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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소개
이르크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내중심에 늘어선 건물들 하나가 하나가 예술작품 자체다. 1879년 대화재가 발생하기 전에 지은 목조건물은 처마며 창틀의 조각들이 일품. 대화재 이후에 지은 석조건물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품격있는 바로크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도시의 격조를 한껏 높혀준다.
오벨리스크 광장을 지나 하중도로 건너가는 작은 다리옆 물속에는 이르쿠츠크 건설 3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음악 분수대가 일품이다. 한 여름밤에 펼쳐지는 음악과 분수의 향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름을 잊게 해준다. 다리를 건너 유노스지라고 부르는 앙가라강 하중도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특히 해질무렵 유노스지에서 바라보는 앙가라강의 은빛 물결은 무척이나 낭만에 젖게 한다.
앙가라강 댐 상류에는 현재 러시아가 보유중인 쇄빙선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앙가라호'가 떠 있다. 이 배는 1889년 영국에 주문 제작한 후 분리된 상태로 철도를 통해 운반하여 1899년 7월18일부터 1900년 7월25일까지 1년여에 걸쳐 조립되었다. 선체 길이 60m, 폭 10,5m, 높이 7,5m로 러일전쟁 때는 미쳐 완공되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연결하여 전쟁 물자와 군인을 수송하기 위해 화차 10량과 승객 160명을 동시에 싣고 호수를 건너기도 했다. 1928년 내전 당시 백군의 대포에 맞아 침몰돼 인양된 적이 있으며 70년에 두번째로, 그리고 80년에 세번째 침몰된 적이 있다. 이후 1988년 수리를 시작해 91년 박물관으로 개관했으며 바이칼 호수를 운항했던 배들에 관한 서류나 사진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
1. 테카브리스트 박물관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유형의 땅'의 중심에 서 있다. 실권한 황제, 혁명가, 죄인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추방당해 동토의 땅으로 유배되었다.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월,'데카브리스트'는 12월의 당원을 뜻한다. 1825년 12월 일단의 귀족청년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에 맞추어 당시의 수도 쌍트 뻬쩨르부르그 원로원 광장에서 러시아에서는 최초로 거사를 일으켰다. 주모자 5명은 처형당하고 120여명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두 발로 6천㎞가 넘는 길을 걸었다. 유배지에서는 20㎏이 넘는 족쇄를 차고 중노동을 해야 했다.
거사의 배경은 이렇다.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 온다. 9월초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곧 발생한 화재로 모스크바는 폐허로 변하고 긴 행군에 지치고 굶주린 프랑스군은 쉴곳을 얻지 못하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빨치산과 러시아 정규군은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좇아 프랑스 파리까지 입성하게 하여 결국 러시아는 폴란드를 얻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 후에 발생하게 된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장교들은 유럽의 자유로운 공기를 흠뻑 쐬고 돌아와 보니, 자신의 러시아는 황제1인이 신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직도 농노제가 존재하는 조국의 현실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모임을 갖는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후 제위가 비어있던 3주 동안의 혼란을 틈 타, 당초 계획했던 1826년 봄에 앞서, 1825년 12월 14일에 봉기를 하게 된다. 원로원 광장에 3000명이 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최고 지도자인 ‘트푸베츠코이’ 공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지향했던 의도와 계획은 좋았으나 시기상조 였던 것이다. 새로 황제가 된 니콜라이 1세는 600여명의 반란 관련자들을 직접 심문한 후 5명은 교수형에 120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낸다. 처음에 그들은 바이칼 뒤편 도시 ’치타’라는 곳에서 노동징역 형을 살았다. 러시아 최고 가문의 귀족들이 ‘거룩한 뜻’을 품은 대가로 손발에 20kg가 넘는 쇠고랑을 차고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다.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페쩨르부르크의 가족들로부터 오는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었다.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발꼰스키(1788-1865)는 옛 공국의 창시자 루릭의 후손으로 1806년부터 58회에 걸쳐 여러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문호 레프 똘스토이와 먼 친척인데 똘스토이가 1812년의 프*러시아 전쟁과 데카브리스트들의 활동상을 연구하다가 쓰게 된 소설이 ‘전쟁과 평화’ 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안드레이 발꼰스키인데 이는 똘스토이의 숙부인 데카브리스트 세르게이 발꼰스키를 이름만 바꾸어 묘사한 것이다.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부인 마리아 발꼰스까야는 모스크바대학 창설자이자 인문계와 이공계 모든 학문을 섬렵했던 천재 중 천재 로마노소프의 증손녀다. 19살 때 20살이나 차이 나는 발꼰스키와 결혼후 첫아들을 낳은 다음 날, 남편은 나라의 ‘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죄인이 된것이다.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갔다.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다시 나온다)
