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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의江
제5회 영상낭송집
2011년 5월 30일(월) 오후 6시
한신문화원 (서울 서초구 잠원동)
文學의江 영상낭송회
참여 문인들
< 시 >
김경자 <서초> ―― 어머니․3
김병렬 <강동> ―― 저 하늘에 차오르는 달을 보며
김양식 <서초> ―― 무릉(武陵)이 열리고 나서
김운향 <마포> ―― 항아리
김현호 <서초> ―― 봄의 낙엽 [春色落紅]
김흥렬 <관악> ―― 오월 (五月)
리문호 <중국심양> ― 진달래꽃 가지
박영록 <서초> ―― 정월 대보름
박영석 <서초> ―― 백목련 (白木蓮)
배혜영 <서초> ―― 창밖의 봄
백덕순 <강서> ―― 동행길
심의표 <금천> ―― 목련꽃 필 때면
이종영 <경기하남> ― 물꽃
임방춘 <서초> ―― 루트바 가는 길
최지혜 <중랑> ―― 땅의 애가 (哀歌)
최은혜 <서초> ―― 봄비 나들이
한기준 <서초> ―― 공원길
< 수 필 >
김재귀 <노원> ―― 기다리는 봄
申吉雨 <서초> ―― 불우의 의미 해석
우상렬 <중국연길> ― 먹자주의와 마시자주의
윤철환 <강동> ―― 나청호 선사의 불괴비첩
이명재 <강남> ―― 엄마, 어머니
어 머 니 ․ 3
― 꽃길이었습니다
김 경 자(서울 서초)
교직 정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꽃으로 올 때는》《흐르는 집》등
용서하셔요, 어머니!
잔잔한 자목련 나뭇가지
미친 듯 흔들어대는 빗줄기마냥
앙상한 당신의 가슴밭 치훑던
이 딸의 갈고리짓, 폭우의 말
용서하셔요, 어머니!
주름 깊어진 얼굴의 그 이름
어머니의 어머니쯤 되어서야
당신의 마음 길
한 귀퉁이쯤이나 돌아보는
세상 뜨신 지 스무 해도 더 지난 오늘
해 지는 언덕에서야
당신의 마음 밭
한 모서리쯤이나 서 보는
걸음 늦은 사랑입니다.
세상, 화려히 길 많아도
다시 태어나 산다면
당신 걸으신, 그 길 걷고픈
이 딸이기에
어머니께서 걸으신 그 길은
꽃, 꽃길이었습니다.
저 하늘에 차오르는 달을 보며
유강 김 병 렬 (서울 강동)
보성고등학교 교사
강남대학 국문과 강사
<모던포엠> 편집위원
후 불어 버리면
구름 속 한 켠에 숨어 버릴까 봐
저 산 모롱이 감돌아
영영 뒷모습 감춰 버릴까 봐
그래서 더욱
서운하기도 했단다.
또 보고 보았단다.
누대累代를 내려온
집안의 세월 속에 간절한
기다림이었단다.
그래서 더욱
내 생애 반쯤
뚝 떼어주고 싶었단다.
아, 오늘은
네가 보던 거울 앞에서
내 모습 속에서 찾아보는
너의 일기장
한 장 한 장
넘기고 싶단다.
그렇지
너는 내 마음 속에
한 마리의 비둘기로 살다가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오른
너는 내 그리움의
자화상自畵像이었단다.
* 2011. 4. 2.(음2.29.) 女息의 결혼식을 마치고
무릉武陵이 열리고 나서
김 양 식 (서울 서초)
韓印문화연구원 원장
서초문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정읍후사> <은장도여>
중문시집 <김양식 시선집>영문시집, 러시아시집 등 다수
나도 이젠 門문밖의 것 모두 잊은 채
한 千五百年천오백년쯤
이렇게 房방에 누워 잠이나 잘까 하나니
연꽃아.
오래고 오랜 세월의 깊은 꿈이 모두
이끼 자욱한 돌벽 사이
싱그런 나무 실뿌리로 자라나거든
그 뿌리 끝마다 초롱초롤 매달려
불이나 밝혀 주련.
그리고 또 거기 섰는 짐승아.
입술 붉은 채 돌이 다 된 짐승아.
