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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고지(Bunker Hill ; 800고지) 전투
김 충 영 KISTI 전문연구위원/국방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철수를 거듭하던 한국군은 UN군의 도움으로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 3개 사단을 격멸하여 북한군의 주 전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여세를 몰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일거에 38선을 돌파하여 승승장구 북으로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닥아 오는 듯했다.
하지만 UN이 38선을 넘어 진격해 오면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라는 것을 당시 중공군 참모총장대리었던 聶榮瑧(니에중챙)이 당시 주중공 인도대사 Pannikar에게 거듭 경고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 개입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하나의 엄포(bluff)로 도외시 해버렸다.
38선을 넘은 한국 국군군은 골짜기 길을 따라 압록강으로 북진하여 먼저 압록강으로 도달하려고 하고 있을 때, 중공군은 1950년 10월 12일부터 빈약한 무기와 장비를 지니고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능선을 타고 낭림산맥과 묘향산맥을 거쳐 청천강 지역까지 침투하여 동년 12월에 한국군과 UN군의 후미를 내리쳤다. 한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의 개입에 속수무책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와중에 8군 사령과 워커(Walker) 중장이 차량사고로 순직하고 리지웨이(Ridgway) 장군이 8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0년 12월 말에 38선은 다시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고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아무 대책 없이 철수하던 한국군과 UN군은 안성과 원주를 잇는 선에서 전선을 회복하고 Thunderbolt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하여 2월 13이에 양평-관악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한강을 도하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개략적으로 양평과 여주를 잇는 선 좌측은 미 9군단이 양평과 여주를 잇는 선 우측에서 평창과 인제를 있는 선은 미10군단이 담당하고 있었고 더 동쪽으로 roudup 작전의 일환으로 한국군 3군단이 반격을 하여 대관령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2월 공세로 맞대응에 나섰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13개 사단은 홍천-힁성-원주를 축으로 2월 공세를 폈다. 중공군은 횡성에서 이 지역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을 몰아붙이고 평창으로 진출했다. 연이어 제8사단에 인접해 있는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도 중공군 공격에 밀리기 시작했다. 미 제10군단 우측이 이렇게 밀리게 되자 UN군 전선은 지평리 우측면이 적에게 노출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지평리는 UN군 전선에서 견부(肩部)가 되어 포위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다시 서울을 탈환할 기회임을 알고 이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고수하여 역습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작전구상을 실천에 옮겨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공격기세는 꺾었다.
6⦁25전쟁을 대부분 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등을 크게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국면전환 전투는 지금까지 설명한 두 전투 즉 다부동 전투와 지평리전투이다. 다부동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의 성공으로 한국군과 UN군이 공격으로 전환했고, 지평리전투는 중공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한국군과 UN군이 공세로 전환한 전투이다.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벙커고지전투로 6⦁25전쟁 중 마지막 국면전환 전투이다.
1951년 2월 중공군의 기세를 꺾은 유엔군은 다시 반격에 나서 4月 21日에 문산 - 동두천 - 화천 - 대포리를 연하는 Kansas선까지 진격하였으며 이에 중공은 4월 제 1차 춘계공세를 1951년 4월 22일 해가 지고 만월이 떠오르자 전 전선에 걸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12개군 약 36개 사단을 문산과 화천 사이에 이르는 약 110km정면에 그리고 북한군을 포함하여 약 12 내지 14개 사단을 화천 동쪽에 각각 전개하여 서울에 주공을 두어 서울을 양익포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지휘관은 공산군 70만명 가운데 약 반수를 이 공격에 참가시켰으나 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포병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전차수도 적고 공군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술도 전과 다름없이 나팔불고 북치고 조명탄을 올리면서 보병집단의 인해전술로 돌격을 반복하면서 소부대가 아군의 간격으로 침투하는 식을 되풀이하면서 야간공격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유엔군은 서울 북방 불광동(仏光洞)과 퇴계원(退溪院)을 연하는 Golden선과 no name선을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반격준비를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중공군은 병력을 보충하여 제2차 춘계공세를 5월에 실시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4월 전투결과 유엔군의 서부지역의 전투력은 두텁고 동부지역의 전투력은 얇게 배치되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인 5월 공세를 분석평가 하기 위해 4월말에서 5월초까지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자. 당시 미국의 군사정책은 중공 및 북한과 휴전하는 것이었으며 군사전략도 중공 및 북한이 승리를 단념케 하여 휴전협상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구상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엔군은 불패, 불철수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 Golden 선과 no name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연이어 반격을 하여 38선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유엔군은 4월 30일에서 5월초동안 소강상태에 대한 적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의정부, 포천, 가평, 춘천, 인제 및 속초지역을 광범위하게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는데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으나 5월 10일에 북진한 각 정찰대는 갑자기 치열한 저항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기간 중 다음과 같은 정보 및 첩보가 유엔군사령부에 들어왔다.
