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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구름 위 환상의 세계, 구름 아래 우리들의 세상
5. 누가 지배권을 쥘 것인가
오늘날의 기업은 소유주와 관리자들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인 창조물이다. 그리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기업의 권리를 보호한다.
- 리처드 L. 그로스맨과 프랭크 T. 애덤스
기업의 의제는 수익을 향상하고 시장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에 중심을 둔다. 또한 이 의제들은 시장의 경쟁, 금융시장의 요구, 그리고 그 의제 안에서 자신들의 커리어를 키우고 소득을 올리려는 개인들의 노력이 하나로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미국에서는 기업들이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정부기관과 법률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해 왔다. 일단 탄생한 기업은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제는 점점 국가와 국제기구에서 정책 의제를 정할 때 인간의 이익보다는 기업의 이익이 그 핵임이 되고 있다.
권좌에 오른 기업들
링컨 대통령은 사망하기 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기업들은 마침내 권좌에 올랐다. 곧 고위직의 부패 시대가 뒤를 이을 것이고, 돈의 힘이 사람들의 편견을 등에 업고 자신의 힘을 연장시키려 기를 쓸 것이며, 결국은 모든 부가 몇 사람의 손에 집중되어 공화국은 멸망할 것이다.
1876년 막후의 은밀한 거래로 당선된 헤이즈 대통령은 후에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는 더 이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현재의 정부는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정부일 뿐이다.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기업들은 자신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줄 관세, 금융, 철도, 노동력, 국공유지에 관한 입법에 돈을 풀어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부는 부를 낳았다.
1886년 미 연방대법원 수석판사는 산타클라라카운티 대 남태평양철도회사의 소송에서 사기업은 미국 헌법 아래 하나의 <자연인>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후로 법원은 이 판결이 기업이 언론의 자유와 그밖에 헌법이 개인에게 보장하고 있는 내용들을 포함하여 권리장전의 완전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기업들은 시민에게 주어지는 대부분의 책임과 의무는 면제받으면서도, 개개의 시민들이 누리는 모든 권리들을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게 되었다. 대중의 사상과 공적 토론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 것이다. 그 뒤부터 기업들은 자신들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개개의 시민들은 기업이 갖고 있는 막대한 재정과 커뮤니케이션 자원과 경쟁을 벌여야 하게 됐다.
한편, 1933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같은 업종의 기업끼리 시장 독점을 위해 결합하는 트러스트를 해체하고 기업과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강력하게 보장해줄 법안을 밀어붙이는 등 개혁을 주도했다. 그 결과 공공고용프로그램이 도입되었고 사회안전망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리처드 닉슨이 연방대법원을 본래의 친비즈니스적 이미지로 돌려놓기 시작한 1970년대 전까지는 매우 진보적인 조세제도, 꽤 괜찮은 임금수준에서 이루어진 완전 고용, 그리고 강력한 사회안전망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면서 형평성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면서 엄청난 이동이 일어났다. 1929년 당시 2만 명의 백만장자와 두 명의 억만장자가 있었으나, 1944년에는 백만장자만 겨우 1만3천 명 있었을 뿐 억만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상위 0.5%에 해당하는 가정이 미국의 전체 부에서 차지한 비율은 1929년 최고 32.4%에서 1949년 19.3%로 하락했다. 이는 중산층의 팽창도와 더불어 노동자 계층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거둔 대승이었다.
그러나 1980년 로럴드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은 한때 전 세계가 미국을 부러워하게 만든 보편적 번영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으로부터 다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기 위해, 그리고 미국의 기업 이익에 보다 부응하는 세계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일치된 노력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재계가 가진 모든 정치적 자원들이 정치적 의제와 사법제도에 대한 기업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총동원되었으며, 그 결과 부유층에 부과되던 세금은 대폭 삭감되었고, 기업 합병과 인수에 관한 각종 규제도 철폐되었다. 환경과 노동 기준에 대한 강제 조항들 또한 완화되었다. 정부는 공격적인 미국 기업들과 한패였다.
그 결과 미국 내 억만장자의 수는 1978년 1명에서 1994년에는 120명으로 늘어났다. 규제가 철폐된 대부산업에 의한 대출남용은 납세자들에게 5천억 달러의 세금고지서를 안겼고, 이는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혹독한 불경기였으며, 탐욕이 물을 만난 듯 설쳐댔다.
다른 서구의 국가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보수주의가 부활함에 따라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가들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덩치가 큰 몇몇 대기업들, 그 경영자들, 그리고 대주주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는 지구와 대부분의 세계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가 내준 권력을 되찾아오라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규제가 없는 시장이 투표보다도 오히려 정치적 의사표현에 보다 민감하고 더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각각 한 표의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1달러가 한 표이고, 그 사람이 소유한 달러만큼의 투표권이 주어진다. 달러가 없으면 투표권도 없다. 시장은 본래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지고 글로벌화할수록 지배권은 각국 정부로부터 세계적인 기업들에게로 이전되고, 기업들의 이해관계는 인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로부터 더 멀어져 버렸다.
