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1.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2.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진 할 일을 마친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네!
3.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텅 빈 몸이 바로 법신이로다.
4.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법신을 깨닫고 나면 한 물건도 없으니 본래의 근원인 자성이 천진불이라네!
5.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오가며 삼독의 물거품이 헛되이 출몰하도다.
6.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실상을 증득하여 인간(人)과 구성물(法)을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린다.
7. 若將妄語광(속일)衆生 自招拔舌塵沙劫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스스로 발설지옥을 진사겁토록 부르리라.
8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단박에 여래선을 깨치고 나니, 육도만행이 본체 가운데 원만하구나!
9.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삼천대천세계가 없네!
10.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11.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여태까지 때 낀 거울 미처 닦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하게 모름지기 해부되고 해석되네!
12.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만약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13.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 부처를 구하는 보시의 공덕이 조만간 이루어지리라.
14.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를 따라서 마시고 쪼아먹을 지어다.
15.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바로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16. 決定說表眞乘 有人不肯任情徵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망정에 따라 증명하려 한다.
17.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18.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裏親收得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들임이라
19.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한 덩이 뚜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20.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오직 증득해야만이 알 뿐 헤아리긴 어렵다네!
21. 鏡裏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거울 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 속의 달을 붙들려 하니 어찌 잡을 수 있겠는가!
22.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니는구나!
23.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로 드높음이여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구나!.
24.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는구나!
25.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가난하면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으면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다네!
26.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을 유익하게 함이 때에 응하여 끝이 없어라!
27.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삼신(三身)과 사지(四智)가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八解脫)과 육신통(六神通)이 마음의 땅에 박혀 있네!
28. 上士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요달하고 중근기와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못하는구나.
29.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다만 자기의 마음 가운데 때묻은 옷을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자랑할 건인가?
30.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남의 비방에 따름은 남의 그릇됨에 맡겨두어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로다.
31. 我聞恰似飮甘露 鎖融頓入不思議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융화되면 단박에 부사의 해탈경에 들어가리라.
32. 觀惡言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곧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33. 不因謗起怨親 何表無生慈忍力 비방함을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어나지 않으면 남이 없는 자비와 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건가?
34. 宗亦通說亦通 定慧圓明不滯空 종취(宗趣)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걸리지 않으리라.
35. 非但我今獨達了 河沙諸佛體皆同 비단 나만 지금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하사 같은 수많은 제불(諸佛)의 본체도 모두 똑같아라.
36. 獅子吼無畏說 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온갖 짐승들 그것을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지리라
37. 香象奔波失却威 天龍寂聽生欣悅 향상(香象)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天龍)은 조용히 듣고서 흔연히 희열을 내리라.
38.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참문함은 참선 때문이라.
39.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干 스스로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아 마치었네!
40.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語默動靜)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41.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창과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구나!
42. 我師得見燃燈佛 多劫曾爲忍辱僊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회상에 인욕선인이 되셨어라.
43. 幾廻生幾廻死 生死悠悠無定止 몇 번을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결코 그침이 없구나!
44.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了達)하고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45. 入深山住蘭若 岑幽邃長松下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아란야(阿蘭若)에 머무니 그윽하고 깊은 산봉우리에 낙락장송 아래로다.
46. 優遊靜坐野僧家 寂安居實蕭灑 한가히 노닐면서 들판의 절 집에서 고요 앉았으니 고요하고 편안히 기거함이 참으로 소쇄(蕭灑)같구나.
47.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깨친즉 그만이요 공력을 베풀 것 없나니 모든 유위법(有爲法)과는 같지 않구나.
48.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모양에 머문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아라.
49.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리라.
50.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겠는가!
51. 但得本草愁末 如淨瑠璃含寶月 다만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과 같다네.
52. 旣能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이 끝없어라.
53. 江月照松風吹 永夜淸何所爲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 일 있을까?
54. 佛性戒珠心地印 霧露雲霞體上衣 불성의 계에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와 이슬, 구름과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55. 降龍鉢解虎錫 兩金環鳴歷歷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구나.
56.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親跡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57.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空無相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空)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구나.
58. 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59.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구나.
60.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明非內外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61. 豁達空撥因果 茫茫蕩蕩招殃禍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무시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라.
