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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 운문 장원>
여행
정 혜 련(영가초등 6)
책을 읽을 때마다
떠나는 신나는 여행
책을 펼 때 책 속의 예쁜 꿈들이
하얗게 피어나고,
내가 살며시 책을 펴보면
웃음으로 반겨준다.
교훈을 주는 이야기들이
활짝활짝 피어나고,
예쁜 시들은 강물에서
반짝반짝 노래한다
내 꿈 내 나래짓이
맘껏 꿈꾸는
책 속 여행
내가 내가
세상을 위해
신나게 떠나는
책 속 여행
<중등부 운문 장원>
소나무
이 정 인(김해시 신어중학교 1)
소나무
당신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나뭇가지 잡고 흔든
짖궂은 장난에
몇 년을 그렇게
세월 삼킨 당신의 허리는
어느새 저 만치나 굽어있고
그것도 모르는 채
나는 하늘 나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당신안의 먹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잎새 흔들며
바람을 갈라보아도
하늘높이 손 뻗어
소리쳐 보아도,
외로운 당신을.
나는 그저
한 마리 벌레가 되어
깊이 깊이 당신 맘
아프게 파고들 뿐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 자리에서 뿌리 박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한 곳만을 지키며
변치않는 웃음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이젠
제가 당신의
소나무가 되겠습니다.
아직 약하디 약한
어린나무에 불과 하지만
앞으로의
내 힘차게
뻗어나갈 가지에
당신의 외로움
모두 날려버릴테니
나의 소나무
나의 어머니
당신이 내게
가장 큰 버팀목이며
당신이 내겐
가장 큰 소나무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등부 운문장원>
빈자리
이 연 수(영주제일고등학교 2)
당신이 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곁에 둘 수 있으니,
제가 나무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만 뿌리내릴 수 있도록,
당신이 해였으면 좋겠습니다.
늘 바라볼 수 있으니,
제가 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당신만 기다리는
바보같은 나이지만
당신의 찡그린 얼굴마저 사랑하는
바보같은 나이지만
당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대여
당신만을 그리워하는
바보이고 싶습니다.
손목시계
김 연 자(안동시 태화동)
가난한 시골집의 바람벽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고단한 엄마의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시간을 따라
젖을 먹고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하면서
엄마를 닮아갔다
들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아이는 가끔씩
괘종시계를 보고
빨리 열두번 종을 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시간은 꽃처럼 피어서 지고
또 피어나던 날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나의 손목에다 걸어주셨다.
<초등부 산문 장원>
여행
우리 가족은 매년 방학 때마다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보곤 했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새로운 여행을 갈지 방학 때만 되면 항상 그 생각에 바쁘다.
“우리 이번에는 서울로 여행을 가보자”
아버지의 한마디에 나와 동생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도 하마처럼 커졌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안 된다고 반대하시던 서울여행에 드디어 찬성하신 것이다. 나는 멀미도 잘하고 서울까지 갔다오면 힘이 들어서 다음 날 못 일어나곤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서울에는 두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거기다 서울에 가봤자 서울에 살고 계신 작은 아버지와 지내기 때문에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 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큰 시장에도 가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방학 때는 꼭 서울에서 여러 구경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서울구경을 허락해 주신 덕에 내 머릿속에는 어디부터 구경할 지에 대한 생각들이 빙빙 맴돌았다.
아버지께서는 회사에서 돌아오시며 기차표를 넉 장 뽑아오셨다. 서울 여행이라는 생각에도 가슴이 벅찬데 기차여행까지 한다는 생각에 그날이 더욱 기다려졌다.
하루 하루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갔던지 나는 벌써 기차역에 와 있었다. 기차가 들어온다는 방송과 깜박거리는 글씨들은 나를 반겨주는 듯 했고, 길게 이어진 기차의 모습은 나를 더욱 반갑게 여겨주는 것 같았다.