기업은 <부의 재생산>을 통한 번성과 자기복제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닌 매우 이질적인 생명체다. 기업이 충성을 다하는 대상은 단 하나, 바로 금융시장이며 그것은 기업 자체보다 훨씬 더 속속들이 돈이 만든 피조물이다.
문제는 기업이 지닌 경이적인 능력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하나의 구조 속에 결속시키고, 그들을 기업의 목적에 맞추어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여기에 응하지 못하거나 반항하는 자들은 쫓겨나고 보다 고분고분한 사람들로 대체된다.
우리는 지배 권력을 살아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의제에 따라 움직이는 기업집단에 넘겨줄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을 되찾고 인간 사회가 이 지구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가 이 인공적 존재인 기업에게 내어준 권력을 되찾아야만 한다.
6. 괴물 같은, 이름 없는 이데올로기의 습격
현대의 기업은 심지어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유리된 별개의 독립체로 존재한다. 이미 기업의 구성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소모품이 되어 버렸다. 자치조직으로서의 기업의 힘이 커지고 사람들과 지역으로부터 분리되면 될수록 인간의 이해관계와 기업의 이해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생산 비용을 제3자에게 떠넘기기
시장경제 이론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와 대조적으로, 시장이 공익에 부합하도록 가장 효율적으로 가격을 설정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기본 조건들을 명시하고 있다. 이 조건에서 많이 벗어날수록 시장체제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 조건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장은 반드시 경쟁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내의 각각의 경쟁자들의 결탁이 심해지고 그 규모가 커질수록 신규로 시장에 진입하거나 소규모의 독립 기업들은 살아남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시장은 더욱 독점적이 되고 경쟁은 더 약화된다. 또 그럴수록 거대 기업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과시하면서 정부의 양보를 얻어내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비용을 사회로 더 많이 외부화한다.
시장이론은 시장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면 각각의 생산품에 드는 전체 생산비용을 생산자가 감당해야 하고 그것이 매매가격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비용의 내부화cost internalization>라고 한다. 반면 상품의 생산비용 중 일부를 제3자에게 떠넘기는 <비용의 외부화cost externalization>는 그 생산물의 과도한 생산과 더불어 타인의 비용으로 그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부추기는 일종의 보조금이다. 그 제품을 사지도 않는 일반 대중은 중요한 환경파괴, 자연서식지와 휴양지의 손실, 지구온난화, 미래 임산품의 감소 등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이다.
비용의 내부화가 시장원리의 기본 원칙이 되는 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규제가 없는 시장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비용의 외부화를 꾀한다. 일반 대중에게 전가한 비용은 곧 기업의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가 커지고 시장이 자유로워질수록 지신의 비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기업의 능력이 더 커진다. 생태경제학자 네바 굿윈은 “권력이란 주로 비용의 외부화에 관계된 것이다. 만약 비용을 외부화할 수 없다면 권력을 가진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지구촌 경제 통합
1817년 리카도에 의해 발표된 비교우위론은 <어떤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이 양국의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즉, 자본이 고임금 국가로부터 저임금 국가로 흘러들어가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양국간의 교역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각국은 반드시 완전고용 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 각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투자는 각국의 천연자원의 차이를 바탕으로 비교우위를 갖는 생산 활동 쪽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리카도 시대에는 대부분의 무역이 각각의 국가에서 그 국가의 기업이 제조한 완제품들을 서로 교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각각의 생산단위를 조합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국가 경제가 아니라 세계적 기업들이다.
자본이 무역 상대국들의 국경 내에 갇혀 있을 때, 그것은 자국이 비교우위권을 갖고 있는 산업 쪽으로 흘러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제가 서로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우러지면 자본은 어디든 상관없이 보조금, 세금감면, 수준 이하의 임금 및 노동조건, 느슨한 환경기준을 통해 비용을 외부화할 기회를 극대화하는 곳으로 흘러들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소득은 노동자에게서 투자자에게로, 비용은 투자자에게서 지역공동체로 넘겨진다.
