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우스와 원두우의 ‘자립원칙’ 도입 동기에 관하여
석박통합 5학기 이혜원
Ⅰ. 문제제기
중국 산뚱(山東)에서 활동하던 미북장로교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자립, 자치, 자전에 근거한 선교 정책을 정리하여 1885년 Chinese Recorder에 기고하였다. 그리고 소위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라 일컬어진 이 삼자원칙(Three-self principles)은 한국 교회 초기 선교에 적용되었다. 1890년 6월, 한국의 젊은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사 부처를 한국에 초청하여 그의 선교 정책에 관한 강의를 듣게 되고, 1893년 1월에는 한국 장로교공의회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한국 선교 상황에서 네비우스 정책을 가장 주도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선교사는 다름 아닌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였다. 그는 1888년에 이미 네비우스 선교사의 정책을 분석하여 한국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였고, 일부를 실천하고 있었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과 그의 방법이 한국에 적용되는 과정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서는 곽안련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대한 연구,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 언더우드와 마펫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적용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간헐적으로 지속되어왔다. Floyd Eugene Hamilton와 Roland Allen은 1930년에 자립과 성경 공부로 대표되는 네비우스 방법이 한국에 적용되는 과정을 당시 한국 상황을 배경으로 설명하였고, 곽안련은 네비우스 방법이 한국에서 크게 실효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으로 “성경 중심의 사경회”를 중시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영재(1984)는 당시 대두되던 네비우스 방식에 대한 비판론에 대해 반박하며, 역사적 배경(context)을 고려한다면 한국에 네비우스 방법을 채택한 것은 당시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남식(1985)은 네비우스 1차 저작물들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네비우스 선교방식의 핵심과 한국의 적용과정에서 변화된 점 등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일련의 석사논문들은 위의 연구 성과들을 재탕, 삼탕하며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언더우드를 통해 한국에 성공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언더우드 가문에 대한 관심으로 우선 원두우의 초기 사역(1885-1890년)을 살펴보던 중, 원두우가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들을 살펴보니, 네비우스의 방법을 원두우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용하였는지, 어떻게 한국 상황에 적용되어 나갔는지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일었다. 네비우스와 원두우는 왜 “자립의 원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들이 선교 방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과정 말고, 그 전 단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왜 그 선교 방법을 주창할 수밖에 없었으며, 현장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을까? 네비우스와 원두우는 같은 이유에서 자립 원칙을 고집했던 것일까? 본 소고에서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 핵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자립 원칙’을 네비우스와 원두우가 선택하게 되는 동기에 대해 간단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Ⅱ. 네비우스의 자립원칙 도입 동기
1800년대 후반 선교의 세기가 펼쳐지면서, ‘선교신학’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삼자원칙은 네비우스 전에 이미 헨리 벤(Henry Venn, 영국의 교회 선교회 총무, 선교 이론가, 행정가)과 루퍼트 앤더슨(Rufus Anderson, 미국 해외선교회 총무) 등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선교교회들이 독립교회로 성장하는가”였다. 하지만 그런 이론을 아시아 선교지 상황에서 다시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네비우스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설파하는 선교방법의 제일 주요하면서 시작점이 되는 것이 바로 ‘경제적 자립원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집요하게 주장한 ‘경제적 자립’은 산뚱지역에서의 오랜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 선교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현지인을 고용하지만, 네비우스가 경험하기에 이것은 많은 폐해를 낳았다. 현지인들을 돈으로 고용하여 매서인이나 권서인, 혹은 전도사로 일하게 하였을 때 나타나는 치명적인 결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불만이 일어나 결국 지역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둘째, 고용된 사람은 물질적 풍요를 느끼고 그 삶에 안주하게 되면서 전도의 열심을 잃게 된다. 셋째, 고용된 자가 해고되면 바로 기독교를 버리고 심지어 적으로 돌변한다. 넷째, 고용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짓 회심하는 자가 늘어난다. 다섯째, 결국 돈을 바라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고, 이런 사람을 구별해 내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섯째, 자원해서 전도에 나섰다가도, “왜 돈도 안 받는 내가 이런 일을 하나, 돈 받고 고용된 사람이 할 일이다”라는 식으로 마음이 변한다. 결국 무보수로 일하는 것을 가로 막는다. 네비우스가 봤을 때, 실제로 보수 받고 일하는 교회는 다 몰락했으며, 스스로 전도하는 교회는 건전하게 살아남았고, 목사는 교인의 돈을 받았을 때 의무와 책임을 다 하였다. 결국 네비우스는 종교 단체에서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했을 때 나타나는 폐해를 뼈 저리게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중국 문화를 처절하게 직시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 “경제적으로 자립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경제적 자립의 문제가 중요하게 거론되게 된 것이다.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이 비단 경제적 자립의 문제만 논의하는 것은 아니며, 자치, 자전 및 성경 중심, 하층민 중심을 주장하는 등 선교 전반에 걸친 방법론을 전개하지만,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바로 경제문제에 집착하는 산둥민들의 관심을 젯밥이 아닌 제사에 돌려놓는 것이었다.