62. 棄有著空病亦然 還如避溺而投火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마찬가지니 도리어 마치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네!
63.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룸이로다.
64. 學人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65.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心), 의(意), 식(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66.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는구나.
67. 大丈夫秉慧劒 般若鋒兮金剛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68. 非但能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구나.
69. 震法雷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구나.
70. 龍象蹴踏潤無邊 三乘五性皆惺悟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없으니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모두 깨치었구나.
71. 雪山肥更無雜 純出醍我常納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내가 항상 받는구나.
72. 一性圓通一切性 一法含一切法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73. 一月普現一切水 一切水月一月攝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는구나.
74. 諸佛法身入我性 我性還共如來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여라.
75. 一地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76. 彈指圓成八萬門 刹那滅却三祇劫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구나.
77. 一切數句非數句 與吾靈覺何交涉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78. 不可毁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어라.
79. 不離當處常湛然 則知君不可見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구나.
80. 取不得捨不得 不可得中 只得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81. 默時說說時默 大施門開無壅塞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82. 有人問我解何宗 報道摩訶般若力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83.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과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84. 吾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惑 나는 일찍이 많은 劫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밝고 밝은 부처님법 조계에서 이었구나.
86. 第一迦葉首傳燈 二十八代西天記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하니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보리달마가 첫 조사되었도다.
88. 六代傳衣 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89. 眞不立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구나.
90. 二十空門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이십공문(二十空門)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구나.
91.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衆生薄福難調制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어려워라.
94.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해(怨害)가 많구나.
95.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구나.
96. 作在心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檀林無雜樹 鬱密深沈師子住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구나.
99.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 皆遠去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니니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난다.
100. 師子兒衆隨後 三歲卽能大哮吼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구나.
101. 若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102. 圓頓敎勿人情 有疑不決直須爭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 지어다.
103. 不是山僧逞人我 修行恐落斷常坑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수행타가 단(斷). 상(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로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非卽善星 生陷墜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그른 즉 선성(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亦曾討疏尋經論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不知休 入海算沙徒自困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다 속의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네!
108. 却被如來苦呵責 數他珍寶有何益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가.
109. 從來 覺虛行 多年 枉作風塵客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하였구나.
110. 種性邪錯知解 不達如來圓頓制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여래의 원돈제(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 精進勿道心 外道 聰明無智慧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구나.
112. 亦愚癡亦小駭 空拳指上生實解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구나.
113. 執指爲月枉施功 根境塵中虛捏怪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육근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구나.
114.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한다네!
115. 了卽業障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빛 갚으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病遇醫王爭得差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는구니.
118. 勇施犯重悟無生 早是成佛于今在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深嗟頑皮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은 완피달을 몸시 슬퍼하는도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 하구나.
121. 有二比丘犯淫殺 波離螢光增罪結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消霜雪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妙用恒沙也無極 부사의(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어라.
124. 四事供養敢辭勞 萬兩黃金亦銷得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만양(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구나.
125.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었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河沙如來同共證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信受之者皆相應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또한 사람도 없고 또한 부처도 없어라.
129. 大千世界 海中 一切聖賢如電拂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아라.
130 假使鐵輪頂上旋 定慧圓明終不失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구나.
131. 日可冷月可熱 衆魔不能壞眞說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다.
132. 象駕觴嶸漫進途 誰見螳螂能拒轍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133. 大象不遊於兎徑 大悟不拘於小節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未了吾今爲君決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구나.