너는,
네 머리꼭지 위에 돋아나서
이젠 짙푸른 녹도 슬은 무쇠뿔 하나로도
내 곤한 잠을 깨우려드는 妖異요이떼를
훠이훠이 쫓지는 말고 한 상 그득히 먹여 보내는
그런 재치 있는 忠誠충성도
심심할 땐 가끔 베풀어 주련―.
찬이슬 내리면 고개 숙이고
벼랑 아래 떨어지지 않으려
가냘픈 뿌리 바위 속에 파고든다.
항 아 리
김 운 향 (서울 마포)
고려대 박사과정 수료
한국현대시인협회 문화위원
시집《구름의 라노비아》외
소설집《바보별이 뜬다》등
머리에 달을 이고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
산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울리거든
바람결에 그 님이 스쳐갔다 여기시라기에
천봉당 태흘탑 아래서 합장하노라니
노오란 옷을 입은 소년이 나타나
운무 드리워진 능선을 가리키네.
마음 한 곳을 비우고
몸 한 곳도 열어두기를
귀한 인연으로 빚어진 삶인데
알몸으로 와서 조각조각 깨질 때까지
골고루 채우고 비워 보기를
큰 바위 속에서 흘러넘치는 감로수로
청정심 되어 시나브로 비우리라 하니
새로운 법열이 새록새록 밀려 드네.
< 수필 >
기다리는 봄
김 재 귀 (서울 노원)
고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월간<수필문학> 등단
아직은 산간계곡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았다. 기온이 매우 춥고 쌀쌀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이 왔으나 봄날 같지 않다. 지난겨울은 폭설과 추위로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깊고 긴 겨울 밤 사색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따뜻한 봄날을 기다린다.
이른 봄 상쾌한 아침 차고 부드러운 바람이 집 뜰에 스며들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수경칩도 지났다. 어려운 우리의 생활 형편들도 차차 봄눈 녹듯 풀리고 새 봄을 맞아 어깨를 활짝 펴고 보무 당당히 살아 보리라 다짐한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가 자연에 투영된 것인지 요즘엔 봄이 오면 여러 꽃들이 동시에 다발적으로 활짝 피어 산과 들을 곱게 물들인다.
서울 남산은 이런 한국적 봄의 거대한 오보제, 그러나 물감 섞는 화가의 팔레트처럼 다채로운 하루하루가 달라진다. 출렁이는 남산의 봄, 꽃이 지면 신록으로 덮힌다. 다시 봄을 맞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구촌의 변화하는 계절 속에 4계절을 맞는 나라에 삶은 더욱 큰 축복이다.
상하의 열대나 혹한의 한대지방에서 살아보면 더욱 절감할 것이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행복하고 감사할 때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비로소 깨닫는 둔함이 있다.
봄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 뿐 아니라 공간과 함께 만나는 좋은 일이다. 폭설과 혹한의 힘든 겨울 삼동을 보냈다. 그래서 금년 봄은 더욱 반갑게 맞이한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다. 산간 농촌 잔설 사이 양지쪽 논두렁에 불을 피워 놓고 구정(설) 대 보름달을 맞이하는 사춘기 아이들 마음속에 봄은 먼저 찾아온다. 도시의 운동 부족 자를 일찍 깨우고 새벽 출근길 반은 걷고 뛰는 사이 새 봄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 나뭇가지에는 꽃눈과 잎눈이 불룩해 지고 있다. 눈을 밟으며 뛰어가는 운동화 바닥으로 봄을 느낀다. 겨울눈과 봄눈은 바닥 촉감이 다르다. 봄눈은 촉감이 부드럽고 연하며 겨울눈은 이보다 딱딱하다. 달려가는 새벽길의 옷소매 속으로 스며드는 봄기운은 생활 속에서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내는 맑은 냉수 느낌이다. 자연의 계절은 그때만 민감할 수 있고 유정했던 것인지?
봄소식은 만인이 듣는 복음이다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과 힘없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엄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 낸 사람들로서 봄은 더욱 반갑고 따뜻함을 느낀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자애로운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훈훈하다. 봄 눈 녹는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과 함께 걸으며 위대한 자연의 사랑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따뜻한 모닥불을 피우자. 천지 창조주께 경건한 마음으로 찬미를 힘차게 부르리라.
(2010년 3월)
봄의 낙엽 春色落紅
김 현 호 (서울 서초)
서울대 법대 실장 정년퇴임
서울대문예회 회장 역임
서초문인협회 이사
연분홍 야린 가슴 아파 오는 절린 통증
어디에도 숨바꼭질 벅차지도 않는 전율戰慄
차라리 지지나 말 것을
눈시울이 뜨겁다.
