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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랑스런대한민국 힘차게 뻗어가라 블러그
맥국 요새 삼악산
황 장 진
“옛날 신북 발산지역에다 궁궐을 짓고 태평성대를 누리던 부족국가인 맥국(貊國)이 언젠가 적의 침공을 받아 패하자 이곳 삼악산으로 옮겨와 임시 궁궐을 짓고 산성도 쌓아 적과 대치했습니다. 적국은 산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맹렬히 공격을 해 봤으나 워낙 산세가 험준하고 요소요소에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해 놓고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면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응전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공격할 때마다 많은 손실을 본거지요. 힘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위장전술을 쓰기로 하고 저기 보이는 저 건너 바위산에다 군사들의 옷을 빨아 널었답니다. 싸울 준비가 안 되었다고 위장을 한 거지요. 그래서 저 바위산을 옷 바위(衣岩)라 부릅니다.”
난곡께서 열변을 토한다.
옆에 있던 자연께서 잇달아 이야기를 잇는다.
“그리고, 말골 산등성이와 계곡에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수백 개를 세우고 안장이 없는 말들을 한 곳에 모아놓아서 이 산위에서 맥군이 내려다보면 마치 공격의사가 없는 것으로 위장했습니다. 강촌역 뒤편에 있는 칼봉에서는 늙고 병든 군사들로 하여금 군사조련을 가장한 칼싸움을 하도록 해서 맥군을 안심시켰답니다. 그리고 밤을 이용해 맥군 대궐의 서쪽 골짜기, 지금은 할미문이라 부르는 서문 앞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놓고 공격군을 대궐부문 어구인 허궁다리로 이동시켜서 구름다리를 놓아 북문새인 북문입구까지 접근시켰습니다. 미리 정해놓은 공격시간에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북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흥국사 골짜기의 맥군 방어군을 무찔렀습니다.
서문 앞에 매복하고 있던 복병들도 북문 군사들과 때를 같이하여 항아장수(박물장수) 할머니를 앞세웠답니다. 지금의 할미문에 이르러 왕비가 전부터 은밀히 부탁한 패물을 구해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패물 꾸러미를 보이며 문지기를 속여 문을 열게 한 후 일제히 쳐들어갔습니다. 마음을 놓고 있던 맥군은 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대패한 겁니다. 나라의 재건을 꿈꾸던 맥군은 적의 위장전술에 넘어가 하루아참에 패망하고 만 것이지요.”
삼악산성 아래 마을은 맥국의 군사들이 적의 위장전술에 말려들어 패한 곳이라 하여 아직도 배일골이라 한다.
“자, 또 올라갑시다.” 땀 좀 내보자고 돌계단을 리듬 맞추어 올랐더니 안경알에 땀방울이 제집 화장실바닥인 줄 알고 번진다.
상원사(上院사) 뜰 앞 샘물 한 쪽박을 들이켰더니 단 뱃속이 시원해진다. 상원사는 조선조 고종 갑술년(1874)에 풍계(豊溪)란 분이 중수했다고 한다. 호수님을 따라 대웅전에 들어 예를 표하고 나오니 모두 삥 둘러앉아 있다. 참외 과자 안주삼아 소주잔이 춤을 춘다. 산에 오늘 때 술을 마시면 걷기 힘들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사정사정해서 3분의 1잔씩 마신다.
목에 건 수건이 축축하다. 소산께서 샘물에 적신 수건을 주려고 할 때 넙죽 받을 걸 괜히 사양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낯이 익은 등산객의 우렁찬 인사에 기우뚱한 앞산이 무너질까 살핀다. 이렇게 늑장부리다가는 산을 넘자면 어두워지겠다.
앞장서서 돌아가는 길로 오른다. 바위투성이 깔딱고개를 피하기 위해서다. 잠시 발품을 팔았더니 넓은 길이 나타났다. 뽕나무와 무궁화, 축대가 있는 걸 보니 필시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터전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야! 좋다. 야유회를 했으면 참 좋겠다.”
