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부락 나주김씨 무안파
<진례의 나주김씨(羅州金氏)무안파>
진례에 사는 나주김씨 무안파는 다음과 같다.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신호 (금산) | 용연 | 인구 | 우경 | 정형 | 진호 (기동) | 용종 | 원구 | 우홍 | 남석 남진 |
명량 | 우현 | 대형 | 우창 | 세훈 |
덕량 | 우관 | 지형 은형 | 우남 | 보성 |
우국 | 민형 | 우종 | 도언 민성 |
용균 | 경구 | 형남 | 윤형 | 윤구 | 우택 | 승협 |
형석 | 문형 | 우량 | 석현 |
우진 |
| 우준 | 형석 형진 |
형구 | 우만 | 한영 | 우련 | 창현 |
화구 | 우복 |
| 용욱 | 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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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주 | 태민 | 봉구 | 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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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 | 광구 | 우성 | 원형 | 태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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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조 | 민형 근형 | 경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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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구 | 우승 |
우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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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구 | 우문 | 기형 | 복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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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 | 채형 | 성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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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근 | 재형 | 금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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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열 | 원구 | 우섭 | 태훈 | 권욱 | 창량 |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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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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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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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 | 맹구 | 우일 | 선형 | 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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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복 | 봉구 | 우표 |
| 용조 | 동구 | 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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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 | 우중 |
| 광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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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구 | 승준 |
| 만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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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 |
| 귀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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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구 | 준우 |
| 치현 방우동 | 용조 | 진량 | 우필 | 정형 봉기 |
재현 (금산) | 용기 | 윤량 | 우풍 | 훈형 두형 | 병량 | 선득 | 대현 |
병만 | 동형 찬형 | 인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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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섭 |
| 삼득 | 상현 |
옥량 | 병록 | 준성 | 봉량 | 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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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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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에서 진례로 입향>
진례는 원래 무안에 속한 면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1914년 행정 개편을 하면서 함평군 학교면에 속하게 되었다.
우리 성씨는 조선 초기에 무안 대사동(지금의 성동리)으로 들어와 무안읍, 사창, 차뫼, 용뫼, 엄다면 신계리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금산으로 들어온 우리 집안도 무안읍에서 살았으나 1번 국도인 호남선이 개설되면서 집 뒤로 그 도로가 지나갔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집 뒤로 도로가 지나가면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주김씨 32세 신호(1875-1940) 선조께서 처음 금송리(금산) 525번지로 이사하였고 그의 생부 석연(1845-1930) 선조도 금산 535번지로 오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진례의 입향은 1915년쯤으로 생각된다.