Ⅲ. 원두우의 자립원칙 도입 동기
원두우는 1890년 네비우스 선교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다. 훨씬 이전부터 네비우스의 글을 통해 그의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한국 현장에 맞게 수정을 가하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원두우는, 네비우스 방한 후 그의 정책을 정식으로 채택한다. 하지만 원두우가 자립원칙을 도입하게 된 동기는 네비우스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원두우도 돈으로 현지인을 고용했을 경우, 돈을 바라고 교회에 오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고, 문제로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수는 복음에 목말라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원두우가 “경제적 자립 원칙”에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노동을 천시하는 한국 풍토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려면, 우선 가난한 한국인들이 돈을 모아야 했고, 돈을 받은 자는 받은 만큼의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을 천시하는 한국에서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정책이었다. 원두우는 경제자립 원칙을 통해 한국인들을 능동적인 일꾼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가 경제 자립을 고집한 두 번째 이유는, 감리교가 차용하는 소위 “기독교 문명정책”을 통해서는 한국 땅에 기독교를 뿌리내릴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감리교는 당시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를 배우면 돈을 준다”는 소문이 날 때까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돈을 주었으며, 정동제일교회 건물을 외국 자금의 도움을 받아 고딕식으로 건축하는 등, 한국을 “기독교 문명화”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퍼뜨리려 하였다. 하지만 원두우는 가난한 한국인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초가집이나 기와집 양식의 교회를 짓는 것을 장려하였고, 가난한 학생들도 학비를 내도록 유도할 정도로 ‘경제적 자립’을 고집하였다. 이것은 한국 땅에 기독교 복음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남이 주는 “문명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경제적 자립 교회를 적용한 세 번째 이유는, 한국인들의 정치 상황을 목도하면서 그들에게 “사명감”을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다. 복음 전도는 본토인들이 한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주체적인 활동에 목말라 있던 “진지한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김남식, 황청일 등의 학자들은 이런 자립, 자전의 방식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독립 정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굳이 “독립정신”과 관련을 맺지 않더라도, 원두우가 한국인들 심저에 자리 잡고 있는 시대적 무기력을 간파하여 자립을 부추겼다고 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원두우가 자립원칙을 도입한 마지막 원인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잘 알기에 이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외국 자본을 계속 사용한다면, 한국에서 기독교는 계속 외국 종교로 남게 될 것이라고 원두우는 생각하였다.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짓고, 전도사를 파견하고, 학교를 지원한다면 한국인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인식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Ⅳ. 결론
이상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바에 따르면, 네비우스와 원두우는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지고 경제적 자립을 꾀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일하는 지역의 교회와 일꾼이 선교회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립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물론 모든 선교 교회는 자립된 독립교회를 지향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립, 독립 교회가 되는 길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처음에는 선교회에 의존하지만 차츰 자립해 나가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립의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다. 네비우스는 선교회가 돈을 지불하였을 때 오는 폐해를 충분히 경험하였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나는 교회는 처음부터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길 바라였다. 하지만 이미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던 교회들이 있었고, 네비우스의 방법을 반대하는 선교사들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의 방법론을 끌고 나갈 수는 없었다. 반면 원두우는 한국 선교 초창기에 네비우스 방법론을 접하면서, 처음 조직교회를 이루어 가는 장연 교회와 새문안 교회를 처음부터 자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왔다. 원두우는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을 도와달라며 찾아온 장연 교회 사람들에게 스스로 나무를 하고 돈을 모으고, 일을 하고, 밥을 지어 나르며 건물을 지어야만 한다고 설득했고, 그렇게 되었다. 네비우스와 원두우가 경제적 자립 원칙을 주장했던 동기가 달랐던 것은, 그들이 다른 사회, 문화적 풍토를 가진 나라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국가가 처해있던 운명이 달랐고, 사회와 문화적 배경도 달랐기에, 동기도 달라졌을 것이다.
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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