외계에서 온 경제학자들
세 과학자가 무인도에 고립되었다. 그들은 난파선 속에서 겨우 통조림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들에겐 깡통을 딸 도구가 없었다. 물리학자는 나무에 올라가 적당한 각도로 깡통을 떨어뜨려서 열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화학자가 그러면 콩이 바닥에 쏟아져 못 먹게 되니 자신이 바닷물을 이용해 뚜껑을 부식시켜 열어 보이겠다고 했다. 이를 듣고 있던 경제학자가 말했다. “당신들은 이 간단한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군요. 방법은 일단,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이처럼 경제합리주의자(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떠받칠 전제들을 <가정>하고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들은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경제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가정을 전제로 도출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전망을 하고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가정이 현실적이지 못할수록, 전망은 더 낙관적이 된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러한 모델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모델의 배경인 가정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고사하고 이론의 배경을 이루는 가정들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 왜곡행위에 참여하는 자들은 탐욕스런 자들에게는 이득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불이익만을 가져다주는 결함 있는 경제정책들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왜곡된 논리, 편리한 합리화
큰 정부에 대해 적당히 의심하고, 정직한 노동을 믿으며, 깊은 종교적 가치를 지니고 가족과 지역공동체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생각’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기업이 지배하는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짓 정보와 왜곡된 논리에 속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가치관과 이해관계 모두에 배치되는 정치적 의제에 동의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다. 주요기업, 학계, 정계, 정부 그 밖의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문화와 보상체제가 기업 자유의지론자들의 이데올로기와 너무나 강력히 연합되어 있어서, 자신의 직업과 경력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감히 반대의견을 표명할 꿈도 꾸지 못한다. 우리는 자멸적인 <문화적 최면상태>에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환상과 왜곡의 장막을 뚫고 나가, 이제 사람들과 살아 있는 지구에 봉사하는 경제체제를 재창조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7. 구름 위, 환상의 세계
감소된 빈곤층의 소득은 누구에게로 갔는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사는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 소득의 82.7%를 점유하고 있다. 반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에 사는 세계 인구의 20%에게는 세계 소들의 단 1.4%만이 돌아간다. 개발과정을 세계화하자는 서약이 이루어진 1950년에는 최고 부유한 국가에 살고 있는 20% 인구의 평균소득이 최고 가난한 국가에 살고 있는 20% 인구 평균 소득의 30%에 달했으나, 1989년도에 이 비율은 두 배로 늘어 딱 60배가 되었다.
<세계의 소득 분배도>
국가 평균을 바탕으로 작성된 이 도표는 각 국가들 간의 격차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들 사이의 격차는 훨씬 더 크다. 개인소득을 기준으로 세계적 부의 분배를 추산했을 때는, 최상위 20%의 평균소득은 최하위 20%의 평균소득의 무려 150배에 달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 수치들도 최상위 20%의 소득을 계층별로 구분할 때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불평등은, 최고 1%에 속하는 부유층 가정이 벌어들이는 소득은 평균 55만 9,795달러로, 1%의 소득을 모두 합친 금액은 하위 40%에 속하는 국민의 총소득을 합친 금액보다도 많다.
1960년에 주요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의 평균 보수는 근로자 평균 임금의 40배에 달했는데, 1992년에는 157배가 되었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백 명>의 순자산이 1982년에서 1993년 사이에 920억 달러가 증가해 이들의 순자산 총계가 3,28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에 살고 있는 10억 인구의 1991년도 국민총생산의 합계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가정의 상위 1% 계층의 평균 실질소득은 78%나 증가한 반면, 하위 20%의 그것은 10.4% 감소했다. 이는 1989년에 고용된 근로자들의 평균 근로시간이 1977년도보다 더 길어졌고, 더 많은 여성 인력이 노동시장에 합류하여 한 가족당 전일제로 일하는 사람이 두 명인 가정이 훨씬 늘어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나와 당신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인도네시아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73달러 내지 135달러에 팔리는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가 대략 5.60달러의 원가에 시간당 고작 15센트의 임금을 받고 고용된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나이키의 경우는 경제체제 왜곡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보상은 실제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마케팅 환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러니까 부풀려진 가격에 꼭 살 필요 없는 상품들을 구매하도록 소비자를 설득하는 일이 주 기능인 자들에게로 돌아간다. 많은 관리자들이 엘리트 집단 외부의 사람들은 별로 만나려 하지 않는 이유다.
이것이 바로 세계 경제 질서를 입안하는 자들이 살고 있는 구름 위 세계, 즉 부와 권력은 아무리 소유해도 충분치가 않고,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현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자들이 사는 세계이다.
