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전 5세기경부터 기원 초까지 일 천년 동안의 찬란한 비잔티움제국을 20세기말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 소피아성당을 보프러스 해협 건너 쪽에서 바라보았다. 멀리 지붕꼭대기의 돔이 뿌연 안개에 가려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개가 겹치고 빛나는 태양 아래서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까운 거리의 블루 모스크가 터키석처럼 아름답게 자태를 나타냈다. 다른 종교의 세계가 나란히 공존했다.
아직 다 복원되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이스람 교도들이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다. 성당의 안팎을 온통 옻칠해서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천년의 문화 및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멀리서 보고 느꼈던 감동보다 소피아성당은 신성한 분위기가 안팎으로 강하게 넘쳤다. 오늘의 터키인들은 여기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찾아낸다. 역사를 보존 시켰던 벽의 옻칠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었다. 옻칠한 덧칠 속에 5백년 동안 숨겨졌었다.
모자이크 화와 프레스코화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츰 복원되고 있는 성당의 내부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작은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건물과 색깔의 구성요소에 따라 나타나는 빛깔이 선명했다. 또한 모자이크벽화의 표현방식은 색채효과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더욱 신비한 점은 그림의 형태이다. 3차원적 표현방법을 원근법이나 입체법을 쓰지 않았다. 모두 평면으로 처리했다. 그런 대도 신비감을 더욱 강렬하게 나타냈다.
소피아성당이 전체적으로 모자이크 화와 프레스코 화로 치장되어 있다. 성당 안에 들어서거나 바깥쪽에 있거나 모든 장소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전체적으로 압도했다. 오늘날까지 소피아성당과 블루 모스크는 나란히 서 있다. 기독교의 콘스탄티노플과 이스람 교의 이스탄불이 나란히 공존한다. 이 곳이 우리에게 증명한 건 나와 다른 사람들도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확인이다.
이스탄불은 박해가 아닌 관대와 파괴가 아닌 포옹이라는 감동으로 5백년 전부터 존재했다. 양보와 관용의 도시이며 동서고금이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대도시였다. 동진 하는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더 발전한 비잔틴문명의 절정이다. 소피아성당은 로마에서 옮겨 온 옴파리온 즉 세계의 중심지였다. 신의 자리는 한 개의 기둥도 없이 56미터 높이에 직경 32미터의 돔이 세워진 불가사의한 건물이었다. 그리스의 점령에 따라 그리스문화가 왕성하게 발전되고 아시아의 가장 찬란한 문화권을 형성했다.
이 그리스문화권 중심지는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더구나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학은 물질적인 세계보다도 정신세계를 더 중요시했다. 비잔틴문명을 계승하여 찬란하게 발전 시켰다. 그러나 동로마제국도 15세기가 되어 술탄 마호메트 2세에 의하여 마침내 함락되었다. 술탄은 곧바로 소피아성당을 모스크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파괴를 금지시켰다.
그 때까지 이집트-누비아-이디오피아-시리아-팔레스티나-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토니아-러시아까지 문화권을 형성했었다. 이런 문화가 그리스어와 문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그리스문자는 크레타 문자가 발전하여 이루어졌다. 그리스문자가 발전하여 유럽의 알파벳문자를 만들었다. 문자의 발전과정은 팔레스타인 초보문자에서 페키니아 문자를 거쳐 크레타문자, 그리스문자, 로마식 알파벳문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장대한 역사는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한 쪽,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에 의하여 변천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완성이 된다.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는 결국 위대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룩됨을 증명했다.
톱카프 궁전이 가장 화려했다. 소피아성당의 뒤편으로 곧게 뻗힌 길 끝에 제국의 문이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언덕 끝에 정원을 중심으로 서 있는 다양한 건물이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수목들 속에 가려진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자체가 박물관이었다. 진기한 보석들이 가득하다. 동유럽 전체와 아라비아반도와 북 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의 일부까지 지배했다. 술탄들이 헌상을 받았거나 거두어들인 게다.