증도가(證道歌) 강의에 들어가면서
{증도가}는 다른 이름으로 {영가진각대사증도가} 또는 {연가연각성사증도가}라고도 불린다. 현각선사(675-713)는 제6조 혜능조사로부터 심법(心法)을 인가(印可)받아 혜능조사의 고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현각선사와 {증도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가현각선사를 일명 일숙각(一宿覺)이라고 하는데, 이는 현각선사께서 6조 혜능조사를 처음 뵙고 하룻밤을 쉬어간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의 최초는 {조당집}(952년 찬술)이다. 이 {조당집} 제3권에 [일숙각화상]이라 하여 선사의 전기와 깨달아 혜능조사로부터 인가받은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증도가}에 있는 한 구절인 [조계를 한차례 만난 뒤로는 생사와는 전혀 간여치 않음을 분명히 하노라. 즉, 자종인득조계로(自從認得曹溪路), 요지생사불상관(了知生死不相關)]라는 내용이다. 이 일숙각화상에 나오는 것의 연대를 상고해 보면 952년 이전에 이미 {증도가}가 제방에 유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각선사를 일숙각화상과 동일시 한 것은 {조당집}부터 시작되는데, 오늘날 연구 결과 현각선사와 일숙각화상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영가집(永嘉集)}의 권두(卷頭)에 당나라 경주 자사인 위정(魏靜)이 쓴 서문과 말미에 [勉友人書]와 [大師答朗禪師書]를 통해서 보면 현각선사는 본래 천태계 선자(禪者)로서 천태 제5조인 좌계현랑(左溪玄朗, 673-754)과 교류를 자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천태덕소선사로부터 심의(心意)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영가집}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으로 선사는 천태선에 정통한 선자였는데, 당시 풍미했던 천태선과 선의 각축선상에서 천태 쪽에서 현각선사를 조계참문설화로 엮어서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세 번째, 조사선 계통은 송 이후에 크게 흥륭했는데 그 흐름은 9세기초부터 {신심명}이나 {증도가} 등이 크게 유포되면서 많이 읽혔던 관계로 점차 과거의 전통은 미화되고 숭상되었다. 이미 우두법융의 {심명(心銘)}, 보지화상의 {대승찬(大乘讚)}, 부대사의 {심왕명(心王銘)} 등도 유행되고 있었던 터라 그런 조류 속에서 {증도가}는 현각선사와 관계했다는 것이다. 특히 {증도가}에는 하택신회의 {현종기(顯宗記)}의 뒤를 잇는 의도가 많이 보인다는 전에서 당시 사상적 조류가 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예로서 [서천28조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런 사실을 말하는데 이러한 조통설(祖通說)은 8세기 말해야 성립된 것이다.
네 번째로 혜능조사의 선 계통에서 높이 받들어 모시는 {육조단경}에서도 혜능조사의 사법제자로서 현각선사가 없다는 점이다. {육조단경} 중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판본인 {본황본 육조단경}에는 혜능조사의 10대 제자들의 혜능조사를 만난 기연(機緣)을 기술하고 있는데 거기에도 현각선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각선사의 육조참문설설화가 후대에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로 {증도가}의 원명은 {선문비요결(禪門秘要決)}이며 그 작자는 [소각대사 일숙각]이라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 연구한 종주의 호적(胡適)의 {호적문존} 제3집에서, 자신이 발견한 빨리어 본에는 [태편흥국 5년](980)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 내용에 [선문비요결(禪門秘要決), 소각대상일숙각(招覺大師一宿覺)]이라고 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현각선사와 소각선사는 전혀 다른 인물인데 후대에 혼동하여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도가}는 후대에 이를 수록하여 선가의 보배로운 작품으로 존중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증도가}는 {신심명(信心銘)}이나 {대승찬}처럼 비슷한 시기인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찬술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증도가}는 {신심명}처럼 노장사상에 뿌리를 두고 여러 경전과 불교의 핵심사상을 총괄하여 8만4천의 법문의 요결(要決)을 결집한 것이다. 불교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부처님에 의해서 발견된 이후 그 진리로 인도되는 가르침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저마다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증도가}는 아주 간결한 문구 속에 무가보(無價寶)의 진수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면 {증도가(證道歌)}는 일숙각스님 또는 영가연각께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로 엮은 [3·3·7·7·7]이란 가곡현의 시구(詩句)로 엮어진 것이다. {증도가}의 전체구성을 보면, 먼저 깨달아 해야할 일을 마친 도인의 경지를 노래한 한도인(閑道人), 두 번째로 그런 한도인의 참된 경지가 무엇인가를 노래한 대원각(大圓覺), 세 번째로 그러한 대원각의 경지는 참으로 세상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무가보(無價寶)의 가치임을 노하였으며, 네 번째는 이러한 경지는 어떻게 얻어지는 가를 노래한 선(禪), 다섯 번째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선을 닦아야 하는지를 노래한 하소위(何所爲), 여섯 번째는 참된 실상(實相)을 다시 보이는 진실상(眞實相), 일곱 번째는 진실상을 오득(悟得)한 대장부의 경지를 노래한 대장부(大丈夫), 여덟 번째는 대장부가 얻은 반야지혜의 작용을 노래한 마하반야력(摩訶般若力), 아홉 번째는 그러한 반야의 경지를 전해져 온 과정을 노래한 전등(傳燈), 열 번째는 전등(傳燈)한 사람들이 노니는 곳을 노래한 전다림( 檀林), 열 한 번째는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를 노래한 관자재(觀自在), 열 두 번째는 다시 완전한 해탈의 경지를 노래한 해탈력(解脫力) 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와 같은 {증도가}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돈오(頓悟)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신심명}과 더불어 가장 잘 읽혀졌던 조계선문의 진주이다. 특히 조선조에서 세조대왕은 이를 귀중하게 여겨 한글화한 보서(寶書)인 것이다.
