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세번째 사제는 누구일까?
뜻밖에도 특별히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개의 신자들은 잘 모르는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근대 한국 천주교회가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첫번째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그늘이 워낙 크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었기에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도 마찬가지. 20여년전 뒤늦게 교회사 전면에 등장한 최 신부는 늦은 등장을 보상받으려는 듯 신자들의 사랑을 듬뿍받고 있습니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습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을 맞아 김대건 최양업 신부의 뒤를 이어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사제의 길을 걸어온 3명의 초기 한국 천주교회 사제들을 만나봅니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습니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대건(안드레아)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837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역시 정하상(바오로)·이문우(요한) 등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직접 신학교육을 시켰습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함께 받았습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돼 순교했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조선교회는 박해 와중에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 를 세워 신학생들을 교육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말레이반도 페낭 신학교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 사제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정규하(아우구스티노)·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 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됩니다.
사제교육을 위한 이들의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서울을 출발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홍콩 또다시 싱가포르를 지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 페낭까지 무려 50여일이 걸린 유학출발 길이었습니다.
페낭 유학 생활은 강성삼이 1882년에 정규하가 1883년 그리고 강도영은 제일 늦은 1883년에 시작했다.
이들을 비롯한 페낭의 조선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습니다.
이들 조선 유학생들이 다른 풍토와 기후 그리고 음식등의 차이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국내에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습니다.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 를 설립 1885년 10월 7명의 신학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블랑 주교는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 를 얻자마자 서울 인근에 신학교 부지를 물색 1887년 3월에 용산신학교 터(현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은 용산신학교에서 수학 마침내 1896년 4월26일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서품식이었습니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인 강도영신부와 네번째 정규하 신부 다섯번째 강성삼 신부는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 경남 밀양(당시 명례)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투전 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지금의 풍수원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또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 을 세워 한글과 한문 수학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삼위학당은 오늘날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했습니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중 6년만에 37세로 요절했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제가 되기위해 걸어야했던 험란한 길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올랐던 21명의 신학생 가운데 7명이 병사한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교회는 이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일곱번 째 한기근(바오로)·여덟번째 김성학(알렉스) 신부 배출 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출처 : [평화신문]
성물방소식지 제2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