기차에 타 있어도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한참 지루해 지려던 참이었는데 드디어 창 밖의 풍경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로 지나가버리는 바깥의 풍경들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인사를 남기고서 나는 새로이 보이는 풍경들을 보며 하나 하나씩 감탄사를 내 뱉었다. 그리고 그 풍경들도 머지않아 내 뒤로 지나갔다.
많은 풍경들을 보아 왔는데도 아직 서울까지 가는 길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보아 왔던 서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아도 금방 자료가 바닥나고 말았다. 생각을 해 보아도 같은 생각만 떠오르고 풍경들도 계속 같은 풍경에 터널만 몇 번이고 지나가는 모습만 반복되었다. 몇 몇의 사람들은 벌써 지쳐서 잠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나는 기차 천장에 달린 텔레비전을 보면서 지겨움을 달래었다.
드디어 4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스피커에서 청량리역이라는 방송이 들려 왔다. 드디어 기차에서 내릴 수 있다는 것과 기차에서 내리면 서울의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서울구경은 내일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회도 먹을 수 있어서 좋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구경을 다하고서 아쉽지만 다시 안동으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으로 인해 서울이라는 대도시와 안동이라는 작은 도시의 다른 문화들을 알게 되었고, 작지만 큰 교훈들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기뻤다.
<중등부 산문 장원>
박 보 름(임동중학교 3)
“언제 와?”
“일주일 후에.”
“알았어. 끊어.”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낸 지 3년 정도까지는 항상 엄마가 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약하고 여린 엄마 잃은 오리새끼였다.
아버지는 내가 3학년 때 돌아가셨다.
지금 엄마는 재혼을 하셨다. 행복해 보이신다. 나는 그 모습이 싫었다. 처음 난 엄마가 재혼을 하신 사실을 몰랐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며칠 엄마가 집에 오지 않아 이상했을 뿐이었다.
“엄마, 어디야? 안 와?”
“으응… 보름아 사실 엄마… 재혼하려구 지금 그 집에 와있어.”
11살, 너무 어린 나이였다. 전화기를 던져놓고 울었다. 몇 시간이고 캄캄해져 언니가 올 때까지 울었다. 언니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뱃속에서 답답함이 차 올라 목까지 올라왔다. 먹은 음식을 다 토해내고 잠이 들었다. 긴 밤이었다.
괜히 화를 내고 입이 나왔다. 뾰루퉁한 얼굴로 다른 곳에 화풀이를 하고 다녔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났다. 몸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했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삼년 전 밤에 생긴 그 응어리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서 더 딱딱하게 굳었다. 가끔 찾아오는 엄마도, 돈을 쥐어 주시는 새 아버지도 녹이지 못한 내 마음 속 응어리는 어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해주려고 하실 때마다 더욱 단단해졌다. 나 때문에 쩔쩔매며 난감해 하는 그 얼굴이, 집으로 돌아가며 미안한 얼굴로 새 아버지에게 사과를 할 엄마 얼굴이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하고 도려냈다. 혼자였는게 좋았다. 나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나는 사람들이 싫었다. 특히 새 아버지는 앙숙의 라이벌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엄마 모습에는 새 아버지가 묻어 났고 엄마에게서 ‘나’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엄마의 발길도 전화도 확 줄어버렸다. 어쩌다 걸린 전화도 반찬은 있으냐, 돈은 있으냐 같은 구질구질한 질문들이었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짜증이 잔득 묻어난 내 목소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눈물이 났다. 어렸을 적보다 울보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울고 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지금 뭘 할까? 나는 이렇게 울고 있는데 엄마는 새 아버지와 웃고 있겠지? 새 아버지, 정말 뭐야! 남의 소중한 사람을 가로채가고…….’
나는 새 아버지가 엄마를 가로채갔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오직 엄마 뿐인데 새 아버지는 그런 소중한 엄마를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 난 열등감에 휩싸였다. 자연히 새 아버지를 부러워했고 질투도 했다. 하지만 마냥 질투만 할 수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새 아버지보다 힘도 약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고 지혜롭지도 못하고 지식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많았다. 힘, 지혜, 지식… 난 그 모든 걸 얻어 엄마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난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했다.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하루하루 나는 바뀌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랑도 알고 미움도 알고 그걸 푸는 방법도 알았다. 학교에서 일등도 하고 칭찬을 받으며 내 자신을 발전시켰다. 그때는 그저 엄마를 찾고싶은 마음에서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목적이 달라지고 변했다. 엄마는 새 아버지 곁에서 행복하단 것도 알았다. 엄마가 행복하길 바랬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난다.