영가(永嘉)스님에 대한 일화
영가(永嘉)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다. 천태종 팔조(八祖)인 좌계현랑(左溪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 보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한 데 개의치 않았다.
영가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여세였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영가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서 방에 들어왔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見處)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책스님은 영가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했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 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시오."
그러자, 영가스님이,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신 듯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 때에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육조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지게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이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영가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러자 영가스님께서,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므로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이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육조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나가버린 구경을 성취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이에 영가스님이 답하였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스님이 반박하자.
육조스님께서,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고 인가(印可)하시었다.
이에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욱조스님의 질책이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眞如)의 대용(大用)이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이다. 그러자 육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가 수집한 것이라고 전한다. 영가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라 하였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에 대해서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이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앞의 법담(法談)하는 말끝에서 확실하게 깨쳤다고 본다.
영가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도 하였다. 그런 만큼 육조스님께 와서 깨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가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고 선종에서 깨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리라. 그러면 영가스님의 행장(行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증도가(證道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겠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廓徹)하게 깨치고, 깨친 경지에 의지해서 <증도가>를 지었는데, 천태종이나 다른 교가의 사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고 하여 이것이 일종의 미친 견해이지 바른 견해는 아니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선종에서 볼 때는 <증도가>가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선종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지 바른 길을 아는 사람이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선(禪)과 교(敎)의 관계가 <증도가>에서 더욱 더 완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고 많이 주장하는데 대해서, 교[敎]에서는 '점차(漸次)로 닦아 성불하는 것[漸修]'만을 근본으로 표방하므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래서 그 당시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대해서 천태종에서 가장 많이 공격했지만, 그 공격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며, 영가스님의 <증도가>는 실제로 도 닦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고의 표준이 되어지고 있다.
그러면 <증도가(證道歌)>라 하였는데 '증(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한다. 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置癡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팔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곧바로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見性)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았지 '해오(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에서 근본으로 삼는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에서의 깨달음[悟]이란 궁극적으로 체달(體達)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한 이름부터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妄念)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다.
근본 무명인 제팔 아뢰야식은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을 확실하게 깨친 것이 곧 '증(證)'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하겠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르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스님까지 달마스님에서 육조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
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인 구경각을 성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한다. 즉, 도(道)란 구경을 깨친 '증(證)'한 도(道)이지 어중간한 도(道), 해(解)한 도(道)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경각인 도(道)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즉, "무심(無心)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無心)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關門)이 막혀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라는 말이다.