발꼰스키의 집은 이르크츠크 인텔리들이 모여서 시낭송을 하거나 정치토론을 하거나 음악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학문, 문화, 예술활동은 이르크츠크의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르크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명성을 얻는 이유는 시가지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바로 이 데카브리스트들의 공헌으로 이 도시의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발꼰스키의 집에서는 지금도 그때의 전통을 이어 연극회와 문학의 밤을 갖고 있다.
한편, 거사의 실패로 사형이나 유배를 당한 데카브리스트들의 뒤를 따라 1년여를 걸어서 시베리아로 뒤따라 온 이들이 있었다.
젊은 장교들의 약혼자들과 젊은 아내들 일부가 연인을 찾아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르크츠크 현의 총독은 강제노동중인 남편을 만나게 해주기 전에 먼저 서류를 내밀고 서명하도록 했다. 그것은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버리겠다는 것,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 이곳에서 낳게 될 자녀들은 농민 신분으로 살 것에 동의한다는 것, 그리고 남편이 죽어도 귀족사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였다. 그녀들은 이곳으로 떠나올 때 벌써 페쩨르부르그에 두고 온 자식을 포기해야 했다.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아 바꼰스까야는 한 살된 아들을 친척들에게 두고 왔는데 그 아이는 엄마와 떨어진지 일년이 안되어 죽었다
그녀들 중에 토르베츠코이(1790~1860)의 아내 에까쩨리나 토르베츠카야는 혹한의 광산 갱으로 남편을 찾아가 족쇄를 찬 발에 입을 맞추었다고 전한다. 30년이 흐르고 마침내 사면을 받았으나 아내는 이미 죽은 뒤였다. 남편은 수도로 돌아가지 않고 이르쿠츠크에 남아 문화를 고양하다 죽었다.
마리아는 15세때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국민시인 푸쉬킨과 함께 크림반도로 휴양을 갔을 때 부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으나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족끼리 친분이 있던 터라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았다. 여기서 잠깐 푸쉬킨과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푸쉬킨은 25명의 데카브리스트들과는 친척관계이고, 56명과는 친구관계로 데카브리스트들의 비밀활동 깊숙한 곳에는 늘 푸쉬킨이 함께 하고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모임에서는 ‘자유’, ‘마을’, ‘차다예프에게’ 등 자유사상이 담긴 작품들을 낭송했다. 그는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시들을 많이 썼는데 이것이 황제의 눈에 거슬려 당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던 그를 1820년 시골로 추방을 당한다. 이 덕분에 그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연루되는 것을 면했지만, 죽을 때까지 비밀경찰의 엄격한 감시와 검열을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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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브리스트들이 살던 집이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자그마한 목조 건물
이다. 입던 옷, 안경, 책상, 필기구, 연인과 남편을 따라온 용기있는 여인들의 초상화 그리고 족쇄와 삽 같은 것들이 보인다. 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날 한 데카브리스트는 외투를 걸치고 호롱불 아래서 의자에 앉아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썼던 모양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된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비록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혁명정신은 결국 100여년후 공산혁명을 낳게하는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관람시간은 10:00에서 18:00까지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2. 발콘스키의 집(박물관)
발콘스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톨스토이의 친척이며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시베리아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후에 이르쿠츠크 북쪽 30여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 정착한다. 1845년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사하면서 살고 있던 목조 주택을 이르쿠츠크로 옮긴 후에 재조립하여 1847년부터 1856년까지 9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발콘스키가 상빼쩨르부르그로 돌아 간 후 한 때는 고아들을 위한 학교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1985년에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발콘스키가 살던 당시, 이 집은 이르쿠츠크에서 유명한 사교 장소였으며 문인들이 모여 시 낭송을 하거나 명망있는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서 지금도 문학 작품 발표회나 연극 등이 공연되고 있다.
