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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시기와 도읍지의 위치는 어디인가?
광복 후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을 표방하면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백제. 신라의 건국 시기를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가 성립 시기를 AD 2세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도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BC 1세기에
삼국이 건국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도 바로 이 점이다.
한반도나 만주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없다면,
발상을 전환, 삼국의 건국시기가 한반도와 만주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정을 하였음직 함에도 그렇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BC 37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BC 58년이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북부여의 멸망이 시기와 연결시켜 산정해보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BC 58년이 정확하다.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시기가 BC 277년이라고 주장하는데
고구려의 건국 시조를 동명성제東明聖帝로 계산한다면
BC 58년이 맞는 것이고, 동명성제 이전의 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리국藁離國의 건국 시조인 고진高辰을 시조로 본다면
BC 58년의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옥저沃沮의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국호가 비롯된 것인데
동명성제(주몽朱蒙)의 아버지가
북부여의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였고,
불리지의 할아버지가 북부여의 고리군왕이었던 고진이다.
또 고진의 아버지가 대부여의 고리군왕이었고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기도 했던 해모수解慕漱이다.
고구려는 옥저에 있던 고구려(감숙성 인유현麟游縣)의 지명을 국호로 했지만
그 건국 연대는 BC 58년이 정확하다.
고리군은 섬서성 요현이고 북부여가 건국한 웅심산熊心山은 감숙성 녕현이다.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
<삼국유사>의 기록은 물론 <환단고기>의 기록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고구려의 건국 위치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이 요녕성 환인현桓仁縣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나마 정설도 없고 고구려의 건국지나 도읍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이다.
재야 사학자들도 고구려의 건국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고 또 도읍지의 변천에 대해서도 상세한 위치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 위치와 도읍지의 변천 과정은 <환단고기>와 <삼국사기>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환단고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고구려의 도읍지에
대한 기록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고구려는 BC 58년 시조 동명성제가 졸본卒本에서 건국했다.
이곳은 송양국松壤國이 가까운 곳이고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곳으로
지금의 감숙성 빈현彬縣이다.
이곳이 비류왕沸流王의 송양국(섬서성 순읍현)이 이웃하고 있던 곳이다.
BC 26년 고구려는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에는 눌견訥見으로 도읍을
옮긴다.
북옥저는 섬서성 낙천현이고 눌견은 섬서성 순읍현이다.
AD 2년 고구려는 국내성國內城(황성皇城)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곳은 섬서성 순화현淳化縣이었다.
AD 209년 고구려는 환도성桓都成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곳은 섬서성 건현乾縣이다.
AD 246년 고구려는 한을 이은 조위曹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 관丘儉의 침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환도성은 심하게 파괴되고 만다.
AD 247년 동족 평양성平으로 천도하는데 이곳이 섬서성 동천시이다.
AD 342년 고구려는 평양성(섬서성 동천시)에서 환도성(섬서성 건현)으로
도읍을 옮겼는데이때 최대의 국가 위기를 맞는다.
AD 343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황의 침입으로 섬서성의
요동지방을 잃게된 고국천제故國川帝는 도읍을 동황성東皇城으로 옮긴다.
동황성은 섬서성 대려현大려縣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였던 이곳도
평양이라고 했다.<지도 22참조 <-- 책 뒷편에 지도 있음!!)
고구려의 평양은 네 곳이었다는 다른 세곳은 1) 동천제東川帝가
천도한 평양(섬서성 동천시),
2) 장수홍제 호태열제가 천도한 평양과 양원제陽原帝가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이 있는 섬서성 서안시,
3) 하남성 양성현으로 이곳은 남평양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남태평양은 백제가 차지했던 한성漢城(하남성 등봉시)과
가까이 있다 AD 427년 고구려는평양성平壤城(섬서성 서안시西安市)으로
천도한다.
AD 586년에 양원제陽原帝는 장안성長安城으로 이주하는데
장안성은 평양성에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평양성과 장안성은 같은 곳으로 알려졌다.
두 곳 모두 섬서성 서안시에 있었다.
고구려는 AD 668년까지 이곳에 도읍하고 있다가 라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섬서성, 산서성, 그리고 감숙성이었다.
고구려는 두 번에 걸쳐 영토를 확장했다.