이 도(道)는 무심(無心)과 상통한다. 우리가 실지로 공부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서 구경각을 바로 성취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제팔 아뢰야식 무기무심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팔 아뢰야식의 무심(無心)의 선정인 멸진정(滅盡定)의 무심(無心)은 도(道)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멸진정의 무심도 아주 벗어나서 제팔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곳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현발(顯發)한 이것이 도(道)인 것이며,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證)'이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증(證)'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제7말라식에서 근본무명이 끊어져서 제8아뢰야식의 무심(無心)의 경지인 멸진정의 경지가 구경의 경지라고도 한다.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즉,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이라야 可以入道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음이 담과 벽 같아야 한다고 하니 목석과 같고 장승과 같은 무심지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도(道)냐 하면, 그것이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팔 아뢰야식인 무기무심이 장애가 되어 근본적인 구경무심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참으로 구경의 대무심지에 들려면 멸진정의 가무심(假無心), 거기서 한 관문을 더 뚫어서 구경무심을 성취해야 바로 도(道)를 깨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달마스님의 말씀도 구경적인 도를 말씀한 것이지 중간적인 도가 아니며 증오(證悟)의 '도(道)'이지, 해오(解悟)의 '도(道)'는 아니다. 달마스님 이래로 선종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구경각을 '증(證)'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도 '증(證)'을 근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구경각이 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달마스님이 말씀하신 무심을 한층 넘어간 도가 되어야지 그 중간적인 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면 '가(歌)'란 무엇인가?
영가스님 자신이 확실히 깨친 경계를 노래로써 표현한 것이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 확철하게 깨쳐 구경각을 성취하고 나서 그 경지를 가사(歌詞)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대부들이 쓰는 시(詩)나 명(銘)의 형식을 쓰지 않고 일반인들이 즐겨 부르는 가사형식을 빌어서 증도(證道)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누이가 이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하겠다.
- 본 증도가의 강의 내용은 열반하신 성철큰스님의 강의를 참조하여 올림을 밝혀 둡니다 -
성철큰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강의-한도인(閑道人)-1
군불견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그대'라는 것이 자성을 자리킨다고 보아 '자성을 깨치지 못했느냐'고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로 뒤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할 일없는 한가한 도인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해석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대'를 자성이라 하여도 자성이 바로 '배움이 끊어진 할 일없는 한가한 도인'이므로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진 할 일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네!
[배움이 끊어졌다]는 것은 계(戒)와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수행하여 다 마쳤기에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배울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배움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배울 것이 더 떨어져서 다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이것이 구경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증도가}의 증(證)이란 구경각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자성(自性)을 깨쳐서 실제로 자성을 체득하여 요달(了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에 '할 일없다'는 것은 진여(眞如)의 본체에 계합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하되 그 일이나 결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즉, 진여(眞如)와 하나 된 것으로 바로 깨친 그 자리에는 세속적 유위(有爲)의 기대치와는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울 것이 하다도 없고 할 일없게 되면 자연히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이다.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닦아서 더 닦을 것이 없고, 더 나아갈 수 없어 '배움이 끊어져 버려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도(道)를 증득한 사람을 표현한 말로서,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그 깨침(悟)의 내용이 구경의 깨달음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한가한 도인은 무엇을 하느냐?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이 구절을 잘못 보아서 '모든 망상이 없앨 것도 없고 참됨을 구할 것도 없다. 망상이 일어나도 이대로가 참됨이며 참됨과 망상이 본래 완전히 통해 있기 때문에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며 망상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앞 구절의 '절학무위한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반대가 된다.
'절학무위한도인은 일체망념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을 성취한 사람인데, 거기에 상대법인 참됨과 망상이 있을 수 없다. 이 [증도가]가 가운데서 영가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공하다.[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설래야 설 수 없고 망상도 본래 공하여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참됨과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데서 하는 말이다.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기 때문에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절학무위한도인'을 모르는 것이고 영가스님의 뜻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망상을 다 없애려 하여도 없앨 것이 없고 참됨도 설 수 없다면 참됨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참됨과 망상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지에서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참됨과 망상은 상대법이며 양변, 변견이기 때문에 생사의 견해이며 생멸법이다.
참됨과 망상의 양변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이것이 중도(中道)이다. '절학무위한도인'은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며,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은 참됨과 망상의 양변을 다 버린 것을 말하니 그것이 곧 중도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증도가]를 이해하는 첫출발로서 근본 자세가 바로 섰다고 보겠다.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無明)이라 하면 아직 생멸법인데 이것이 불성(佛性)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무명 이대로가 불성인 것이 아니라,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라는 것이다.
앞 단에서는 '부제망상불구진'이라 하여 참됨[眞]과 망[妄]을 다 버려버린 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하였다면, 이 단에서는 '무명의 참 성품이 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하고 있고,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차원이 바뀐 데서 쌍조(雙照)로써 긍정을 말하고 있다.