유배지하면 그의 행색이나 처소가 초라할 것으로 추측하기 마련이지만, 넓은 마당 한켠에 있는 행랑채며 마굿간의 규모,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까지한 실내의 장식이나 각종 가구, 세계에서 2대 밖에 없다는 포르테 피아노 등을 보면 그가 혁명에 실패한 반역 죄인이 아니라 상빼쩨르부르그의 명문 귀족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더 이해에 와 닿는다.
데카브리스트하면 항상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 톨스토이와 푸쉬킨 그리고 그들의 부인 이야기다. 특히 톨스토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 곳곳에 표현하여 남다른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이채로운 것은 발콘스키보다 열 일곱살이나 연하였던 그의 부인 마리야. 처녀 시절에는 유명한 러시아 국민시인 푸쉬킨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부모가 점지해준 노총각 발콘스키에게 시집갔다는 사실이다. 자유분방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러시아도 예전에는 우리보다 더 엄격한 가부장의 권위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3. 즈나멘스카야 수도원
끼로프 광장에서 앙가라 연안을 따라 걸어가다 앙가라 강을 벗어나서 우샤코프카 강의 다리를 건넌 곳에 위치하고 있다. 1762년에 건설되어 현재도 쓰이고 있는 교회로 일요일에는 미사도 행해지고 있다. 사원의 정원에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처형된 귀족들의 묘지가 있다. 성당 안에서는 성가가 메아리치고 곁에서 러시아 정교신부가 향료를 흔들며 걷고 있다. 돔은 황금색 테두리에 여러 가지 성화로 장식되어있다.
4. 시베리아 철도 기념관 오벨리스크
향토 박물관 건너편 가가린 거리 남쪽끝에 앙가라 강을 면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한 알렉산더 3세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쌈지 공원이 있다. 그 곳에서는 각종 이벤트가 수시로 열리고 많은 무명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주며 거리 악사들의 연주 또한 끊이질 않는다.
1891년에 기공된 시베리아 철도를 이르쿠츠크 에서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897년으로 최초의 열차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1898년 8월의 일이었다. 오벨리스크에는 시베리아 개척에 공헌한 3명의 영웅인 엘마크, 스페란스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벨리스크까지의 '가가린 가로수 거리'는 이르쿠츠크의 인상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 줄 곳이다.
5. 향토박물관/드라마극장/미술관/영화관
앙가라 강에서 마르크스 거리로 향하여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붉은 건물로 1782년에 설립되었다. 러시아에 표류한 일본인일행의 귀국을 실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락스먼이 이 박물관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많은 전시품을 수집하였다. 시베리아 선주민의 무기, 생활일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시베리아 동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그릇, 어린이들의 완구, 민속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이 외에 세레호프가 탐험에 사용하였던 짐승가죽으로 만든 카누 등이 볼만하다. 1층 표를 파는 장소 옆에는 선물상점이 있고 시베리아에서 산출되는 돌에 그린 인형 등을 팔고 있다. 박물관 앞의 흰 건물은 화이트하우스라고 불리는데 동 시베리아 총독부가 있었던 장소이다. 현재는 이르쿠츠크 대학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람시간은 10:00시에서 18:00까지이고 월요일, 화요일은 휴관이다.