움트는 춘아들이 그다지도 모질더냐.
얄궂은 아픔일랑 거슴츠레 묻어 두자.
이것이 세상 모습인 걸
나무람이 차갑다.
하나도 아닌 것을 어찌 모두 감당할까.
두 눈을 씻고 봐도 살고 지남 속절이다.
누구도 감당 못할 승산
널브러져 웃는다.
2010. 04. 11.
오 월 五月
김 흥 열 (서울 관악)
신한은행 지점장 ․ 부본부장
서초문인협회 부회장 역임시조집 <고장 난 시계> 등
4월의 거친 바람에
시야조차 흐리더니
잎새에 쌓인 먼지 단아하게 닦아놓고
창포에
감은 머릿결처럼
반짝이며 앉은 오월五月
지난 날 아픔까지
녹여서 꽃을 피워
가슴에 곱게 꽂은 청초한 봄나들이
청옥靑玉 빛
치맛자락을
살짝 여민 오월이여.
가지마다 내 걸린
산새의 고운 노래
형형색색 꽃마다 고운 향 뿜어낸다.
여인의 가냘픈 손가락에
비색翡色으로 앉은 오월.
진달래꽃 가지
리 문 호 (중국 심양)
1970년대 <연변문학> 등단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요녕성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시집 <징검다리> 등 다수.
또 봄이 오나 봅니다. 시장통에서
진달래 가지를 사다가 꽃병에 꽂고 봄을 불러 봅니다.
사랑을 지니지 못해 꽃가게에 팔리지 못하고
내 방에 향사鄕思만 듬뿍 채워줍니다.
아직 변치 않은 풋향이군요.
옆집 소꿉친구 순이의 수줍은 웃음 같은,
아직 새파랗게 돋은 청순한 기억이군요.
나물 캐는 강반에 빨간 댕기 같은 노래.
부풀어 몽알지는 추억이
물올라 터지네요, 봉긋이
발가스럼한 속잎이 나를 원망하듯
눈 빨며 보조개 애교로 터지네요.
타향에 내가 너무 무정했나요.
창턱에서 고향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
황곡 박 영 록 (서울 서초구)
<월간문학> 시조 등단
씨얼문학회 회장
동인시조집《신서정》15권
<달집태우기>
둥근달 따 내려서 뒷뜰에 불 밝힌다.
댓 가리 달집 태워 풍농을 기원했지
첫 새벽 정화수 놓고 소원 빌던 울 엄마.
<세시음식>
오곡밥 나눠 먹고 부럼도 깨물었다.
더위도 팔아 보고 까마귀에 던져 주며
해맑은 귀밝이술에 칭얼대는 보청기.
<지신밟기>
대문엔 입춘축을, 연줄에는 소원 적고
쥐불에 풍물놀이 삶 이웃이 하나 되어
지신을 밟던 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백 목 련 白木蓮
석산 박 영 석 (서울 서초)
<문학세계><지구문학>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서초문인협회 회원
교교한 달빛 흐르는 적막한 뜨락에
아련한 자태
숨 죽여 살며시 옷 벗지 마라.
별빛 사라진 캄캄한 밤에
말없이 옷고름 홀로 풀어헤치고
우유빛 하얀 속살
보이지 마라.
못 견딜 그리움에 소리 없이 뒤척이는 밤
잠 깨지 못한 내 창문을
눈길 그윽이 무한정 엿보지 마라.
들뜬 계절에 은밀하게 스쳐가는 바람이었나.
진달래 개나리 꽃 흐드러질 때
한바탕 눈물만
꽃눈처럼 쏟아놓고
이토록 서러운 운명이란다.
남겨둘 비밀스런 아무런 사연도 없이
먼 길 황급히 떠나지 마라.
창밖의 봄
가은배 혜 영 (서울 서초)
서울시 공무원 퇴임
<한울문학> 시 등단
서울서초문인협회 총무
넘침과 모자람이
반복했던 수많은 날들
주머니 속 쓸쓸한 지폐 한 장 두고
술사야 하는 날이면
얼마로 자를 것인가.
