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오 종 일
Ⅰ서 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관향貫鄕은 울주蔚州(울산의 옛 이름) 호號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중종 5년 장성에서 태어나 명종 15년 장성의 본집에서 돌아갔으니 50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다.
이 시기는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조선조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연산군燕山君의 혼란한 조정에 대한 중종의 반정이 있었고, 인종의 짧은 재위 기간을 거쳐서 명종의 등극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집권 대신들과 사림들과의 갈등으로 일어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조선조의 건국과 함께, 새로운 이념으로 숭상되었던 충절정신이나 의리정신이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인간의 가치를 더욱 존중하는 도학사상으로 발전하였으나, 도학의 이상은 기묘사화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많은 선비들이 다시 산림에 은거하게됨으로서, 그에 대한 학문적 탐구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성리학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이다.
김인후는 기묘사화를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였고, 인종과 만났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려 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하서의 삶과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 과정에서 어떻게 처신하였으며, 또한 그가 남긴 성리학적 연구 업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밝혀, 그의 삶과 학문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Ⅱ김인후의 삶과 교연交緣의 인물들
1. 하서의 성장과정
하서가 살았던 시대는 중종 명종 연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인연을 맺은 것은 인종이었다. 따라서 그 사회적 배경과 학문적 특징은 중종 명종의 시대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그의 진실한 내면세계와 삶의 모습은 인종에게 발휘되었던 충절과 의리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서는 중종 5년에 태어났다. 이때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29세였고 기준奇遵(1492∼1521)은 19세였다. 이해에 기준이 처음으로 조광조를 만난다 그 후 하서가 9살이 되었을 때, 기준은 우연히 하서의 영민 함을 듣고 직접 만나 조정에서 내린 붓을 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가 기준의 나이 27세로서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그 시기는 신진 사림들이 벌써 조정에 많이 참여하여 새로운 이상을 펴고 있을 때였다. 하서는 이 때 받은 붓을 소중하게 여기고 깊이 간직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었고, 또한 사화가 일어난 이후에도 이 일을 자주 말하면서, 기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조광조와 기준의 사상과 의식이 김인후에게 전승되는 과정을 이해하게된다.
10세 때는 전라도 관찰사인 김안국金安國(1478∼1543)을 만나서 학문을 배웠다.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김안국은 이천利川 주촌注村으로 물러났고 그의 동생 김정국金正國(1485∼ 1541) 또한 고양高陽의 망동芒洞으로 귀양가서 정지운을 제자로 맞이한다.
18세 때는 또한 기묘사화로 동복에 귀양와 있는 최산두崔山斗(1483∼1536)에게 학문을 배웠다. 최산두는 김굉필의 문인이었다. 이때 맺어진 중요한 인연이 양산보였다.
양산보는 18세 때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귀향하여 소쇄원에 살았다. 하서가 장성에서 동복을 오가면서 그곳에 들르게되었으니 두 분의 교유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소년시절과 청년 시절의 하서는 이와 같이 모두 기묘 사림들의 학문을 전수 받고 또한 그 정신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하서 19세 때는,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시회詩會에 장원을 하게된다. 그 후 24세 때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이황과 더불어 각별한 정을 나누었다.
이 시기에는 사화를 겪은 후이기 때문에 유생들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지식인들을 냉소하는 풍조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흔들리리 않고, 서로 돕고 언행言行과 동정動靜을 한결같이 하면서 뜻을 함께 하였다
하서의 이와 같은 행적은 그의 학문적 연원과 교유가 모두 기묘 사림과 더불어 전개되었고, 또한 이황과의 만남은 조선조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유 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출사와 인종과의 만남
하서는 중종 35년 3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의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세자, 곧 훗날의 인종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의 나이 34세가 되었던 중종 38년 4월에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겸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어 인종과 만난다.
