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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2: 17-29>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 표면적 그리스도인과 이면적 그리스도인, 사람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
바울시대의 로마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유대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상태가 아니고, 유대교라는 종교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새롭게 형성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대 율법의 영향으로 교리적 혼란이 있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볼 때에 로마교회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참 유대인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복음 만을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도 아닌 로마교회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다고 로마교회를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는 있지 않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마교회의 모습
로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는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이 모인 교회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행 8:1).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로마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듣지 못한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고자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롬 1:11-15)
유대인 로마 교인들 특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맹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1절 이하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요?
율법을 자랑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21-23)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23-24)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할례를 행하는 (25-26) 이런 유대인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에게는 칭찬을 듣지 못하면서 사람에게 칭찬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29)
바울은 이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① 율법을 범하면서 할례를 한 것은 무할례와 같고, 오히려 ②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5-26)
또 ③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할례를 행했지만 율법을 범하고 있는 너를 정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7)
그러면서, 오늘 핵심 말씀인 ④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며, ⑤ 할례도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미음에 할례를 해야 진짜 할례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8-29)
▶ 다시 정리해 보면, 로마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행하고 외형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롬 2:13),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하고 외형적인 신앙으로 사람들에게만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29)
물론 바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최종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로마서 3장에 가면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죄인임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3:9-18). 그래서 로마교회 너희들도 다 죄인이므로 복음이 필요다고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롬 3:20-31)
2. 오늘날도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바울이 로마교회에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상당히 로마교회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목거리나 자동차 그리고 집에 십자가를 걸고는 있지만 주님께서 주신 말씀, 바울을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직분을 가졌다고 하면서 얼마나 말씀을 깨닫고 행하고 지키고 있는가? 말씀을 믿고 따르고 있는가?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그저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말씀을 이루고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경건을 위하여 피흘리기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히 12:4). 자신의 속이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지고 그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습관적인 죄를 반복하고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고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매주마다 “주여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연약해서 간혹 넘어지는 경우가 아니라 반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문을 나서자 마자 세상 사람과는 전혀 구분되지 않고, 똑 같이 분노하고, 화를 내고, 다투고, 욕심 부리고, 거짓말을 일 삼으며, 세상에 대하여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감사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과 전혀 구별되는 삶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과 똑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서 로마교회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믿지 않는자 곧 이방인들로터 모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우습게 여김받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싫어함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사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전도가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작은 흠을 가지고 안티 그리스도인으로 사람들을 몰고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라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서 그들과 같이 술먹고 방탕하며 거칠고 더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로마교인보다 더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된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총체적인 문제입니다. 저도 다녔지만 신학교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목사부터 직분자에 이르기 까지 말입니다. 저도 그 안에 원인을 제공한 자로 포함됩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의 총체적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까요?
다시 복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다시 성경 말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세상의 시스템, 화려함,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유인하여 끌어올 수는 있지만, 변화가 없고 표면적 그리스도인들 만을 양산하고 있다면 그런 방식을 다 허물어야 합니다.
수많은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면 안됩니다. 힘과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하면 안됩니다. 소수라도 정예부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자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변화된 인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와 신학교가 복음의 참 진리안에 있지 못하면 영적인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개개인의 교회 구원원들도 힘을 잃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 말씀의 진리를 따르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도 오늘날 그대로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만 믿으면 안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부활승천 하신 기적의 예수님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도 사라집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면 안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세상 다른 종교의 하나로 보게 됩니다. 더구나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융합하지 않는 독선적인 종교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2021년도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종교 호간도에서 불교가 28%, 기독교가 20%, 천주교가 13%를 차지하고 있고 호감가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 38% 정도입니다.
비종교인들 만의 종교호감도에서는 불교가 20%, 개신교가 6%, 없음이 61%입니다.