먼저 AD 5세기 광개토경호태열제와 장수홍제호태열제 제위
시와 AD 7세기 영류제와 보장제 시기인데,
AD 5세기의 고구려는 사천성, 요녕성은 물론
길림성과 한반도, 대륙의 백제의 산동성, 하남성, 호북성, 호남성과
신라의 안휘성, 강서성,절강성, 강소성, 복건성과 대만,
오키나와 제도와 일본열도의 구주九州까지도 통치했고,
AD 7세기의 고구려는 연개소문 장군의 주도 하에 서역 지역으로 진출,
섬서성, 감숙성, 산서성, 하북성, 요녕성과 내몽고자치구
그리고 산강유오이자치구를 차지함으로써 당으로서는 생사를 건
고구려와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지도 16, 18 침조 <--- 책 뒷에 있음!! 참조>
당과의 전쟁 시에는 당의 도읍지였던 만년萬년(감숙성 화정현) 과
장안長安(감숙성 임하현)까지쳐들어 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하한족의 뇌리에 강력하게 남아있는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는 말기에 당의 침입에 대비하천리장성을 쌓았는데
북서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해성海城으로 이어진 장성이었다.
부여성은 감숙성 평량시, 해성은 섬서성 부풍현이다.
백제의 도읍지와 강역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백제가 한반도의 경기도 한강의 남쪽에서
건국하고, 한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충청남도 공주로,
그리고 다시 부여로 옮기고 그곳에서 라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 유물이나 유적이 한반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백제가 도읍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
아도 백제의 것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이 없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부大夫라는 관직이 새겨
있는데 대부라는 관직은 북부여의 관직명이지 백제의 관직명이 아니다.
더욱 기이한 것은 한반도에는 백제의 왕국터라고 인정할 만한 유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도 백제가 한반도에 있던 나라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재야 사학자들은 백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나라가
아님을 간파하고 있다.
사서가 전하는 백제의 건국지와 도읍지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십제十濟라는 국호로 BC 18년에 건국했다.
십제는 온조왕 때 백제百濟로 바꿨는데 백제가 건국한 하남위례성은
산동성 비성서에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제와
재혼했는데 동명성제가 제위를 유리에게 넘겨주기로 하자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졸본성卒本城(섬서성 빈현)에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함께 남동쪽으로 이동,
하남성 제원시 지역에 정착해 백제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우고
번성했다고 전한다.
소서노가 죽자 비류와 온조는 다시 동쪽으로 이동,
하남위례성(산동시 비성시)에서 온조가 십제를 건국하고,
비류도 그 동쪽인 미추흘(산동성 장청현)지역으로 가서 비류백제를
건국했으나
여의치 않아 다시 하남성 제원시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대부분의 비류백제인들이 십제로 와서 합류함으로써 국호를
백제로 했다고 한다.
비류백제는 하남성 제원시 지역에서 계속 이어졌는데
고구려와 벡제 양쪽에 번갈아 귀속되었다가 백제에 완전히 합병된다.
백제는 지명인데 감숙성 청수현의 부여 때의 지명이다.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優台가 북부여의 백제후百濟侯르르
지냈으므로 아버지가 제후로 있던 지명을 국호로 사용한 것이다.
위례성(산동성 비성시)이 직산稷山이고 미추흘이 고려의 인주仁州였다.
백제는 AD 5년 온조왕은 한산漢山 밑에 책성柵城을 쌓고 그곳으로
천도한다.
한산성이라고 했다. 이곳이 산동성 태안시이다.
이곳에는 백제의 궁궐터가 남아있다.
이때 온조왕은 한산지역을 흐르는 한수漢水의 서북에도 성을 쌓고
별궁을 지었는데 이곳이 산동성 신태시인데 이곳에도 성과 궁궐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백제는 한산성(산동성 태안시)에서 376년간 도읍했다.
AD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고구려의 남평양 지역
(하남성 등봉시)을 빼앗고 그곳으로 천도한다.
이곳에서 74년 간 도읍했다가 AD 475년 문주왕文周王은 동쪽 웅진熊津
(산동성 곡부시曲阜市)으로 도읍을 옮기는 데
백제가 무려 450년 간이나 도읍했던 곳이 동서 두 곳의 한성이었다.
<신당서新唐書> 백제 편에는 동서 두 곳의 한성에 관한 기사가 있다.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곳의 한성에서 살았다는 기록이다.