인종과 하서는 서로 가깝고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들이 처하고 있었던 조정의 형편은, 세자로서 안정된 환경에서 덕을 쌓고, 또한 신하로서 세자를 보필하여 성군聖君의 길을 가도록 보도補導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서와 만났을 때 인종의 나이 28세였다.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章敬王后는 세자가 태어난 지 1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10세가 되던 중종 19년에 결혼하였으나, 그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장경왕후가 돌아가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왕비로 책봉되고, 29년에 경원대군을 낳았다. 이가 뒷날의 명종이다. 그러므로 세자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종 28세 때, 경원대군은 11살이었다. 이 때 문정왕후는 경원대군을 보위에 앉히려하여 조정에서는 끊임없는 암투가 일어나고 환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서는 세자를 보도補導하는 책임을 맡게된 것이다.
하서는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도학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세자가 성군의 길을 가도록 훈도訓導하였다. 그것은 하서가 세자에게 "세자가 세자로서의 닦아야 할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나서 왕위에 오르면 요堯 순舜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정성껏 계도하니 서로 계합契合하게되었다"는 기록에서 그 성실성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자는 이러한 하서의 인품을 존경하고 잘 따랐을 뿐 아니라, 깊은 인간적 신뢰를 나타냈다. 그것이 대나무를 그린 묵죽도墨竹圖 한 점을 내려주면서 자기의 뜻을 보여주고, 그 그림에 제시題詩를 써줄 것을 부탁한 일이다. 그리고 성리학 연구의 교재라고 할 수 있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내려 주었던 것들은 하세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세자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는 한편, 도학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묘 사림들의 신원伸寃을 건의하기도 했다.
세자의 보도補導가 된 그 해 7월, 경연에서 임금에게, "기묘 사림들이 한 때 그렇게 한일은, 비록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본심은 조금도 국가를 기만하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인데 끝내는 중죄를 입었고, 그 후에 죄지은 사람들은 죽게되고, 다른 사람들도 비록 세월이 오래되어서 더러는 복직되었지만, 아직도 기묘 사림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으니 신臣은 이를 불편하게 여긴다" 고 한 것은 그가 사림들을 구하려는 마음이 절실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정의 형편은 하서와 세자 단 둘이서 권신들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정대신들 거의가 이미 윤원형의 편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는 견딜 수 없어, 8월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귀향하기에 이른다. 4월에 세자를 만나서 8월에 고향에 돌아 왔으니, 인종과 함께 하였던 기간은 5개월이었다. 그 이듬해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였으니, 이 시기에 조정의 세력들에게 얼마나 날뛰게 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3. 귀향과 교유관계
8월에 고향에 돌아온 하서는 12월에 옥과 현감에 임명된다. 이듬해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인종 원년에 명나라 사신이 국상國喪에 조문을 오자 제술관製述官으로서 잠시 갔을 뿐이다.
그의 부인은 여흥驪興 윤씨尹氏였는데, 아들 둘 딸 넷을 두었다. 아들은 종룡從龍 종호從虎인데 종룡은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8)의 사위였다. 둘째 딸은 양자징梁子 에게 출가하였는데, 양자징은 양산보의 아들이다. 또한 셋째 딸은 유경렴柳景濂과 결혼하였는데 유경렴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아들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단순한 친인척의 사이가 아니라, 사화의 시대에서 의리와 신의를 지키며 학문적인 교연交緣을 통하여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의 스승 김안국은, 중종 35년에 하서가 홍문관 부정자가 되던 그 해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예조판서禮曹判書 데사헌大司憲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세자대사世子戴師 대제학大提學을 두루 거쳤다.(金安國의 家狀) 그러나 학문적인 관계로 볼 때는 이때 김안국의 동생 김정국을 통하여 정지운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훗날 정지운의 「천명도」가 탄생되는 과정에서, 그 그림에 대한 하서의 평가가 있게된 것이다.
