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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순간들
증 언 자 : 장세경(남)
생년월일 : 1955. (당시 나이 25세)
직 업 : 무직(현재 공인중개사 사무소)
조사일시 : 1988. 9
개 요
1979년 '부마사태'에 파견된 군인이기도 했던 장세경 씨가 5·18 때는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가두시위에 적극 가담한 증언.
함평에서 태어나 광주로
아버님은 교육자이셨다. 60년대에 함평국민학교 교장이셨는데 자녀교육 문제로 1964년에 광주로 이사했다. 당시 재산으로 33마지기의 논밭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일꾼들을 데리고, 또 일부는 소작으로 주어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러나 이농 당시 아는 사람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탈이나 그 빚을 갚느라고 농사가 11마지기 정도만 남았다. 그것을 처분하고 광주로 왔다. 아버님은 정년 퇴직하실 때까지 교직에 계속 계셨다.
여기서 잠깐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고 싶은데, 나는 할머니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께 들은 얘기가 있다.
6·25 때 할머니께서는 지방 면단위 인민부녀위원장을 지낸 적이 있다. 일찍 혼자 되신 할머니께서는 이미 재혼하신 뒤라 아버지와는 함께 살고 계시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교직에 있으면서 논밭이 많았던 까닭에 우익으로 몰려 죽을 뻔했다. 그때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부마항쟁 때는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나는 1977년 군에 입대하여 1979년 11월에 제대했다. 유신 말기를 군에서 보냈던 셈이다. 1979년 10·26 이전에 나는 군대 제2보급창에 근무하고 있었다. 운전병으로 병장 계급장을 달았을 때 부마사태가 터졌다.
부마사태가 터진 다음날 새벽 4시 30분경 비상이 걸려 나는 차량에 공수병력을 싣고 나갔다. 동아대 운동장에 막사를 치고 난 후 저녁 9시쯤 부산시경에 불이 났다고 하여 첫 출동을 했으나 부산시경은 전등불이 모두 꺼져 깜깜했고 시위대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우리들은 주위의 왕대폿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 버스 기다리는 사람을 연행했다. 그날 나는 영도다리 건너기 전 시가지 쪽 육교에서 근무를 섰다. 20대 남녀가 영도다리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선임 탑승자인(소령과 대위) 소령이 백미러로 이들을 보고,
"저것들 봐라."
하며 트럭에서 내리더니 손을 까딱까딱하여 그들을 불렀다. 소령이 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신 머리가 왜 이렇게 길어!"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청년이 대꾸하자 소령이 순간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뒤에 있던 병력이 내리더니 총개머리판으로 지근지근 두들겨팼다. 그러더니 실신해 버린 청년을 워커발로 차서 트럭에 실었다. 함께 있던 여자는 놀라서 택시를 타고 도망쳤다.
새벽 3시경 남자를 파출소로 넘기는데 세부사항은 모르나 '용의 주모자'로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3시 이후에 동아대학교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서종철 국방장관이 내려와 시찰이 있었다. 다시 영도다리 근처에서 근무를 서는데 출동 전에 대위가 물었다.
"당신들 돈 만 원씩 안 받았느냐?"
받은 적이 없다고 했더니 대령 이하 이등병까지 일률적으로 돈 만 원이 나왔다면서 한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대위와 소령이 차 안에서 말했다.
"돈 주고 사람 패라는데 못 팰 것이 무엇이냐?"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는 몹시 분개했다. 서종철이 대통령 하사금으로 지급했다는 돈을, 육군 운전병으로 파견된 나는 받은 일이 없다. 그 후에 곧바로 개인적인 일로 파견부대에서 나만 철수, 귀대했다.
광주항쟁 때는 삽을 들고 동참하다
제대 후 1980년 3월에 소방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5월을 맞았다. 1980년 5월 16일 소방서 면접을 보고 나오는데 도청 앞에 전경이 3열로 서 있고 학생들(전남대생, 조선대생 등)이 '신현확 물러나라', '전두환 물러나라'는 노래와 구호를 외치기에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바로 귀가했다.
18일 아침 10시경에 가까운 친구가 가게 정리를 한다고 해 그곳에 갔다. 친구의 가게는 금남로 4가 덕영상사 앞에서 승차권과 담배를 파는 조그만 가게였다. 도착하고 보니 공수부대가 이미 퍼져 있었고 골목과 골목 사이에는 시민과 공수부대가 밀고 밀리는 산발적인 시위장면이 보였다. 가게로 들어와 양철문 틈새로 내다보니 공수가 시민을 머리부터 곤봉으로 때리며 총을 뒤로 맨 상태에서 올려차기를 하며 진압하는 것이 보였다.
