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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뉴질랜드 유학 생활
안 수 웅 부경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1973년 당시의 필자 뉴질랜드의 호수 가에서
1973년에 뉴질랜드 유학을 위해 콜롬보플랜 장학금을 받게된 사람은 모두 8명이었는데 그 중 4명은 먼저 떠나고 남은 4명이 같이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비행기 표를 받아서 김포공항에서 같이 비행기를 탔다. 모두들 외국여행은 처음이고 비행기도 처음 타 보는 것이어서 다소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비행기 안에서 식사와 음료수를 제공하는 줄 모르고 도시락을 준비해 오는 바보 같은 짓을 하였다. 대만에 약 1시간 가량 기착하였다가 홍콩에서 콴타스 비행기로 갈아타고 시드니로 향하였다. 중간에 뉴기니아의 포트모레스비에 잠시 기착하였다가 시드니에 도착하였다. 시드니에서 1박하고, 다음 날 에어뉴질랜드를 타고 웰링턴으로 향하였다. 웰링턴 공항에 내리니 외무부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외무부에 들려 필요한 수속을 마치고 우리들의 숙소인 콜롬보 플랜 호스텔에 데려다 주었다.
이 때가 한국에서는 2월 달이었는데 뉴질랜드에서는 초가을이었다. 콜롬보 플랜 호스텔은 대학 기숙사와 비슷한 시설인데 2층으로 된 목조 건물이었다. 이런 건물들이 홉슨 스트리트(Hobson Street)에 여러 채가 있어서 이번에 콜롬보 플랜 장학생으로 온 학생들이 거주하게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보를 나갔을 때의 거리 정경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주택들과 거리, 정원을 비추고 있었고, 새 소리와 상쾌한 공기가 나를 맞이 하였다. 길 건너 편에는 지붕 꼭대기 보다 더 키가 큰 나무에 온통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 마음에는 무슨 낙원에 온 것 같은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 지금까지 가졌던 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부터 37년 전 한국의 국민소득이 1000불 미만이었을 당시의 한국과 비교해서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내가 이번에 유학을 나온 것이 백번 잘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웰링턴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온 김영태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어떻게 재주가 좋아 미군 PX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의 근무 기간이 끝났으나 한국에 귀국하지 않고 태국, 호주에서 전전하다가 뉴질랜드로 흘러들어 왔다. 대사관에서는 이 사람 때문에 골치 아파 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비자 연장을 해 주어야 할 명분이 없는데 계속 눌러 앉아 있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국에 나와 보니 이렇게 살기 좋은지를 처음 알았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갈 줄을 처음 안 것은 월남 파병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가정을 바탕으로 한 유교 문화에서 살다 보니 가족 중에 누구라도 외국에 나가 걱정하며 살기보다, 못 살아도 한 동네에서 같이 얼굴 보며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컬럼버스가 파도와 싸우면서 미지의 세계로 보물을 찾아 나선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유럽 국가들은 땅과 부를 가지며 높은 문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뒤늦게 외국 생활을 알게 되었고, 서독에 광부로 가기도 하고,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은 월남에서 돈 버는 재미를 알아서 중동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중동에서 벌어 온 돈으로 한국은 현대적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내가 뉴질랜드에 간 이 시기가 외국 나가기를 배우기 시작한 때였고, 한국 기업도 외국에 공사를 수주하여 돈을 버는 방법을 알게 된 즈음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우리 일행은 빅토리아 대학에 가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ELI(English Language Institute)에서 첫주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 클라스는 약 50명으로 구성되어 3학기(1년)동안 같이 공부하였다. 구성원은 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월남, 싱가포르 각 국에서 온 8명 정도의 선발된 중등학교 영어교사 혹은 대학교수들과 필립핀, 피지, 뉴질랜드 현지에서 온 약간 명 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 클라스 메이트들은 아시아에서 왔다는 동질성 때문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한 학기를 지나니 각국에서 온 이 사람들이 마치 한국 사람인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친해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하루 6시간 씩 공부하고 매주 과목별로 시험을 쳤다. pass하지 못한 학생은 다음 번에 pass할 때까지 재시험을 쳤다. ELI 스탶들은 어떻게 적당한 수준의 프레셔(pressure)를 줄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 과정은 영어교수법, 언어학, 영문법, 노트테이킹(일종의 속기 기록법), story-writing, Little English, 영문학 과목들이었다. 여기서 받은 교수법 공부는 훗날 학생들과 교원들을 가르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었다. 따라서 쥐, 뱀 등도 없어서 캠핑 족들에게는 안심하고 캠핑을 줄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유럽에서 배가 들어오고, 유럽인들이 낙엽수들을 가져와서 심고, 사슴, 고양이 같은 동물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들이 서식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북미대륙과 달리 원주민인 마오리 족과 조약에 의해서 상호공존하는 정책을 썼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국민으로 인정되어 유럽인과 동등한 혜택을 누리고 있고, 뉴질랜드의 국어도 영어와 마오리어로 되어 있어 인종차별 정책도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네델란드의 항해가 타즈먼(Tasman)이었다. 그는 1642년에 이 땅을 처음 보았을 때 이 땅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남쪽의 커다란 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발견으로 네델란드의 항해가들에게 이 새로운 땅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지도에 Nieuw Zeeland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뉴질랜드를 본격적으로 탐험한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었다. 쿡은 영국 왕실협회의 명을 받고 94명의 선원을 태우고 1768년 8월 26일 플리머스를 떠나서 남아메리카 칠레 남쪽 끝 혼 곶(Cape Horn)을 돌아서 태평양에 진입하였다. 타히티에서 4개월을 보낸 후 배는 지도에도 없는 남쪽 바다로 향하였다. 유럽인들은 태평양 남쪽에 커다란 미지의 대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1769년 10월 6일 드디어 날카로운 시력을 가진 니콜라스 영(Nicholas Young)이라는 12살 난 소년에 의해서 이 땅이 처음 목격되었다. 