에메랄드 방은 세 개의 큰 에메랄드와 톱카프 단검과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 등 깊은 초록의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반짝인다.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장식된 물병에 초록의 에메랄드가 더 곱게 빛난다. 특히 스픈의 다이아몬드는 마치 투명한 눈물방울과 같다. 할렘의 내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식과 호화로운 가구들이 잔뜩 들어찼다. 술탄의 모친과 네 명의 부인과 첩들이 사는 곳으로 나눠졌다. 지금도 잘 보존된 욕실과 미려한 뱀 문양의 욕조에서 정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이 궁전의 정원 끝에 있는 금빛 지붕의 테레스에 올라섰다. 올라서서 궁전의 상상을 초월한 풍경과 그 현란한 어지러움을 보포러스 해협의 바다에
우리는 마차를 타고 보포러스 해협을 따라가며 숙소 주변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교를 건너 아시아 쪽으로 갔었다. 멀리 시가지 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이스람 사원들의 둥근 돔들과 첨탑들이 시야에 뚜렷이 들어왔다. 이 옛 지역은 모스크들이 많이 산재했다. 이스탄불의 다른 한 쪽으로 소아시아의 무역 거점이었다. 바그다드철도의 시발점인 하이달파샤 역은 웅장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역의 웅성거림과는 달리 위스퀴타르 지역은 한산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서나 대중가요처럼 친근하게 들었던 위스쿠타리였다. 터키군인들이 부르던 터키민요에 의하여 귀에 익었던 무역의 도시 위스퀴타르 말이다. 우리의 귀에 친근한 노래 소리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유럽 쪽은 번잡하고 활기가 넘쳤다. 눈을 들면 보이는 건 모스크의 지붕과 첨탑뿐이었다. 모스크의 지붕인 돔의 반원형은 신의 자리였다.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스탄불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원 은 블루 모스크였다. 독특한 문양으로 내벽을 장식한 푸른 타일은 연속된 아름다움을 지녔다. 나이가 들수록 푸른 색깔은 이상하리 만치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아득한 천장은 신비의 푸른빛이 가득 떠돌았다. 그 천장을 한참동안 바라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기도를 드리고 싶어진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아니라 깊은 신비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의 내부는 2백8십8 개의 창문으로 절제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빛줄기와 더불어 아흔 아홉 가지 푸른 색깔이 공간으로 현란하게 채색된다. 푸른 터키석처럼 선명한 색깔로 카페트가 바닥에 짙게 깔렸다. 가지각색의 빛깔과 무늬가 정성스럽게 짜여졌다.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한 폭의 거대한 그림 위를 걷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발 한발씩 걷는 게 몹시 조심스럽다. 가만히 앉아본다. 카페트가 공중으로 휙 날아오를 듯하다.
블루 모스크는 완벽한 일체의 집약이었다. 의도적인 공간배치와 구도였다. 다른 사물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이 숭배하는 신의 말씀에 따른 정성이다. 또한 너와 나, 우리를 넉넉한 포용력으로 감싸 안았다. 이렇게 이스탄불은 다양한 문명의 공존과 융화를 실천하고 관용했다. 모스크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면 넓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 잘 조성되어 있다. 많은 시민들과 지친 여행객들의 편안한 휴식처였다.
빈 빌 딜레크 지하 저수조는 거대한 물 저장소로써 현재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 지하궁전의 입구로 들어가 밑 층계로 내려간다. 지하공기가 섬뜩할 정도로 서늘하다. 조심스런 발길로 들어가면 불가사의한 기하학적 공간이 나타난다. 우리는 어둑한 조명 아래 줄지어 선 기둥 사이를 걸어간다. 우리는 천일주라고 이름한 지하세상의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걷는다. 머리 위쪽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린다.
맨 안쪽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녀 메두사의 머리가 옆으로 뉘어져 있다. 누운 메두사를 본 순간 돌이 된다는 전설 때문에 가장 깊숙한 안 쪽에 숨겨 놓은 듯하다. 바닥에 가득 물이 고여 있어 지하내부는 차가운 습기가 가득히 찼다. 그러나 잠깐 땀을 식히며 쉬어 가기에 이 보다 좋은 장소는 없다. 지하 카페에서 터키 전통차를 마실 수 있어서 운치가 돋보인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이 더 밑으로 가라앉는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음악이 더 나직하게 퍼져 간다.