다음은 하서와 기준과의 관계이다. 기준이 기묘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하자, 기준의 친형 기진奇進이 광주로 내려와서 살게되었는데, 그의 둘째가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다. 이는 하서와 기대승의 만남이 매우 각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승 또한 하서에게 학문을 의지하려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하서가, 기대승과 이황의 성리학 논변이 일어나게 된 동인動因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리학 논변 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일재一齋 이항李恒이다. 이항은 40세가 되던 1538(중종33)년에 칠보산七寶山(지금의 정읍 칠보)에 와 있었다. 기대승 또한 그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 인연으로 일재의 문인이었던 김점金 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다. 그 뿐 아니라 이항은 소재 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외당숙이었으니, 이러한 관계로 말미암아 성리학에 대한 여러 가지 논변이 있게 된 것이다.
Ⅲ김인후의 도학과 성리학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일반적인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堯 순舜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된 것은 유학의 근본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그 까닭은, 연산군 시대의 어두운 조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새로운 기풍을 세우기 위해서는,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유학의 본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요 순의 도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서는 기묘사림의 정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학문은 도학을 그 본령으로 하게된 것이다.
요 순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을 통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도학을 구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리학이었기 때문이다.
하서의 학문은, 이와 같이 성리학 연구를 통하여 도학을 실현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성리학 연구를 통하여 요堯 순舜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또한 「천명도」를 통하여, 우주와 인간이 하나임을 밝혀, 중화中和 사상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하게된다.
1.하서의 학문적 기반
이와 같은 도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하서는 그러므로 평소에 「태극도설太極圖說」「서명」등을 읽고, 그 깊은 의미를 찾았으며, 이를 정밀하게 익히기를 천 번은 두루 하였다「태극도설」이란 주렴계周濂溪(1017∼ 1073)가 창안한 것으로서, 성리학의 시원始原이 된다. 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우주의 생겨남으로부터 만물의 형성에 이르기까지를 도표로 설명하고 거기에 도설圖說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알면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이해하게된다. 또한 그와 같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장횡거張橫渠가 쓴 「서명西銘」이다. 하서가 이 두 책을 학문 방법으로 삼은 것은, 이 책들이 성리학의 기본 서書이지만 이를 통하여 도학의 세계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서는 이에 대하여 "태극은 덕성의 본령이며 서명西銘은 문학問學의 기틀이니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하서가 존덕성存德性 도문학道問學을 그의 학문적 종지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곧 인도人道에서 천도天道에 이르는 중화 사상의 본지本旨로서, 인간의 문제로부터 우주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하서는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는, 그 구체적 방법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서 찾았다.
『소학』은 인간의 지적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인격 도야의 방법이며 『대학』은 『소학』규범을 완성하는 덕성의 함양방법이다. 『소학』의 가르침이 ‘하학下學’을 이루는 것이라면 『대학』은 ‘상달上達’함에 있다.
하서는 "반드시 『소학』을 읽고, 『대학』을 읽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하학下學으로부터 상달上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음 알 수 있다.
도학이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도道를 인간의 가치로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도학의 정치를 지치至治라고 한 것은, 하늘에서와 같은 지극한 도道로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가 요 순이었다. 그러므로 요 순이 이루었던 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천명에 대한 해명이었다.
하서는 그러므로 『대학』『논어』와 함께, 『시경』『서경』『 주역』을 공부하고, 『태극도』와 『서명』을 익혔다. 이는 성리학 연구와 함께 『시경』을 통하여 성정性情의 올바름을 구하고 『서경』을 통하여 인심의 위태함을 경계하고 도심의 은미 함을 발현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주역』을 통하여 만물의 형성과 그 운행에 대한 실체를 터득하는 일이었다. 하서는 이와 같은 학문 방법을 통하여 마침내 인간과 우주가 하나임을 밝히는 도설圖說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하서의 「천명도」였다. 「천명도」는 천명을 설명하는 학문적 정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하서는 요 순의 지치를 이루기 위하여 도학정치를 표방하고, 그와 같은 세계에 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송학宋學을 배웠으며,, 나아가 시詩 서 書 역易을 이해하여 도道의 실체를 익힌 그 결과로서, 마침내 「천명도天命圖」를 제시하여 자신의 학문적 결실을 제시한 것이다.