앞 단에서는 참됨[眞]과 망[妄]을 쌍차(雙遮), 부정하고 나서, 이 단에서는 불성(佛性)과 법신을 쌍조(雙照), 긍정하는 것이다. 쌍조는 서로 즉(卽)하는 것이 근본이니 모든 것이 다 통함을 말한다. 무명과 불성이 통하고 허깨비의 빈 몸과 법신이 통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통하느냐 하면, 무명의 참 성품 이대로가 부처님의 성품이고 허깨비같은 빈 몸 이대로가 법신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쌍조(雙照)의 긍정의 세계이다.
법신각료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이라고 하면 무슨 물건이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쉬운데, 법신을 턱 깨치고 보니 거기에는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다면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대광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遮), 막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조(照), 비추어서 전체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중도(中道) 공식은 앞에서 차(遮)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조(照)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부정을 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긍정을 하여 부정은 분명히 긍정을 전제로 하고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한 면만 강조해서는 중도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조(照)의 입장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면, 법신이 또 흙덩이나 돌덩이처럼 무슨 물건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한 물건도 찾아 보려하여도 찾아볼 수 없는 공공적적(空空寂寂)을 말한다. 공공적적하다고 하면 또 오해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다시 공공적적한 이대로가 대광명체라는 말로서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자성의 항하사의 묘용이 현전하다는 것을 부정 뒤에 긍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위의 {증도가}는 열반하신 성철큰스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
성철큰스님/{증도가(證道歌)} 강의-한도인(閑道人)-2
오음부운공거래 삼독수포허출몰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내가 법신을 깨쳐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임을 확실히 알고 보니, 오음의 뜬 구름이 공연히 왔다갔다하고 삼독의 물거품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생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음이나 삼독은 법성과 천진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오음이나 삼독은 아직 중도를 깨치기 전 생멸의 쪽, 중생 쪽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실지로 중도를 바로 깨쳐서 정각을 이루어 법신을 확철히 깨치게 되면, 한 물건도 없어서 오음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고 삼독을 찾아보려고 해봐야 볼 수 없다. 만약 삼독과 오음이 그대로 있다면 법신을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자성이 천진불'임을 바로 안 것이 아닌 것이다.
증실상무인법 찰나멸각아비업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실상을 증득하여 인(人), 법(法)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오음이나 삼독은 거짓 모습[假相]이고, 불성이라든지 법성이라든지 자성이라든지 구경각이라든지 하는 것은 참모습[實相]을 표현해 말하는 것이다. 실상을 증득하면 인(人)과 법(法) 즉 주관과 객관이 없다. 여기서 증자를 쓰는 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깨침[悟]이라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기 때문에 '실상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이다.
실상을 증득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인(人)과 법(法)의 양변을 여읜 중도실상을 증득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과 법이 떨어진 곳을 알고 실상을 알려면 증오해야만 알지 해오로써는 도저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상을 증득하여 주관이 공하고 객관이 공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찰나 사이에 아비지옥의 업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아비(阿鼻)란 간단(間斷)이 없다, 쉴 사이가 없다는 뜻으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말하며, 아비업(阿鼻業)이란 아비지옥 곧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받아야 하는 죄업을 말한다. 중생이란 여러 무수한 겁을 윤회하면서 한량없는 죄를 지어 갈 곳은 무간지옥 뿐이다. 거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지옥이며 죄의 고통이 쉬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그 아비지옥이란 꼭 땅 밑으로 들어가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은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언제나 자기가 계속해온 업에 따라 항상 쉴 사이 없이 업고(業苦)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 받고 있는 처소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업이 남아 있으면 업을 따라 고(苦)가 따라 다녀서 전체가 아비지옥입인 것이다. 어느 특정한 처소를 설정해서 아비지옥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있고 업보가 따라 갈 때는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쉴 사이 없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중생세계 전체가 아비지옥이고 아비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라는 것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자기의 업에 의해서 업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표방하는 것은 이 모든 업고를 완전히 벗어나 영원히 자유를 얻는 것, 곧 해탈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해탈하려면 성불해야 하는데, 성불한다는 것은 곧 실상을 증득해서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아비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비업만 찾아볼 수 없고 중생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란 중생을 상대한 약이지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따로 취한다면 이것도 일종의 변견이 되고 만다. 