나는 새 아버지만큼 똑똑하고 지혜롭다 하지만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새 아버지와 난 해야 할 일이 달랐다.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새 아버지는 진작 알고 계셨다. 부끄러웠다. 그동안의 내 자신이.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다. 지금 나는 이렇게 멋지게 살고있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었다. 또 지혜였고 지식이며 사랑이고 은혜였다. 난 지금 엄마와 떨어져 있지만 행복하다. 언제나 그들을 향한 질투가 나와 함께 커갈테니까. 내 질투는 나의 진실된 마음이다.
<고등부 산문 장원>
이 진 선(진성고등학교 2)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이제 중학생활이 익숙해졌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랑스럽게 “네!”라고 대답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새 교복에 설레곤 합니다. 그래도 한 달 전 입학식 때보다는 중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한결 자연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내가 입학하던 날, 엄마는 교복입은 내 모습을 보면서 매일 밥상에서 깨작거리더니 키가 여태 그 모양이냐며 나무라셨지만, 나는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늘상 입에 달고 사는 ‘미자네 딸래미’에 관한 얘기는 흘려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도 많이 들어서 귀딱지가 된 기분입니다. 엄마가 그토록 강조하던 ‘미자네 딸래미’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는 그저 안면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키도 크고 어깨도 꽤 넓습니다.
또한, 초등학교 때는 학생회장까지 했을 만큼 인기도 꽤 많습니다 물론, 나처럼 미자아줌마의 간지러운 전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찍은 아이도 있겠지만, 아줌마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우리 유진이 꼭좀 뽑아줘. 부탁한다.”하고 전화하기도 힘든 일이니까요. 엄마는 미자아줌마를 보고 돈 많은 집에 시집가더니 싹수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특히 미자 아줌마가 엄마의 미용실에 다녀간 날에는 더욱 씩씩거리며 말합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도 우리 아빠가 더 좋잖아요.”하고 애교도 부려보지만, 엄만 “고 기집애가 돼지같은 지 딸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돈만 있으면 누가 일등 못하니? 그게 어디 또 통하나 보자!”라며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계속 합니다. 그리고 그 끝엔 “진선아, 네가 이번 시험은 꼭 잘봐야 해. 알았지?”
하며 내 귀딱지를 물리곤 합니다. 그것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처음 치르는 중학교 시험에서 수석으로 입학한 유진이를 이겨야 하니까요. 공교롭게도 유진이는 우리반 반장이기 때문에 누가 더 시험을 잘 쳤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도 미자 아줌마가 우리 가게에 오는 것이 반갑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유진이도 덩달아 미워졌습니다. 내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분명 5학년 때까지는 내가 공부를 더 잘 한 것 같은데…….’ 하고요. 왜냐하면 내 친구가 말하길 유진이의 5학년 때 받아쓰기 시험이 50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 한번도 받아쓰기 시험에서 1등을 놓쳐 본적이 없습니다.