① 철의 삼각지대(철원, 평강 그리고 금화)와 고성부근에서 양구 - 인제지구로 향하여 남하하는 보급종대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② 38선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고 있는 대부대가 끊이지 않는다.
③ 공군세력도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④ 5월 10일과 15일 사이에 중공군 5개 군을 동진시켜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정면인 인제(隣蹄)지역에 전개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⑥ 일본 아사히신문은 다음과 같이 중공군 이동사항을 기재하였다.
5月 12日 : 중공군 화천으로부터 남하
5月 14日 : 중공군 공세재개징후, 중공군 중부에서 이동, 만주에 상당수 집결
5월 11일과 12일경에 미 제8군은 각종 정보자료를 종합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은 5월 중순 주공을 중동부 산악지대로 지향하여 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한편 50년 말 청천강 강변전투에서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때에 수십만 대군을 이동시키면서도 기도비익을 할 수 있었던 중공군이 새싹이 나는 봄 계절에 왜 그와 같이 기도를 폭로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으며 그렇다면 서울로 주공을 두고서 하는 작전을 기만하고자 하는 술책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 4월 공세 때 서울을 주공으로 공격했으나 좌절되었으며 지금까지 전투를 두고 볼 때 산악지역전투에서 유리하였기 때문에 산악이 많은 중동부지역에서 주공을 두고 5월 공세를 취 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중공군이 택할 수 있는 방안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안, 주공을 서울로 두고 조공을 중동부지역으로 하여 4월 춘계공격 때와 같은 방법으로 공격한다.
2안, 중부(가평과 양평연하는 지역) 산악지역을 주공으로 하고 동부지역과 서울지역을 조공으로 하여 전면공격을 한다.
3안, 중부(가평과 양평연하는 지역)산악지역을 조공으로 하되 중동부 지역(인제지역과 양구지역)을 주공으로 하여 홍천(洪川)이나 횡성지역에서 유엔군을 포위 섬멸한다. 이때 서울정면과 춘천정면은 견제만 하도록 한다.
이때 유엔군은 Golden 선과 no name 선에서 진지방어를 준비 중에 있었으며 4월 전투 후에 방어전투력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지역에 치중하여 배치하고 있었으며 이때 가용한 전투력은 미 6개 사단 및 영2개 여단이 전방에 배치되어 있으며, 군 예비로 미 제3사단이 서울지역을 방어하는 미 제1군단지역에 위치해 있고 미 제187공수단이 가평과 청평지역을 맡고 있는 미 제9군단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었다. 그리고 전라도지역에 국군 제8사단이 공비토벌 중이었다. 중공군의 4월 공세 결과 유엔군의 배치상황은 <그림 1>과 같다. 이러한 상황 하에 유엔군은 가용 예비대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예비대 운용은 진지전(전선방어)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부산방어선에서 실감했다. 이때 Walker 장군은 역습만이 방어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고 예비대를 확보하는 일과 예비대 투입시기를 결정하는데 지휘통솔의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낙동강 방어전을 성공시킨 Walker 장군의 매일 아침 인사가 오늘은 어느 정도의 예비대를 확보해 두었나? 라고 예하 지휘관에 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진지전(전선방어)에서 예비대 운용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돌파구의 견부(肩部)를 고수하는 것이다. 견부 고수(固守)는 부산방어전서 영천이 돌파 당할 때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가 영천동북부를 고수하여 북한 제15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국군 제11연대와 제19연대가 돌파구 좌측을 막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견부고수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 예가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Ridgway 장군과 미 제8군사령관 Van Fleet 장군도 마차가지로 항상 입버릇처럼 “만난을 무릅쓰고 돌파구의 견부를 지켜라. 그리하여 적의 침입을 제한하라…”고 훈시했다고 한다. 견부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매설하고 추가하여 화망을 구성해야 하며 탄약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유엔군은 no name 선의 진지를 5월 14일까지 강화하였다.