드라마극장은 향토 박물관 옆에 위치하며, 주변 일대는 밤이 되면 연극을 관람하러 온 시민들 로 떠들썩하다. 극장안에는 노동스타디움이 있는데 겨울에는 실외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어진다.
미술관은 석조건물로 1870년대의 이르쿠츠크 시장이었던 스카초프의 회화 수집품을 기초로 창설되었다. 시베리아 각파의 이콘, 러시아 회화, 중국의 도자기나 회화로도 유명하다. 관람시간은 10:00에서 18:00까지이고 화요일은 휴관이다.
영화관들은 주로 마르크스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르크스거리는 이르쿠츠크의 중심가로 길가에는 쇼핑객과 영화관람객으로 성황을 이루며 다음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로비에서 쉬고 있다. 내부장식이 화려하고 조각도 꼼꼼하게 되어 있다.
6. 바이칼 호수와 동식물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호는 터키어로 물고기가 풍부한 호수’를 의미한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동쪽으로 70㎞에 있는 바이칼 호반의 리스트비얀카 까지는 차나 배로 갈 수 있으며, 차량으로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호수 북쪽으로는 바이칼-아무르 철도가, 호수 남쪽으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간다.
길이 약 640km, 너비는 평균 48km, 최대 79km이며, 호안선의 전체 길이 2000km로 우리나라 해안선 총길이와 맞먹으며, 면적 3만 1500km2, 가득 채워진 수량 2만 3000km3 이다(전세계 표면 담수량의 약 20%이며, 마실수 있는 물을 기준으로는 전세계의 식수의 80%에 해당된다).
재밋는 비교를 해보면, 현재 바이칼 수량만으로도 전인류가 40년을 마실수 있으며, 앙가라강은 더 유입되는 물이 없어도 400년을 더 흘러 갈수 있다고 한다.
2500 만년 전에 생성된 이 호수는 지금도 매년 2cm씩 호수가 넓어진다고 한다. 전세계의 강물이 1년간 흘러 모으면 바이칼을 채울수 있다고 한다. 최대 수심은 약 1600m, 최대 투명도는 약 40m로 두가지 모두 세계 제일이다.
호수의 위아래 물이 한 차례 순환하는 주기가 북쪽은 225년, 중앙은 132년, 남쪽은 66년에 한 번이라고 하니, 어린아이가 막 태어나서 본 남쪽의 바이칼 물은 평생 한번 보면 다행이고, 북쪽에 있는 바이칼 물은 8대 후손쯤 가서나 그 물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얘기^^
여름에는 호수 가장자리의 수온이 23도까지 올라 가지만 호수의 중심부는 4도에 불과할 정도로 수온의 차이가 심하다. 10월 말경이면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1월 중순이면 호수의 중심부까지 전부 얼어 붙는다. 적설량에 따라 얼음의 두께에 차이가 있지만 보통 70에서 120cm까지 얼며 50cm이상의 얼음이 얼 경우 15톤이상의 화물차도 거뜬히 지나갈 수 있다
1~2월의 평균 기온은 -19도이고, 8월의 기온은 11도이다. 1~4월에는 호수면이 결빙된다. 1m 이상 얼은 호수도 아름다워 호수위를 산책할 수도 있다. 한겨울에는 호소면의 얼음이 큰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기도 한다. 8월의 표면 수온은 1도이다. 겨울에 결빙하지 않을 때는 호수 전체가 일종의 열섬(heat island)이 되는 일도 있다. 호수 주변의 높고 깊은 산과 협곡에서 형성된 바람이 엄청난 규모의 물을 만나 대기가 불안정해지면 간혹 호수에 돌풍을 일으키기도 해서 종종 호수를 지나는 배가 뒤집어 지기도 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바이칼의 수심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1년에 한번은 강도 7의 지진이, 5년에 한번은 강도 8의 지진이 발생할 정도로 지진 다발 지역.