시간은 잠시만 멈춰달라고 기도했지만 잘도 흘러갔습니다. 무심코 달력을 보니 중간고사가 벌써 이 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학원이란 곳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이런 내 모습을 무척이나 흡족해 하시는 눈치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닥치는대로 외우고 읽어갔습니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고, 시험지에서 내가 외워두었던 반가운 것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결과는 나의 승리였습니다. 유진이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이 우리 반의 반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공주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기분 나쁜 귀딱지를 쌓아두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지만 유진이와의 신경전은 점점 골이 깊어져만 갔습니다. 한번은 체육시간 때에 키순으로 줄을 선 적이 있는데, 그 때에 세 번째에 선 나에게 맨 앞으로 가라 하여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방과 후 활동시간에 나만 빼놓고 다른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사이가 그렇게까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부터 유진이와 나는 서로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진이가 새로 가방을 사면 나도 사고, 내가 실내화를 새로 사면 유진이도 그랬습니다. 유진이는 커다란 덩치로 나를 자주 놀리기만 했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귀밑이 달아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조그만 내 몸으로 어찌 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엄마 앞에서 엉엉 울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봐 가면서도 그럭저럭 학교의 생활도 무난하게 해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나름대로 3학년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학생회장 선거가 한창이었습니다. 나는 유진이가 출마 할 것이라고 짐작해 왔지만 막상 커다란 유진이의 포스터를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더군다나 유진이의 선거운동을 친구들이 모두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아이들이었음을 알았을 땐 그 포스터를 떼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유진이가 떨어질 수 있을까?’하는 어리석은 고민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도 출마 해 나는 그 친구를 돕기로 했습니다. 그날 부터 우리는 아침 일찍 등교하여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에게 홍보운동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나는 극기훈련 때 체력훈련을 받던 목소리보다도 크게 기호 2번을 외쳤습니다. 그러면 저 쪽에서는 유진이가 더 큰 목소리로 기호 3번이라고 외쳤습니다. 마치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시합하는 것 처럼요.
그 해 학생회장의 결과는 기호 1번이 회장, 2번이 부회장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서 우리는 아예 인사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진이에 관한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괜히 뾰로통해 졌습니다.
여름방학을 몇 일 앞둔 7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한가지 추천 할 것이 있다며 교무실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시’에서 여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캠프를 준비했는데, 참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학년만 한 반에서 한 명씩 가기로 했는데 나보고 가라고 하신 겁니다. 나는 내 친한 친구도 간다기에 알았다고 한 뒤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 시작되었고, 나는 캠프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캠프에 가던 날 시청 앞에는 과연 많은 학생들이 꽃단장을 하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진이도 있었습니다. 나는 다소 언짢았지만 신경 안 쓰기로 했습니다. 캠프 첫 날 우리는 레프팅을 했습니다. 같은 학교끼리 조였기 때문에 유진이와도 한 보트를 타게 되었습니다. 보트는 한가롭게 흐르는 강을 지나 제법 거센 물살이 흐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보트는 심하게 흔들리더니 빠른 속도로 내려갔습니다. 그 때 보트가 잠깐 들리는 바람에 나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당황했지만 사전에 물에 빠지면 침착하고 그대로 떠내려 오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했습니다. 그냥 떠내려가는 것은 보트보다도 발랐습니다. 내가 하류에 도착하니 아직 보트는 저 멀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혼자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저벅거리며 다가왔습니다. 유진이었습니다. 우리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장면이었을테지만 유진이와 어느 정도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
캠프는 빠르게 지나가고 폐막식을 앞둔 때였습니다. 우리는 조끼리 편지를 써 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유진이에게 뭐라 쓸지 꽤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요. 다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편지중에 가장 고마운 편지는 유진이의 편지입니다.
우리의 이유없는 질투와 시기는 어쩌면 서로에게 있는 관심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유진이의 말은 나를 적잖이 감동시켰습니다. 아직은 서로에게 민감하지만, 이제 조금씩 웃으며 손을 흔들 수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일반부 산문 장원>
윤 상 희(인천광역시 남동구)
내 몸 곳곳에 쌓여있는 케케묵은 먼지를 벗기기 위해 오랜만에 동네목욕탕을 찾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서로의 등을 다정스레 밀어주던 딸아이가 시집간 이후로 나는 혼자서 이런 곳을 찾는 것이 왠지 모르게 겸연쩍었다. 언제나 함께 걷던 자의 부재는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한 꺼풀씩 옷을 벗고 나는 황급히 수건으로 내 몸을 가렸다. 부끄러운 몸이었다. 중년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축 쳐진 뱃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였다. 목욕탕 속,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내 몸은 생김새 자체부터 달랐다.