그러면 유엔군의 가능한 예비대 운용방안을 <그림 1>을 참고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안, 군 예비인 미 제3사단(서울지역에 위치)과 미 제187공수단(楊平地域에 위치)를 현 위치에 두고 중동부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명령을 내리고 하시라도 즉각 이동할 수 있도록 하고 공비토벌 중인 국군 제8사단을 군 예비로 활용토록 한다.
2안, 서울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미 제1군단에 위치하는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 중에 하나를 차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전용한다.
3안, 군 예비인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수단을 처음으로 중동부로 이동시켜 중동부로 이동시켜 중동부지역의 예비대로 운용토록 한다.
備考 : 8師團 4月 15日부터 5月 11日 間에 걸쳐 湖南地方의 共匪討伐中
出處 :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韓國戰爭(8), 陸本 軍事硏究室
<그림 1 > 共産軍의 4月 攻勢(4月 22日∼30日)
그런데 유엔군 2안은 중공군이 10일 이내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되므로 미 제1사단의 전선에 배치된 1개 사단을 중동부로 전환시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서울을 주공으로 해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2안은 중공이 곧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 하에서는 불리한 방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군 1안은 우선 서울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고 중공의 주공이 중동부지역으로 확실히 판명될 경우 이 돌파구를 2, 3일 이내 저지 가능하다. 더구나 제공권을 완전히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예비대를 이동하여 돌파구에 투입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 유엔군 3안은 미리 군예비를 중동부지역으로 이동시켜 이 지역에 예비대로 운용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한 적의 주공이 판명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만약 적이 서울지역을 주공으로 할 경우 서울방어가 곤란하며 중동부지역 일부가 돌파되는 것이 서울지역이 돌파되어 점령되는 것보다 유엔군으로써는 참을만 하다. 한편 중공측 입장에서 보면 서울을 주공으로 하는 1안은 4월 춘계공세때 실패하였으므로 이를 반복해서 시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만약 새로운 무기나 항공력을 동원한다면 4월 공세의 실패이유를 분석하여 새로이 시도해 봄직도 하지마는 새로운 무기가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을 가능성도 없으므로(이는 5월 공세결과로 추정할 수 있음) 새로운 방법의 공격시도도 불가능하다.
중공측 2안은 4월 공세 때 화천(華川), 사창리(史倉里) 및 가평(加平) 지역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을 격파하여 산악전투에서 우세함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주로 소총, 수류탄, 박격포 등으로 경무장한 중공군으로서는 중무장한 유엔군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보다 산지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 또한 절대 제공권이 없는 중공군으로서 산악지역에서 전투를 함으로써 유엔군의 근접항공지원으로부터 입는 피해를 보다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서울과 중부지역은 지나치게 가까워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유엔군 전투력이 중부지역 전환이 용이하여 유엔군의 방어선을 혼란시키기에는 미흡하다.
중공측 3안은 인제와 현리지역에서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홍천(洪川) 또는 횡성(橫城)지역에서 미 제10군단과 미 제9군단을 포위하거나 후방전투지원기지를 파괴할 수 있으며 보급이 어려운 중공군으로써 손자(孫子)가 말하는 유엔군으로부터 군수품을 탈취(智將務食於敵)할 수도 있고 더욱이 유엔군의 군 예비대를 중동부지역이 아닌 중부지역에서 전개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중동부전선(縣里地域)에서 돌파구확장을 원활히 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중부와 중동부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적시적인 부대통솔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위 피아 각 방안에 대한 결과를 전략이득행렬로 표시하면 <표 1>와 같다. 그런데 유엔군 2안은 다른 두 안보다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 다시 말하면 중공군이 어떤 안을 택하던지 상관없이 유엔군이 2안을 택한다면 다른 어떤 안을 택하는 것보다 불리하다. 따라서 유엔군의 2안은 비교대상 즉 선택하고자 하는 고려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대상이 되는 유엔군 안은 1안과 3안만 남게 된다. 마차가지로 중공군 2안도 중공군1안과 3안 보다 불리하여 고려 대상 전략에서 제외할 수 있다.