1862년에 강도 10의 강진이 발생하여 6개의 마을과 1,300여명의 주민이 함께 수장되기도 하였고, 미진은 거의 매일 몇 차례씩 발생하며 년 평균 2,000회 이상의 지진이 관측될 정도로 지진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름의 호수는 그 투명도가 약 40m라고 하며 가장 깊은 곳은 1,637m이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인 바이칼은 동식물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1,085종의 식물, 1,550종 이상의 동물들 중 60%는 바이칼호에서만 서식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이칼 바다표범 ‘네르파’ 이다. 이 동물은 북극해에 사는 바다표범과 많이 닮았다. 바이칼호에 사는 가장 큰 물고기는 용상어인데 그들 중에는 몸길이 180cm, 몸무게 120kg이나 되는 것도 있다. 또한 바이칼호에서만 서식하는 새우 ‘예삐슈라’는 바이칼 물을 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연어의 일종으로 바이칼호 근처에서 훈제해서 파는 "오믈"이라는 물고기를 맛보는 즐거움도 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의 일부는 호면에서 2000m 높이로 솟아 있다. 호수 위에는 27개의 섬이 있고, 그 가운데 5개는 주기적으로 수몰한다. 가장 큰 섬은 면적 약 730만 km2의 올혼섬이다. 바이칼 호수에는 336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오고 있지만 나가는 것은 앙가라 강 뿐이다.
승선장은 시내의 남쪽, 악차프레스키구의 소네추누이에 있다. 오전,오후 각 2회, 총 4회운행되고 있으며, 호수내를 유람하는 유람선은 1시간 코스, 2시간 코스가 있다.
‘오물’
바이칼에서만 서식한다는 이 어류는 네르파와 함께 바이칼 호수의 상징물. 길이 약 50cm, 몸무게 약5kg까지 나가는 것도 있으나 보통의 경우 약 30cm 내외이며 수명은 약 25년.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오물의 양은 일년에 약 25만에서 30만톤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중요한 양식이자 산업자원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오물의 요리 방법도 다양하다. 내장을 없애거나 아니면 둔채로, 절이는 소금의 양에 따라, 절이는 시간에 따라, 그리고 훈제 여부에 따라 그 맛은 아주 다양하다. 호수에서 갓 잡아 올린 생물을 그대로 연기에 익힌 말랑말랑한 오물은 보드카 안주로 그만이고, 소금에 약간 절인후 반쯤 말린 오물은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소금에 깊게 절인후 바짝 말린 오물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사가는 선물용으로 안성맞춤
시베리아 갈색곰
시베리아 타이가 밀림속에는 힘세고 사납고 무서운 갈색곰이 약 3~400여 마리의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바이칼 렌스키 사냥금지 구역에 위치한 '갈색곰의 해변'이라는 곳에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다.
'루체이니까'라는 나비의 번식기인 6월 초순에 이들의 애벌레를 핥아 먹기위해 갈색곰들이 무리를 지어 해변에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가축을 공격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갈색곰은 코가 잘 발달된 대신 눈이 안좋기 때문에 이들은 만났을 때는 될 수있으면 몸을 숨기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 때 도망가려 한다거나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적으로 덤빌 수도 있다.
곰사냥은 해당 관리인에 허가를 받은후, 현지인 전문가와 사냥개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담비
바이칼을 비롯한 시베리아의 광활한 산림속에는 천연 모피의 황제로 불리우는(현지인은 '소볼'이라고함) 검은 담비가 야생한다. 주로 큰나무 밑의 땅속이나 돌틈 사이에서 서식하며 몸길이는 30~40cm, 꼬리 길이는 15cm내외로, 17세기 중엽, 용감하고 잔인했던 카자흐인들이 시베리아의 평화를 깨고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던 원인도 알고보면 소볼을 비롯한 야생 동물의 모피 때문이었다.
담비는 원래 색깔이 짙을수록 고급으로 여기는데 이곳 바이칼 호수 동쪽 우스찌바르구진 인근에서 나는 소볼이 가장 검고 짙어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당연히 모피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로 대우 받으며 이것으로 만든 코트나 모자는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린다.