2.성리학 연구와 「하서 천명도」
하서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가 그린 「천명도」는 그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천명도」는 처음 정지운이 그린 것이다. 정지운이 김정국의 제자라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정지운이「천명도」를 그리게 된 것은 김정국이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가게되자 그의 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주자학이 수입되자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은 「태극도」를 보고, 자기의 생각에 따라서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제목처럼 하늘과 인간과 심心과 성性은 하나로 합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정지운은 「태극도」와 「천인심성합일지도」를 참고하여 「천명도」를 그렸는데,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지운이 자기가 처음 그린 「천명도」를 세상에 내놓기 이전에, 하서에게 가지고 와서 물었다는 점이다.
하서 40세 되던 8월, 옥과 현감에서 물러나고 순창의 점암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을 때, 정지운은 자기가 그린 「천명도」를 들고 하서를 찾아왔다. 이를 본 하서는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고 천도의 이치를 감탄하는 글을 써준 다음에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천명도가 만들어짐에 있어서 어찌 함부로 들여다보고, 헤아리려는 사람들의 모의적인 수단으로는 될 법이나 할 일인가. 하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나아가지도 못 한 사람이라, 이 그림을 펴보니 서글픈 생각이 없지 않다. 정군鄭君 靜而(靜而는 鄭之雲의 字다)가 조석간에 서울로 올라가게 되니 서로 생각하는 정은 말로 다 할 수 없기에 우선 이 글을 천명도의 후면에 써서 주는 것이다. 가정 기유 8월 김후지는 쓰다"
이 후제後題를 보면 정지운이 「천명도」를 그리자마자 하서를 찾아와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서는 또한 그에 대한 평가의 글과 함께 이와 같이 격려하였던 것이다.
하서는 또한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고, 이에 자극을 받아서 자신의 뜻에 의하여 새로운 「천명도」를 그렸던 것이니, 그것이 세상에 전하는「하서천명도」이다. 이때 탄생한 하서의 「천명도」는 정지운의 「천명도」와 함께, 조선조 성리학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정지운은 그 후 자신의 「천명도」를 김안국 김정국에게 물었으나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한채 곧 돌아가게 되었고, 이황이 이를 수정하여 준 때가 명종 8년이었다. 그 후 명종 13년 기대승이 과거에 합격하고 이황과 만나, 그 이듬해부터 이에 대한 논변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이 시작된 때는 하서가 정지운을 만나서 천명도에 대한 후제를 써주었던 가정 기유 (명종 4년)로부터 9년 후의 일이었다.
하서의 성리학 연구는 남다른 바가 있다. 이는 그가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요한 특징은 만물 화생化生 현상을 천명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주렴계는 「태극도」에서 만물의 생생生生은 무극에 근원을 둔 태극의 작용으로 보았다. 주자는 이를 리理라고 하였다. 하서는 그러나 "하늘의 도道가 깊고 멀어서 다 함이 없으니, 일찍이 생생의 이치가 간단함이 없다" 하였다. 이는 만물의 생생生生은 깊고 그윽한 천명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는 태극을 리理로 이해하고 리의 작용에 의하여 만물이 생겨난다는 「태극도」의 정신보다 천명을 더욱 중시한 현상이다. 이는 하서의 '경敬'의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하서 49세 때는 또한 기대승이 이항과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로 볼 것인가 이물二物로 볼 것인가 하는데 대한 논난이 있었다. 기대승이 이에 대한 의견을 하서에게 묻자 하서는 일물설이 옳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이듬해에 이항이 다시 기대승에게 자기 사위 종룡의 편에 '태극과 음양은 이물二物이다'는 편지를 보내자, 하서는 그 편지를 먼저보고 이항에게 태극과 음양을 이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편지를 보냈다.
