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理實見分 第五 (여리실견분 제오)
제5분, 바른 도리를 실답게 봄
여기서도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일으켰으며 그 마음을 어찌 간직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까?’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의 제명 ‘여리실견(如理實見)’은 진리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어야 법계의 실상을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는 금강경 내면에 담긴 진실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함을 이른 말로, 언구에 집착하지 말고 부처가 설하는 근본을 알아 마음속의 참 진리를 찾아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 온갖 것에서 외형은 외형 그대로만 보고, 또 외형이 다인 양 보지도 알지도 말고, 내면의 진실을 찾아 그 실체를 발견하여 깨달음으로 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사상을 버려 그릇된 마음을 다스리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로 보리심을 지키라 하셨는데, 여기 5분에서는 신상(身相)에 집착을 말라고 이르십니다.
여래를 신상으로 보려하면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이르시면서 겉으로 나타난 외형은 부처님의 참된 상이라 할 수 없다 하십니다. 이는 대 우주의 진리, 법계의 실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며 어찌 깨달을 것인가를 일러 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모든 형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절대로 형상에 집착을 말라고 설하셨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가히 신상으로써 여래를 보려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신상으로써 여래를 보려하지 않사옵니다. 어찌한 연고냐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신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은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佛告須菩提.
(불고수보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則)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 견여래)
“무릇 있는바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이 보이면(깨달으면)
곧 여래가 보일 것이니라.”
ㅇ 신상(身相)하면, 형체의 몸을 이르는 말로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법신(法身)하면 부처의 육신이 아닌 부처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진리를 일컫는 것으로 실제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사상에 입각해 불상을 조성해 모시게 됩니다.
불경을 새기다 보면 부처님 칭호(稱號)로 석가(釋迦),세존(世尊),여래(如來),불(佛) 등 다양한데 ‘석가’와 ‘세존’은 색신(色身·肉身)의 부처를, ‘여래’나 ‘불’은 법신의 부처를 호칭(呼稱)한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을 부를 때는 세존이라 했고, 부처의 말씀을 옮길 때는 ‘여래께서 설하길’ 혹은 ‘불이 설하길’이라 해, 그 말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세존이 설했다’했는데 이는 부처가 그냥 하신 말씀이라는 의미를 드러낸 것입니다.
석가는 스스로 신앙의 대상이 되길 거부했으나, 후대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동감하여 흠모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숭배하게 됩니다. 그래 자연 신앙성을 띠게 되고 신앙의 대상을 가시적으로 모시길 희망해 불상을 제작해 모시게 됩니다.
수보리의 질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으면 그 마음을 어떻게 간직할 수 있습니까?’에 대하여 3분에서는 상을 버리라 설하시고, 4분에서는 모든 보시와 행위가 육경육식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론적인 대답으로 부처를 형상으로 보지 않아야 하며, 눈에 보이는 상이 실로 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참된 모습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추측하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에 집착하면 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여 여래는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고 일러주심은 곧,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적인 외형이나 형상에 집착하면 이는 진실을 외면한 채 허망(虛妄)을 쫓는 것으로 참된 마음을 볼 수가 없음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불교가 상 중심으로 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는 듯한 부분으로 불상에 집착하고 대가람 건설 등, 외형 치장에 매달리며 허망을 좇고 있는 이들을 타이르는 느낌입니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상상의 산물을 32상을 모델로 조성해 모셨을 뿐입니다. 고로 법당에 모신 부처님은 우리가 마음을 모으고 닦는 수행에 필요는 하지만 불상에 지나친 집착은 불교를 왜곡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부처에 대한 집착이나 허망을 좇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나 봅니다.
1,200여 년 전 조주스님도 걱정이 되시었는지 그런 대중의 심기를 일전하기 위해 말씀하시길
泥佛不渡水 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
(니불부도수 금불부도로 목불부도화.)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며,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구덩이를 지나지 못한다.” 하시며
“참된 부처는 각자의 내면속에 있으니 보리나 열반 그리고 진여니 불성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몸을 감싸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니 이 역시 번뇌라고 이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참으로 당연한 말씀이신데 중생이 어리석어 참 진리를 보지 못하여 미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의 부처야말로 진짜 부처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중생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가슴 그 속, 마음속에서 진짜 부처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 일이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