핑계 없어 못 쉬는 데 또 둘러않는다. 강강술래를 추던 선조들의 피를 물려받아서일까. 짬난 나면 삥 둘러앉는다. 난곡께서 걸쭉한 육담을 시작한다. 옛날 옛적 저 아래 스님과 공양보살과의 가상야화다. 스님들한테 회초리를 맞을 일이다. 속는 줄 알면서도 모두 허허댄다. 도중에 포기할까봐 걱정되던 소산은 머루넝쿨 주위를 다람쥐 돌 듯 들락댄다. 훗날 머루주 맛을 볼 수 있을까. 또 먹자, 마시자 판. 많이도 가져왔다. 배낭들이 홀쭉해진다.
이번에는 호수께서 토하는 석파령(席破嶺) 전설에 귀가 쏠린다.
“이 산 너무 북서쪽에는 옛날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석파령(340m)이라는 고개가 있었습니다. 신작로가 놓이기 전까지는 소리개마을 앞에서 나룻배를 타고 신영강을 건너 덕두원 골짜기를 타고 석파령을 넘어 당림리로 나가 한양으로 갔답니다. 이 고개는 외 따르기에 도둑이 자주 나오고 호랑이도 출몰했다나요.
옛날에 춘천부사가 새로 부임해올 때는 이 석파령을 넘게 되고 갈려 가는 구관도 이 영을 넘었지요. 신, 구관은 석파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주연을 베풀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회포를 풀었답니다. 이 고개는 산세가 매우 험하고 고갯길이 아흔아홉 굽이로 마치 양의 창자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춘천부사들은 이 고개에 와서 꼭 두 번씩 울었다고 하는데 부임할 때 고개가 험하다고 울고, 떠나 갈 때 고을살이를 해보니 인심 좋고 살기 좋아서 떠나기가 섭섭해서 울었답니다.
신, 구관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자리가 파할 때까지 회포를 풀고 헤어졌다고 해서 석파령이라 합니다.
석파령지(席破嶺址)라고 새긴 돌비석이 6.25동란 전까지 고객마루에 있었으나 지금은 간 곳 없답니다. 옛날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왓장만 고갯마루에 늘려 있답니다.”
화전 정리지 전나무, 소나무, 굴참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니 왼쪽으로 붓처럼 생긴 바위가 산비탈에 꽂혀 있다. 그 아래로 의암댐이 바로 눈 밑에 앉아 있다. 한참을 올라 왔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논 꼴이다. 산비탈 넓적한 돌 위에는 다래 예닐곱 알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다람쥐 양식인가, 날다람쥐 양식인가.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제법 달콤하다. 다람쥐와 뽀뽀했나, 소산께서 묻는다.
“다람쥐는 이 먹이를 어떻게 찾아오지요?”
“돌이나 나무 그루터기에다 몸을 비비거나 배설물을 누었다가 그 냄새를 맡고 찾아 올 겁니다.”
그럴 듯하게 둘러 되었다.
깔딱고개 위의 안부에는 대구에서 온 등산객 80여 명이 북적댄다. 자연께서 바위 위를 가리키며 좀 앉으라고 권한다. 키가 작아 앉으나 서나 매한가지라고 하면서 서서 버틴다.
자연보호 표지판을 산불조심 계도판 옆에 매단다. 대구서 온 분이 묻는다.
“아저씨. 구의원 나오려고 그러세요?”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바람에 경상도 분들이 춘천을 많이 찾는다. 춘천지역의 명산대천과 토산식품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도 이들의 꼬리를 문다. 혼자서 일행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오른다. 이제부터는 순전히 바위벽이다. 드디어 네발도지가 된다, 장갑이 있지만 맨손으로 긴다, 바위 낯이 매끄럽거나 험하지 않고 적당히 울퉁불퉁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게걸음도 치고 거북이걸음도 한다. 바위얼굴이 따뜻하다. 차가운 쇠사슬에 매달리고 기암괴석에 딱정벌레처럼 찰싹 붙어 오른다, 나무뿌리를 안 밟을 수 없고 손때 반들반들한 나무줄기를 안 붙들 수 없다. 맥국이 이렇게 험한 곳에 진지를 구축할 만하다.