<표 1> 중공군 5월공세에 대한 피아이득행렬
중 공 군
1안 (서울 주공) |
2안 (중부 주공) |
3안 (중동부 주공 중부 조공강화) | ||
유 |
1안 (군예비 중동부로 이동준비) |
1. 서울방어성공 |
1.중부 지역 돌파되나 예비대로 저지가능 |
1.예비대 중부지역에 투입강요 2.중동부돌파, 저지에 어려움 |
엔 |
2안 (서부 엷게 중동부 두텁게 새진지편성) |
1. 새 진지편성 시간여유없음 2. 서울방어곤란 |
1.새진지 편성시간 여유없음 2.중부지역 방어에 혼란 |
1.새 진지 편성시간 여유없음 2.중동부 지역 방어곤란 |
군 |
3안 (군예비 중동부로 이동) |
1. 서울방어곤란 |
1.중부지역 예비대로 방어가능 |
1.중동부 지역 방어가능하나 고전 |
다음에 유엔군 각 안에 대하여 가장 불리한 결과와 중공군의 각안에 대하여 가장 불리한 결과(이는 곧 유엔군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와 같다.)를 알아보면 <표 2>와 같다. <표 2>에서 유엔군은 중동부를 돌파 당하느냐 서울을 점령당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중동부지역을 점령당하는 것이 서울을 점령당하는 것보다 유엔군으로서는 더 참을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유엔군사령관 Van Fleet 대장은 1안을 택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아무래도 3안을 택하는 것이 유엔군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이득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중공군이 취할 수 있는 각 안에 대해 유엔군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 중에서 가장 나쁜 결과는 중공군이 3안을 실행할 경우이기 때문이다. 실제 중공군은 중동부전선에 전투력을 집중하고 서울과 가평지역(加平地域)에는 보잘 것 없는 전투력을 배치하여 중동부지역(인제-현리-속사리) 을 주공으로 하는 3안을 택하여 5월 공세를 5월 15일에서 16일 밤에 시작하였다.
<표 2> 중공군 5월공세에 대한 피아이득행렬
중 공 군
1안 (서울 주공) |
3안 (중동부 주공 중부 조공강화) |
유엔군 가장 나쁜 결과 | ||
유
엔 |
1안 (군예비 중동부로 이동준비) |
1.서울방어성공 |
1.예비대 중부지역에 투입강요 2.중동부돌파, 예비대투입시간에 의존 |
1.예비대 중부지역에 투입강요 2.중동부돌파, 예비대투입 시간에 의존 |
군 |
3안 (군예비 중동부로 이동) |
1.서울방어곤란 |
1.중동부 지역 방어 가능하나 고전 |
1.서울방어곤란 |
중공군 가장 나쁜 결과 |
1.서울방어성공 |
1.중동부 지역 방어가능하나 고전 |
이때 중공군 약 21개 사단이 춘천(春川) 동북방 16km지점의 소양강변(昭陽江邊)에 위치한 내평리(內坪里)에서부터 인제(隣蹄) 동북방 20km에 있는 노동(路洞)에 이르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따라서 다음 날인 17일에 미 제10군단의 동측방과 국군 제1군단(東海岸에 위치)의 측방이 노출되었다. 미 제10군단의 우측에 있는 국군 제5사단과 국군 제3군단의 좌측에 있는 국군 제7사단정면을 돌파한 중공군은 1일 평균26km의 돌파속도로 전진하여 18일에는 미 제2사단 주력을 홍천(洪川) 동북방 지역에서 포위하고 무인지경으로 남진하였다.
미 제8군은 5월 18일에야 중공군과 북한군이 주공을 중동부전선에 집중했고 중부와 서부에 지향했던 조공병력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명확히 밝혀냈다. Van Fleet 장군은 미제 3사단과 미 제187공병연대를 미제 10군단정면에 급파하고 미 제9군단 우익을 동쪽으로 연장하고 미 제10군단 정면을 좁혔다. 그런데 중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이 미 제2사단과 국군 4개 사단(5, 7, 9, 3사단)을 격파하는 것이 빠른가, 서울 부근에서 200여km의 산길을 달려오는 미 제3사단이 빠른가 하는 시간다툼을 하게 되었다.(<그림 2> 참조)
備考 : 한국군8사단은 4月 15日∼ 5月 11日間 湖南地區의 討伐遂行中
出處 :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韓國戰爭(8), 陸本 軍事硏究室訳, 서울, 明成出版社, 1986, 附圖 6.
