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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이란 무엇인가?
들어가는 말
신학생으로서 누군가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자문자답을 해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6:9 구절의 말씀을 보면 기도문이 기록되어있고 그 기도문에는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명시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대상이 영원 전부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기를 준비하셨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사는 삶이 신앙생활 이라는 대답을 준비해 보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 이상의 만족할 만한 대답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자책감속에서 번민을 하며 이런저런 책과 학습정보지 등 에서 또 다른 대답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신앙을 증명 하거나 표현하기 전(前)에 신앙과 이성과의 갈등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깊은 강 앞에 서서 많은 고민들을 해야 하는 처지에 당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과 신앙을 정립 시켜야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수많은 시간들을 연구하며 고뇌를 하던 옛 신학자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남다른 은총을 주신 하나님과 또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합니다.
본론
1: 신학자들과 신앙
먼저 신앙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내리려고 하는 많은 신학자들 중의 한사람, 칼바르트 의 경우를 보면 기독교 신앙은 우선 만남 이라는 논점에서 시작되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며 그들 자신의 존재 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의 근거와 목표를 신뢰하고 확신하게 되는 이성의 조명이라고 신앙의 정의를 내립니다.
이 정의를 다르게 표현 한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지만 이 믿는 것에 대한 설명의 근거나 책임은 지식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신학이고 신학은 이성이기에 신앙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여러 신학자들의 신앙관에 대적이 되는 견해였고 그로 인하여 학자들 간의 많은 논쟁과 변증의 발전이 거듭되었다고 보여 집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학의 지식은 신적인 이성. 즉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의 법이나 피조물의 이성이 순응해야 하는 율법을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칼바르트 그는 이성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신적인 학문으로 표현하여 신앙과 신학의 대립을 공존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또 기독교 신앙은 결단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신비 가운데 있는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이 인간을 향하여 목적을 두시고 작정하신 대로 행동하시는 사건이며 또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 사건 이라고 합니다.
즉 신앙이 있는 곳에는 인간에 의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완성되며 수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 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1) 신앙의 어의 : 마음을 상대에게 주어 고정시킴, 우리의 신앙적 상대가 예수님이라면 나의 마음을 예수에게 고정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에민) 확고부동 하다, 즉, 사물이나 증언에 의한 것의 신뢰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본질 : 기독교신앙에는 지식과, 동의, 신뢰, 세 가지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복음의 지식을 통하여 진지한 확신으로서의 동의를 얻어 신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R째, 믿음이 있고 둘째, 결단과 잊을 수 없는 체험이 있으며 셋째, 생/사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신앙의 결과 : 신앙을 가지면 죄 사함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회복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좇아 행하며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결국 이 아홉 가지의 열매를 통한 참 신앙인의 성품이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로서 신학연구도서 황승룡 저(著)의 조직신학에서 안셀름의 견해를 보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신앙과 앎의 문제를 중요시 하였다고 합니다.
신앙과 지식은 서로 규명하기 위해서 동반적 관계임을 부정할 수가 없고 알기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니, 결국은 같은 맥락을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진리를 비판적으로 묻고 자기 자신을 비판적 측면에서 문제시 하여 합리적인 해명과 설명을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진정한 신앙이란 무지에 자신을 내 맡기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와 사실을 포함한 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숙명적으로 지식을 찾게 된다고 말하여도 과장되지 않으며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신앙과 신학을 정리해보면 신앙 없는 신학은 공허 하고 신학 없는 신앙은 맹목적 이라는 것이 안셀름의 견해이며 이러한 그의 견해로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구원사건에서 일어난 인간의 응답이며 결론적으로, 그 구원사건은 신앙에서의 구체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응답을 하는 인간은 양자의 인식이 절실히 요구 된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2 : 신앙의 의미
신앙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 맡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예수의 역사에 대한 앎을 의미한 사실의 신앙을 뜻 하는 것이며 서두에 기록을 하였던 신앙의 의미로 세 가지 본질적 요소를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cia)라고 하며 지식으로 알게 되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임으로서 신뢰하고 복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고 동의하지 못하면 순종할 수도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변증가였던 저스틴과 오리겐의 견해 역시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통일 관계로 보는 편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서로 대립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대표적 인물로서 터툴리안도 있었습니다.