동한성東漢城은 산동성 태안시, 서한성은 하남성 등봉시였다.
하남성 등봉시에도 백제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백제는 서한성에서 강성한 국가로 발돋움했는데
이때 섬서성의 남부를 점령하고 이어서 감숙성의 남동부까지 진출한다.
백제가 요서遼西 지역을 차지했던 이른바 백제의 요서 경략
(AD 370 AD 384)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도 14 참조 <--책 뒷편에 있음 !!참조>
백제는 요서 경략 과정에서 서연西燕을 멸망시켰고,
요서지역에 있던 부여에도 심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감숙성 지역까지 쳐들어 갔다는 가정은 사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제가 차지했던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晋平郡은 동쪽으로는
감숙성의 청수현에서 서쪽으로는 유중현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AD 392년 백제는 광개토경호태열제의 공격을 받고 하남성의 북서부 일부
지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AD 475 고구려의 장수홍제호태열제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은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한다.
결국 이 해에 문주왕은 웅진(산동성 곡부시)으로 천도한다.
아단성은 하남성 신밀시 지역으로 추정된다.
AD 528년 백제 성왕聖王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사비성은
산동성 추성시에 있다.
이곳은 남양호라는 거대한 호수에 접해 있는데 고대에는 이곳으로
황하黃河가 흐르던 곳이다.
이곳 가까이는 백마강이 흐르는데 이곳 주변에 백제 왕릉이
여러 곳에 있다.
백제의 옛 성곽과 건축물을 비롯한 유적이 남아있고 백마강 하구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기암괴석이 있지만
한반도에는 백제 궁터의 주춧돌 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릉斯麻王陵이 입증하듯이 한반도의 충청남도와
전라도 지역도 물론 백제의 강역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반도는 백제의 도읍지가 있던 중심
강역이 아니고 대륙에 있던 백제가 바다 건너 동쪽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백제의 강역은 초기에는 산동성의 일부 좁은 강역이었지만 차차 확장되어
하남성과 산동성의 전지역은 물론 호북성과 호남성, 섬서성과 감숙성,
사천성과 광동성, 강서성, 절강성과 복건성 등지로 뻗어 나갔고
한반도와 일본열도까지 그 세력이 미쳤던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강역은 산동성과 하남성, 호북성과 호남성
그리고 일본열도와 한반도 지역으로 일본열도와 한반도를
제외하더라도 대륙의 강역은 한반도의 2배 정도로
추산된다.
신라의 건국 시기와 강역
신라는 BC 57년 혁거세 거서간이 서나벌이라는 국호로 건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그 시기를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하고 있다.
제도권 사학자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경상도 경주에서 건국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신라의 유물이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 경주 지역에 많이
있으므르 이를 근거를 신라의 한반도 존재설을 신봉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신라의 것임을 확증하는 것은 없다.
경주 부근에는 거대한 무덤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신라왕의 것임을 입증하지 못하고
지금부터 2000년 이전의 유물도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렸거나 아니면 신라가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닌 것이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한반도 경주 지역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성,
월성, 명활성의 자취가 없고 궁궐로 추정할 수 있는 건축 유지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월성에는 박朴, 석昔, 김金의 세 성 씨의
신라 왕족들이 거처하던 궁궐이 20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한반도 어디에
그 유적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7세기 말 이후 한반도가 신라의 영향권이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지만
한반도가 신라의 도읍지가 있던 중심 강역은 아니었던 것도 분명하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신라의 건국지가 한반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재야 사학자들 중 몇 몇 분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의 건국지와
도읍지가 대륙에 있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 정확한 위치와 강역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만간에 대륙신라의 건국지 도읍지,
그리고 그 강역은 뚜렷하게 증명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서서에 나타나는 신라의 건국지와 도읍지
그리고 그 강역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 다르면 BC 57년 서나벌(지명에서 유래)이 건국한다.
서나벌은 진한의 도읍지였는데 진한 사람들은 선도산仙桃山에서 태어나서
진한으로 온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한다.
진한의 도읍지인 서나벌은 섬서성 자양현이다
BC 39년 변한(사천성 양중시)이 서나벌에 항복함으로써 서나벌은 변한을
병합하고 서나벌 가까운 곳에 금성을 쌓고 BC36년 금성으로 천도한다.