<그림 2> 공산군의 5月攻勢(5月16日∼5月 22日)
그러나 미 제3사단은 다음 날인 19일에서 20일까지 질서 있게 전선에 배치되어 중공군 돌파부대의 첨단을 격파하고 미제 2사단도 포위탈출에 성공했으며 대관령(大關嶺)에서는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가 중공군의 진격을 격퇴시켰다. 또한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도 전세를 회복하여 속사리(束沙里) - 강능(江陵)을 연하는 수정 no name선에서 중공군을 저지하였다.
미 제3사단이 질서 있게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Ridgway장군이나 Van Fleet장군이 평소에 강조하던 돌파구의 견부(肩部)를 성공적으로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때 전투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국군 제3군단이 현리(縣里) 지구전투에서 돌파 당했을 때 미 제10군단의 우측에 위치한 국군 제5사단도 동시에 무너졌다. 따라서 돌파구는 어이없이 확장되어 나아갔다. 이때 홍천에서 춘천 간의 도로와 홍천에서 인제를 잇는 도로 사이에 위치하면서 춘천도로로부터 14km, 인제도로로부터는 8km 떨어져 있는 800고지에 미 제2사단의 제38연대 제3대대가 진지를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지탱하여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면서 견부를 고수하고 미 제3사단 투입을 온전하도록 하였다.
뒤에 이 800고지전투를 벙커(Bunker)고지전투 또는 벙커힐(Bunker Hill)전투라 부르면서 돌파구 견부를 고수하는 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그림 3> 참조)
<그림 3> 방커고지전투
중공군의 5월 춘계공세기간 중 벙커고지전투에 버금가는 중요한 전투가 용문산(龍門山)전투이다. 이는 국군 제6사단이 용문산과 홍천강을 연하는 선에서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하여 중부지역의 적 조공을 무력화함으로써 미 제3사단의 중동부 지역으로 원활히 투입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위치한 미 제187공수연대를 중동부전선으로 투입 가능하도록 하였다. 만약 중부지역도 돌파 당하였다면 미 제3사단이 이 지역에 투입되도록 강요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중부전선에 배치된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은 포위될 위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돌파범위는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중공은 용문산지역의 전투력을 더 증가시키지 않았고 국군 제6사단은 성공적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만약 중공군이 중동부지역에 21개 사단씩이나 집중하지 않고 일부를 중부지역으로 돌려서 서부지역에 두텁게 배치된 유엔군 전투력을 중부지역에 투입되도록 강요하였다면 유엔군이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더 많은 기일을 소요했을 것이다.
요약하면, 피아 가능한 전략을 나열하여 피아 가장 나쁜 결과 중에 가장 좋은 결과를 택하는 선택하는 방법은 손자가 주장하는 勝易勝者原則(쉬운전투를 하여 이기는 전략)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는 곧 孫子가 말하는 먼저 적이 아군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 (先爲不可勝)을 택하는 길이며 틀림이 없는 자(不忒者)의 위치에서 조치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7. 결론 및 토의
지금까지 6․25전쟁을 통해서 국익에 합당한 정책목표를 선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도출하고 비교분석하여 보았다. 비교분석할 때 피아 모든 가능한 전략을 행렬로 만들고 결과를 나열하여 피아 가장 나쁜 결과 중에 가정 좋은 결과를 최적안을 선택함으로써 손자(孫子)가 주장하는 승이승자원칙(勝易勝者原則)을 적용할 수 있음을 알았다.
옛날부터 전쟁은 항상 적의 의지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돌발 사태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군사사항과 연관되어 발생되는 사건은 모두가 예상하지 않은 돌발 사태이다. 이러한 돌발 사태에 직면하면 누구나가 당황하게 되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지시를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고급장교에 이르면 이를수록 이러한 긴급사태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능한 전략을 구상해 내고 이를 실행 가능한 전략 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전략을 선택하여 결심권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아주 긴요하다.