수없이 칼질 해대던
그날들 긴 겨울이었건만
이제
시절 좋아 창밖은 봄인데
인생의 봄날은 아직도 먼 지
생의 무게는 여전하고
허리는 곧게 펴지기커녕
더 굽어져 가는 우리들 삶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버려야
화사한 봄 햇살처럼 가볍고
따뜻한 사랑만 무거워질까.
동 행 길
설란 백 덕 순 (서울 강서)
<한맥문학> 시 등
한맥문학가협회 이사
시화집《청산호의 노래》등
우리가 오늘 황혼길에서
삶이 무거워 비척거릴지라도
너 안에 내가 있고
나 안에 네가 있는
보석보다 소중한 인연 하나가
정갈한 삶의 의미가 된다.
막힌 벽 허물어지듯
가슴 열고 떠나는 자유여행
아내의 자리도 내려놓고
엄마의 자리도 내려놓고
하루 중에서
반 토막도 안 되는
너와 나만을 위해 준비한 시간
약속의 날이 저무는 길목에서
이 시대 너를 만난 건 행운이며
일평생 곁에 두어도 질리지 않을
사랑과 우정이 익어가는 동행길에서.
< 수필 >
불우不遇의 의미 해석
申 吉 雨 (서울 서초)
상지대 교수, 영서대 학장
중국 연변대 초빙교수
한국PEN클럽 이사
서초문인협회 회장 역임
마쯔시다 고노스케 씨는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 마쯔시다의 회장이다.
그는 부모가 일찍 죽자, 어린 나이에 자전거 점포의 점원으로 살았다.
뒤에 그는 전기에 관심을 두어 이 분야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570개의 계열사와 13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대기업 마쯔시다 전기회사를 건설하였다.
그가 크게 성공한 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불우한 처지였는데 무엇이 성공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첫째 나는 11살에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철이 들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나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셋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나는 세 가지를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하게 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노스케 회장보다 불우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자신이 불우하고 불행하다면서, 불만스러워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설령 불우해도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 불우하다고 불평불만하면 마음을 상하게 한다. 불우한 것 자체가 우리의 삶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우한 것을 감사해하는 것은 기운을 내게 한다. 고노스케의 삶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훌륭한 삶은 행복보다 불우와 역경 속에서 태어난다. ☺
목련꽃 필 때면
심 의 표 (서울 금천)
금천문협 회장
서울시낭송클럽 부회장,
한국세계작가회 부회장
시집『섬은 바다에 누워』
백의민족 혼불인 양
수줍은 미소로
희망의 기치 높이 들고
벌써부터 탐스러운 꽃송이
손 흔들어 사인 보낸다.
가슴깊이 솟구치는 애틋한 정
그리움으로 피워
하얀 속살 드러낸 화심
떠도는 구름떼 흔들어놓고
떠나버린 바람처럼
유유히 거니는 나그네 된다.
<수필>
먹자주의와 마시자주의
우 상 렬 (중국 연변대학)
문학평론가, 수필가
연변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연변작가협회 이사
내가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에서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일. 명절이 되면 베풀어지는 특식. 두말할 것 없는 당의 은덕. 아무렇게나 해주는 기숙사 식당밥에 진절머리가 난 우리는 이 특식을 손꼽아 기다린다. 특식, 특식이니만큼 시내 고급요리점에 가서 한바탕 맛좋은 요리 먹기. 물론 술도 마실 수 있다.
매번 특식일이 다가올 무렵이면 며칠 전부터 우리는 왁자지껄인다. 이번에는 어떤 요리점에 가서 무슨 요리를 먹겠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중구난방. 싸고 맛있고 환경이 좋은 것을 원칙으로 하여, 요리점과 요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대학원생들이 선정하도록 되어 있다. 모두들 제 흥에 들떠 특식일 며칠 전부터 만포식한 기분들이다.
특식 당일은 가관. 우리 학교는 조선족이 절대다수인 민족대학교라 대학원생도 조선족이 많고 한족(漢族)이 적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漢族이 오히려 소수민족이다. 그래서 漢族들은 자기네끼리 똘똘 뭉쳐 다닌다.