터툴리안 그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던 신학자였습니다.
이러한 신앙관의 변천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지식인들의 성경번역과 성경을 아는 전도자들의 전도활동으로 교회가 점점 확산 되고 조직화됨에 따라 신앙의 개념이 포괄적 개념으로 바뀌어 신앙의 강조점이 신뢰보다 지식과 인정의 신앙 쪽 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식과 인정으로서의 신앙은 교회의 권위를 믿고 인정하게 하는 권위의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신앙과 결부되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주의 신앙은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조차 권위에 의존하는 신앙을 강조하도록 하였고, 안셀름 까지도 알기위해서 믿는다는 정의를 내리며 그의 주장에 동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이러한 믿음은 인격적 결단과 신뢰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일어나는 맹목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신앙과 이성을 정립해준 인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태 있는 신앙 (사랑과 은총을 받은 의지적 신앙, 명시적 신앙, 즉 무엇을 믿는지 알고 믿는 신앙)과 맹목적 신앙(무엇을 믿는지 알지 못하지만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믿는 신앙)을 구분하였습니다.
토마스의 이 견해를 간략하면 신앙은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은총으로서 자연을 완성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서 신프로테스탄티즘의 대표적인 인물 헤겔은 철학과 신학은 같다고 하였고 그 이유는 같은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학자는 또 신앙과 사고는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보고 헤겔을 배격하기도 합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합리주의와 관념주의 신학을 주장하며 그의 신앙은 특수한 신앙과 주관적 신앙으로서 감정이나 내면성의 영역으로 축소되어서 그리스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교리, 행동, 규범,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각성된 내 적인 삶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이라고 합니다
결국 학자들은 객관적 신앙과 주관적 신앙을 공동적 기반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며 그 이유는 너무 주관적이면 광신주의에 빠지기 쉽고 개관적이면 외적증명과 권위에 의한 신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 : 신앙관계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앙과 신학은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변증학 이면서 하나님에 관한 학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길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이 없이는 신학을 할 수가 없지만 반면에 신학이 없는 신앙은 형태 없는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신앙의 진리성을 진리답게 변증하고 선포하는 상호관계 이어야 한다고 정의?? 내린 것이 현 시대의 이성을 인정한 기독교 신앙이라고 봅니다.
마치며...
◎ 나의 신앙관 ◎
그리스도인의 얼굴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보이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신학의 교육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서 그 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결론부터 전합니다.
제가 신앙을 신학을 통하여 알고 변화되는 것이라고 저의 신앙관을 정립시키게 된 이유는 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얻어진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인정사정없이 내주시는 스승님들의 많은 숙제를 하다가 지쳐서 머리 좀 식히려고 조금은 편하고 쉬울것 같은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문득 신앙 안에서 변화되어온 저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그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인격이나 생활을 나타낸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화난 얼굴, 기쁨이 충만한 얼굴, 저자는 이 두 얼굴에서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글에서 내가 처음 서울성서신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선배 학우에게서 들었던 나의 ?R 인상을 기억합니다.
그 선배는 나에게 처음에는 송아지가 도살장에 끌려온 얼굴이더니 공부를 하던 몇 달 사이에 많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나는 미소 한 번 없던 나의 얼굴을 통하여 나의 내면성을 모두 들키고 있었던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심코 밟고 다니는 흙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잉태하고 탄생 시키는 자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듯이 삶의 여러 부분에서 늘 듣고 인식하고 이었던 말이었지만 가볍게 흘려 넘겼기에 뒤 늦게 깨달아지는 동기들 처럼 참다운 신앙,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언제나 인간의 눈에 보이는 변화의 실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간이 죄를 지어서 영원히 죽게 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된다는 지극히 간단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신앙의 모범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면 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 즉 아홉 가지의 열매를 다 가진 사람은 참다운 신앙인으로 성화가 되고 한번 성화가 되면 두 번 다시 죄를 범할 수가 없다는 신학을 배웠습니다.