숨을 돌릴 때마다 동쪽을 조망하던 춘천시가지가 아름다운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오를수록 시가지가 점점 넓어 보인다. 살찐 붕어섬은 의암호 속에서 낮잠을 즐긴다. 아가미 쪽으로 메밀을 심었는지 분칠을 한 듯하고 꼬리는 다른 고기에게 물렸는지 지느러미가 희끄무레하다. 중도는 한반도를 거꾸로 뉘어 놓은 듯 평화롭다.
동그란 빙상경기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전거도로, 인도, 차도가 어우러져 마치 삼색공단을 펼쳐 놓은 것 같다.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350m)과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봉의산(734m), 소가 발로 묘를 밟고 뿔로 파놓아도 고총이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솟아난다는 우두산(133m), 금강산에서 떠내려 온 고산(99m), 머리산 수리봉(654m), 맥국 적의 근거지 마적산(510m), 아홉 봉우리 구봉산(441m), 골짜기에 과수댁들이 많이 살았다는 애막산(158m), 말안장 같은 안마산(198m), 망국의 설움과 국상의 울분을 시문으로 달래던 국사봉(203m), 향로 같은 향로산 등 무수한 산들이 올망졸망 춘천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동녘으로 대룡산(899m), 남녘으로 수리봉(645m), 금병산(652m), 검봉(530m), 서녘으로는 계관산(665m), 북배산(867m), 가덕산(858m), 북녘으로 용화산(878m), 오봉산(779m), 부용산(882m) 등이 춘천시가지를 옹위하고 있다. 모두가 안겨 보고픈 산들이다. 후평동, 석사동, 퇴계동 지역에는 아파트가 하얀 숲을 이루고 있다. 강원대학교, 한림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주위의 푸른 숲과 의암호의 푸른 물이 하얀 시가지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참으로 잘생긴 터전이다.
시가지 전경사진을 찍고파 한 발 앞서 올랐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산중턱 바위에 끼여 앉아 일행을 기다린다. 이마와 목둘레의 땀이 다 식을 때쯤 되니 한두 사람 나타나 여섯 사람 모두가 엉금엉금 기어오른다.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다니 천만다행이다. 소산은 힘이 부친지 왼쪽 무릎을 꺾어 바위 난간에 얹으며 오른다. 뒷발 발바닥을 밀어주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될라고. 아마도 무릎에 멍깨나 들었을 것이다. 아까운 흰 바지에 구멍이 안 나기 망정이지.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를 바라 볼 때마다 아리랑과 난곡께서 지르는 탄성이 산새들을 푸드덕거리게 한다. 난곡의 사진기에 서로 잘 보이려고 모두가 ‘김치이, 김치이다.
저마다 밥 시계가 종을 치는가 보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점심 타령이 시작된다. ‘저기 저 정상만 넘으면 둘러앉기 좋은 명담이 있다’고 꼬여 일으켜 세운다.
비록 두 뼘 정도씩 발걸음을 떼어놓지만 한걸음 한 걸음이 보태져서 1킬로미터가 되고 수 킬로미터가 되어서 드디어 제3봉에 다다랐다. 이 봉우리가 망덕봉일까? 사주경계를 하기 좋아 능히 군사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초소가 들어 설만한 곳이다.
제2봉으로 뛰어 갔으나 아무도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서 그런가. 이 좋은 경치를 감상하지 않고 훌쩍 지나치다니. 안개가 끼여 시계가 좋지 않지만 춘천시가지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다.