요리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漢族들은 자기네끼리 달랑 한 상 틀고 앉고, 우리 조선족들끼리는 몇 상을 차지한다. 우리는 대개 중국요리를 주문한다. 허기지고 출출하던 배를 달래기에는 그래도 중국요리 최고니깐. 중국요리는 지지고 볶고 달구고 하는 요란한 요리이니깐 상에 오를 때도 정해진 순서대로 한 가지 한 가지씩 오른다. 우리가 요리점에 가면 재미나는 광경은 바로 이 요리가 나오고 술잔이 돌기 시작해서부터다. 漢族들 상의 술은 잔에 부어 놓은 채 그대로. 그러나 요리는 들어오는 족족 없어진다. 조선족들 상 요리는 먹는 둥 마는 둥 그대로다. 그러나 술은 벌써 몇 순 배에 빈병들이 나돈다. 漢族들 상은 조용조용 말없이 먹기에 바쁘고, 조선들 상은 왁자지껄 마시기에 바쁘다. 漢族들과 조선족들은 선명한 대조― 먹자주의와 마시자주의다.
먹자주의자들은 民以食爲天할 정도로 육체적인 먹기에 신경을 쓴다. 補身주의자들이다. 마시자주의자들은 그때그때에 붕 뜨는 정신적인 마시기에 신경을 쓴다. 기분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먹자주의자들은 배불러야 되지만 마시자주의자들은 알딸딸해야 된다.
내가 조선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 이 점 또 한 번 여실히 증명되었다. 다른데 교환교수노릇도 마찬가지겠지만, 조선 교환교수노릇도 별로 할일이 없다. 연구는 제가 알아서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것. 하루에 하는 짓이란 주로 먹고 자고 노는 짓이다. 그러니 자연 술 퍼먹기다. 술친구도 절로 생긴다. 그때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딱 네 명 생겼다. 漢族들 둘, 나까지 포함한 조선족 둘. 식당에서 술은 안 줘도 반찬은 잘 나오는 편이다. 1인당 육류, 물고기류, 채소류 세 가지 반찬에 국, 조선에서는 매일 특식대우인 셈이다. 우리 조선족 교환교수들은 모두들 잘 먹었다. 그런데 漢族 교환교수들은 가지 수가 적소, 요리법이 단조롭소, 조미료가 적소, 하며 잘 먹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농민시장이란 데에 가서 반찬감을 사와서는 자기네들끼리 해먹었다. 그래서 조선족 교환교수들이, 사내자식들이란 놈들이 항상 채소구럭이나 들고 다니고, 참 꼬라지 좋다 하며 은근히 비웃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이 마련한 술좌석에 참가했다가 확실히 그들이 장만한 요리가 일품인데는 머리를 끄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좋은 요리를 갖추어 놓고도 술은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술이 고급술인데다 음식도 맛갈져 누가 그리 권하지 않았지만 혼자 술을 잔뜩 퍼마셨다. 눈이 휘둥그래지는 먹자주의자들. 자기네들은 영양가 높은 요리를 많이 먹기 위해 술을 안주삼아 조금씩 들고 있는데, 이 마시자주의자는 요리는 먹는 둥 마는 둥 술만 잔뜩, 그러니 바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며칠 후 내가 술을 냈다. 漢族 친구들은 독한 술은 잘 안 마시니 맥주로 하기로 했다. 맥주에 제격인 마른 명태, 낙지 좋은 걸로 한 구럭, 여기에 맛좋은 고추장도 준비했다. 전형적인 조선사람 술마시기법으로 꾸몄다.
그런데 그날 술마시기는 완전히 파투. 漢族 친구들이 마tu주고 먹어줘야지, 맥주는 몇 모금 마시는데 명태오리와 낙지 쪼가리는 무슨 나무껍질이나 씹는 듯 오만상을 짓는 것이 분명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먹자주의자들이 보기에 내가 차린 술상은 술상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술도 안 마실밖에. 나는 그날도 그저 나 혼자 내 멋에 마시고 떠들며 지랄. 나는 마시자주의자이니깐.
먹자주의자들은 먹자주의니 음식을 요란하게 장만한다. 음식재료도 많고 가짓수도 많고 조미료도 많고 요리법도 다양하다. 그러니 여자 혼자서 감당하자니 힘에 부친다. 그래서 남자도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는 것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먹자주의자 주방은 넓다. 남자들이 여자가 갖다 바치는 요리를 기다리다가는 배고파 죽기 십상이다.