신호 할아버지는 무안 상동 광산김씨 할머니 사이에 6형제(용연, 용균, 용화, 용열, 용진, 용복)를 두셨고 그 자손들이 금산에 함께 살았으며 번창하였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하면서 도시로 흩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동의 우홍가는 32세 진호 선조께서 무안 다산에서 생활하다 진례의 넓은 들을 보고 월호리 122번지(기동)으로 이거 하였고, 광산김씨 할머니 사이에 4형제(용종, 용욱, 권욱, 용조)를 두었다. 4형제가 합심하여 집안을 일으켰으며 그 후손들이 기동 마을을 중심으로 함께 살다 지금은 여러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외에 방우동의 우필가, 배야의 우종가가 살고 있었으나 어떤 연유로 진례에 왔는지 기록이 없고 족보에서 묘지의 이동을 조사해보면 거의 동시대에 무안에서 진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진례에서 활동은 다른 성씨들과 마찬가지로 발전하는 조국에 헌신하면서 교수와 중등, 초등교장들이 나왔고, 금융계에서는 지점장급이 있고, 경찰계에는 여러명이 활동한다. 법원의 과장급과 행정부에는 5급이상의 공무원이 있으며 다른 가정과 비슷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주김씨(羅州金氏) 무안파(務安派)>
나주김씨 무안파는 나주김씨 19세 우운(祐雲) 선조로부터 시작된다. 선조는 능성현령(綾城縣令)을 하고 있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이자 원로 대신인 김종서를 살해 제거한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우운은 부모님 계시는 곳으로도 못가고 나주 거평(지금의 문평)으로 수양대군 무리들을 피하여 피신하였다. 그 이유는 숙부(叔父) 증이 김종서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거평에는 금성나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며느리로 금성나씨 할머니를 얻으셨고, 그 후 손자인 수남(粹南, 承仕郞敎授贈通訓濟用監正) 선조가 무안 대사동(성동리)으로 옮기셨는데 할머니가 면성정씨(綿城丁氏)인 것으로 보아 처가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남(粹南) 선조가 무안에 와서 적(適), 원(遠), 형(逈), 순(巡), 선(選) 5형제를 두었으며 적(適) 선조는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을 당하여 영암 지역에 처음 들어온 왜적을 물리치신 공으로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이 되었고 광주 목사를 하였다. 그의 장남 충수(忠秀)는 정유재란 때 영산강 전투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인 금성나씨와 함께 돌아가셨다. 두 아들 천성(天成), 만성(晩成)은 포로로 잡혀가다 충남 공주에서 탈출하여 정착하게 되었으며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어도 고향이 무안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무안김씨로 살다 우연한 기회에 나주김씨 대동보를 하기 위해 공주에 갔던 사람들을 만나 집안의 가승을 보임으로 충신의 후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후손들이 공주, 보령 등 충남지방에 살고 있다.
충수 할아버지는 선무원종(宣武願從) 1등 공신에 녹훈되었고 할머니 나씨(대사헌 송재 나세찬의 손녀)가 남편을 죽이려는 칼에 맞아 순직함에 부부가 한날한시에 순직하였다.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1리에 정조 22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선조의 공적비는 사포에 있었는데 일제가 파손하려 하니 몰래 사창으로 옮겨 숨겨 놓았다가 해방 후에 사창 우산사에 세워 놓았다. 원형대로 복원하려고 하고 있다.
원(遠) 선조는 성균직강(成均直講)을 하였고 그의 3남 예수(禮秀)는 임진왜란 시 의병을 일으켜 무주 금산에서 공을 세웠고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매형인 최경회(崔慶會) 경상우병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내려가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 투신하였고, 4남 지수(智秀)는 선전관으로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잘 모신 공으로 선무원종 2등 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은 엄다면 신계리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형(逈) 선조의 자손들은 충남 서천을 중심으로 충남지방에 살고 있으며 순(巡) 선조의 자손들은 군위로 이거하여 군위와 의성에 살고 있으며 선(鐥) 선조의 자손들은 남원에 살고 일부는 무안 함평에도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안 함평에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기술한 것은 족보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인구의 대이동이 있었고 사회가 산업화하면서 직장을 찾아 흩어져 지금은 세거지가 없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초기 무안파는 자손이 무척 번성하였고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연원>
나주김씨는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는 신라 계림(鷄林) 김씨로 처음 왕에는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味鄒)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김씨 38번째 왕으로 경순왕이 신라 56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국력이 다하여 더이상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 고려 왕건에게 양국(讓國)하였다. 왕은 일(鎰), 황(湟), 명종(鳴鐘),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추(錘), 덕지(德摯)를 낳아 9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왕이 왕건에 양국함에 태자 일은 금강산에 들어갔다. 둘째 황은 평장사의 벼슬을 받지 않고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하여 범공(梵空)이라는 중이 되었다. 범공은 중이 되기 전에 운발(雲發)과 우발(雨發) 두 아들을 두었다. 그중 장남인 운발(雲發)이 나주군(羅州君)으로 봉작이 되고 벼슬이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래서 자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며 운발(雲發) 선조가 나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책임작성자> |
| 이름 : 김우현(金禹鉉) |
본관 : 나주김씨 35세손 무안파 |
힉력 : 남교 11회, 학중 16회, 학고 15회 공주사범대학 |
경력 : 광주 중등교장 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