위대한 역사의 도시답게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일부러 눈에 잘 보이게 드러내지 않았다. 가능한 겸손하게 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숨겨 놓은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큰 시장이라는 그랜드 바자르를 들어서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부분 같은 품목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들이 밀집해 있어 쇼핑하기에는 불편이 없다. 우리는 블루 모스크가 가까운 동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짚어 나왔으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미로처럼 얽힌 실내시장들은 아랍권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아무 것도 걱정할 일은 없다. 골통품 가게와 금은 세공점과 보석상이 제일 많다. 여기서 제일 눈이 많이 가는 보석은 푸른 터키석이다. 그러나 우리가 터키석이라고 부르는 푸른 돌은 이란이 원산지이다. 이 원석을 가져다가 세공한 다음 터키상인들이 도맡아 전세계 보석시장에 무역을 했다. 여기 저기 터키석 상점들이 즐비하다.
여름철을 시원하게 해 줄 것 같은 푸른 색깔에 빠져 내 여자들에게 선물할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을 골랐다. 목걸이는 길이가 아주 짧다. 그대의 가늘고 긴 목을 조일 듯하다. 2 개을 한꺼번에 이어 놓으면 좋을 성싶다. 하나씩 더 살 수 밖에 없다. 호텔에 돌아와서 계산하다 보니 여행자수표 가운데 일천 불 짜리가 없다. 아무래도 터키석을 살 때 계산이 잘못된 걸 알았다.
다시 찾아갔을 때 주인은 내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석을 파는 사람은 역시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세계시인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 시인들이 모여 일주일간의 문학행사였다. 푸른 터키석의 빛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그러움과 포용의 찬란한 빛의 도시에 모여 살고 있었다. 언제 또다시 찾아갈 수 있을런지. 그 때 젊은 주인이 고맙다. 친절하고 착한 가게 주인이 생각난다.
이스탄불은 에게해를 순회하며 오가기가 편리하다. 특히 문명의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지중해 주변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트로이 지방을 찾거나 노아의 방주를 찾아 떠나는 출발지이다. 푸른 바다와 메마른 대지와 만년설이 쌓인 산을 만난다. 레스보스 섬이나 사모스 섬 등에 보다 가까이 가볼 수 있다. 에게해의 햇빛은 강하게 내려 쏟는다.
그러나 직사광선을 피해 그늘 밑에 앉자 있으면 온도가 낮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다. 해변을 따라가면 고급 레스토랑과 바, 카페가 계속된다. 터키의 도시와 마을에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만난다.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을 볼 수 있으며 새벽마다 이스람 교도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쉴새없이 한 자리를 맴도는 남자들의 춤은 어지러웠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지루함은 관객들을 객석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게 했다. 이 공연을 끝까지 관람하기는 어렵다.
춤은 일상처럼 얼마든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초대를 받은 관객들은 정중하게 관람한다. 미처 감동을 받을 수 없는 춤의 한계였다. 밸리 댄스는 더 현기증이 났다. 기막힌 밸리 댄서는 터키여자가 아니고 유럽인이었다. 마지막 날의 늦은 만찬은 터키식사였다. 우리 입에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꼬치구이 요리가 맞았다. 터키요리는 향신료와 향기야채가 많았다. 그 가운데서 토마토 소스는 맛이 좋다. 올리브 기름을 넣으면 남부 프랑스의 요리 맛이 난다. 내가 평소 즐겨 먹는 요구르트가 있었다. 산 양젖으로 만들었는데 독특한 신맛이 났다. 식탁에 풍부한 과일이 많다. 채리, 포도, 수박, 복숭아, 토마토 등이 쌓였다. 여행하는 동안 식사에 잘 적응지 못하는 사람도 식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첫댓글 터키역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방어할 수 밖에 없엇던 강력한 흉노족이 그 조상이더군요. 우리 한민족과도 먼 사촌이 되구요. 터키역사는 바로 세계사란 생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