마시자주의자들은 마시자주의니 먹는 음식을 간단히 장만한다. 음식재료도 많지 않고, 가짓수도 많지 않고, 조미료도 많지 않고, 요리법도 단조롭다. 조미료라야 기껏 간장 마늘 고추고, 요리법이래야 날것, 생것이 많고 그저 삶아 내거나 아무 것이나 한데 넣고 끓이는 것이 많다. 그러니 여자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요리를 감당할 수 있다. 요리가 빨리 나올 수 있으니, 남자들 도움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 좁은 주방에 남자들까지 끼어들면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구들목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있어도 된다. 옛날 할머니들이 남자들 주방에 들어가면 앞엣거 떨어진다며 주방 나들이를 경계한 것은 일리가 있다.
(2011. 5. 25.)
< 수필 >
나청호 선사의 불괴비첩 不壞碑帖
윤 철 환 (서울 강동)
서울시 서기관 정년퇴임
강동문인협회 회장
서울600년사 편찬위원
서울시 <市友> 창간주간
五友수필, 풍경소리 동인
1998년 어느 봄날, 서울의 동부지역인 강동구 송파구 하남시 등 옛날 광주지역의 서예인들이 벌이는 서예전이 하남시청에서 열려 들른 적이 있다. 작품관람이 끝나고 다과시간에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서울의 역사편찬에 참여한 이야기를 하자, 고 이훈종 박사가 “이것만은 꼭 서울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을축년 대홍수 때 지금의 잠실 일대의 난민 중 일부가 탈출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알게 된 봉은사의 나청호 라는 주지 스님이 뱃사람들에게 “저 난민들을 구조해오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하여, 뱃사람들을 모아 난민들을 구조한 인원이 700여 명이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왜냐 하면 『서울 六百年史』의 제4권(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의 역사편찬에 참여했고, 또 강남구와 송파구의 『區誌』의〈건설편〉을 집필한 나로서는, 비록 수재(水災)에 대한 필자가 따로 있었지만, 하나의 사찰에서 700여 명의 난민을 구조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고, 사실이라면 이를 빠뜨린 책임의 일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봉은사를 찾아가 종무실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내놓은 『봉은사지(奉恩寺誌)』를 보니 역시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내용이 너무 간략했다.
그래서, “그 밖의 증빙될 만 한 것은 없습니까?” 물었더니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한 석조비석 앞에 서더니 “이것을 보십시오” 하였다. 대본산 봉은사주지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大本山奉恩寺住持羅晴湖大禪師水害救濟功德碑〉였다. 비를 세운 발기인으로 광주 고양의 수해이재민대표 4개 지역의 5명의 이름과, 송덕요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乙丑七月 洪水懷襄 船浮蠶室 變桑而滄 七百八人 呼號蒼荒 我師慈濟 德不可忘“ 대략 을축년 7월, 산과 언덕을 뒤덮는 홍수를 무릅쓰고, 잠실에 배를 띄워, 뽕밭이 바다로 변한 상황에서, 708명이 살려 달라 아우성치는 것을, 우리 스승이 자비를 베풀어서, 건져준 덕 잊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 아래에는 비문찬서자(碑文撰書者)로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 송(頌),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서(書)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이재민구제공로자로 나청호 대선사를 비롯한 봉은사 스님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공덕비를 세운 시기는 수해가 있은 후 4년 만인 1929년 7월로 되어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이 당시의 지역관할관청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의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라니…. 요즈음 일이면 해외토픽감인데, 73년 전 일이라니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종무실로 돌아와 좀 더 구체적인 자료는 없는가 물었더니, “부주지 스님이 『不壞碑帖(불괴비첩)』이라는 책을 가지고 계신데 오늘은 외출 중이니 내일 오시면 뵈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가 부주지 스님을 만나고, 『不壞碑帖』을 빌려 받아 복사본을 얻게 되었다.
책은 1925년,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되는 1926년에 발간된 잡지 <佛敎> 제26호 부록의 한자본(漢字本)을 한글 대역으로 1985년에 발간한 것이었다. 제호는 ‘너무나도 뚜렷한 공덕이므로 그러한 공덕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부쳐진 것이었다.