부지런히 주봉인 제1봉에 뛰어 오른다. 의암댐 2.8킬로미터, 등선폭포 3.2킬로미터, 산성6.7킬로미터 지점이다. 1,2,3봉 모두가 바위봉우리다. 제1봉은 용화봉, 높이가 654미터이다. 서쪽에 있는 청운봉(546m)과 서남쪽의 등선봉(632m)을 합쳐서 삼악산이라 한다. 삼악산은 삼학산(三鶴山)이라고도 한다. 학이 많이 살던 곳이었을까?
용화봉은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봉우리에다 깃대를 꽂았다고 해서 깃대봉이라 하기도 하고 봉화를 올리기도 한 곳이다. 등선봉은 성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맥국의 남한산성이라는 성터가 있고 궁예와 왕건이 싸운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춘천지방에서는 삼악산에 검은 구름이 감돌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정상에 검은 구름이 감도는 것은 맥국의 패망한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다 뭉쳐서 검은 구름으로 감돌다가 비바람을 몰아치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산을 뛰어 오르내리는 70살 넘은 노인이 있는가 하면, 이 문화원장께서도 자주 여기에서 새벽 등산을 한 뒤 집에 가서 아침식사를 든다고 한다. 이런 험한 산도 마음먹기에 따라 자기 집 앞동산쯤으로 여기고 꾸준히 오르내리며 70대 젊은이, 60대 젊은이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2시 넘어 먹는 점심은 쇠라도 녹일 판이다. 나만 빼고 죄다 김밥을 싸 왔다. 모두들 밥그릇 뚜껑도 열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 밥을 같이 먹자고 야단들이다. 남기면 쉰다고···.
술은 쥐 오줌만큼 들면서 항상 매실주 2병씩을 갖고 오는 자연의 성의에 놀라 큰 종이 잔에 술을 가득 받아 든다. 이번에는 어찌하여 날보고 건배를 제의하라나?
“어얼씨구! 저얼씨구!”
건배소리 한번 기차게 잘 맞는다. 꼴깍 꼴깍 잘도 넘어간다.
태석 부인께서 말아 주셨을 알록달록한 김밥과 호수와 아이랑의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김밥으로 빈 배를 위로한다. 옥상에서 기른 들깻잎 장아찌와 화단에서 기른 풋고추가 동이 난다. 천도복숭아도 인기 만점, 그밖에도 뭘 먹기는 많이 먹었는데 걸탐을 내고 보니 생각이 잘 안 난다.
이제부터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누워서 떡 먹기라고 허풍을 떤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경사가 심하고 땅이 비에 젖어 미끄럽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판이다. 아니나 다를까. 호수께서 ‘쿵덩’ 엉덩방아를 먼저 찧는다. 난곡께서도 덩달아 ‘쿵덩쿵덩’, 그렇게 반주 안 맞추어도 미워하지 않을 텐데. 기역자 소나무 자태, 매미울음, 찌르레기 노래에 홀리거나 돌멩이 하나, 나뭇가지 하나 잘못 밟았다가는 엉덩방아 찧기 딱 좋다. 이 길바닥은 옛날 맥국 사람들이 저 아래 초원에서 기와를 구울 때 사용하던 찰흙이 깔려서 더 미끄러울까?
화전민 두 집이 살던 큰 초원은 나무들만 빽빽하게 자라 하늘을 찌를 뿐 언제 사람이 살았느냐는 듯 흔적 하나 없다. 작은 초원은 집터 같은 축대 몇이 여기 저기 서있는 밤나무와 함께 그 옛날의 흔적을 넘기고 있다. 김신조 같은 공비들이 안 넘어 왔다면 아직도 여기서 아기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물도 사람이 살지 않으니 샘물을 끌어올릴 힘을 잃어 허무하다.
가파른 길, 얼 바짝 차리고 내려오니 흥국사에 이른다. 법당에 들러 부처님을 뵙고서 안내판에 눈길을 멈춘다.
흥국(興國)사는 맥국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여러 번의 전란에 불에 탄 것을 광무 2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가 퇴락하고 협소한 관계로 불기 2530년에 대웅전 17평을 중창하였다.