기대승은 나중에 이 내용에 대한 전말을 모두 적어서 이를 이황에게 질문하였는데 이황 또한 하서와 견해를 함께 하였다. 기대승은 또한 하서가 세상을 떠나자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하서선생에게 의지하여 전에 배운 것을 강습하려 했는데, 이 선생께서 1월 16일 갑자기 별세하셨으니 사도斯道의 불행이 클 뿐 아니라 저의 불행이 더욱 심합니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하여 보면, 하서의 「천명도」는 조선조 성리학 발전의 토대를 쌓은 것이었고, 태극 리기에 대한 견해 또한 매우 깊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의리 실천과 우국충절의 시
하서의 정신은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 그가 남긴 시는 1500 수에 이른다. 그 내용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들이 많지만, 그와 같은 시를 쓴 목적은 도학을 선양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그 시는 『시경』을 원형으로 삼고 국풍國風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국풍國風은 「주남周南」편과 「소남召南」편이 정경正經으로서 그 중심이다. 이는 주(周)나라가 평천하를 이루었던 것은, 성정의 올바름을 백성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인데, 그 내용이 「주남」 「소남」편이기 때문에, 백성을 다스리는 도학의 정신은 여기에서 나온다.
하서는, 유학 정신은 공자에서 나온 것이며, 그를 정신을 계승한 것이 주자라고 보았다. 그가 일찍이 쓴 시, "중니仲尼가 원기元氣라면 주자는 진眞이라는 것은 그의 학문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서의 시는 공자나 주자의 가르침을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 많다 「일관부一貫賦」「복성부復性賦」와 같은 시들이 그것으로서, 이는 충서忠恕의 일관을 통하여, 인간 본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읊은 것이다.
도학의 시는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이는 수신제가를 통하여 백성들의 성정을 올바로 발현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 자신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양하고, 충군忠君의 의리義理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서의 그와 같은 정신은 인종에게 바친 충성에 나타나 있다.
하서는 인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조정의 사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를 안타까워하고, 그 마음을 술로 달랬다. 임금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울부짖고 괴로워하였다. 그러한 심정을 시로써 나타냈다. 이와 같은 속마음을 직접 나타낼 수 없어서,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간흉奸凶들이 날뛰어 충신을 해치는 일들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충신 악비岳飛가 간신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고, 결국 송나라가 멸망한 사실을 회고하면서, 울분한 마음으로 이에 대한 감회를 읊었으며, 초 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나 멱라강에 목숨을 던진 억울한 사실을 읊어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였다.
인종이 죽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또한 그 죽음이 문정왕후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풍문을 듣자 그 슬픔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인종의 생신이나 기일에는 언제나 난산에 올라 통음痛飮하면서 슬피 울고 그 그리움을 시로 남겼다. 그 시가 「유소사有所思」였다.
이처럼 인종에 대한 의리는 그에 대한 그리움의 시로 승화된다.
이와 같이 하서의 시는 도학을 일으키고 자신의 절의를 지키며 인종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였던 시 세계는 「욕기浴沂」의 시와 같이 만물의 유행을 도와서, 천도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현실에 집착하여 시비에 얽매이는 좁은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Ⅳ호남유학과 김인후의 위치
기묘사화는 조선조의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轉回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호남의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오게됨으로서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고,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되었기 때문이다.
하서는 기묘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서, 기묘사화 이후 호남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과 문장 그리고 절의 정신이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그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인품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서를 전후한 호남유학자들을 보면, 위로 박상朴祥(1474∼1530) 조광조(1482∼1519) 촤산두 (1483∼1535)등이 있고, 같은 시기로는 송순(1493∼1583) 임억령(1496∼1568) 양산보(1503∼1557) 김인후(1510∼1560) 유희춘(1513∼1577)이 있으며, 이후로는 김성원(1524∼1587) 양응정(1519∼1581) 박광옥(1526∼1583) 기대승(1527∼1572) 최경회(1532∼1593) 고경명(1533∼1592) 정철(1536∼1593) 김덕령(1568∼1596)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거의가 하서와 깊은 인연을 맺었거나,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1.도학의 발전과 호남 성리학
하서의 도학은 기묘 사림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
천명도는 하서사상의 정화精華를 보여준 것이지만, 그 중요한 업적은 도학을 사림의 이상에 그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정립시켰다는 데 있다
도학의 실체가 하늘의 명命에서 온 것임을 밝혀, 이를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지운의 「천명도」가 김안국 김정국을 통하여 장안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이황의 손에까지 들어가, 기대승과의 논변을 불러왔지만, 실제로는 기대승이 이황을 만나기 이전에 하서를 통하여 기대승에게 전해졌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서가 정지운의 천명도에 대하여 내린 평가와, 하서 스스로 그린 「하서 천명도」는 조선조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데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인된다.