내용을 보니 당시의 독립운동가를 비롯, 명망 있는 종교인, 교육자, 문필가, 화가 등 108명이 각자의 소양에 따라 헌시(獻詩) 또는 헌화(獻畵) 한 점씩을 내놓아 그 공덕을 찬양한 것을 하나의 커다란 책으로 엮은 것이었고,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나춘봉(羅春鳳)씨의 목격담 등이 추가되어 있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홍수가 일어나서, 봉은사에서 가까운 부리(浮里=지금의 잠실종합운동장 부근)와 그 이웃인 잠실리, 신천리 등에는 옛날부터 홍수 때에 대비하여 일시적으로 올라가 대피할 수 있는 돈대를 조성 관리하고, 돈대 위에는 느티나무를 심어 정자나무 역할도 하도록 가꿔왔다. 그런데 1925년 대홍수 때에는 돈대도 물이 넘치자 난민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불어난 거친 물결에 언제 뿌리가 뽑혀 물귀신이 될지 모를 위기에 처한 난민들을 보고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소식이 이웃인 봉은사의 나청호 선사에게 알려지게 되자, 나 선사는 “죽은 사람도 천도하는 것이 불교인데 위급한 상황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불교의 도리가 아니다”라면서 뱃사람들을 모아 구조하려 하였으나 뱃사람들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뱃사람들이 떠내려 오는 목재를 건지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금 부리도와 잠실, 신천리의 돈대에 있는 나무에 수백 명의 난민이 올라가서 아우성치고 있는데 저들을 구조해 오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마침내 사공 다섯 사람이 배 다섯 척을 몰고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내리게 해서 봉은사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구조한 수가 708명이었다. 느티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마지막 구조선이 떠난 지 몇 분 후에 물살에 떠내려가고, 나머지는 남아 있었으나 잠실 신시가지 개발 때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당시의 신문을 통해 확인도 해 보았고, 1926년도에 발간한 잡지 〈佛敎〉제26호 부록도 동국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 복사했다. 그리고 이들을 근거로 서울문화사학회에 보고하여 〈서울文化硏究〉제2집에 수록했다. 그리고 2005~6년 2년간 송파문화원 주관의 송파구 옛모습 찾기 사업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때, 인천에서 사는 나청호 선사의 양손자를 찾아 『불괴비첩(不壞碑帖)』도 원본을 확인하고, 나청호 선사의 수해구조공덕을 기록으로 편입시켰다.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릴 수 있는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보존하게 한 셈이다.
내가 이 사실을 다시 세상에 드러내게 된 것도 하나의 인연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큰 보람과 함께, 그야말로 ‘글을 쓰는 기쁨’, 곧 ‘문열(文悅)’을 누리기도 했다.
(2011. 2. 28)
<수필>
엄 마 — 어머니
이 명 재 (서울 강남)
문학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1977년 동아일보 신춘 등단
한국문협 평론분과회장
중앙대 문과대학장
미국 하와이대 초빙교수 역임
‘어머니’란 말을 듣거나 그 글자만 보아도 나는 가슴부터 뭉클해지곤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여읜 모친 때문일까. 막내였던 터라 엄마 젖내랑 한복 모습이 떠오르고 문득 눈물마저 솟는다. 대머리에 서리까지 덮인 지금도 속절없이 울먹이고 눈두덩을 훔치다니.
예전과 오늘의 일상적 삶에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그 파생어는 다채로운 느낌으로 와 닿는다. 흔히 높낮이말로 쓰이는 엄마, 어머니, 어머님, 어미, 어멈. 그리고 각 지방별로 향토색 짙게 쓰이던 사투리 맛 또한 구수하기 그지없다. 어마니, 어무이, 오마니, 엄니, 어매, 에미, 엄씨 등. 우리 모국어는 실로 그 지방이나 대상, 상황에 따른 뉘앙스와 정감이 다채롭고 아기자기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못지않게 내가 좋아하는 표상의 기호이다.
특히 한반도 밖에 나가 사는 동포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은 눈물겨운바 많다. 십여 년 동안 세계 여러 현지의 한글문학을 조사, 연구하면서 내가 체득한 모국어는 그 이민자들에게 민족의 얼을 지탱해 주는 구원의 끈이라 싶었다. 구소련 카자흐스탄서 발행된 한글신문 <레닌 기치>에 실린 고려인의 시 경우는 잊혀 지지 않는다.
—로씨야의 ‘마마’보다도/ 카자흐의 ‘아빠’보다도/그루시야의 ‘나나’보다도/
조선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인 뿌리 더 깊다. /
— 김준의 <나는 조선 사람이다>에서.