서나벌은 AD 55년 국호를 계림(시림始林)으로 국호를 바꾸는데 계림
(섬서성 자양현)은 지명으로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이다.
김알지는 서나벌의 4대 왕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의 세자였으나 왕이 되지
못했다
김알지은 황룡국黃龍國(섬서성 장가천현)의 유민이었다.
황룡국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땅이었다.
AD 101년 계림은 섬서강 자양현에서 안휘성 회원현인 월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AD 300년에는 조위가 점령했던 섬서성의 지역인 낙랑(섬서성 서안시)과 대방帶方(섬서성 상주시)의 항복을 받는다.
AD 309년 계림은 신라로 국호를 바꾼다.
신라도 지명으로 낙랑樂浪(호북성 형주시)의지명이다.
신라는 AD 475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명활성으로 천도한다.
이곳이 안휘성 잠산현이다. AD 488년 다시 월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와 같이 신라는 섬서성에서 건국했는데 동쪽 안휘성으로,
다시 말하면 먼 곳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신라가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다는 인식은 대륙의 지명을 반도로 이전시켜
놓은 반도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역사의 강역을 너무나도 사실과
다르게 축소시킨 나머지 그렇게 조작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대륙 안휘성 회원현에서 811년 동안이나 도읍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즐비하다.
한반도 경상도의 경주에는 금성, 월성, 명활성의 유적이 없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귀족들의 대저택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경주는 근세조선 초(AD 15세기 초)의 인구가 6,000명 정도인데
이곳이 17만 호가 있었다는 월성일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AD 689년에 도읍을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실현시키지 못한다.
신라의 달구벌은 사천성 달천시인데 신라는 이곳을 당唐에게 빼앗기고
지명을 안휘성 수현으로 옮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의 동생 거득공車得公이
문무왕의 명을 받고 전국의 현지 실정을 알아보려고 여러 공을 돌아
보았는데 이때 무진주(호남성 상덕시를 말한다.
이곳이 고려의 해양海陽이었다)에서 안길安吉이라는 그 지역 관리의
신세를 진바 있다고 전한다.
고마움을 느낀 거득공은 안길에게 월성에 오면 자기집으로 들르라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준다.
이 때 거득공은 자기의 집이 월성안에 있는 황룡사黃龍寺와
황성사皇聖寺의 사이에 있다고 가르쳐 주는데 나중에 안길이 월성으로
찾아가보니 그곳은 궁궐이었다고 한다.
한반도 경상도 경주시 일원에는 황성사는 흔적도 없고,
황룡사는 경주시 동쪽 산 속 깊은 곳에 있었다는 아주 자그마한 절터로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 경주를 아무리 신라의 월성이라고 주장해도 근거가 없다.
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고려에 실재했었다는
신라 때 창건한 절들이 지금 한반도에는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일연 스님은 대륙에서 태어나서 대륙에서 돌아가신 분이다.
대륙에 있던 절들이 한반도에 있을 까닭이 없다.
우리는 경주의 불국사,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 구례의 화엄사,
영주의 부석사 등이 신라의 절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 절들과 같은 이름의 절들이 대륙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사찰들이 신라의 사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기록과 일치하는 불국사와 석굴사는
안휘성의 천주산 부근인 안경시의 태호연과 종양현에 남아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순교할 때 갑자기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온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설이 이루어진 배경이 한반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로 신라의 월성이 있던 안휘성 회원현은 북위 33도이고
한반도 경주는 북위 36도로 대륙의 월성은 한반도보다 온난한 지역이다.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 조에는 계림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객수는 타지역으로부터 흘러오는 강이고 역수는 이 객수와는 거꾸로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한반도 경주 시내를 흐르는 강과 물즐기가 다른
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
대륙의 월성 지역 주변에는 호수가 산재해 있어 물줄기가 거꾸로 흐르는
강이 있다.
..........
6) 신라의 영토는 어디까지인가?
신라의 강역을 제대로 찾아서 확인하는 작업은 감추어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관건이며,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들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서 AD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AD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리고 당과 영토 분쟁으로 전쟁을 치른 결과 백제의 옛 강토는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영토는 후 고구려와 후고구려를 이은 대진大震이 건국되어
발해로 이어져 당도 신라도 고구려의 강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도읍지였던 장안성
즉, 평양성平壤城(섬서성 서안시)은
AD 675년부터 멸망시가지 줄곧 강역으로 편입,
그곳에 패강진을 설치하고 제후를 임명하고 비중있게 통치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륙에는 신라, 발해, 당의 삼국이 정립하게 된다.
