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동시에 듣기
티크 나트 한 스님의 시(詩) 한 편을 소개합니다. 티크 나트 한 스님은 베트남 사람인데 프랑스에 살고 있는 평화운동가입니다. 이 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peace maker)"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시는 그 분이
40년 동안 지은 시들 가운데서 106편을 골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는데(1993), 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내일 내가 떠나리라고, 그렇게 말하지 마셔요.
오늘도 여전히 나는 도착하고 있습니다.
깊게 들여다보셔요, 순간마다 이렇게 나는
봄 나뭇가지에 돋는 새싹으로,
보금자리에서 노래를 배우는
여린 날개의 앳된 작은 새로,
꽃의 심장에 들어있는 쐐기벌레로,
돌 속에 숨어있는 보석으로, 도착합니다.
울기 위하여, 웃기 위하여,
두려워하고 희망하기 위하여, 나는 웁니다.
내 가슴의 박동소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요 죽음입니다.
나는 강물 위에서 몸을 바꾸는
한 마리 날도래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날도래를 삼키려
물위로 낮게 나르는 새입니다.
나는 깨끗한 연못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입니다.
그리고 나는 소리도 없이
개구리를 삼키는 바로 그 풀뱀입니다.
나는 대나무 막대기처럼
뼈와 살갗만 남은 우간다 어린이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간다에
전쟁무기를 팔아먹는 무기상(武器商)입니다.
나는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났다가
해적한테 겁탈 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해적입니다.
볼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굳어진 심장의 해적입니다.
나는 막강한 권력을 움켜잡은
공산당 정치보위국 요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며 인민을 위해
'피의 대가'를 치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의 기쁨은 봄날처럼 따뜻하여
대지를 꽃망울로 덮어줍니다.
나의 아픔은 눈물이 강이 되어
드넓은 바다를 가득 채웁니다.
부디 나의 실명(實名)을 불러주셔요.
그래서 내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동시에 듣고
내 기쁨과 아픔이 하나임을 보게 해주셔요.
부디 나의 실명(實名)을 불러주셔요.
그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내 가슴의 문을,
자비(慈悲)의 문을,
활짝 열게 해 주셔요.
―「부디 나의 實名을 불러 주셔요」
시(詩)가 너무 벅차서 뭐라고 설명의 말을 붙일 수가 없군요. 시집에 첨부된 해설을 보니 이 시는, 시인이 베트남의 보트 피플(boat people, 베트남이 통일된 뒤에 배를 타고 조국을 탈출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일하던 무렵인 1978년에 씌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화란 암
스텔담의 코스모스 센터에서 이 시를 처음 낭송할 때 그 자리에는 미국의 반전운동가
다니엘 메리간 신부도 있었다는군요.
열두 살 소녀가 캄보디아 해변에서 해적들에게 겁탈을 당하고 자살한 사건이 뉴스로
보도되어 온 세상이 캄보디아 해적들을 비난하고 저주할 때, 티크 나트 한 스님은 그
비난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까닭을 묻자, "나도 그들(해적들)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들과 똑같은 짓을 했을 터인데 어떻게 그들을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답니다. 어쩌면 이 시는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수도(修道)를 생(生)의 목표요 수단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큰 복(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도란 무엇일까요? 침묵과 명상과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수도일까요? 그렇겠지요. 그러나 과연 침묵 그 자체가, 명상 그 자체가, 기도 그 자체가, 노동과 봉사 그 자체가 수도의 모든 것일까요?
수도 그 자체를 위하여 우리는 수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예술을 하듯이, 봉사 그 자체를 위하여 봉사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황송하게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한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노동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느님처럼 온전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온전하다는 게 뭘까요? 그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들어있는 무엇, 그 무엇이 곧
온전함이 아닐까요?
겁탈 당한 베트남 소녀만 가지고는 '온전함'이 이루어질 수 없지요. 아프고 슬픈 일이
제외된 '온전함'은 없습니다. 내가 온전함을 이루려면 내 속에 해적도 들어 있고 공산당 정치국 요원도 들어있고 풀뱀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과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라고 하는 독립된 존재가 따로 있다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과연 수도자라면, 기도와 침묵과 묵상과 노동과 봉사를 한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모든 '경험'을 통해 극(極)과 극(極)을 한 몸에 품는 연습을 함으로써
마침내 하느님처럼 온전해지는 데 궁극의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보기 싫은 내 모습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껴안아 주기! 우선 이것부터 착실하게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동시에 듣고 기쁨과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온 세상을 끌어안아 마침내 온 세상과 하나로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