척박한 이민족 틈에 모여 살다 일본유학 중이던 북간도 출신 조선족 청년도 그랬다.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그밖에도 모국이 그리워, 모국어를 지키려 동포들은 한사코 미주 한국일보, 뉴욕문학, 미주 펜 문학, 로스 안데스문학, 시드니 수필문학 등을 내는가 싶다. 나 또한 엄마, 어머니 그리움 못 잊어 이토록 한국문학에 매달려 사는지 모르겠다.
물 꽃
이 종 영 (경기 하남시)
<문학공간> 시 등단
한국공간시인협 사무국장
황희문학상 외 다수 수상
시집《들꽃 같은 사람》등
뜨락 호수에 떨어지는 두려움
동그랗게 그리다 마는
빗방울
창백한 꽃이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상처 맑아
안타까움 고요해지는
플루트 소리 나는
내 언니 가슴속 풍경 같은 꽃.
수선스러운 날
창가에 기대어 가만히 내려다보면
초연 묻게 하는
하나의 생명이다.
루트바 가는 길
林 方 春 (서울 서초)
서초문협 감사
<詩林> 동인회장
공저<한국대표 명시선집>
달나라로 찾아 온 듯한 민둥광야
바람 한 점 기척도 없다.
고요의 바다 계곡에는
돌맹이들 듬성듬성 기도 중
하늘마저 숨을 죽인다.
대한민국 암스트롱이 되어
도마뱀 한 마리라도 만나고 싶지만
숨쉬는 물체는 태양 뿐
멍한 기운마저 삼켜 버린
괴괴한 고요
마왕으로 변신하여
알라를 아는지
루트바가 어느 방향인지 대라는데
코란도
나침판도 없다.
시간이 멎어 버린 지평선 위
오싹하게 무너지는 하늘
혹성에 남겨진 듯
가위 눌린 나에게
술취한 마녀처럼 안겨 오는 태양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지도 않는
알라신을 찾는다.
* 루트바 : 이라크 서북부에 위치한 조르단, 시리아와의 국경마을
땅의 애가 哀歌
최 지 혜 (서울 중랑)
본명 崔吉順
<문예사조> 시 등단
백두산문학 사무차장역임
시집《슬픈노래의 계단》
경계선이 뚫렸다.
땅에 서기가 서린다.
폭설이 덮치고 칼바람이 불어온다.
나뭇가지 사이로 슬픔들이 밀려 온다.
언 땅, 꺼져 가는 생명들의
눈 부릅뜬 비명소리가
검은 환청으로 들려온다.
어디서 불어오는 바이러스인가?
몸서리치는 피울음, 사면으로 흩어지고
혀끝부터 식어 가는 통증들…
엄동설한에도 다칠세라 동물들은
자식처럼 키워 온 이들은 어이할까, 어이할까.
흙이 토하려고 요동친다.
별들이 숨어 울고
구름도 바람도 흔들리면
땅은 정녕 참아내지 못하리라.
생명을 할퀸 붉은 토악질
봄이 오면
땅이 어찌 감당할 것인가, 구제역의 재앙
경계선을 늦을 수가 없다.
봄비 나들이
최 은 혜 (서울 서초)
본명 최영순(崔英順)
한빛문학회 회장
한빛결혼연구원 대표
새벽잠 내려놓고
나들이 나온 당신
계곡 너머 겨울 잔설
목청 풀린 시냇물 소리에
해빙의 잠 흔들어 깨우시는 당신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속삭이듯 속삭이며
당신 따라온 나들이
흰빛으로 희생하고
노란빛으로 봉사하는
붉은 눈시울 가슴에 묻고
바쁜 발걸음 멈추고 나면
먼 산 끝에 꽃망울
봄나들이로 출렁이겠지….
두 손 모아
당신을 기다리며.
공 원 길
만청한 기 준 (서울 서초)
한국PEN클럽․ 한국문협 회원
서초문인협회 이사
<서울문학> 고문
소설 <6시 사랑> 등.
가는 해를 잡지 못해 한 해가 저물어
아쉬움에 공원길을 더 빨리 뛰었더니
해는 나보다 더 빨리 노을 속으로.
어제 해를 만나려 새벽잠을 설치고
이 일 저 일 욕심 속에 기다렸더니
새벽 공원길 작은 일에 아침해가 반겨.
날마다 돌아가는 마음에 바퀴가 되어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짐이 되어
새벽마다 기쁜 일에 생기가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