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산실인 설악산 백담사 근처에 만해마을이 들어섰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법장 불교조계종총무원장)는 9일 오후 3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136―5 일대에 조성된 ‘백담사 만해마을’ 준공식을 갖는다. 스님·시인·독립운동가로 한국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의 사상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만해마을에는 2000여 평의 부지에 만해문학박물관·만해사(寺)·만해학교·문인의집·심우장(尋牛莊) 등 5동의 현대식 건물과 만해광장, 만해평화지종(萬海平和之鍾), 만해상(萬海像)이 들어섰다.
충남 홍성 태생인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른 후 백담사에 와서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면 이곳을 찾았다. 신간회 활동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고 혹독한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는 한편, 장편소설 ‘흑풍(黑風·1935년)’과 ‘박명(薄命·1937년)’을 잇달아 연재하는 등 문필활동을 계속했다.
1940년 8월 11일 조선일보 강제폐간 당시에도 ‘삼국지’ 번역을 연재했으며 일제의 강제폐간을 개탄하는 한시 ‘신문이 폐간되다(新聞廢刊)’를 발표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함께 만해마을에 ‘만해어록비(萬海語錄碑)’를 국민의 참여 속에 세울 계획이다.
▲ 만해마을 '문인의 집'
만해마을 앞을 흐르는 북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문인의 집.대규모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어 연수나 회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뒤쪽의 산은 설악산 자락인 안산이다./한영희기자 yhhan@chosun.com
'님의 침묵' 산실에 만해의 혼 살아났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을축(乙丑·1925년) 8월 29일 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 시인이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은 1925년 여름,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며 발문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78년이 흐른 올여름, 이 근대문학사상 불후의 명시집 산실에 그의 호를 딴 만해마을이 완공됐다.
백담사 만해마을은 설악산 자락의 십이선녀탕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강원도 인제에서 속초로 가는 46번 국도를 달리다 십이선녀탕 계곡 입구에 이르면 ‘백담사 만해마을’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계곡 쪽으로 차를 몰아 최근 개통한 만해교(卍海橋)를 건너자 여러 동의 현대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들의 앞뒤에는 내린천 상류인 북천과 설악산 자락인 안산이 자리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놓임)의 지형이다.
만해마을에 들어서는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입구 왼쪽에 위치한 ‘심우장’(尋牛莊·지상 2층)이다. 만해의 만년 거처였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의 이름을 따온 이 건물은 문인·종교인·학자들이 함께 이 시대의 정신과 사상, 문학을 토론하는 곳으로 마련됐다.
심우장 뒤편에는 만해마을의 정문인 ‘경절문’(徑截門)이 자리하고 있다. 두 장의 큰 돌판을 기역(ㄱ) 자로 이어붙인 듯한 현대적 감각의 경절문에 들어서면 ‘만해학교’(지상 2층)와 ‘문인의 집’(지상 4층, 지하 1층)이 마주보고 있다.
다시 그 뒤는 만해마을의 중앙으로 ‘만해사’(萬海寺·지상 2층)와 ‘님의 침묵 만해광장’이 자리잡고 있다. 북천을 내려다보는 만해광장은 약 500~600명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야외행사를 할 수 있는 반원형(半圓形)의 열린 공간이다.
만해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야 할 곳이 ‘만해문학박물관’(지상 3층)이다. 1층 상설전시실, 2층 기획전시실, 3층 세미나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해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고 있다. 만해마을 준공과 함께 1차로 문을 연 상설전시실에는 연보·사진으로 보는 연대기·일대기를 담은 동양화 병풍·만해의 친필 휘호 및 현판 등이 대형패널로 전시돼 있다.
만해는 49세 때인 1927년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서울)지회장으로 활동했다. 만해를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에게 소개시킨 이는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였다. 계초는 친지들과 함께 서울 성북동에 만해의 거처인 심우장을 지어주는 등 각종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해는 소설 ‘박명’과 ‘흑풍’을 연재했으며 1940년 조선일보 폐간 때 ‘신문 폐간되다’란 제목의 한시를 지어 일제의 강압조치를 개탄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이제는 재갈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아 쓸쓸키도 쓸쓸한 망국의 서울의 가을날….”
만해마을에서 만해의 정신적 고향인 백담사까지는 약 3㎞ 거리로 바로 이어지는 도로가 최근 만들어졌다. 만해는 20세 때 처음 백담사에 들어와 인연을 맺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5세 때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이듬해 출가했다. 또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다시 백담사로 내려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면 백담사를 즐겨찾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해지는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은 1996년 신흥사 회주 오현(五鉉) 스님의 주도로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발족하고 만해상·만해축전이 잇달아 만들어지면서 다시 부각됐다. 이번 만해마을 조성으로 백담사를 만해 정신을 널리 알리는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은 한층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만해 한용운 연표
-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남
-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
- 1913년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 출간
- 1918년 불교잡지 ‘유심(惟心)’ 창간
-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일제로부터 3년형을 선고받음
-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선임됨
-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간행
- 1927년 신간회에 적극 참여,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맡음
- 1931년 잡지 ‘불교’ 사장에 취임. 불교비밀결사 ‘만당(卍黨)’ 당수로 추대됨
- 1933년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이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 마련해줌
-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
- 1944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남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 1973년 ‘한용운전집’(전6권·신구문화사)이 간행됨
-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발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