부자들의 섬, 가난한 자들의 바다
최근 몇 년에 걸쳐 미국에서 소득에 의한 지리적인 분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정치적 관할에 따른 이 같은 분리 현상이 연방 정부가 사회복지를 위한 재원 마련의 책임을 많은 부분 지자체에 전가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서 더욱 악화되었다.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이 같은 현상을 소수의 특권층이 그 나머지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분리 독립>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부유층과 빈곤층이 누리는 교육과 공공서비스의 질적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계층 간 분리는 종종 인종 문제까지 겹쳐져 더욱 악화되었고, 부유층이 자기들만의 환상의 세계로 떨어져 나가는 단절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세계적인 재계의 엘리트들이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국적도 국경도 없는 구름 위 환상의 세계로 병합되고 있다. 지리적 위치보다 경제적 계층에 의해 나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세금 낼 능력이 넘치는 사람들의 세금을, 세금 낼 형편도 못 되는 사람들에게 전가
글로벌 경제체제는 표준 미달의 임금을 지불하며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에 외주를 주어 생산을 맡기는 대가로, 원시림을 밀어버린 대가로, 수십만 명을 해고하는 노동력 절감을 도입한 대가로, 그리고 인간의 이해보다 기업의 이해를 우선하는 정치적 의제를 설정한 대가로, 유독성 폐기물을 내다버린 대가로 기업과 그 임원들에게 관대한 수익과 그에 따른 여러 혜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피해로 인한 비용은 주로 사회의 힘없는 구성원들, 즉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그들 대신에 그 자리로 들어가 턱없는 임금으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 살던 숲이 밀려버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유독성 폐기물 더미에서 거주하는 빈곤층, 그리고 소시민 납세자들에게로 돌아간다.
이제 정치동맹의 재편성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는 무르익었다. 그러나 정치동맹의 적은 인간의 이해에 아무런 충성심도 없는 거대 기업들이라는 사실을 진정한 대중주의자들이 깨달아야만 비로소 이 같은 재편성의 꽃이 만개할 것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새로운 기업 식민주의 제국의 건설에 초석이 된다.
8. 피라미드의 어느 층도 안전하지 않다.
기업이 주축이 되는 현대 경제에서 시장은 수동적 기관에 불과하다. 능동적 기관은 기업이다. 기업은 선천적으로 좁은 시야로 오직 눈앞만을 바라본다. 기업은 그게 누구든 간에, 기업을 지배하지 못하는 자들의 비용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자들의 이익에 이바지하도록 진화해 왔다.
- 윌리엄 더거
그 어느 누구도 면제받지 못한다
1차 산업혁명 때는 새로 발견한 에너지원에 대한 정복으로 기계에 엄청난 근력이 생기면서 인간의 육체노동에 대한 수요가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와 전자 감지기를 통해 기계에 눈과 귀와 두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보고 듣고 해석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정보기술 분야의 굵직한 발전들을 이용하고 있다.
지역에 의해서보다 계층에 의해서 규정되는 식민화 과정을 토대로 한 2차 산업혁명은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세계 인구를 식민지 국민의 대열로 몰아넣고 있다.
노조도 없고 노동력은 남아도는 세상에서 생산성 증가로 확실한 혜택을 받는 계층은 오직 자본가들뿐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추방하는 과정에 이미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대다수 기업의 관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와 기업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 점차 커져가는 갈등에 직면해 있다.
<<포천>>지에 실린 [지쳐빠진 보스들]이라는 커버스토리의 글이다.
무언가를 쌓아올리도록 훈련받은 관리자들은 이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는다. 그들은 고용하지 않고 해고한다. … 상황이 이러한지라, 일을 하면서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거의 부도덕하게 보일 지경이다. 자연히 그들은 침울하고 소심해지고, 다음 해고의 파도에는 자신이 떠내려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한편 그들은 이미 떠난 자들의 노역까지 떠안고 더 열심히 더 오랜 시간을 일한다. 쌓이는 것은 피곤과 억울함뿐이다.
사람들을 여러 번 해고한 어떤 최고 경영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처음에 사람들을 해고할 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해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일로 얼마나 많은 아기들이 유산될 것인가? 이혼은 얼마나 늘 것이며 자살은 또 어떤가?’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피라미드의 어떤 층에도 더 이상 안전은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대기업의 우두머리들은 하나같이 다음 차례가 누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주주의 힘이 개인 투자자로부터 실적 지향의 투자기금으로 이동하고 있는데서 이 현상의 원인을 찾고 있다.
아무도 당신을 돌보지 않는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단순히 일자리의 급격한 감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일자리의 질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낳는다. 사무직 근로자들의 노동시장은 점점 일용직 노동자들이 기웃거리며 모여드는 직업소개소처럼 되어가고 있다.
마치 암세포가 퍼져나가듯이 미국의 기업들과 금융시장의 특징을 이루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가치와 동력이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고 있다.
기업 제국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꿈이 빠르게 실현되고 있다. 세계적 체제는 한 국가에서 다음 국가로 기준을 일치시켜 나가고 있으며, 최소 공통분모를 향해 밑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의 절대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글로벌 시스템이 가치를 두는 것은 오직 돈뿐이다.
인간의 행복한 삶은 사람과 지구, 문화와 공동체의 유대를 오로지 현재의 시장 가치로만 판단하는 약탈적 금융시스템이 요구하는 경제성장 같은 것으로는 확보될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이 어떤 것이냐로 귀결된다. 만일 우리가 돈보다 삶을 중시하는 사회를 원한다면 그에 따라 우리의 제도를 다시 창조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