이틀 후 쿡 선장이 처음 육지를 밟았고 마오리 족과의 충돌이 있어서 원하는 보급품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쿡 선장은 이 만을 Poverty Bay(가난의 만)이라고 이름지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발달한 도시가 오늘날의 기스본(Gisborne)이다. 기스본 해안에는 오늘 날 쿡 선장의 동상이 서 있다. 쿡은 1770년 3월까지 약 5개월간 뉴질랜드 해안을 탐험하였으며, 뉴질랜드가 남쪽의 미지의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섬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1772년에 쿡이 뉴질랜드를 2차 탐험을 하였을 때 뉴질랜드를 남쪽과 서쪽을 탐험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 유럽인들인 생각한 남쪽 미지의 대륙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776년에 그는 3차 탐험을 하며 1777년 2월까지 뉴질랜드에 머물다가 북 쪽으로 향하였다. 그는 1779년 2월에 하와이에서 섬 원주민들과 충돌로 사망하였다. 쿡선장은 3차례의 탐험에서 도합 328일간 뉴질랜드에서 머물렀으며 뉴질랜드의 자연과 원주민 마오리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탐험으로 영국이 뉴질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기여하였고, 1840년 2월 영국과 북섬의 대표적 추장들과 와이탕기(Waitangi)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국이 뉴질랜드에 대한 영유권(sovereignty)을 정당화하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의 신기한 경험 하나는 대학 클리닉에 가서 진찰 받은 경험이었다. 의사를 만나고 처방을 받아 병원을 나올 때 카운터에서 얼마냐고 물으니 직원이 돈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그냥 나오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그 처방을 들고 시내 약국(약국을 Chemist라 불렀다.)에 갔다. 약을 받고 얼마냐고 물으니 돈은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역시 돈을 내지 않고 나오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뉴질랜드는 북구의 스웨덴, 노르웨이 등과 같이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체험해보니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제도를 가지려면 봉급자들이 소득 정도에 따라 고율의 세금을 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뉴질랜드 외무부는 콜롬보플랜 학생들에게 친절한 프로그램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뉴질랜드는 3학기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기 중간에 두번의 짧은 방학이 있었다. 첫 방학 때는 50명 클라스 전체가 버스를 타고 북섬 여행을 하였다. 버스 비와 숙식비 모두 뉴질랜드 정부가 부담하였다. 이 여행은 각 국에서 온 이질적인 우리들이 친구가 되는 좋은 기회였다. 버스 안에서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민요를 배워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라사사양이 라사사양 사양이 . . .”로 시작하는 노래로 한국의 아리랑과 같은 국민민요였다. 영어를 제일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은 말레이시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어가 국어처럼 유창하였다. 그 다음으로 영어를 잘 하는 그룹이 싱가포르인들이었다. 싱가포르인들은 학교에서 영어 몰입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어의사 표현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자신있는 영어를 하였다. 월남인들은 두명을 빼고는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 때 월남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군대에 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월남에서 온 이들은 모두 천재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교사로 근무하면 군입대가 면제되었기 때문도 있었고 전쟁 중에 교사직이 가장 안정된 직업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인제들이 지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시험 때 가장 먼저 합격하는 이들은 보통 월남인들이었다. 영어 스피킹을 제일 못하는 그룹이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시험 때는 모두들 잘 해 내었지만. 우리는 마오리 회관에서 자고, 마오리 마을에 초대되어 마오리 음식도 먹고, 마오리 춤도 관람하였다. 온천으로 유명한 로토루아(Rotorua)와 와이또모 동굴,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펄프공장 견학, 등 오늘날 한국 관광회사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곳은 대부분 관광하였다. 두 번 째 방학 때는 기스본으로 향하였다. 기스본 로타리클럽 초청으로 1주일간 무료 숙식을 하며 문화 체험을 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625전쟁 참전 용사의 가정에 초대되었다. 그는 거대한 양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운전하는 랜드로바 짚차를 타고 양농장 산 언덕을 오르내리며 양떼들을 구경하였다. 산비탈 몇 개와 냇물을 포함하는 큰 농장이었다. 그는 산돼지들이 양떼를 해치기 때문에 산돼지 사냥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산 언덕에서 재빨리 산돼지를 발견하고 총을 겨누어 한방에 그를 잡았다. 그날 저녁 산돼지 파티를 하고 한국전 이야기도 하면서 그의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며칠 뒤 올 때는 돼지고기 한 봉지 씩을 받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3학기 중에 한 달은 오클랜드 대학 사범대학에서 실습을 하였다. 학생들이 매우 친절하게 학교 안내도 하고 워크샾도 하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사가 되는 과정을 비교해서 배울 수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오클랜드 일대를 같이 다니며 젊은이들 답게 어울렸던 추억이 새롭다. 1년도 후딱 지나가 버렸다. 우리는 ELI에서 쉬는 시간에 언덕에 앉아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광경을 보며 6개월, 5개월, 4개월 하면서 남은 일수를 헤아리고 귀국 행 비행기 탈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좋아했는데 어느덧 즐거운 추억을 뒤로하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돌이켜 보면 이번 유학동안 우리는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가고 오는 경비 이외의 일체의 경비를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지원 받았고, 체류동안 외무부로부터 받은 여러가지 친절한 프로그램들, 교수진의 친절과 동남아에서 온 클라스메이트들과의 유익한 교류, 이런 것들로 나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 경험은 후일 후일 미국 유학을 위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취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Secondary Teachers College The University of Auck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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