또 다른 학우들과 의 토론 속에서도 동감을 얻어낸 내용이지만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만큼 죄를 짓는 다는 것 도 힘든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철저한 윤리주의로 도덕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 죄를 범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안다는 것이나 신학적인 지식에서 의식(意識) 되거나 인식(認識)되는 일종의 유식(有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례와 도덕에 유식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잘 아는 신앙인이며 그 들에게는 선과 악을 올바로 판단하는 의식과 인식이 있기에 죄를 범할 수가 없고 신학을 통한 의식과 인식에 의한 신앙의 차이에 따라서 행함의 분량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할 수는 있어도 똑 같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게 된 인간은 하나님에 뜻에 따라 선의 경쟁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상급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배운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저는 인간의 의식과 인식을 깨우쳐주는 신학이 신앙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이성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옛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늘도둑은 적은 죄이고 소도둑은 큰 죄 라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바늘 도둑의 죄의식의 크기가 어느 정도 큰 것인지 소를 훔친 사람 그 자신의 죄의식이 얼마나 큰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는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죄 의식 이라는 것은 죄를 지은 당사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빌게이츠 같은 거부나 대통령쯤 되는 권위자가 소 한 마리를 도둑질 한 것과 저 같은 천한 사람이 바늘 하나 훔친 죄는 객관적 시선도 인식도 다르고 본인들의 죄의식 또한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께서 질병에 시달리시다가 곧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산삼 한 뿌리만 먹으면 살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 산삼을 캐어서 보관하고 있는 이웃의 것을 도적질 하여 어머님께 먹이고 어머니를 살렸습니다.
이때의 아들이 자신은 도적질을 하였다는 죄의식과 ("후에 살아나신 어머니께서 그 착한 아들이 자신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된 것을 알고 아들을 도둑으로 만들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살을 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 자신 때문에 자살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의 죄의식은 도적질만을 했던 아들의 죄의식보다는 크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그 진실한 의식을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죄에는 상황과 형편성이 있고 죄 질의 진위와 죄의식 또한 그 형편성에 따라서 달라질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로 어느 정직한 사업가 한 사람이 어느날 사기를 당해서 하루아침에 가족을 대리고 길거리로 나와서 당장 아이들을 먹일 빵 한조각도 구 할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기꾼을 만나면 단 칼에 죽여버리고 자신도 죽겠다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복수를 한뒤 자신도 죽을것이라면 차라리 그 사람도 잃은 많큼 도적질을 하던지 사기를 치던지 하는 편이 낳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이 죽어도 남에게 피해를 못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자살을 하는 사람치고 바보가 아니라면 마음이 착하고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살을 하는 사람은 힘들고 서러운 세상 적어도 남과 싸우고 피해를 주며 사느니 더러운 꼴 안보고 나 한 사람 죽으면 그만이라는 선한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제로서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의 속마음까지 통찰하시고 처지와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의 죄를 정죄 할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차마 쓸 수가 없었던 비유이지만 만일 솔로몬의 재판 처럼 아이 하나를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두 여인에게 새끼 돼지를 아기인것 처럼 요람으로 싸서 품에 안겨주고 가마솥에 들어가서 서있게하고 물을 부은뒤 그 물을 서서히 꿇이면 결국 친모가 아닌 여인은 아기를 자신의 발아래로 내려놓고 그 위로 발을 올리게 된다는 잔인한 설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거듭 쓰지만 교회를 20년 이나 다녀도 신학을 모르고 다니는 신앙생활은 맹목적 신앙이라고합니다.
여기서 맹목적 신앙이란 늘 퍼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보지를 못해서 하나님 뭐 해주세요 하며 징징대는 신앙이라는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앙생활이 힘들거나 배가 고프면 분명히 하나님을 떠난 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이 모임이 있을때 마다 자신에게 신들린 사람처럼 말을 한다고 지적을 할 때 마다 목사님은 기분이 나빴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신들린 것이 확실한데 왜 신들렸다고 안하고 신들린것 같다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하나님만을 믿고 사는 목사님께 믿는척 하는것 같다고 들린다는 것입니다. 다행이도 목사님은 한나님의 신에게 신이 들린것을 알기에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대상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모르는 맹신은 어느 종교를 만나도 신의 이름만 바꾸어 주면 그 신이 대상이 되고 자신이 섬겨야하는 신실한 대상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을 모른다는 것은 십계명에 해당되는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아니 이미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르면 죄의식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지요.