바로 손자(孫子)가 말한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적에게 달려있다.”(不可能在己, 可能在敵)는 이론을 생각한다면 승패가 자기에게 달려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자(孫子)가 말한 “틀림이 없는 자는 그 조치하는 바가 반드시 승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승리는 패배한 사람에게 이기는 것이다”(不忒者, 其所措必勝, 勝己敗者也.)라는 원칙은 상대측이 실행할 전략을 알고 이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측이 불특자(不忒者; 틀림이 없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급지휘관과 참모들은 유념해야 할 원리라 단언할 수 있다.
1951年 5월 중공의 춘계공세는 1950년 9월 부산방어전투와 유사하게 전장 내 전투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전투라 할 수 있다. 유엔군은 서울과 중동부지역을 두고 어디에 예비대를 치중하느냐를 저울질하고 있었고 중공군은 서울과 중동부지역을 두고 어디에 전투력을 집중할 것이냐에 고심했던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엔군이 서울에 치중하면서 즉각 예비대를 중동부로 전환할 수 있게 한 것은 서울이 중요성에 비추어 안전한 전략이라 할 수 있으나 중공은 중부지역의 조공을 너무 약하게 배치하여 유엔군의 서울지역 예비대를 중도에서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엔군의 재반격기회를 마련해 주고 말았다. 중공군 5월공세에 대한 유엔군 no name방어전은 대표적인 진지전이였고 진지전에서 최적의 방어는 역습이며 이 역습을 위해 예비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예비대가 원활하게 역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파구 견부를 고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전투라 평할 수 있다.
미군은 이 전투를 방커고지(Bunker Hill) 전투로 명명했다. Bunker Hill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독립군이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한 전투를 상기하여 이렇게 이름을 불렀다. 실제 이제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을 몰아붙일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으나 미국은 전쟁에 지쳐서 휴전으로 모로갔다.
추가적으로 중공군 한국전 개입 목적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당시 주은래(저우언라이; (周恩來) 수상이 10월 1일에 미군이 38선을 넘었기 때문에 개입했다는 발표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많은 인명을 희생하면서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얻은 이익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오르기(이념)가 중요한 시대였고 이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시기였다. 또한 중공군은 장개석 국민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본토를 장악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모택동이 급격하게 중국 본토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장개석 국민군의 투항을 기꺼이 받아드렸기 때문이었으며, 이들은 벌써 돈에 물들어 있어서 정신이 해이하여 중공군 내에 골치 덩어리였는데 이들을 동원하여 대만을 공격하자니 미국 제7함대가 버티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이때 한국전쟁은 이들을 동원하여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으로 모택동이 판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參 考 文 獻
1. 國防大學院, 「軍事運營分析」, 서울, 國防大學院,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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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안흥․浦港戰鬪」, 서울, 國防部, 1986.
4. , 「龍門山 戰鬪」, 서울, 國防部, 1986.
5. , 「韓國戰爭史」, 卷 3, 卷 6, 서울, 國防部, 1970, 1973.
6. 「陸軍士官學校, 韓國戰爭史附圖」, 서울, 日新社, 1981.
7.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韓國戰爭」, 卷 2, 卷 4, 卷 6 및 卷 8, 陸軍本部 軍事硏究室譯, 서울, 明成出版社, 1986.
8. 金忠英, “보다 나은 전략수행을 위한 방안,” 國防硏究, 第 28卷, 第 2號, 1985.12,
pp.209-231.
9. 孫子, 「孫子兵法」, 盧臺俊譯, 弘新文化社, 1976.
10. 合同參謀本部, 「韓國戰史」, 서울, 數學社, 1984.
11. McArthur, Douglas, Douglas McArthur Reminiscence, McGraw-Hill Book Co., New York, 1964.
12. Von Newmann, John and Osker Morgenstern, The 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 Princeton Univ. Press, Princeton, 1953.
주) 지평리전투와 벙커힐 전투는 전선 동쪽을 다망한 한국군이 부너져 UN 군이 견부를 고수하느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졌으나 결국 견부를 고수함으로써 북으로 계속 진격이 가능했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우려하자 지지웨이 장군과 벤프리트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 한국군의 지휘통솔력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정부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고위한 정신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유능한 직업적인 장교들을 육성해야 하는데 이는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라고 조언했다. 이를 시작으로 4년재 육사가 전쟁 중에 진해서 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