뿌연 거울 속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나의 모습 나는 수건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는다. 힐끗힐끗 거울을 통해 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본다. 동정따윈 필요없는데 나는 찬물로 머리를 적신다
“등 좀 밀어드릴까?”
닿지도 않는 등을 닦으려 끙끙거리는 나에게 어떤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아니라고 아무리 사양해봐도 할머니는 어서 등 돌려보라며 나를 재촉했다.
“젊은 양반이 어쩌다 그렇게 됐어? 많이 힘들었겠구먼.”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런 말에 의미없는 옅은 미소만 띨 뿐이었다. 그랬다. 내 가슴은 끓다가 끓다가 용암이 폭발한 화산이었다. 지금은 볼품없이 타인의 시선을 받는 푹 꺼진 분화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왼쪽 가슴을 도려낸 유방암 환자였다.
딸아이의 결혼준비로 바빴던 그 해에 왼쪽 가슴 한 켠에 무언가가 뭉글하게 솟아올랐다. 무덤덤하게 그 덩어리를 키우던 나는 뒤늦게서야 팔팔 끓고있던 암세포의 정체를 알고 맡았다. 유방암 3기, 의사는 살려면 가슴을 도려내야 한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이의 결혼준비도 해야 하는데, 아들 대학 공부도 아직 다 못 시켰는데……. 캄캄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것은 오직 아이들뿐이었다. 그렇게 내 생이 쓰러지는 가운데에서도 내 자신에 대한 걱정은 어리석게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삶을 살아온 것이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살찌우게 해준 내 가슴. 평생을 따뜻하게 안고 살았던 내 왼쪽 가슴은 아이들의 색종이놀이처럼 허무하게 오려졌다. 떠나보내면 안 되는 것들……. 나는 내 인생에서 살점 이상의 존재였던 가슴을 그렇게 잃어버렸다. 여자란 이름보다도 엄마란, 아내란 이름으로 바보처럼 산 내 삶이 그저 허무하게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마음속이 뚫려버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도톰한 살점이 있던 그 자리에도 내 마음 속에 꽉 차있던 어떤 것들도 모두 빈자리가 되어 남아있었다.
견디기 힘든 항암치료보다 견디기 더 힘든 것은 사람들이 시선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게 생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나의 마음은 점점 찾지 않는 우물과도 같아졌다. 나는 서서히 우물의 문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도 다시 찾고 싶었던 일상 안에 서있어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였다. 약해져 버린 나, 마음 속 빈자리에 원래 있어야 할 것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무덤덤하게 비어있는 가슴 한 켠을 만져보기도 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암같았던 나의 가슴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품었던 온기의 기억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나의 빈자리에 채워놓고 싶은 한 가지였다. 그리고 넣을 수만 있다면 평생 글을 쓰고 싶다던 문학소녀의 내 옛 모습도 넣고 싶었다. 내가 찾고 싶었던 그 것, 내 자리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숨쉬고 있음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답답했던 내 마음이 서서히 세상의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깊고 고요했던 나의 우물에 새빛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남들 앞에 서는 것에 익숙치 못하다. 수건으로 급급하게 내 가슴을 가리곤 하지만 난 예전처럼 약한 내가 아니다. 여자로서의 진짜 내 이름, 내 자리를 찾은 나는 지금 이 순간조차 행복하기만 하다.
“할머니, 등 돌리세요 제가 등 밀어 드릴게요”
어느새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버린 나는 딸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할머니의 등을 밀어드린다. 세월의 먼지와 함께 말이다.
거울 속 흐릿하게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양쪽으로 머리를 딴 이제 몽글하게 젖이 올라온 어린 소녀의 얼굴이 겹쳐보인다. 나를 보며 환한 웃음을 보이는 아이는 바로 꿈 많던 나의 모습이었다. 나의 빈자리에 그 아이의 웃음을 살포시 놓아둔다.
푸른 연기 속에서 내 빈자리는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다. 따뜻하다. 내 가슴 속 몽글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안동문학제29집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