실상을 증득하면 양변을 떠나 중도를 바로 깨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부처도 찾아볼 수 없으며 아비업도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일 찰라간에 아비업이 없어져서 버린다고 했는데,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친 즉 찰나간이라[迷聞이면 經累劫이요 悟卽刹那間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깨침에 무슨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종에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성취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이것은 그 닦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리가 서울 가기 위해서 걸어간다면 한량없는 날들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버리면 잠깐 사이에 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서 공부할 것 같으면 일 찰나간에 구경각인 실상을 증득해서 아비업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약장망어광중생 자초발설진사겁 若將妄語[言狂]衆生 自招拔舌塵沙劫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내가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이는 것이라면 내 스스로 진사겁토록 발설지옥에 간다'는 말씀이다. 발설지옥이란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면 죽어서 가는 지옥으로 그곳에서는 혀를 빼내어 쟁기질을 하는데 그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선종에서는 인과 법, 즉 주관과 객관이 떨어지면 찰나간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의심이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자꾸 거짓말처럼 들리기 쉽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중생들이 너무나 딱하게 생각되어 자기의 말이 절대로 참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나, 어떻게 보면 영가스님이 참 딱하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이 어느 정도 권위가 설 것 같으면 누가 듣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겠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거짓말할 것 같으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혀를 빼는 지옥에 가서 고생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맹세한다는 것은 남에게 내가 불신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선(禪)에 대해서 일반의 인식도가 낮고 이해를 잘못했지 때문에 선(禪)이란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구구한 말씀을 하신 걸로 볼 수 있다.
돈각료여래선 육도만행체중원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육도(六度)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한다. 바라밀이란 도(度)라든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여 저[彼] 언덕[岸]에 이른다[到]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행(萬行)이란 저 언덕인 해탈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법이니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한다.
만행(萬行)이란 육바라밀을 실천 궁행하여 보살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확철히 깨친다고 함은 여래선을 깨치는 것인데 여래선의 본체 가운데는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나무를 벨 때 그 밑 뿌리를 자르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근본자리를 바로 깨치기만 하면 육도만행을 닦고 안 닦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도만행을 달리 어떻게 닦으려하지 말고 영가스님 자기가 소개하는 여래선을 바로 깨치기만 하면 전체가 모두 따라 간다는 것이다. 근본을 바로 알면 지엽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니 지엽적으로 나아가 육도만행을 닦는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근본적인 여래선을 바로 깨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몽리명명유육취 각후공공무대천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꿈속에선 밝게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세계가 없도다.
육취란 육도(六道)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말하니 중생은 지은 업에 따라 윤회 전생(轉生)하는 세계의 모양이다.
대천(大千)이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뜻이다.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쓰이는 말로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앙으로 하여 일곱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에워싼 공간을 한 개의 소세계라 하며, 이 소세계를 천개 합친 것이 소천, 소천을 천개 합친 것이 중천, 중천을 천개 합친 것이 대천이니 이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육취니 사생이니 삼천대천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가 다 망상으로 일어난 업연(業緣)의 기멸(起滅)에서 생긴 이름들일 뿐 자성을 바로 깨친 대원경지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육취인들 찾아볼 수 있으며 중생인들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육취라 하니 육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 전체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꿈속에서 하는 소리지 꿈을 바로 깨놓고 보면 부처도 찾아볼 수 없고 조사도, 중생도, 하나님도 외도도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천대천세계도 찾아볼 수 없어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아무것도 설 수 없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설 수 없는 거기에서 진여대용인 대지혜광명의 항사묘용이 발현되게 되는 것이다.
무죄복무손익 적멸성중막문멱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여래선을 확철히 깨쳐 돈오(頓悟)하면 모든 것이 원만구족한데, 거기에는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다는 말이다. 비단 손해와 이익, 죄와 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남, 옳고 그름의 모든 변견이 완전히 떨어지면 적멸한 성품이 발현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무엇을 묻고 찾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진 곳이 쌍차이며, 쌍차(雙遮)이면 쌍조(雙照)로써 거기에서 중도정견(中道正見)의 항하사 묘용이 발현함을 알아야 한다.