얼마나 기독교의 호감도가 낮아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를 회복하여 교회가 그들의 답이 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 안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자꾸만 이단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성경적인 은사도 인정해야 합니다. 목사가 아닌 사람에게 은사가 나타나면 교회에서 질서 안에서 행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사역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 혼자 다 하면 안됩니다. 각자의 기름부으심에 따라 직분에 상관없이 사역하도록 해야 합니다. 평신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종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동등한 사역자로 삼아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평신도 용어도 마음에 들이 않습니다.
신학교를 나오지 않는 이유로 그의 사역을 제한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없어집니다. 소멸됩니다 (살전 5:19).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오늘날과 같은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번역은 일부 오류가 있어 수정을 해야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요란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않더라도 그가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의 삶이 성경적인 삶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형적으로도 그에게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면에서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가 빛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빛으로 몰려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오라고 오라고 끌고 오듯이 끌어오지 않아도 스스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픈 자도 몰려올 것입니다. 문제 있는 자도 몰려 올 것입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세도 몰려 올 것입니다.
이런 부흥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옆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 환경과 시스템이 좋다는 이유로 수평 이동해 와서 교회 인원수가 증가되는 것이 부흥이 아닌 것입니다.
인기 몰이로, 행사로, 시스템으로 편안함으로, 교회로 사람들을 유인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일부분 긍정적인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문제가 더 많습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 부족한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사람들을 수평이동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큰 교회 기둥 뒤에 숨어서 믿음 생활하는 자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로 스스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읽는 자들이 생각하기를 “너는 그렇게 되고 있나?”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저도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하는 꿈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이니까요? 이를 위하여 끝임없이 기도하고 몸부림 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도 자신이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하며 푯대를 향해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 진리의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저의 분량에 따라 나타나게 할 것입니다.
저는 바울처럼 달려갈 뿐입니다. 선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존경이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내공으로 뭔가 남들과 다른 경건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과 똑 같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언어도 행동도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들에게 자신들보다도 더 높은 경건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은 집단, 융합할 줄 모르는 집단, 광신도 같은 집단으로 여겨지면 안됩니다. 가식적인 외형적인 표면적 그리스도인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들은 초반에는 우리들은 경계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보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의 사람으로 진심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답이 되도록 말입니다.
우리들이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빛으로 나방들이 찾아오듯이 빛이 되면 사람들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2주 전에 전했던 이사야 60장 말씀처럼 빛이 될 열방에서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에 영적인 빛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들과 동일하게 어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힘도 잃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치유와 회복, 축사와 같은 기적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아프면 병원을 가야하지만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기도로 낫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 아예 치유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7-18)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언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미래가 궁금하면 사람들은 무당에게 달려간다고 합니다. 대통령까지도 말입니다. 무당은 과거는 맞출 수 있습니다. 귀신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무당이 그들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답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교회가 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분 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 그리스도인 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역사하는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3. 그래서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칭찬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교회 유대인들은 외형적이고 가식적인 종교생활로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은 남다르게 유대인의 혈통에 대해 자랑을 했을 것이고, 할례를 행하고 구약에 기록된 많은 율법적인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만의 독특한 복장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도 남들도 그들을 경건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남들 보기에도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보여졌고, 교사요 선생의 위치에 있었기에 다른 이방인들에게서 존경과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는 외식으로도 칭찬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외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
너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나? 물었을 때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실 때에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무늬만 있는 그리스도인,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많기 때문입니다.
직분자라고 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어떤 교회이기에 이런 칭호를 받은 것입니까?
안디옥 교회 구성원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흩어진 유대인들과 구브로, 구레네와 같은 곳에서 모여온 헬라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행 11:19-20). 이방인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한 바울과 바나바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며,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를 파송하고 (행 11:24).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네가 예수 믿는다고?”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리스도인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힘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락없는 표면적 유대인과 같이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 말씀을 100% 믿습니까?
여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지체함이 없이 “예”라고 답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한 모든 사역을 우리들이 해야 합니다. 그들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될 때가지 몸부림 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이 전한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말고, 비그리스도인과 같이 숨어 있지 말고 그 마음 깊숙이 성령으로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어 당연히 사람으로부터도 칭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