의 성품은 단순하고 맑았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기 몸처럼 여겨 비록 모기나 빈대 같은 벌레라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죽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수월이 동진출가했다는 설도 있으나 발심하여 불문에 귀의할 생각을 한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출가 본사로 천장암을 택한 것은 단지 그 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천장암에서 늦깎이로 행자생활을 시작했었다. 나무를 해오는 것은 물론 밥까지 지어야 하는 행자생활은 머슴살이 보다 나을 것이 없는 고단한 것이었지만 그는 일체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나갔다.
당시 천장암의 주지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스님이었다. 따라서 수월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깎아 준 은사는 태허스님이다. 나중에 경허선사가 이곳에서 보임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월이 경허의 법통을 잇게 되는 인연의 고리로 작용한 것이었다. 수월의 뒤를 이어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을 날리는 혜월(慧月)이 찾아와서 밭일을 하며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월, 혜월과 더불어 경허선사의 세 달로 꼽히는 월면당 만공스님은 14세 소년의 몸으로, 세 달 중 가장 늦게 천장암 식구가 된 것이었다.
이 무렵 수월은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천수경을 외웠다. 천수경의 원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이라는 긴 이름인데, 뜻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와 공덕은 광대무변하시고 원만 구족하여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한 큰 힘으로 일체 중생의 고뇌를 건져주시는 다라니라는 것이다. 천수(千手)는 자비의 관대함을, 천안(天眼)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내며 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한다는 염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말하며 이 긴 이름을 줄여 『천수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수월이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게 되었다. 급히 수월을 밀치자 그 직후 공이는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때 수월의 순전한 수행력을 목격한 태허스님은 바로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리는 수계식을 거행한 다음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수월은 스승 경허의 가름침을 받으며 종일 일하면서 죽기 살기로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그는 자고 일어나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고 빨래를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도 틈이 생기면 짚신을 삼아 남의 발에 신겨 주었다. 그는 기꺼이 낮게 낮게 몸을 낮추었다. 나무를 하던 빨래를 하던 짚신을 삼든 그의 입에서는 천수경을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함께 동문수학을 했던 만공선사는 나중에 “수월 형님은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게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 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걸어주었다. 그런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구월심,오매에도 불망하여 외고 다니는 천수경은 그에게 있어서 바로 화두요 공안이었던 것이다.
수월은 1887년 겨울 어느 날 골방으로 들어가 먹는 것,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천수경을 외우는 정진을 감항하였다. 이레째 되는 밤, 사하촌 사람들이 절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절에서 불기둥이 솟아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자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불을 끄러 달려 온 것이었다. 절에 도착하여 수월스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방광을 한 그는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다.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불망염지(不忘念智)와 잠이 없어진 것, 병을 고칠 수 있는 힘 등을 얻은 것이 그것이다. 천수경을 외움으로써 그는 천수관음으로부터 손 하나와 지혜의 눈 하나를 얻는 불은을 입은 것이었다.
이때 경허선사가 제자인 음관스님이 자나 깨나 큰 소리로 천수경을 외더니 마침내 깨우쳐 부처를 이룬 것으로 여겨 매우 기뻐한 다음 천수경에 나오는 수월관음의 이름을 따 수월이란 법호를 내려준다. 밝은 달이 바다 위를 환하게 비추었을 때 한 연꽃이 바다 위에 떠 있고 그 연꽃 위에 화신하여 나타나서 계신 관세음보살의 32가지 모습 중 하나가 수월관음이다. 수월관음이 되어 방광을 한 것을 표현한 문구가 주련의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몸의 육근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천장암이 수월선사가 득도한 관음도량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비밀의 열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나는 수월관음 - 육문상방자금광 -수월선사로 연결되는 방광코드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보임을 위해 천장암을 떠난 수월은 금강산 유점사 → 마하연사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 →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장곡사(長谷寺) → 오대산 상원사를 거쳐 → 묘향산 중비로암에 들어가 3년 동안 머물렀다. 이 무렵 스승인 경허선사가 행각 중 자쥐를 감추었다는 소식을 들은 수월스님은 1910년경 강계군에 있는 자북사(子北寺)에 머물며 스승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마침내 수월은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춘 채 훈장 노릇을 하던 스승 경허를 찾게 된다. 그러나 경허는 방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닫은 다음 말했다.