맥국의 대궐 터 왜(와)데기, 큰절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흥국사 주변에는 고색이 창연한 주춧돌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기는 한데 절도 작고 묵밭과 수목이 울창하여 그 옛날의 웅장한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다. 5·16후까지 여덟 집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음식점 한 집만이 남아서 궁궐터를 지키고 있다.
수많은 군사들이 몰려 다녔을 계곡 길은 발소리 대신 물소리만 요란하다. 계곡물에 발을 담갔더니 뼛속까지 한기가 뻗혀서 기력이 되살아난다. 산에 오를 때보다 모두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고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효녀가 등선한 등선폭포와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선녀탕을 잇는 길을 벗어나 왼쪽 산자락 옛길에 접어든다, 큰 초원, 작은 초원, 와데기에 살면서 장작이나 산나물, 약초를 지고이고 장보러 다니던 길을 우리가 간다. 부지런히 비탈을 돌자 망경대로 오르는 네 갈래 길목에 이르자 다 꺼져 가는 산소 하나 누워있다. 여기가 맥국의 최후 격전지로 이곳 싸움에서 패망하였다 해서 망국대(亡國臺)란 곳이다. 땅 속에 누워있는 분은 맥국의 후손이라서 이렇게 깊은 산중에 묻혀 있는 걸까?
태석도사께서 오랜만에 입을 뗀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농부가 이 산에 나무를 하러 왔답니다. 나뭇짐을 내려놓고 옷바위 아래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벗어 놓았던 옷을 찾아보았으나 옷은 온데 간데 없었더랍니다. 멀리 내려다보니 신선이 농부의 옷을 들고 하늘로 올라가더랍니다. 농부는 깜짝 놀라 고함을 쳤어요. ‘신선님, 제 옷을 주세요. 다 떨어진 옷을 무엇에 쓰려고 가지고 가십니까? 어서 돌려주세요.’
‘아니다. 착한 너의 몸 냄새를 못된 사람들에게 맡게 해서 모두 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니 어두울 때까지 기다려 보거라.’
신선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에 착한 농부는 하는 수없이 어둡기를 기다렸습니다.
땅거미가 돌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신선이 나타났습니다.
‘자 보아라. 너의 마음씨가 착하기에 내가 선물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나 받아라. 그리고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 말고 착한 일만 하여라. 네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 갖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흔들기만 하면 되느니라.’ 하면서 조그만 복주머니 하나를 내주고 사라졌답니다. 농부는 우선 급한 대로 옷 한 벌만 달라면서 흔들었더니 과연 옷이 나왔답니다. 집으로 돌아온 농부는 낮에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부인한테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농부 내외는 평생을 욕심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서 꼭 필요할 때만 복주머니를 흔들었습니다. 하늘에서 이들 부부를 지켜보아 온 옥황상제는 이들이 죽자 하늘로 올라오게 해서 영생하도록 했답니다.”
삼악산은 요새이자 신령스러운 산인가 보다. 곳곳에 절이 안겨 있다. 상원사, 흥국사, 금선사, 석림정사, 신흥사, 동천사, 청약사···등등. 밑에서 쳐다볼 적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악산처럼 보이지만 안겨보면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 있다. 사람의 발길이 무섭긴 무섭다.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적군이 쳐들어 갈 길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요새라도 지략엔 무너지는 것이다.
쌩쌩 차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더워진다. 7시간을 숲 속에 있었기 망정이지 시내에 있었다면 꽤나 더위에 시달렸을 것 같다. 이제 배불뚝이 쓰레기봉투는 내려놓자. 아직도 힘이 남았나?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로 어우러진 울창한 숲과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진 삼악산의 정기를 받은 탓일까? 호수와 의암호변 갓길을 초등학교 시절, 지각 5분전 교문을 통과하던 모습 그대로 달린다. 옛날 옛적 맥국 군사들과 그들의 적군들도 이렇게 달렸을까. 팔, 다리는 투정 하나 않는데 등판에서 춤추는 배낭 속의 잡동사니들만 덜거덕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