몇 칠전 헬라어 모의고사를 보던중에 갑자기 교수님께서 시간이 지났으니 시험지를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왜 냐하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던 몇 몇 학우들과 저에게 개인지도를 해주시는 선생님을 통하여 보충수업까지 시켜주셔서 틀림없이 잘 볼수 있는 시험을 치루게 되었는데 그날 따라 시간도 정해주시지 않기에 여유를 잡고 행여 한 문제라도 실수를 할까봐 읽고 또 읽으며 쓰고 있는데 화를 내시면서 시간이 지났으니 모두 시험지를 제출하라고 하시니 기가 막혔습니다.
마음은 교수님 보통 시험보는 시간처럼 1시간은 주실줄 알았어요 하고 10분만 더 부탁을 드리고 싶었지만 순종을 배운 신학생이기에 말없이 제출을 하고 수업이 끝난뒤 교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지우려고 기도실로 가서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깨 달음이 왔습니다.
내 잘못이었습니다.
시간안에 다 기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의고사였어도 시험을 볼때는 쉬우면 쉬운대로 아는 문제 부터 풀고 되도록 서둘러야 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른다고 죄가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의 죄 그것은 게으른 죄였습니다.
저는 그 날 기도중 교수님의 또 다른 사랑에 깜짝놀랐습니다.
교수님이 그토록 갑자기 냉혹하게 시험지를 받아간 이유는 순수하고 연약한 당신의 양들인 우리가 실전의 시험에서 이러한 사고를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교육자의 철저한 사명과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싶으셨던 사랑이셨습니다.
저는 비로서 잠시나마 교수님을 원망했던 죄의식에 사로 잡혔고 그 고마운 심성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기 전의 저엿다면 벌써 시간을 안정하고 했으니까 무효라는 등 등 한 없이 따졌겠지요.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하지만 그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의식을 인식하지 못하면 죄인일 수도 없고 벌을 주어도 반성이나 회개보다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히려 복수의 칼을 갈며 더욱 악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어떻게든 자신들이 먼저 알게 된 하나님의 지식을 인식 시켜주려고 많은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하는 신학자들이나 목자를 두는 것이며 하나님 또한 창조주로서 자신의 피조물 들이 행복해야하는 스스로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먼저 인식한 자는 반듯이 그 인식을 나누고 전해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하는 것이며 내가 변하면 그 의무감은 하나님의 쓰임으로 자동화 되어서 알려야 하는 책임과 권한으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식인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학자들이 인류를 피로 물들이는 핵폭탄을 만들 때 그 학자들의 가슴에는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간 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들은 바늘도둑도 도둑이라고 침을 뱉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엄청난 살인행위를 모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의식과 인식이 잘못되어서 발생되는 죄는 이 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의식과 인식을 올바로 가르쳐 주어야 하는 교회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의 조상 아담은 무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무지함은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이름을 지어주면서도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돕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좁은 소견이지만 저는 성경에서 최고의 지도자 라고 말하는 모세역시 이 시대의 지도자 들 보다 모든 것이 부족한 지도자 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도와 주어야 했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처지와 입장을 너무도 몰라주는 지도자 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였기에 물이 떨어지고 식량이 떨어지도록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미리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늘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고 불신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능한 지도자를 따르는 백성들은 늘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면서도 의심의 강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불신 그것은 백성들의 교만 이기전에 설득력이 부족한 지도자의 무능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당시 모세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생각을합니다.
그 시절에 지금처럼 쇠덩이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보았으면 그것은 하늘의 신 있었을 것이고 쇠덩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으면 그것은 바다의 신 이었을 것입니다.
쇠덩어리가 지구밖의 달나라까지 날아 가는 이 시대의 목사님들은 그 시대의 모세와는 달리 정확한 예언자 들입니다.
내일 비가 오고 안온다는 것 쯤은 거의 백발 백중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가려운 곳도 잘 알고 정세의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은 희생정신과 사랑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모세는 모든 것이 답답한 사람이었을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치면 필요한 모든 설교자료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종이가 있어서 원고준비를 해서 읽어주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전하고 행하여야 하는 처지였던것 같습니다.
민 11:29절에서 모세는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허탄한 심정을 토하였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선지자가 되어봐라...내가 선지자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 라는 심정을 고백하는 모세의 호소이자 한탄 으로 들려집니다.