차가버섯
암갈색의 돌덩이 같기도 하고 말라 비트러진 쇠똥처럼 모양이 귀해보이지 않은 딱딱한 이 버섯이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차가 버섯. 한국명은 검은 자작나무 버섯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에 바이러스가 침입하여 생긴 후 상처가 아물면서 석탄처럼 검은 덩어리 모양으로 커지는데 그 기간이 10~20년은 자라야 약효가 있다고 한다. 일본의 홋까이도, 핀란드 일부 지방에서도 자생하지만 이곳 시베리아산이 가장 우수한 약효를 지니고 있다고 함.
시베리아의 레나강이나 예니세이강 주변 등 일부 특정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은 당뇨나 소화기 계통의 질환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역학 조사 결과 이들은 차가버섯으로 차를 달여 늘상적으로 마신다고 한다.
일본이나 미국에서의 연구도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고, 급기야는 '신의 선물'이라는 만병 통치약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7. 리스트 비앙카 & 러시안 사우나
석양이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의 유일한 출구인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곳에 위치하며,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약 70km 떨어져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며 산 경사면에는 목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에 녹색 지붕이 드문드문 보인다. 청색이나 녹색으로 칠해진 목조 주택들은 멀리서 보면 마치 작게 축소한 정원같다.
리스트비얀카를 중심으로 위쪽으로 발쇼이코트와 뻬스차나야 같은 고립 마을이 있다. 이곳은 배가 아니면 갈 수가 없고 겨울에는 얼음위로 자동차로 가야만 한다. 관광객이 많은 성수기에는 1주일에 한두번 유람선이 왕래하기도 한다.
리스트비양카 인근 뚜르바자라는 여행자 숙소에서 재밋는 러시안 전통 사우나를 즐길수 있다. 사우나에서 땀을 흘린 다음 곧바로 바이칼의 차가운 물로 뛰어든다. 겨울에도 얼음에 구멍을 뚫고 바로 들어간다. 바이칼에 손을 씻으면 5년을 더 살고 얼굴을 씻으면 10년을 더 산다는 말이 있는데 바이칼에 온몸을 담구고 나면 100수를 누릴지도 모르는 일^^
8. 바이칼 갤러리
바이칼 호수에서 나는 신비한 희귀 동식물의 표본과 바이칼 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에 일하는 연구원을 통해 바이칼호의 설명을 자세히 들을수 있다. 바이칼 갤러리 바로 뒤쪽으로는 바이칼의 수질 보존과 동식물들의 보호를 위한 바이칼 연구소가 있다.
9. 앙가라강 샤만바위
호수의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은 유일하게 앙가라강뿐이다. 앙가라강의 길이는 약 1800km이고, 예니세이스크 상류에서 예니세이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앙가라강의 강 입구 가까이에는 유명한 ‘샤만의 바위’가 있다. 그것은 높이 약 200m, 무게 약 150t의 대리석인데, 그 대부분은 수면밑에 있다. 최근 이르쿠츠크 가까이에 큰 댐이 만들어져 수력 발전 등의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 호수의 수위가 약 15m 상승하여 샤만의 바위의 겉모습은 보이락 말락 해졌다.