“나는 스님이 찾는 사람이 아니오”
매정하게 말하며 끝내 만나주지 않는 스승에게, 수월은 짚신 몇 켤레를 정성껏 삼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스승의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수월→묵언→도천으로 이어지는 법맥에서 수월하 손증손상좌가 되는 명선스님에 따르면 “수월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스님을 찾아와서 먼발치서 지켜보다가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그 사실을 당시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정진하던 만공에게 알려준 뒤 두만강을 넘어 간도(間島)로 들어갔다.”고 한다. 수월이 은사 주위를 맴돈 기간은 대략 2년간이며, 이때 갑산에서 멀지않은 회령군 팔을면 백천사, 경원군 만월산 월명사,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 등지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간도으로 간 수월은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회막동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의 실력을 발휘하여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그 일을 해서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고는 하였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며 보살행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었다.
명선스님의 증언이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어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그들을 기다렸다가 밥 한술을 먹이고, 짚신을 주워 보내는 식으로 생의 마지막 수년을 보내신 것입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이런 식으로 조용히 헌신을 한 것이었다.
수월은 1915년 회막동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그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채 한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을 했다. 그러다가 1921년 봄 수월은 왕청현 나자구(羅在溝)에 들어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늘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이나 날짐승과 어울려 놀거나, 때때로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
이때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 등이 스승을 찾아와 한철을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었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 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을, 그들이 나중에 증언하였다.
1928년 하안거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수월은 절 뒤편 송림산에 올라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잘 접어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세상을 떠났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그가 원적에 든 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던 수월은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저 단절돼 있었기 때문에 전설이 되어 잊혀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의 숨결이 자취도 없이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월은 수덕 문중 사람이다. 1989년 당시 문중의 최고 어른이었던 원담당 진성대종사와 그의 상좌인 설정스님이 수월의 흔적을 찾아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수월 선사가 살던 옛 간도에서 80~90살 든 노인들이 수월을 ‘자기는 없고 중생만을 위했던 자비의 화현보살’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진성대종사도 이제는 고인이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설정스님이 수덕 문중을 관장하는 방장의 자리에 올랐다. 설정스님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일광산과 송림산에서 수월을 친견했던 노인들이 있어서 많은 증언을 채록할 수 있었단다. 그 가운데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 성을 가진 노인이 있다. 방씨의 증언을 설정스님이 전한다.
"수월스님은 매일 아침 공양 뒤에 산에서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래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가셨답니다.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은 곳이지요. 수월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시어 아사를 면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수월스님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00리 산길을 단숨에 다녀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는 거에요. 스님이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았기 때문에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는 말도 들었어요."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은 소년의 부모에게 찾아와 “이대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내 곁에 두라”고 말해 단칸 흑집에서 일주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수월선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방씨 노인은 “그때 보니 수월 도인 스님은 일절 눕지 않았고, 아예 잠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운데도 나가지 못하게 하던 수월이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고 말해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방시 노인은 "수월스님께서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수북이 쌓인 하얀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는 증언도 했었단다. 은사인 진성대종사를 모시고 현지를 다녀온 설정스님 이외에도, 김진태 전 청주지검장이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에 대한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펴낸 바 있고, 명선스님이 『수월평전』을 출간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런 책들을 통해 어느 정도 수월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 주며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 땅의 많은 민초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던 자비의 관세음보살이며, 이름 그대로 물속의 달처럼 흔적 없이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성자였다.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으며, 글과는 담을 쌓았던 까막눈 선사였지만, 일상의 노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어난 수행력과 함께 때때로 내툰 방광불사(放光佛事)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불교사의 전설적인 선지식이다. 주련의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일곱 자을 다시한번 나직이 외워본다. ------(계속)
경허 수월 혜월 만공
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것이 경허진영이다.
첫댓글 무주상보시를 행하셨던 수월선사님의 가피가 저희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_()_ 해월스님,잘 읽었습니다.
눈밝은 선지식을 만나는 인연 어떤 복일까요?
해월스님과 함께 성지순례 동참하신 법우님들 부럽습니다.
천장사를 그리며 고승열전 다시 읽는 기쁜 마음 내려놓고 갑니다.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실 해월스님.......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언감생심 금광불괴를 이루는 것을 바랄 수는 없고, 자옥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머슴 출신 수월당 음관선사의 짚신과 주먹밥 보시가 암울했던 일제시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힌 한줄기 촛불같습니다. 한국에 있다면 해월스님과 같이 하는 성지순례에 꼭 동참하고 싶은데, 이렇게 글로 같이 하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이주해간 곤고한 실향민들에게 허기를 달래줄 주먹밥과 짚신을 나누워 주는 무주상보시를 베프신 수월선사,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