모세에 대한 저의 인식이 잘못 되었다면 이 사람 이단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틀리면 그가 틀린 것이고 동시에 이단이요 마귀라고 정죄해버리는 이 시대의 신앙인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15-6년 전 쯤 우연히 애견을 훈련시키는 일본인 친구의 통역을 하게 된적이있었습니다.
그는 퇴계로에서 애견장사를 하는 파트너를 만나서 애견미용학원과 협회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애견미용사협회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노래방업이 허가 되기전에 일본과 미국에서 노래방사업계획을 받아 본적이 있었습니다.
가라오케라는 말은 (비어있는)이라는 의미의 일본어와 (오케스트라)의 약어가 합성된 언어입니다.
이렇게 협회를 차려놓고 회비를 거두어 드리는 단체에서는 원산지에서와 는 달리 자국에 맞는 환경메뉴들을 첨부하고 개발시킵니다.
그렇다고 원산지에서 전승되어온 것은 모두 틀리고 협회에서 개발한것 만이 옳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유하던 욥기의 그 천사도 하나님이 부르면 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그 천사에게 사람들이 사탄이요 악마라는 단어를 만들어 붙이고 그를 감히 하나님과의 라이벌 관계로 추겨세우고 있는것이 아니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기록이 된 구약성경을 공부하셨던 것과 인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종파가 있었다는 것 등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거나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잘못 알고 있고 천국을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천국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 10명에게만 물어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을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속의 허공에 에덴 동산 같은 낙원이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아직도 옛 신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번복을 해야 하는 부분과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만 현제의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는 문제 될것이 없기에 종교는 존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누구도 하나님을 섬기는 타 종교를 비방하거나 정죄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변증으로 세워진 교단입니다.
얼마전 한강에다 자식을 던져버린 살인자 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자식들과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안죽었어 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가 막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하던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법으로 그는정신병자로서 판사와 변호사의 재량에 따라서 죄가 가벼워 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검사라면 그는 지극히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변증을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교회에서는 천국이 살기 좋은 곳이고 자살은 죄가 된다고 배운 그 였기에 이 땅에서 아비를 잘못만나서 헐 벗고 굶주리는 자식들을 자신이 죽이면 자식들은 애통하게 죽은자가 되고 성경은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팔복의 은총을 부여받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비로서 자신이 범죄자로 희생이 되어 자식들은 천국으로 보냈다는 결론이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살을 하는 것은 희생도 아니고 죽어보았자 어차피지옥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기에 죽지 못했다는 말을 한마디로 기독교인이라서 죽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변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말이 이 시대의 설교들 속에서 흔치않게 인정이 되고 아멘을 기다리는 현실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전도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골프를 치로 갔다고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그 목사님의 아버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 일렀답니다.
하나님 저는 제 자식을 저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저녀석이 양들 몰래 골프를 치러다닙니다.
혼좀내주세요.
하나님이 보시고 사랑의 매를 들기로 하였습니다.
잠시후 그 골프장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홀인원을 친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버님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혼좀 내주시기로 하시고 오히려 영광을 주시면 어떻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대로 두면 되는거야...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자 에게는 홀인원을 친사람이 자신이라고 영원히 내세울 수 없는 고통이 따를 것이고 숨어다니며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살아가는 자 에게는 온 세상에 위선자 라는 소문이나서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을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위한 신앙을 만들어 가는 것인지 신앙이 신앙을 위한 사람을 만들고 있는지 혼란 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목자의 설교중에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질문 중에서 알이 먼저라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닭을 창조하였기에 닭이 알을 낳게 되?該?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직접창조 한것이 아니고 땅을 창조하시면 땅이 생물을 소생하도록 부여를 하셨다는 나의 창조론과 어긋나기에 생략을 하기로 하고 이 시대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잠시만 돌아보고자 합니다.
TV가 나오고 인터넷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기능을 가진 손바닥 만한 핸드폰을 사람이 만듭니다 .
그리고 일을 대신 해주는 로봇도 사람이 만들고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돈이 있어야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새벽밥 먹고 숨이 막히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갑니다.
이유는 한가지 돈을 벌기 위해서 ...