이들 세나라는 신라와 당은호북성과 섬서성, 호남성과 광동성 지역에서
접경했고, 신라와 발해는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에서
접경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삼국시대가 된다.
1,000년 가까이 지속되는 동안 전쟁으로 인한 지리적 변동이 있었는데 도
내용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삽량주삽良州, 상주上州, 하주下州, 강주康州,청주菁州, 서원경西原京,
중원경中原京,정천군井泉郡, 신주新州, 패서도浿西道 등인데
섬서성, 감숙성, 사천성에 있던 신라의 지명이다.
삽량주는 사천성 양평현, 하주는(완산주라고도 했다.) 사천성 영창현,
상주는 섬서성 자양현으로 금성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 백제, 당과 각축했던 곳이다.
강주는 복건성 천주시, 청주는 광동성 광주시로 신라의 영토였으나
당의 강역으로 편입된다.
서원경 감숙성 유중현, 중원경은 감숙성 예현으로백제, 고구려, 당, 발해가
다투던 곳이다.
정천군은 섬서성 한성현으로 발해의 강역이었다.
신주는 감숙성의 예현 지역, 패서도는 고구려의 장안성(섬서성 서안시)
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가 차지했던 곳이다.
삽양주는 양주(안휘성 화현)로, 상주는 상주尙州(절강성 구주시)로,
강주와 청주는 진주晋州(강서성 남창시)로,
서원경은 청주(산동성 요성시)로 중원경은 충주忠州(산동성 래무시)로
하주는 강서성 의춘시江西省 宜春市로 옮겨진다.
신라의 대륙의 강역은 한반도의 6배로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륙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전역, 산서성의 남동부 일부,
섬서성의 남동부 일부, 안휘성, 절강성, 강서성, 강소성, 호남성의 전역,
호북성과 복건성, 광동성, 그리고 한반도였다.
단국은 영하자치구와 감숙성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 중화는
감숙성 임하햔을 중심으로 하는 한족漢族,
여적은 후대의 여진女眞으로 섬서성 연안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부족이었고
말갈은 감숙성의 회령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부족,
예맥은 하북성 남부와 하남성의 북부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응유는 사천성 중서부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남조南朝의 한족,
탁라는 한반도를 지칭하며,
오월은 사천성 합천시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유역의 부족들이었으며,
왜는 광동성과 복건성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
이들이 모두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접했던 지역에 있었다.
신라와 당, 백제와 왜는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진한辰韓 때에 진秦의 유민들이 감숙성에서 섬서성의 서나벌로 이주했고,
섬서성과 사천성의 신라인들이 당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백제가 중기 이후에 진출한 호북성과 호남성은 원래 왜倭의 강역으로
왜의 상당수가 백제로 편입되었고
또 산동성과 하남성의 백제 사람들이 호북성과 호남성을 거쳐 광동성과
복건성 지역의 왜로 또는 일본 열도로까지 건너갔던 것이다.
신라의 김씨 왕조와 가락의 김씨 왕조의 조상은 하한족의 조상과 같다.
신라와 당이 군사적으로 연합했고,
백제와 왜가 서로 도운 것은 전략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혈통이 같다는 점도 무시할수 없다.
신라의 강역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확인 할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삼국사기>의 판본은 고려 때
인쇄된것이 전혀 없다.
근세조선 중기 이후 인쇄된 것이 전하고 있는데 고려 때 인쇄된 판본과
근세 조선 때 인쇄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가 저술된 곳은 대륙에서였기 때문이다.
근세조선은 건국은 대륙에서 했지만 곧바로 한반도로 이전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저술 당시의 판본에는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방향을 나타내는 동서남북으을 바꾼다든가 바다를 건넜다는
도해渡海 등의 글자를 삽입한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진것이다.
근세 조선 초기에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원본이 그대로 전해지면
우리 역사가 대륙에서 이루어졌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근세조선의 집권층은 우리 역사 특히 고려의 역사가
마치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위장 하기 시작했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역사서는 금서로 정해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도록 했고,
더 나아가서는 모두 없애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위장하거나
감추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우리는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서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역사의 제모습을복원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대륙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