오후 1시경, 금남로 2가 쪽에서 아스팔트의 열기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데 4명의 청년이 공수부대에게 붙들려 팬티차림으로 원산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되어 있는 그들의 머리를 보는 순간 내 머리가 쭈뼛해졌다. 그때까지 공무원 시험 때문에 데모 대열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부터는 시위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내 이웃이고 광주시민이 다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19일 저녁 7시경에 발산다리 근방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광천교 앞에서 트럭이 한 대 오고 있었다. 부산 번호판을 단 PVC파이프를 실은 차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소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경상도 차만 보면 태워버리던 때라 내가 미리 가서 사정을 말해주었다.
"이리 들어가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
그러나 운전수 옆에 탄 사람이 나도 광주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계속 가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제지당했다. 부산 차량임을 확인한 시민들이 근처 해성주유소에서 석유를 가져다 차에 불을 붙였다. 시민들은 차에 불이 붙자 차를 하천변으로 밀어버렸다.
그날 밤 9시 30분경에 임동에 있었던 집에서 들으니 전남방직과 광주천에서 구호 외치는 소리가 났다. 삽을 들고 나가 동참했다. 선두를 이끌고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양동에서부터 출발하여 천변을 타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공설운동장까지 가서 다시 도청으로 간다며 모두 5-8톤 정도의 트럭 2, 3대에 탑승했다. 그런데 차를 타던 두 사람이 잘못하여 차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근처 조원대 의원에 입원시켜 놓고 내가 탄 차는 유동 쪽으로 갔다.
20일로 생각되는 오후 6, 7시쯤에 나는 유동 삼거리 쪽에서 광주역에 있는 공수대들에게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졌다. 누군가가 광주고속버스 2대를 가져와 광주역을 차로 밀자고 하였다. 사람들이 차를 타고 광주역으로 전진했으나 그 후 차가 되돌아오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문화방송이 불에 타는 걸 봤는데 몇 시인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그렇게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새벽 4시에 귀가했다.
YMCA 앞에서 공수대와 협상하다가
21일 아침 9시 30분 경에 티셔츠와 예비군복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왔다. 도청 분수대에 공수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YMCA에서 한 구역 지난 곳에 자전거를 버려두고 돌멩이를 던지며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공수부대의 대위와 시민이 협상하여 잠깐 휴전하기로 하고 시위대열이 자리에 앉았다. 한 군인 대위가 나와 말했다.
"경상도 군인이 술을 먹고 왔다는 것은 유언비어다. 나도 전라도 사람이다."
공수부대들과 시민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좋은 상황이었다.
그때 YMCA 앞 건물에서(당시 3층) 화염병 하나가 공수부대에게 날아가 난장판이 되었다. 결국 최루탄을 한참 쏘아대더니 공수부대가 후퇴하였다. 천천히 전진하여 YMCA에서 전남매일신문사 건물 앞으로 빠져 분수대 앞에 가보니 공수부대 5-6열이 서 있고, 뒤에는 전경과 장갑차 2대가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사이에서는 11시쯤 도지사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시민측에서 연단 근처에 여고생(불확실함) 시체 2구와 피 묻은 교복을 막대기에 걸어놓았다. 시민들측에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군인 트럭 3대와 장갑차 1대가 있었다. 연단에는 여고 교사(불확실함) 한 분과 관계자들이 나와 시민을 독려했다.
11시 30분경 70대 노인 한 분이 나와 공수 지역대장(소령)을 찾아 말했다.
"당신들은 총으로 무장을 했지만 우리는 비무장이니 무장을 해제하라."
소령이 승낙하고 방독면을 벗고 뒤로 '어깨에 총' 상태에서 대치하게 됐다.
12시경 시민들 사이에 방송국을 접수하자는 의견이 있어 방송에 관계했던 사람들을 뽑았으나 반대의견이 많아 취소되었다.
시체가 거둬지고 난 후에 부지사 정시채가 1시 15분경에 나와 "광주시민 단결합시다"고 2번 외치자 2번 모두 시민들이 따라 외쳤다. 다시 "광주시를 보호합시다"하자 정적이 흐른 뒤에 단상을 향해 병 한 개가 날아갔다. 정시채는 놀라 경호원들에게 싸여 도망치고 공수부대 진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밀어버리자는 의견이 있어 시민군 장갑차가 도청 우측으로 돌아갔다. 그때 도로변에 공수 2명이 차에 깔렸는지 엎어져 있었다. 공수부대가 노동청과 향토회관 건물 사이까지 밀려났다. 내가 앞쪽에 나서서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데 탄창 끼우는 모습이 보였다. 아랑곳 않고 돌멩이를 다시 던지자 총성 두 세 발이 울리더니, 이어서 계속 울렸다. 한 손에 차 창문틀 쇠레일을 들고 또 한 손에 돌멩이를 집어드는데 옆 사람이 쓰러지면서 분수대 대리석에서 불이 튀었다. 금남로 뒤에 있던 사람들이 총소리가 울리자 공포탄인 줄 알고 밀고 들어와 앞 사람들을 떼밀다시피 했다. 나는 악을 썼다.
"진짜 총알이니 물러서라."