과학문명의 기계는 인간이 만들지만 오히려 과학문명의 기계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후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통하여 구제의 기회를 부여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교훈이며 인간에게 의식과 인식을 주는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탐 하던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셨습니다.
그 선악과는 이 시대의 의식과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아는 것은 신학이며 신학은 지식으로서 사람을 유식하게 하는 것이고 그 유식함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한 새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는 인식이며 인간을 흠 없이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올려 바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어나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라는 글을 읽으며 가슴이 찔렸습니다.
지난날의 저는 상당히 즉흥적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계획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 마음먹은 대로 행하며 바람처럼 사는 사람...
이러한 삶이 저의 옛 삶들이었습니다.
링 위에서 같은 사람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며 링 바닥에서 뒹굴 때 나는 두 손을 들고 기뻐하던 자였습니다.
훗날 부상을 당하고 시각장애자가 된 삶을 살게 되었을 때에는 눈이 잘 안 보이니 한 번 무시당하면 영원히 무시를 당한다는 선입견에 다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했고 추한 욕도 망설임 없이 하는 자였습니다.
그 때는 죄의식을 느낄 수가 없었던 많은 죄악들을 지금은 도저히 행할 수 가 없습니다.
새치의 혀가 실수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이 들면 즉시 회개를 하고 사과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이라고 의식되어 지는 행위를 한다는 것들이 죽기보다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변화들이 신학을 하면서 알게 된 지식의 결과이며 그 결과는 저에게 의식과 인식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이 신학은 신적인 지식으로 결부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신학이라는 지식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여 새롭게 변화된 삶에는 길, 진리, 생명, 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내주하시게 되며 내주 하신 주인예수께 순종하는 것은 신학이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신앙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신학적 지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신앙은 꿈속을 헤메는 일도 아니고 뜬 구름위에서 가슴을 부풀리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 증거가 열매로 들어나는 것이 진실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넓은 바다속의 작은 새우 한마리의 눈알 만큼도 안되는 것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아니 내 눈에 빛이 다 하는 날까지 질문을 하고 답을 찾고자 합니다.
나는 비록 새우의 눈알 보다 작은 자 일찌는 모르지만 그 작은 새우의 몸을 던지 희생이 바다의 제왕인 고래들을 살찌우는 것은 사실입니다.
참 목자는 자신과 틀린다고 힐책을 하기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참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친대로 행하는 목자를 갈망하며...
참고 문헌 : 조직신학. 항승룡.저.
칼바르트. 교의학 개요
누구든지 아는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땅이 알것을 알지 못함이라...
고린도전서8:2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답게 가르친 것에 대하여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할 것이며
배우는 자는 배운것의 진의를 확인해 보는 것이 진정으로 배우는 자세일 것이며 부정이야 말로 진실한 긍정일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맛을 보았거든 그리하라.
벧전 2:3
롯데 시게미쯔 씨 세상을 떠나기전에 기증하실맘 없나요.
진정한 기업의 윤리는 사람이 몰리면 몰릴수록 죽어가는 도심 한가운데를 레져사업장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서울 근교의 미 개척지에 이러한 규모이 레져타운을 세운다면 신도시가 형성되고 도심의 인구문제에 도움이됩니다. 진정한 기업인은 수입보다 국가와 인간을 먼저 생각합니다.
예배관광으로 선교를 꿈꾸는 21세기...
예배 끝나고 하루종일 놀다가는 대형 교회를 지으려면 이런곳에다 지으면 어떨까요.
위로받고자 하는 영혼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확실하게 주고 싶습니다.
저는 이 빌딩이 탐나요 이곳에다 기독교 전용 뮤지컬학원과 극장을 설비한 선교관을 세우고 싶어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낮이나 밤이나 캄캄한 세상 주님만 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장애우님들의 애통함을 들으셨습니다. (헌법도 고개를 숙여준 시각장애우 국토종단)온 종일 비를 맞고 걸으며 허기지고 목이마른 장애우들이 어느식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첫댓글 동영상은 지난해 시각장애우님들이 안마업권을 되찾기 위해서 전국을 걸어다니며 기도회를 가졌던 내용입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도우미들이었습니다. 결국 헌법을 뒤집고 안마권을 찾았습니다.