거대한 대리석 ‘샤만의 바위’에는 아름다운 앙가라 아가씨의 전설이 간직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 주변에 바이칼이라는 이름의 나이 든 영웅이 살고 있었고, 그에게는 앙가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바이칼은 336개의 강이 유입되고-이를 바이칼 노인의 아들에 비유함. 유일하게 흘러나가는 앙가라 강이 있는데 이를 바이칼 노인의 고명딸로 비유함). 이 딸을 극진히 사랑한 바이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그녀를 깊숙한 호소 바닥에 숨겨 두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마리의 갈매기가 날아와서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예니세이강 주변의 초원과 그곳에 살고 있는 잘생긴 용사 예니세이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후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깊이 동경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바이칼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빠져 나와 예니세이를 그리워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잠에서 깨어난 바이칼은 사랑스러운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나서, 딸이 가는 길을 막기 위해 가까이에 있던 큰 바위를 들어올려 힘껏 던졌다. 바위는 바이칼호의 폭포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곳에 떨어지고 그 바위에 앙가라는 깔려 죽게 되었다. 그것이 샤만의 바위이고 앙가라 강은 그 이유로 지금도 예니세이를 그리워하며 예니세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앙가라 강이 이르쿠츠크 주민들에게 주는 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강줄기의 중간중가을 막아 발전하는 여러 개의 발전소 전력양이 년간 수백만kw에 이른다. 이르쿠츠크주의 전기 요금은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프스크의 15%도 되지 않는다.
앙가라는 수 많은 어류자원의 보고이다. 여기에서 잡아올린 풍부한 어류는 주민들의 소득원이며 고품질의 영양 공급원 이다. 뿐만 아니라 앙가라는 수상교통의 핵심이다. 깊은 산속이나 타이가숲속의 오지는 앙가라의 물줄기에 의존해서 삼림자원이나 생필품을 운송한다.
무엇보다 앙가라 강이 시민들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자산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사실. 바다 같은 바이칼호도 1미터 이상으로 어는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앙가라는 움추린 삶에 생명을 불어 넣고, 한여름의 앙가라는 막힌 가슴을 뚫어 주며 남녀노소 모든 시민들과 연인들의 최고의 휴식처가 된다.
인근 보리셰코치 거리에는 이르쿠츠크 대학의 수생 생물 연구소가 있다. 호소학 연구소 부속의 박물관에는 바이칼 바다표범 박제와 그 밖의 것이 전시되어 있다. 또 앙가라강이 바라 보이는 옥외 박물관에서는 17세기 상인의 집, 부랴티야인의 주거, 아름다운 이콘(성화상)을 소장한 교회 등을 볼 수 있다
10. 알혼섬
브리아티아 말에서 유래한 “조그마한 숲” 이란 뜻의 알혼섬은 길이 71.7km, 넓이는 15km, 면적은 730 제곱키로미터인 알혼섬은 바이칼호수의 26개 섬중에서 제일 큰 섬이다.
섬동쪽은 숲과 80m에 이르는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모래사장이나 초원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떼들이 거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와 시베리아의 각종 들꽃이 펼쳐진 들판과 시베리아 시골마을을 지나면 알혼섬 들어가는 선착장에 이른다.(이르크츠크에서 선착장 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으며 자동차로 약4시간 정도 소요되며, 선착장에서 자동차를 배에 싫고 건너면 곧바로 알혼섬내 선착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잘 딱여진 비포장길을 약1시간 이상 자동차로 달리면 후찌르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러시아인과 브리아티아 소수민들로 구성된 알혼섬 인구는 약1500명 정도로 대부분 ‘후찌르’란 마을에 산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과 양목축을 하는데, 마을의 생선공장은 매년 500-600톤의 물고기를 잡는다고 함.
알혼섬은 남북 72km로, 그림 같은 절경들이 펼쳐진 해안과 숲을 따라 이동하는 드라이빙 투어가 이루어 진다. 주요 여행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부르한 바위(독수리 형상의 거대한 바위)는 브리아티아인들과 몽골인들에는 신성한곳으로 여겨지는데..이 곳에 징기스칸의 무덤이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삼형제 바위(바이칼의 가장 절경중에 절경이라 할 수 있는 곳)와 하보이(알혼섬의 끝으로 송곳이와 같이 쭉 호수로 펼쳐진 곳으로, 우측으로는 100m넘는 절벽이 있으며 건너편 부랴트 공화국을 볼 수 있다).
우쥐르(유일하게 섬에서 해안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곳으로 갈매기와 해안 절경이 아름다운 곳)
그리고 여행 중에는 생선 오물과 감자로 만든 국을 숲속에서 점심으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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