전남일보 건물 뒤로 뛰었다. 가로수에 총알이 날아왔다. 가로수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졌다. 광주경찰서 부근에 경찰관 1명이 있길래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그는 급히 말해 주었다.
"이미 발포명령이 내렸으니 빨리 집으로 가라."
금남로 3가 쪽으로 대피하여 도청 쪽을 내다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분수대 앞에 공수부대들만이 '무릎 쏴' 자세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죽은 사람 몇 명이 들것에 실려 금남로 3가의 어느 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미국 ABC 기자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그 병원으로 안내해 주고 다시 나왔다.
장갑차를 타고 가던 청년도 집중 사격을 받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시민들 사이에서 총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갑차 위에 탄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카빈총을 거꾸로 매고 도청을 향해 간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말렸으나,
"죽어도 간다."
고 하며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청년이 탄 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연발 총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뒤로 넘어졌다. 장갑차가 되돌아오는데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으으!" 하는 저음의 신음 소리가 났다. 청년은 코에 구멍이 뚫리면서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으"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옆에 고2학년 정도의 학생이 총을 들고 있었다. 나는 예비역인 내가 총을 더 잘 쏘니 총을 달라고 설득하여 실탄 21발과 함께 총을 받았다. 너덧 명의 시민이 관광호텔을 공격한다고 해 담벽을 따라가는데 공수부대가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등 뒤에 총을 쏜다는 게 비겁해 보여 그만두었다. 시민 중 1명이 총을 쏘아 공수 1명이 쓰러지자 후퇴하던 공수부대들이 데리고 갔다. 그 후 금남로에 나가 헌혈차를 타고(이때부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님) 사람들을 기독병원, 적십자병원에 데려다주며 오후 내내 돌아다녔다.
해방된 도시 광주
22일 공수부대가 물러갔으므로 아침 11시부터 도청 앞 민원실에서 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섰다. 어떤 사람이 사진을 찍길래 왜 찍느냐고 물었다. 그는 훗날 증언을 위해서라고 해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후에 돌려보냈다. 23일 역시 어제 그 자리에서 근무하는데 화정동 공단 입구 쪽에서 일이 터졌다며 병력 모집 차가 왔다. 나는 그 트럭에 탔다. 우선 공원 층계로 가서 실탄 30발을 지급받고 다시 그 차를 탔는데 차가 조선대 쪽을 항해 달렸다.
"왜 조선대 쪽으로 가느냐?"
운전수와 승강이를 벌인 후에 차를 돌려 MBC 방송국을 거쳐 농성동 공단 입구로 갔다. 계엄군과의 전투는 없었고, 시민군들이 평온한 상태에서 주민들이 준비한 김밥과 음료수를 먹고 있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어떤 사람이 공포에 다리를 맞아 시내로 후송된 일밖에는 없다고 했다.
거기 있다가 근처에 사시는 형님이 걱정되어 집을 찾아갔더니 형님은 이미 도피중이었고, 집주인 아줌마 혼자 집을 보고 계셨다. 다시 도청으로 돌아와 새벽 3시까지 경계를 섰다. 그러고는 이 일들이 장기전이 아니라는 생각과 다른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등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24일 10시쯤 집에 총을 남겨놓고 상무관으로 가서 분향을 했다. 노인 한 분이,
"6·25 때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사람을 이리 죽이느냐?"
는 말을 했다. 어느 여고생 시체 위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관을 치며,
"내가 너를 차라리 안 낳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다. 그 이후에 적십자병원, 기독교병원 등을 무작정 돌아다녔다.
26일에도 나갔으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총기를 회수한다는 말을 듣고 총을 내놓지 않았다.
27일 새벽 3시 30분경에 헬기 소리에 잠이 깨어 내다보니 집 앞 100미터 거리의 이층 건물에 철모를 쓴 군인이 눈에 띄었다. 아침 7시 30분경 400미터 떨어진 곳의 사촌 누나집을 가다가 공수부대 소위와 상병을 만났다. 그들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무사히 통과되었다. 가택을 수색한다는 방송이 있어 그때까지 집에 두고 있던 총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밤 12시에 부엌에서 카빈총을 분해하여 하이타이로 닦았다. 새벽 3시경 낮에 보아 둔 이웃집에 다 갖다버렸다.
진상규명을 위해 돕고 싶어
5·18 항쟁 이후 1980년 8월 12일부터 소방서에서 근무하다가 1986년 7월에 그만두고 1987년 10월 부산에서 차 운전을 했다. 소방서 다니면서 조선대 야간 회계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2월에 졸업했다.
현재는 공인중개 사업을 하고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수입이 없는 형편이다.
나는 5·18을 '사태'라고 말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거'였다. 나는 나를 나타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평생 죽어 넘어지는 순간까지 광주의 진상규명을 위해 도울 수 있는 대로 돕고 싶다. 끝끝내 싸우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작업을 철저히 해서 헛된 죽음이 아니었음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김혜형, 주경화)[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