하서의 성리학 연구는 이와 같이 호남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조선조 성리학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2.절의 정신의 계승으로서 의병활동
절의란 절개와 의리이다.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이다. 의義는 인仁의 구체적 실체이다. 인仁은 전체적 개념으로서 본성이며, 의는 구체적 현상으로서 인의 실현이다. 인내의외仁內義外란 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어진 본성을 갖추지 않으면, 의義가 실현될 수 없다.
하서의 의리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 의義 또한 당연한 실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국가가 위난을 당하였을 때, 의義를 실현 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서의 절의 정신은 호남의 의병활동으로 이어진다. 하서의 문인이며 김덕령의 재종숙再從叔이었던 서하당 김성원(1524∼1597)은 창평의 성산에 서하당을 짓고, 하서와 석천 임억령을 스승으로 정철과 고경명 등과 교유하였다. 이들은 임진난을 당하여 의병활동으로 봉기하여 국가의 수호로 이어졌고, 이항의 문인 김천일은 의병장으로서 순사殉死하였으며, 양산보의 사위 안영安瑛 또한 고경명과 함쎄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호남 의병 거의는 하서와 직접적인 관계, 곧 문인으로서 또는 친인척으로서 모두 구구운동에 투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道를 지키고 올바름을 부식扶植하고자 하는 하서의 도학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3.하서의 시와 호남의 문학
문文은 도道를 싣는다. 道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이며, 문文은 그와 같은 도가 실현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하서의 문장이 깊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하서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 문장을 따르게된다.
조선조의 시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정철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철이 하서의 문인이라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철은 하서에게 『대학』을 배웠는데 그가 대학을 읽었던 바위를 대학암大學巖이라 불렀다. 또한 정철이 배웠던 송순은 하서의 사돈인 양산보와 내와종 사촌 사이였다. 양산보의 어머니는 송순의 고모가 된다. 그러므로 하서와도 사돈이 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양산보 가 있다. 일찍이 이황이 양자징에게 집안에서 즐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하서와 더불어 마음의 근심을 창화唱和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양산보의 생활 자체가 하서와 더불어 시를 쓰고 노래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양산보 송순 정철 김성원 임억령 고경명 등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모두 하서의 교유나 문인으로서 호남의 문학을 발전시킨 인물들이었다.
이와 같이 살피면 하서의 도학과 절의 문장은 호남의 성리학과 의병활동 그리고 호남의 시가 문학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또한 호남의 시와 가사의 문학에 그치지 않고, 조선조의 학문과 사상의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그 중심에 하서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Ⅴ맺음말
이상의 서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하서가 살았던 시대는 중종 명종 연간으로서, 이 시기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정립하는 과정이었다. 하서는 기묘사림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였지만, 훗날 인종이 된 세자의 보도를 맡게됨으로서, 조정의 세력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물러나 후학을 길러내고 학문을 닦았다.
인종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어찌할 수 없어, 술을 벗삼고 학문을 닦고 울분을 토로하는 시를 썼다. 그의 삶은 도학을 실현하고 절의를 지키며 문장으로 표현하였던 일생이었다.
그의 도학은 「천명도」와 성리학 이론으로 정립되었고, 절의는 인종에 대한 의리정신으로 나타났으며, 문장은 시로서 표현된 것이었다.
하서의 이러한 삶과 학문적 특징은 호남유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성리학 연구와 의병활동, 그리고 문학적 발전이다
조선조 중엽 호남의 사상과 문화가 이와 같은 특징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하서의 삶과 학문적 업적이 그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의 학술모임이 단순한 수련에 그치지 말고 하서 김인후의 정신적 실체가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