비래진경미증마 금일분명수부석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닦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진경, 때 낀 거울이란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써 맑은 거울 위에 먼지가 덮혀 있으면 거울 빛이 드러나지 못함과 같이, 중생의 근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번뇌망상의 티끌이 꽉 차서 지혜광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업을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전에는 잘 몰라서 이 마음을 닦지 못했지만, 오늘에는 참됨도 버리고 거짓됨도 버리고 죄도 버리고 복고 버리고 옮음도 버리고 옳지 않음도 버려서, 모든 상대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였기 때문에 중도 정견이 발현하여 근본법을 분명히 밝혀 내었다는 것이다.
수무념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앞에서는 때 낀 거울로써 나고 죽음의 망상을 말하고, 이 귀절에 이르러서는 무생법인을 이루어 대원경지를 분명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나는 것이 없느냐'는 것은 때 낀 거울에서 때를 닦아 내면 그 사람이 확실히 무념의 경계를 성취한 사람이고 무생법인을 증(證)한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곧 전체가 다 난다는 것이다. 참으로 쌍차(雙遮)하면 쌍조(雙照)가 됩니다. 모든 일체의 망(妄)이 다하면 이것은 나는 것이 없는 것이며[無生], 거기에서 항사묘용의 무진법문(無盡法門)이 난다는 것이다.
실지로 무념(無念)을 성취하고 무생(無生)을 증했으면 그만인데 왜 또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느냐하면, 혹 어리석은 중생이 잘못 이해하여 무생이나 무념에 응체하여 단견에 빠질까 염려해서 하신 말씀이다.
한 가지 말할 것은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을 '실지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다'고만 해석한다면 이것은 전체를 까뭉게 버리는 잘못된 해석이다. 그렇게 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서 버려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질 않는다. 주의하여 해석하야 한다.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를 구하고 공 베품이 조만간 이루리로다.
기관목인이란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인형극하듯이 나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기관목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처구하고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룬다'하는 것은 흔히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 보면 부처를 구해 공을 베품들 어느 때 이루리오'하고 합니다.
결국 무생물인 장승에게 물어가지고는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인데 그리되면 쌍차(雙遮)는 표현이 되지만, 앞 구절의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과 서로 연관시켜 보면 그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나는 것이 업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하니만큼 그렇게 되면 나무 장승이 말을 해야 한다. 나무 장승이 말을 하지 못하면 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것이 없는 것뿐이지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안되버리고 만다.
예전 스님네는 '나무 장승이 노래부르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춘다[木人放歌石女起舞]'라고 했다. 결국은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곧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나지 않은 것이 나는 것이고 나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어야 쌍차가 곧 쌍조이며 쌍조가 곧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인 원융무애한 구경법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지 않는 것과 나는 것을 분리하여 보면 변견이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그것은 중도정견이 아니고 사견(邪見)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나무 장승이 본래 말을 못하니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을 분리해서 보는 변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나지 아니하면 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뜻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나무장승에게 물어보라. 나무 장승은 언제든지 대답하고 있고, 돌로 만든 여자는 언제든지 춤을 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를 구하여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루어지리로다'한 것이다. 곧 '참으로 나무 장승이 노래 부르고 돌 여자가 춤을 출 때 그 때가 불법을 완전히 성취한 때이다'하는 말이다.
그러면 정말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출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지만, 중생이란 것은 생명의 변(邊)에서 사량분별을 근본생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량분별이 다 떨어져 버리면 무정물(無情物)인 나무 장승과 돌 여자처럼 되어 영영 대무심(大無心)이 되어 버린다. 대무심이 되면 그 때 비로소 참으로 진여의 무진묘용이 거기서 살아나게 된다. 그것이 나무 장승이 말을 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 경계의 소식이니 진여가 대용전창(大用全彰)한 시절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것은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死中得活],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大死却活]을 말합니다. 크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나무 장승과 같고 송장과 같다는 말인데, 거기서 다시 살아날 것 같으면 이것이 진여묘용이 현전한 것이다.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은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곧 대원경지의 경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 그 뜻을 잘 알아야만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